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19일 새벽 한 시, 강남버스터미널-
수단에서 출발할 당시에는 혼자였지만, 김포공항을 빠져나와 속초행 고속버스 출입구 근처에 다다른 경인에게 일행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찬광이라고 통성명한 남자의 손에 버스표 두 장이 쥐어진 상태였다.
...
...
...
“이왕 오시는 거, 차를 가져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리무진이라도 기대한 겁니까?”
첫 인사 이후로, 무려 한 시간 만에 대화의 물꼬를 튼 것 치고는 무척이나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그저 적막만이 계속 이어졌다. 정거장이 훤히 보이는 어느 건물 옥상에서 한 남자가 쌍안경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
...
...
-목표를 확인했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여자 어디 한 군데 망가져도 상관없는 거요?-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물었다. 수화기를 든 길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숨통만 제대로 붙어있다면야 얼마든지.”
-오우케이.-
2분의 시차를 두고, ‘속초횟집’이란 로고를 붙인 용달차 한 대가 찬광 일행이 탄 심야우등버스를 뒤따랐다. 조수석 내비게이션 화면에 지도 대신 앞서 가는 목표의 위치가 빨간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
…
…
-하루 전,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 공항-
“여, 선배님!”
‘샤프카’라는 명칭의 러시아 모자를 머리에 두른 남자가 강창후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창후가 케네디 스쿨에 재학 당시 그의 후배였으며, 숱한 낙제점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외교부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권기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창후와 악수를 나눈 권기수가 그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아, 혁 찬광 씨 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찬광의 관심은 오로지 상대의 입에서 나올 말이었다.
“추운 데 어디 따뜻한 데라도 가시죠.”
권기수가 창후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공항 지하의 고급 주점이었다. 보드카 대신 정종을 시킨 기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배님이 병원을 그만두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허 이 사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리고 우리 얘기보단 자네가 갖고 온 선물이 더 급하네. 적어도 이 친구에게는 말야.”
찬광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갑자기 기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게..하도 오래 전 사람을 찾는 일이라서 소득이 없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그라드로 이주한 것까지는 확인이 됐는데 말이죠.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바로 그때 독일군하고 소련군이 한판 붙었지 않습니까. 그 아일린이라는 여인의 행적을 알려면 타임머신 타고 그때로 날아가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음, 알았네. 자네같이 집요한 친구가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로 뾰족한 수가 없었겠지. 수고의 의미로 술은 내가 사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갑자기 찬광이 벌떡 일어났다.
“제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가 보렵니다. 참 그리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날 이후 살아있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날..이후?’
찬광이 짧게나마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일 년이 넘게 찬광을 봐 온 강창후였지만, 감정 표현에 인색한 찬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블라디미르 아일린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를 에둘러 짐작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휴가 잘 보내고 나중에 보세. 이번에도 동해안 일주인가?”
“달리 뭘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 부탁 하나만 하지. 마침 나와 안면이 좀 있는 아가씨 한 분이 여기 머무르는데, 자네가 한국까지 에스코트 좀 해 줘야겠어. 정확히 말하면 속초라네.”
“젊은 여자군요?”
창후가 보여주는 사진을 들여다본 찬광이 한 마디 했다.
“이십 대 후반이지. 관심 있나?”
“연애 따윈 생각 없습니다.”
상트페테스부르크 공항 외곽에 주차해둔 차로 가면서 찬광은 권기수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무덤과 마주치기 전엔, 포기하기에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