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6
12월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갑작스러운 한파가 닥쳐왔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지라, 강력한 해풍까지 불어오니,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주말 피정을 앞두고 할 일은 태산인데, 바깥으로 나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가슴을 딱 펴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가자!’ 하고 나가보니, 추위 그거 별것 아니더군요. 열심히 일에 집중하니, 강풍이니 체감온도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 독하게 먹고 뛰어들면 극복 못 할 역경은 없습니다. 고통이나 시련, 추위나 더위, 열악한 환경이나 악천후, 그 어떤 도전들이 다가와도 우리 내면에 주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면 넘어서지 못할 도전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안에 든든한 반석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흐뭇한 든든한 반석 위에 우리 영혼의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엄청난 폭우나 태풍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미동도 하지 않는 반석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석 같은 신앙인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강의를 하러 가 보면 주 고객이 어머님들이십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 반, 진담 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이웃 사랑,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이웃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어야만 합니다.
매일 새벽 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신다면, 그 정성, 그 마음으로 영감님 진짓상을 차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강의 들으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현관문을 딱! 여는 순간,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의 그분, 티비 리모컨을 보물처럼 꼭 움켜쥔 채, 소파에 드러누워 졸고 계실 그분을 마주칠 텐데, 오늘은 어제와 다른 얼굴로 그를 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연민과 측은지심의 눈, 더 나아가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Ko3LjnywDI
++++++++++++++++++
<신앙이 쉽게 무너지는 사람의 특징>
오늘 복음은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래 위의 집처럼 무너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많은 신자가 냉담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한 이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 곧 사랑의 실천에 목적을 둔 신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해서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란 집들은 다 천주교 신자의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를 형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용했고 그래서 어머니는 한 집에서는 탈출해야 했으며, 또 한 집에서는 집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한 불쌍한 길 잃은 아이를 그렇게 이용하고 차별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가 가족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길에 쓰러진 강도를 만난 사람이 형제로 보였다면 사제나 레위인이나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형제로 보아주었습니다. 형제로 보이지 않으면, 가족으로 보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휴가 때 놀러 가다 체험했습니다. 저도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는 해 주었지만, 그분과 함께 있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고를 당한 사람이 가족으로 보였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수백 번 해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를 않습니다. 가족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은 이상한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한 재벌가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충성하던 주인공이 그들에게 배신당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죽게 된 주인공은 죽는 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재벌 집 셋째 아들의 손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래 일을 알기에 많은 돈을 벌고 재벌에 복수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요?
주인공은 IMF 때 아버지가 정리 해고되어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하게 된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옛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갑니다. 가족들은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압니다. 이전 생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였음을. 그는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놓으며 망해가는 아버지 회사를 매입하려 합니다. 이것이 복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기억만으로 지금은 남의 식구가 되어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주인공의 선택은 우리 모두의 공감을 얻습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모였다는 기억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겠습니까? 이 드라마처럼 ‘기적’을 통해서 입니다. 그 기적은 미사 때 ‘성체성사’로 일어납니다. 성체성사를 믿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들이 됩니다. 말로만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짜 형제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창조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또한 나의 형제들이 됩니다.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체성사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계명이 지켜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다면 성체가 아니면 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를 이유로 냉담을 한다면 이는 그동안 신앙생활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이 있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 자칫 사랑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빠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킨 성직자도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신앙의 길로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사랑 실천이라는 암석 위에 세웁시다. 그러면 우리가 짓는 신앙의 집이 결코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의 성격을 생각하면 강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편입니다. 논리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이기에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당황하곤 합니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정할 때도 ‘아무거나’라고 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걸 따라 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더러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포트워스에 갔을 때입니다. 신부님이 선물로 카키색 모자를 사주었습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은 모자의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거로 사주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현지에서 유명한 클럽을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자를 원했던 신부님은 입장료를 내면서 갈 필요가 있냐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클럽에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어떤 성격의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더 현명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거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드럽고 약간은 우유부단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정든 고향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도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동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섬세하고 욱하는 성격이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욱하는 성격에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지만 소심한 성격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겁이 많아서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런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니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직관적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은 바오로 사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성격이 내 신앙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반석입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고 극심한 풍랑이 닥치고 유혹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모략, 중상, 상실, 죽음, 가족을 잃는 일 등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 13-27절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스승으로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될 것입니다(10장 참조). 파견된 이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배움은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은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두 개의 형용사 ‘슬기로운’과 ‘어리석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의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시며,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결정을 내리도록 호소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결심한 우리에게 용기 있는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상을 받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사제단을 제외하면 저의 인연은 대부분 신자에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출신 본당과 첫 본당, 혹은 이탈리아에서 만난 청년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그들 중에는 이제 성당에 나오지 않는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인연으로 그리고 상담가의 역할을 기대하며 제게 연락을 해오곤 하지만, 그런데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청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당 활동을 하다가 사제에게 혹은 다른 신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혹은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성당에 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전에 왜 성당에 나왔었는지 곱씹어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신부님과 혹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가 대부분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보다 주변 인물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다 보니 그 시절이 지나가면 성당에 나가는 즐거움을 찾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런 청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신앙이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하느님의 도구로써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기쁨인데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냉담을 한 이웃들을 이따금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세워졌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매우 위태로운 구조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장단점을 갖고 있기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하다 보면 많은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마음이 편하고,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성당에 발길을 끊게 됩니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일이 바쁘고 신경쓸 일도 많은데 일단은 자리를 잡고 혹은 아이들을 키우고 성당에 나오겠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은 주변의 인물들이 아니고 내 일 혹은 물질적인 것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신앙의 끈을 놓아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 즉 나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장의 즐거움으로 인해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 건강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결국 안타까운 결과를 떠안게 된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당장의 인간적인 상처와 시간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과연 어떻게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석 위에 집을 세우듯 항구한 신앙심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결국 견고한 신앙의 기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기도 생활과 미사의 참석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항구히 유지되려면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청년들에게, 우리가 함께 성당에서 한 시절을 보낸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아이들이 좋아서, 동료들이 좋아서 본당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성실히 응답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더불어 그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했기 때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하느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실천의 조화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따랐다고 한들,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의 신앙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주님의 뜻을 실행하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각자가 바쁜 일상생활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저마다의 신앙의 빛이 조금은 바래져 있음을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시 마음을 잡고 성실히 주님의 뜻을 실천한다면 그 신앙의 빛은 반드시 본래의 색깔을 되찾아 다시 영롱하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해치려고 해도 변하지 않는 황금의 색깔과 같이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아멘
=====================
[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 곧 하나는 힘없고 가련한 이들을 짓밟는 권력자들의 교만과 오만의 상징인 “높은 도시”, 바빌론의 멸망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 충실한 민족을 맞이하는 “견고한 성읍”,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성읍에는 견고하고 정복할 수 없는 성벽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언자는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믿는 이의 신뢰는 분명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만든 견고한 성벽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반석에 바탕을 둡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번영과 영역과 재물의 보호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안전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나아가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거리감을 두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멀리하는 장벽을 세웁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성문, 곧 마음의 문을 열어 놓으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 신뢰를 드러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참된 신뢰는 말씀의 적극적인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의사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의 진단을 듣고 말하는 내용의 정확도를 신뢰할 뿐 아니라 제시하는 처방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모시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집을 짓는 데 중요한 반석과 같습니다.
“주님, 주님!” 하고 외치지만 말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고 그분 말씀을 실행으로 옮길 때 주님과 맺은 신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참된 신뢰는 주님 말씀을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오7,21,24-27)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를 촉구하십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실천하는 신앙인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듯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덧붙이신 것입니다.
실천적인 믿음을 지니려면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자기 자신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바라는 것만 많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신앙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좌절해 버리곤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도 많이 해야만 하지요. 그렇지만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먼저 나의 요구 사항만 나열하곤 합니다. 굳건한 토대 위에서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면, 남이 나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나 역시 사소한 일에도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틈나는 대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이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서 힘이 나올 것이며, 그 힘으로 나의 믿음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의 실천적인 믿음을 보고 주변 사람들도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아름다운 손>
복음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일까요?
주일미사와 의무 대축일에 빠지지 않는 것일까요? 교무금과 헌금을 충실하게 내는 것일까요?
교회가 정한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과 교무금과 주일헌금을 내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신자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반석위에 집을 짓는 모습일까요? ‘아름다운 손’이란 예화가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녀 앙리에뜨…. 그녀에게는 나이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려고 어린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된 생활을 해 왔답니다.
잘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과로가 겹쳐 그녀는 결국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몸이 워낙 쇠약해진 상태에서 걸린 병이라 소생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죽음이 가까워져 마지막 성사를 해 주기 위해 신부님께서 그녀의 병상을 찾자, “신부님! 저는 성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동생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그동안 주일을 지키지 않았으며 기도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신부님의 눈길이 문득 그녀의 손에 멈추었답니다. 그 손은 도저히 어린 소녀의 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답니다. 과도한 일로 인해 손마디는 울퉁불퉁 불거져 있었고 손 여기저기에 찢긴 상처들이 나 있었답니다.
신부님께선 소녀의 두 손을 감싸 쥐고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답니다.
“걱정하지 마라. 앙리에뜨야! 하느님께서 너에게,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이 두 손을 하느님 앞에 내어 보이거라, 이 아름다운 손만을….” (김윤덕의 뒤주 속의 성자들 중에서)
그렇습니다.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생각해 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너는 왜, 주일미사에 자주 빠졌니? 왜,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고, 그렇게 많은 잘못을 했니?’라고 물으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니? 네가 만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간 나를 얼마나 사랑했니?’라고 물으시지 않을까 합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기본적이고 의무적인 것에 뿌듯해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외적인 계명에 좀 소홀히 한다고 하더라도, 내적인 계명, 의무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와 교무금을 내는 것이 외적인 계명이라고 하면, 내적인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남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모습입니다.
예화의 소녀는 주일미사 참례와 교무금을 내라는 외적인 계명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쉬는 교우나 행불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내적인 계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렇게 충실했기에, ‘나는 주님을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흐느끼는 소녀에게,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이 너에게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했니?”라고 물으시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너의 손만 보여 주거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분명, 내적인 계명과 외적인 계명 모두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외적인 계명과 내적인 계명을 명확하게 구분해가며 살아가기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내적인 계명은 개개인의 양심법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마음이 어떠하신지 잘 아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 흐뭇해하실, 만족하실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외적, 내적인 계명 준수를 떠나, 하느님 보시기에 흐뭇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습이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의 행동일 것입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하기에 앞서>
마태오 7,21.24-27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내 말을 실행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말하기에 앞서>
믿는다고
말하기에 앞서
믿어요
바란다고
말하기에 앞서
바래요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사랑해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버지의 뜻>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라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 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 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편 실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뜻을 이루려고 애달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좋았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 33,31). 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성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우리 모두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으니 실천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되 한 번에 많은 것을 행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내 뜻을 관철하려 한다면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의 문을 여는 193가지 이야기’라는 책에서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완벽주의는 불행하다. 그는 모든 걱정을 껴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2) 항상 남과 비교하려 한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간다.
3) 자기 자신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
4) 작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의 표정은 항상 불만과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5) 매사에 의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6) 이웃을 위해 절대로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는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더 많은 것을 간직하면서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풍요로움’ 대신에 ‘빈곤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혼자만 남게 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려움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 주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세상 안에서 큰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냐고 항의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행하면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사람이 되어서 어떤 시련과 고통도 거뜬하게 이겨내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앞선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앙인이 되다 만>
오늘 독서 이사야서의 첫 구절은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입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 보호하시려고 하느님이 성벽과 보루까지 세우셨다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이 성읍이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견고한 성읍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야 보호받을 수 있기에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또는 요건은 무엇이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성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과 요건에 대해서 오늘 독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며, 오늘 복음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는 사람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은 자기를 믿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지요.
저의 경우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저를 믿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두지 않음은 물론 하느님께도 신뢰를 두지 않고, 저를 믿는 편이었고, 자신감이 넘쳐서 자신만만한 편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 자신감이 점점 쪼그라들어서 자신만만하지는 않고,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하느님 믿음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는 자신을 믿기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문제이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 입으로는 “주님, 주님”하면서 하느님 뜻을 실천치 않는 겁니다.
이면에서는 옛날의 제가 더 솔직하고 진실했습니다. 옛날의 저는 30대 중반까지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오글거려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 나는 종이 되어야 하고, 종이라면 주인이신 하느님 말씀대로 다 실천해야 하는데 내가 그런 종이 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제는 제가 주님의 종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주님 뜻대로 하는 것보다 제 뜻대로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Excuse me”하면서 우리말로는 “죄송합니다.”하면서.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저는 신뢰는 하면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니,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이라 해야겠고,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볼 때는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 해야겠지요.
의로운 사람이 되다 만, 신앙인이 되다 만 사람이 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오늘 저입니다.
ppp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반석 위의 인생집>
- 주님의 말씀(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삶 -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 118,1)
가끔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수도원 피정 중인 형제가 “신부님은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 물었습니다. 저는 지체 없이 대답했고 지금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기도 맛으로, 말씀 맛으로, 즉 주님 맛으로 삽니다.”
사실도 그러하지만 설상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과감하게 고백으로 던져 놓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 ‘믿는다’ 역시 고백으로 던져 놓고 나면 언젠가 그대로 사랑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은총이 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수도자에게 이런 찬미의 맛, 기도 맛, 말씀 맛, 즉 주님 맛 아니곤 어디서 궁극의 맛을, 기쁨을 찾을 수 있을는지요. 이건 수도자만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찾는 이에게 공통적일 것입니다. 나중 남는 것은 진리자체이신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맛으로, 먹는 재미로, 먹는 기쁨으로 산다는 말도 들은적이 있을 것입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맛을 찾기로 하면 일맛, 사람 만나는 맛, 술맛, 성性맛, 도박맛, 인터넷 맛 등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래서 중독입니다. 뭔가 중독되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광야 여정 살아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중독 환자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래서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요 괴물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 광야 여정도 성인, 폐인, 괴물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바로 주님 맛, 말씀 맛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자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배움은, 공부는 평생이요 죽어야 끝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심판의 그날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이 때는 이미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그날의 심판날은 죽음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식대로 살아 온 일방적 짝사랑의 삶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경청함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공부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래서 사랑의 침묵이요 사랑의 겸손입니다. 늘 내적 침묵 중에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재차 강조하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자명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반석 위인지, 모래 위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주님의 산상설교중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반석 위의 인생집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과정입니다. 주님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해야 합니다. 방심으로 서서히 안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어서 끝까지 리모델링은 물론 늘 새롭게 시작하는 분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모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반석 위의 인생집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서원 중 으뜸 서원인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주님 말씀을 실행하며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을 짓는데 있습니다. 주님 반석 위에 세워진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요 수도자들입니다. ‘베네딕도의 평화(pax benedictina)’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정주의 수도자는 물론 정주의 신자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3-4)
어제 고백성사를 본 자매님에게 이 말씀을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렸을 때 말씀의 위로와 격려에 눈물 글썽이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새삼 주님의 뜻을, 말씀을 실천하는데, 즉 말씀 실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에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모래 위의 인생집, 사상누각에 대한 설명이 너무 실감이 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 어리석은 모래 위의 인생집들입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우리 사회는, 우리 가정 공동체는, 내 삶은 모래 위의 집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기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분열로 망했으니 말 그대로 모래 위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사회나 가정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태원 참사로 158명의 꽃다은 젊은이들이 죽은 사건도 우리 사회가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참 허술하게 보여집니다. 극단의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 나라도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허술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내가 몸담은 공동체부터 냉철히 성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 반석 위에 우리 인생집을 건축하는 보수(리모델링) 하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 은총이 반석 위의 인생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시편118,25-27ㄱㄴ).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구원의 문(門)>
'참행복 선언'으로 시작되는 '마태오 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山上) 설교'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마태 7,21.24-27)인 '주님의 뜻과 말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은 '산상 설교의 끝으로 핵심이자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실행)하는 것이 곧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실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 결론'이며, 이것이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핵심 기준'입니다.
검은 호랑이해인 임인년(壬寅年) 한 해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12월의 첫날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것들을 잘 실천해 오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해 오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은 '나의 몸과 마음이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루카 15,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참조) 주님께는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항상 오늘이 중요할 뿐입니다. 항상 지금 여기인 오늘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 안에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드러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나의 실천'이 곧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문'입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이 되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OWdQsQLrrO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매서운
찬 바람 속에서
맑은 12월을
맞이합니다.
은총의
대림시기는
실행(實行)이
기본(基本)임을
다시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실행을 통하여
우리 믿음은
성장되고
실행을 통하여
하늘 나라를
만납니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은
우리 안에
말씀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믿음을
아우르는 한마디는
바로 실행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과 실행 위에
세워진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말씀이 실행이며
실행이 말씀입니다.
말씀의 탄생은
우리의 실행을
기다립니다.
실행하지 않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멈출 때입니다.
신앙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내면이
맑고 튼튼했으면
좋겠습니다.
반석과 모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세워짐과 무너짐 사이에
달라진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삶은 뜻을 향한
실행이며 뜻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이 대림시기가
삶의 중심인 말씀을
삶의 다짐인 실행을
몸소 실천하는
맑은 성탄의 길
사람의 길이길
기도드립니다.
낡은 악습을
과감하게 끊어 내는
실행의 멋진 날
되십시오.
+++++++++++++++++
(2)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과
실행은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기초이며
기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기본으로 지켜지고
기본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실행은 이렇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실행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아버지 하느님
뜻 안에 실행이
들어있습니다.
실행 없이
우리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실행이라는
실천의 문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대림되십시오.
무너지지 않는
실행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실행이라는
튼튼한 반석 위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