[찬샘레터 58/주말멘붕]친구와의 ‘영별永別’
올 3월, 막역한 친구가 희귀암(가성 복막점액종)에 걸렸다는 소식에 “허걱-” 신음소리를 낸 게 엊그제같은데, 지난 주말 허허벌판 콩밭에서 떨어진 콩알을 한 알 한 알 줍고 있다가 형수(친구의 부인)의 돌연한 전화를 받고 숨이 막혔다. 둘이 10여분 통곡을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마음놓고 ‘한바탕’ 울어제쳐도 슬픔이 온몸을 옥죄어왔다. 이럴 때 ‘멘붕’이라는 말을 쓰는 듯했다. 정말, 도저히 그렇게는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아깝고 아쉽고 안타깝다못해 허무한 죽음이었다. 솔직히 하늘이 노랬다. 하늘도 무심했다. 정녕 이렇게 데려가야만 했을까?
늘 돌쇠같았던 친구, 경찰공무원 정년퇴직 직후 고향 남원 운봉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봉양하고 농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입문했다. 그리고 4년여 너무 잘 하고 있었다. 투병의지도 확실하여 항암치료 12회중 8회까지 마친 상태. 90키로 거구가 58키로가 되어 절망하다 65키로로 몸무게가 늘자 “이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며 10여명의 친구들에게 자신하던 게 딱 1주일 전인 일요일(5일) 오후 6시였다는데,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언제나 씩씩하던 목소리, 해맑은 얼굴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단 말인가?
어제, 일요일 아침 7시 반, 임실 친구의 배려로 승용차 상경 5시간만에 도착한 장례식장. 형수의 얼굴과 상주(미혼의 아들과 딸)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저 악수로 대신하며 손을 꽈악 붙잡는 수밖에. 그렇다. 이건 완벽히 흉상凶喪이었다. 100세 시대에 66세의 나이, 옛날말로 하면 요절夭折에 다름아닌 것을. 농촌에서는 청년회장인 것을. 서울은 물론이고 목포, 순천, 여수, 포항 등 전국 각지에서 친구들이 달려와 말없이 소줏잔을 기울렸다. 너무나 허허로워 할 말조차 잊었으나, 한두 시간이 지나자 결국 우리들의 사는 얘기로 화제가 돌아왔다. 사는 사람은 당연히 죽음의 세계를 모르므로 ‘사는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게 씁쓸한 현실 아닌가.
오후 4시 20여명의 친구들이 영안실에 모여 공동추모를 하고, 한 친구가 눈물반 콧물반, 장문의 추모사를 낭송해 유가족과 친구들을 울렸다. 추모사는 절절했다. 친구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도 기록했다. 이틀동안 40여명의 친구들이 찾았다. 정안준 장준상 김택수 황창주 최규록 이병운 김명중 노윤성 마남일 형관우 유희택 강우성 민장식 고원영 오규진 정영우 정도삼 이춘근 전재일 원탁희 박치원 김종진(2) 고병갑 김종수 이갑진 맹치덕 최규근 변만덕 김성환 윤경래 최영록 이태식 김정권 김승수 박종악 윤중현 한상하 박영순 등이 그들이다. 그 친구처럼 친구들간에 ‘적敵’이 없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순전히 그 친구의 ‘인덕’이었다. 이번에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의 ‘영별永別’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어떻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흔한 말로 친구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의 영별은 너무 슬펐다. 아예 마음이 아팠다.
이제 다시는 그 친구의 얼굴를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투박한 농부시인의 글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생사生死가 이토록 엄연히 유별有別하거늘. 장례식장 앞 벽에 붙여놓은 편액 <空手來空手去>의 의미가 이날따라 남달랐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 우리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자네가 가는 그곳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가는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잘 가라! 영면하라! 벽곡 친구. 자네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다. 오직 그뿐이다! ‘멘붕의 주말’이 마침내 지나갔다. 헛되고 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