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의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 감상 / 송재학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
이혜미 비파가 오면 손깍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배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열매를 깨뜨려 다른 살을 적시면 하나의 나무가 시작된다고. 그건 서로 손금을 겹쳐본 사람들이 같은 꿈속을 여행하는 이유.
길게 뻗은 팔이 서서히 기울면 우리는 겉껍질을 부비며 공기 속으로 퍼지는 여름을 맡지. 나무 사이마다 환하게 떠오르는 진동들. 출렁이는 액과를 열어 무수히 흰 종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봐. 잎사귀들이 새로 돋은 앞니로 허공을 깨무는 동안. 우리는 방금 돋아난 현악기가 되어 온통 곁을 비워간다. 갈라진 손가락이 비로소 세계를 만지듯이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내는 결심. 서로가 가진 뼈를 다해 하나의 겹쳐진 씨앗을 이룰 때, 빛나는 노랑 속으로 우리가 맡겨둔 계절이 도착하는 소리.
―시집 『뜻밖의 바닐라』 2016 ....................................................................................................................................
나무 곁에 있고 싶다는 감정이 절실해지면 나무이고 싶다는 마음이 된다. 나무의 핏줄과 내 핏줄이 연결되고 서로의 손금이 다르지 않다는 자각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게다가 나무와 나의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는 근심까지 도착하면 나무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세계가 존재한다. 열매와 잎이 비파를 닮았다는 비파나무의 세계관이 여기 있다. 나뭇잎과 손금을 마주하면 나는 나무에게로, 나무는 나에게로 하는 삼투압을 시작한다. 모든 하루가 현악기이며 비파나무인 황금빛 계절이 다가온다. 가끔 누구이기 전에 무엇이기도 하다는 상상력은 누구나 품고 있다. 오늘 나는 나무 아래에서 바람과 함께 나무이다.
송재학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