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 (5) ...별장공파
안동 권씨 別將公파는 派祖 權英正의 9대손 權直均이 新寧監務를 지냈고 권직균의 아들 權九叙가 와룡 가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순흥 안씨 文成公 安向의 8대손 安善孫이 권구서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와룡 가구에 이거함으로써 두 집안이 중가구리와 태리에 계거하고 있다.
권구서의 고손자 晦谷 權春蘭(1539-1617)과 권춘란의 양자 藏谷 權泰一(1569-1631)은 부자가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사간원 사간과 형조참판을 지냈는데, 권태일은 학봉 金誠一의 사위가 된다.
안선손의 아들 安處貞은 유일재 金彦璣의 외조부가 된다. 안처정의 아들 安琇(1489-1546)와 안수의 아들 東皐 安霽(1538-1602)도 문과에 급제, 각각 고성군수와 충청도사를 지냈다.
회곡 권춘란과 동고 안제는 함께 퇴계 문인으로 동문수학하여 유독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둘 다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회곡과 동고는 평소 농담으로 먼저 죽은 사람의 묘비명을 살아 남은 자가 지어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1602년 동고가 먼저 죽자 회곡이 동고의 묘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동고는 아들이 없어 조카 安景淹을 양자하였는데 안경엄은 장곡 권태일의 사위(권춘란의 손서)가 되었으니 선대의 친밀한 관계가 후대에 까지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서 두 집안이 와룡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안경엄의 아들 安憲은 金榮祖의 사위가 되었고, 증손자 保晩齋 安鍊石(1662-1730)이 문과에 급제하여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 擇軒 安復駿(1698-1777)도 문과에 급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안동권씨 별장공파 중 또 한 갈래는 안동 풍산 오미동에 參巖亭과 忠烈祠를 수호하며 계거하고 있다. 권직균의 아우 權乙均의 6대손 參巖 權希仁(1558-1593)의 후예들이다. 삼암 권희인은 柳成龍의 문인으로 임란 당시 沃川縣監으로 밀려오는 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좌의정 尹斗壽가 임금에게 변방장수로서 선전한 이로 권희인을 지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英正(별장공파조)-均碩-直成-克諧-孝允-文卓- 奕-用平-天老-直均 -乙均 直均-九叙-自關- 模-錫忠-春蘭-泰一-世俊 (와룡 중가구 세거) - 夫 安景淹 - 夫 安善孫-處貞 - 琇- 霽-景淹- 憲-重鉉-鍊石-復駿 (와룡 태리 세거) - 夫 金籌-彦璣-得硏 (와룡 가야 세거) 乙均- 晪- 乾-禮衡- 詮-彦均-希仁 (풍산 오미동 세거) |
권춘란(權春蘭) 1539(중종 34, 기해) ~ 1617(광해군 9, 정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석충(錫忠)의 자. 와룡(臥龍) 가구(佳邱)에서 출생했다. 구봉령(具鳳齡)․이황(李滉)의 문인.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 등과 교유.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학록(學錄)과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지평(持平)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윤명(金允明)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595년 사헌부장령(掌令)․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지내고, 이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나가고, 1604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후 영천군수(榮川郡守)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으며, 만년에 영양(英陽) 청기(靑杞)로 이거했다. 스승 구봉령(具鳳齡)이 제향된 와룡(臥龍) 주계서원(周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진학도(進學圖)』등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陶山及門諸賢錄
권태일(權泰一) 1569(선조 3, 기사) ~1631(인조 9, 신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내시교관(內侍敎官) 춘계(春桂)의 자로 백부 춘란(春蘭)에게 출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사위. 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내고, 외직을 구하여 영덕현감(盈德縣監)에 부임하며 4년간 재임하면서 어진 다스림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옮겼다가 병으로 사임했다. 향리에 있던 중 군향어사(軍餉御使)로 차출되어 이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선조 임금이 승하하자 국장도감도청랑(國葬都監都廳郞)을 역임하였다. 이후 풍기군수(豊基郡守)․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고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계속되자 시사(時事)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좌승지(左承旨)로 관직에 나아가 전주부윤(全州府尹)․병조참의(兵曹參議)․충주목사(忠州牧使)․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 내외직을 역임한 뒤 다시 향리로 물러났다. 그러나 1631년 다시 대사간(大司諫)으로 불려나가 형조참판(刑曹參判)를 지내고, 접반사(接伴使)로 임명되어 가도(椵島 : 平安北道 鐵山郡에 있는 섬)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던 중 정주(定州)에서 죽었다. 장곡(藏谷)의 부음을 들은 임금은 애석히 여겨 관곽(棺槨)과 상구(喪具) 일절을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와룡(臥龍) 이산사(尼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장곡집(藏谷集)』이 있다.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권희인(權希仁) 1558(명종 13, 무오) ~ 1593(선조 26, 계사)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호는 삼암(參巖). 언균(彦均)의 자.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유성룡(柳成龍)의 총애를 받고, 유성룡의 권유에 의하여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게 되어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막아 싸웠으며,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절도사(節度使) 김면(金沔)의 천거에 의하여 옥천군수(沃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웅천(熊川)으로 쳐들어온 왜군을 막아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의인(義人) 17위(位) 속한 희인은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문집에『삼암유집(參巖遺集)』이 있다. 풍산(豊山) 오미동(五美洞)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 安東府邑誌․安東鄕校誌
안연석(安鍊石) 1662(현종 3, 임인) ~ 1730(영조 6, 경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보천(補天). 호는 북계(北溪)․보만재(保晩齋). 와룡(臥龍) 가구(佳邱)에서 살았다. 진사(進士) 중현(重鉉)의 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조덕린(趙德,隣)․이재(李栽) 등과 교유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7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에 임명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연일현감(延日縣監)이 되어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교학(敎學) 진흥에 힘썼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내려와 있다가 1725년 영조 즉위 후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복직되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진강(進講) 중 임금에게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왕세세(王世弟)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옹호하여 소론(少論)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재직시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으로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1730년(영조 6) 향리 예안(禮安)으로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臥龍誌
안복준(安復駿) 1698(숙종 24, 무인) ~ 1777(정조 1, 정유)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초(子初). 호는 택헌(擇軒). 와룡(臥龍) 출생. 군수(郡守) 연석(鍊石)의 자.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정릉령(貞陵令)․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737년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어사(御使) 남태량(南泰良)의 무고로 고생하다가 풀려났다. 175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흉년에 창고를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하여 감동한 군민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다시 내직으로 승차(陞差)하여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지제교(知製敎)․호조참의(戶曹參議)․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르고 특진관(特進官)이 되었다. 만년에 권춘란(權春蘭)이 지은 『진학삼십육도(進學三十六圖)』를 김원행과 연역(演繹) 간행했고, 서간사(西磵祠)를 지어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했으며, 저서로『택헌문집(擇軒文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臥龍誌․安東鄕土誌(宋志香)
[출처] 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 (5) ...별장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