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전성시대 전반부 품격있는 3대 작품으로 김기영감독의 ‘하녀’와 유현목감독의 ‘오발탄’ 그리고 이만희감독의 ‘휴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휴일’이란 영화는 낯설다. 영화가 상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 신성일은 출연한 작품 가운데 ‘휴일’을 최고라 말했다. 영화가 상영되지 못한 이유는 검열과정에서 너무 우울한 분위기라 스토리를 바꾸라는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배우, 감독, 작가도 거부를 했고 영화가 상영되지 않으면 부도가 날 수 있는 제작자도 거부했다.
1968년에 제작되었던 영화 필름이 2005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먼지가 가득한 상태에서 필름이 발견되면서 37년이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기획 제작한 사람은 전옥숙이다.
영화제작자 전옥숙(1929~2015)이 궁금하다.
지난 포스팅에 전옥숙이 작사한 생명을 조용필이 작곡했는데 80년 5월 광주혁명을 담은 노래라고 소개했다.
배우 신성일은 전옥숙을 이모라고 불렀고 김지하도 감히 이모 앞에 오면 무릎을 꿇는다고 했다.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공산주의를 지향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전옥숙은 여성 최초로 한국영화 제작자란 타이틀도 있지만 이런 기록을 넘어 영화계 전반을 발전시킨 거목영화인이었다. 그녀는 영화만이 아니라 인문학 외교 정치 각 분야에서 그녀의 지성과 분석력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카리스마의 여인이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인들의 주장이다. 즉 그 시절 인물과 학벌, 실력과 의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뮤즈였다.
그녀는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이 땅에서 진보적인 리버럴 행동가로 살았다. 아마 이 과정은 백남준과 비슷하다. 백남준도 공산주의자였다. 전향한 것이 아닌 진보적 전위 행동가로 살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인맥을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상대를 아는 것이을 넘어서 상대를 크게 성공시키는 인물이었다. 인맥관리의 정석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이영희 교수는 전옥숙과 가까웠고 늘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며 여러 도움을 받았다. 고은 이병주 등과 친교했고 YS와 DJ와도 공사석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두 사람을 음 양으로 도왔고 큰 인물을 만드는데 숨은 공로자다.
김근태 김종인 패티김 이주일 등이 따랐다 그녀는 재야 운동의 대부 장일순과 민청관련자들, 연출가 표재순, 김석원 쌍용그룹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춤꾼 이애주 교수 등, 정·재·문화·노동계의 인물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다.
김지하와 조용필을 전옥숙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특히 그녀는 80년대 조용필을 보살피며 음반작업과 일본진출에 힘을 주었다. 사실 그녀가 지닌 생각과 사상, 활동과 사업 그리고 인간관계와 능력인데 본인이 언론이나 글로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고 세월도 지나 지금은 홍상수감독의 어머니란 말을 해야 사람들이 그렇군! 한다.
홍의선과 死線에서 만나 러브하다.
이화 국문과 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눈을 뜬 그녀는 일본 유학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이 후퇴할 때 같이 월북하다 체포된다. 의정부지역 헌병대장인 중령 홍의선은 교도소 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전옥순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이 사랑이 싹터서 사형집행에서 러브스토리로 바뀌며 둘은 결혼을 한다.
홍의선의 친절과 묵묵한 배려와 협력은 전옥순의 활동의 원천이고 외조였다.
전옥순은 1929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이대 국문학과를 다니며 사회주의 연극 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국내 첫 영화 제작 스튜디오인 '은세계영화제작소'를 차렸다.
답십리의 2,000평 부지에 촬영소는 2개의 동으로 녹음실, 현상실, 변전실 등 영화 제작 과정 전반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원의 복지를 위한 식당과 커피숍, 욕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른 영화 촬영소들이 허름한 창고를 임시로 쓰고 버리는 일이 관행이던 시절, 답십리 촬영소는 전기 공급으로 조명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고 배우들이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연기실도 있었다. 이 영화소를 제작된 팔십 여 편의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배우들이 나왔고 정진우 전범성 임권택 이범희 강대진 등 감독 등 배출되었다.
또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 남편과 생활하며 병을 완치시킨 실화를 바탕으로 김지미 주연 ’그대 옆에 가련다(1966)는 스태프가 모두 여성 영화인으로 구성되어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어에 능해 문학계간지 '한국문예'를 통해 한국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했다.
이병주의 소설 ‘남로당’에서 전옥숙을 모델로 한 김옥숙이란 인물이 나온다. 된다. 그리고 기회주의 MB정권과 멀어지며 조용하고 은밀한 삶을 살다 2015년 숨을 거둔다. 그녀를 극진히 내조한 이는 홍상수감독의 아내였다. 그래서 며느리를 위해 효부문을 세워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홍 감독과 김민희 배우와의 관계를 전옥숙은 몰랐다.
영화 ‘휴일’ 내용은 일요일 하루에 벌어진 내용을 담은 영화로 가난한 남녀가 매주 일요일에 돈을 아끼며 데이트를 하지만 임신 6개월이 되어 낙태를 하는 문제로 갈등하고 남자 주인공이 돈을 간신히 마련해 수술비를 마련하고 수술시간이 되자 불안해한다.
여자 주인공이 힘들어하지 말고 술이나 한 잔 하고 오라고 남자에게 말하는데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어떤 여인과 관계를 갖는다. 그러다가 교회 종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병원에 왔을 때 여자 친구는 수술 중에 죽었고 자책한 남자는 원효로 전차 종점에 내려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비관하며 자살을 암시하는 독백이 영화의 줄거리다.
검열기관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줄거리를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밀고 군대 가는 내용으로 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자 전옥숙은 영화상영을 포기했던 것이다.
어둡게 그려진 영상 슬픈 이야기는 경제성장에 무익하다는 논리였지만 영화제작은 바로 그 성장의 시절 감성을 잃고 인간성을 상실한 게오르규의 25시처럼 신이 허락하지 않은 시간을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988년 올림픽 송으로 <서울 서울 서울>이 만들어질 때 희망의 밝은 리듬이 아니라 희망 안에 있는 슬픔을 곡조로 만는 조용필의 노래처럼.....
영화필름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영화로 남게 되었고, 영화사는 당좌가 거래 정지를 당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 창고에서 발굴된 ‘휴일’은 검열의 손길을 피한 채 원형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었다. 흥행 수익보다 작품을 중시한 제작자의 결심이 새옹지마가 되었다.
망하는 것이 때론 보약이다. 석유처럼 술처럼...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사진은 자신의 영화 촬영소에서 전옥숙 대표와 그의 영화 휴일 주인공 신성일과 그의 양아들인 김지하와 조용필 (사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