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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리석은 전쟁 |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1,2차 대전과 스페인내전, 한국전쟁, 월남전, 중동전쟁, 아프리카의 숱한 내전들…그리고 냉전. 21세기가 되면 전쟁은 멈출 줄 알았다. 백년이 지나면 좀 더 현명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인간은 자신들의 최대 발명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같은 종을 향한 증오의 총질은 호모사피엔스가 존속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쟁이 없을 줄 알았다. 보불전쟁(1870-1871년)이후 유럽에는 꽤 오래 전쟁이 없었다. 총성이 사라진 채 40년을 지내자 그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들은 몰랐다. 이전에 없던 거대한 살육의 파도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줄. 1차 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은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인류가 스스로에게 해댄 무참한 총질이었다. 오직 호모사피엔스만이 가능한 자신의 종(種)에 대한 대량 학살(genocide)이었다. 제노사이드는 인종(genos)과 살인(cide)이 결합된 단어다. 세계를 정복한 후 한껏 기고만장해진 서양문명에 가해진 역사의 회초리였다. 대항해시대와 식민지 개척, 산업혁명을 거치며 포악해진 서양문명은 제국주의라는 변종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를 차례로 수탈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무한 팽창을 노렸다. 1920년에 이르러 서양 문명은 전 세계 육지의 절반을 지배했다. 쓸모없는 땅을 제외하면 지구 표면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400년 전에만 해도 그들의 힘이 미치는 지역은 고작 3%에도 미치지 못했다. 18,19세기 유럽의 팽창 속도는 빅뱅을 연상시켰다. 18세기는 유럽의 디딤판이었다.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그들의 범선은 전 세계 해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아편전쟁(1차 1840-1842년, 2차 1856년-1860년)을 통해 동양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유럽은 전 세계 바다를 독점했다. 그들의 19세기는 자랑스러웠고, 20세기는 더욱 찬란히 빛날 것 같았다. 음울한 세기말적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고질적인 허무주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마냥 빛날 것만 같던 유럽의 20세기는 역사에 유례없던 세계대전(大戰)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올렸다. 과학의 발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대량학살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뜻밖의 반전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1차 대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전쟁의 광기는 4년 남짓 기간 동안 무려 38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죽은 군인의 숫자는 900만 명이나 됐다. 흑사병 이후 최대의 재앙이었다. 14세기 유럽을 집어삼킨 흑사병은 대략 2천 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당시 유럽 인구의 ⅓이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흑사병은 자연과 관련된 것이어서 신의 심판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분명 인간 스스로 부른 참화였다. 전쟁의 발단은 유럽의 변방 발칸 반도에서 시작됐다. 발칸반도는 유럽에 속한 땅이지만 오래도록 이슬람 깃발을 내건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그곳은 민족, 종교, 언어, 정치라는 인간 종(種)만이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늘 지배와 반 지배가 이어져 왔다. 불씨 하나라도 떨어지면 금세 온 산을 태울 것처럼 바짝 마른 상태여서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다. 그 화약고에 실제로 불씨 하나가 뚝 떨어졌다. ■ 1917년 ‘1917’(샘 멘데스 감독)은 관객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영화다. 극적인 전개나 감동은 적지만 전쟁에 대한 거부감만큼은 어느 영화를 보았을 때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은 잔혹함 보다 참혹함에 더 가까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해변 상륙신이 적나라했다면 ‘1917’은 전쟁의 민낯을 보다 충실히 재현해 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1차 대전 서부전선의 파스샹달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1917’은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해 관객을 전장 속으로 빨려 들게 만들었다. 편집의 기교를 배재한 채 배우들과 함께 전쟁터를 달려가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달했다. 007시리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스카이폴’을 연출한 멘데스 감독의 작품으로 2020년 제 92회 아카데미에서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음향효과상 등을 수상했다.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밀렸다. ‘1917’은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린 감독), ‘디어헌터’(마이클 치미노 감독), ‘플래툰’(올리버 스톤 감독),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티븐 스필버거 감독) 등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5대 전쟁 영화로 손꼽힌다. 이 전쟁영화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공통 정서는 광기다. 인간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지르기 힘든 잔혹 행위를 태연하게 범한다. 제정신인 상태서 어떻게 목 베기 게임 같은 광기를 표출할 수 있겠나.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군 장교 무카이와 노다 두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난징에서 ‘100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느냐’는 참담한 게임을 벌였다. 이 둘은 각각 106명과 105명을 살해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들의 만행을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한 당시 일본 신문들이었다. 베르뎅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많은 희생을 치른 전투로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베르뎅 전투(1916년 2월-12월)는 광기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약 10개월, 날짜로는 302일간 치러진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군은 6천만 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탄을 서로의 머리를 향해 쏟아 부었다. 베르뎅이라는 작은 지역에 날아든 숫자다. 전투는 프랑스 동북부를 관통하는 뫼즈 강과 베르뎅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강의 동쪽과 서쪽에서 요새를 빼앗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뫼즈 강은 역사적인 도시 베르뎅을 동서로 양분하며 흐른다. 베르뎅은 인구 1만 7000명의 작은 도시다. 프랑크왕국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세 나라로 나눈 베르뎅 조약이 843년 이곳에서 체결됐다. 유서 깊은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영화 ‘1917’에서 볼 수 있듯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진흙 더미 아래 파묻힌 시체들이 공중으로 치솟은 후 봄비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보고 온전히 정신을 붙잡고 있긴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뎅 전투에 참가한 한 프랑스 장교는 “지옥도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다”고 종군일기에 남겼다. 베르뎅 전투 개전 첫 날 하루 양군은 100만 발의 포탄을 일시에 소모했다. 공업화로 인해 급격히 향상된 생산력은 살인이라는 장르로 특화됐다. 오만이 가져다 준 인재(人災)는 21세기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재앙과 유사했다. 두 눈을 가린 이성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 지 보여준 참극이었다. 1차 대전은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으로 일컬어진다. 개전 초기만 해도 마차는 여전히 군대의 수송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말 탄 기병들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은 곧 탱크, 잠수함, 전투기, 독가스라는 새로운 무기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베르뎅 전투에서 사망한 독일과 프랑스 양군의 군인 수는 71만 4231명에 달한다. 부상자는 그 몇 배다. 10달 동안 매달 7만 여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꼬박꼬박 죽어나갔다. 한 달에 도시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들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1차 대전은 결코 고상한 전쟁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대체 무엇이 이성적으로 자부하던 유럽인들을 광기로 몰아갔을까. ■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1993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두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 갈등 속에서 서로 반대편에 있는 두 군인 니노와 치키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갇히게 되고, 세 번째 군인은 살아있는 부비트랩이 됩니다. 19세기 후반 무기의 발달 속도는 현기증 날 정도였다. 인류 역사상 총이 승패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최초의 전쟁은 몽골과 맘루크가 벌인 아인 잘루트 전투였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1256년 아무다리아강을 건넜다. 이슬람 제국의 동방경계였다. 그들 앞에는 유명한 어사신파 산성(山城)이 버티고 있었다. 어사신파 자객들의 솜씨는 워낙 뛰어나 적장의 머리를 취하는 일을 마치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했다. 자객을 의미하는 영어 어사신(Assassin)이 그들에게서 유래됐다. 어사신이라 적었지만 공포로 읽혀졌다. 그러나 산성은 몽골군에 의해 쉽게 함락 당했다. 몽골군의 파죽지세는 유럽 연합군조차 감당해 내지 못했다. 훌레구의 다음 목표는 바그다드. 당시 인구 100만 명을 헤아리던 대도시였다. 신(바그)이 주었다(다드)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도시,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비를 간직한 도시. 몽골군은 무려 17일 동안 이 도시를 약탈했다. 연전연승 안하무인의 일방적 유린이었다. 도무지 패할 것 같지 않던 몽골군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것은 맘루크군이었다. 맘루크는 원래 노예들이었다. 보잘 것 없는 용병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만은 특별했다. 총이라는 몽골군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무기였다. 제 아무리 뛰어난 몽골군이었지만 화살로 총을 상대할 순 없었다. 총과 칼의 대결은 ‘무데뽀(無鐵砲)’라는 말을 낳았다. 무데뽀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행동하는 의미의 일본어에서 유래됐다. 칼을 들고 총을 가진 자, 혹은 그 무리에게 대드는 객쩍은 행위를 말한다. 1575년 5월 승승장구하던 다케다 신겐은 ‘나가시노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패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다케다의 천하통일은 주머니 속 동전 꺼내기처럼 쉬워보였다. 도쿠가와 군에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구입한 총(鐵砲)이 있었다. 칼만 가지고 총을 든 군대에 대든 ‘무데뽀 정신’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한편 무기의 발달이기도 하다. 25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약한 손에 돌을 쥐는 순간 주변의 맹수들은 이후 자신들의 운명이 얼마나 초라해질 줄 상상하지 못했다. 투박하던 돌은 점점 뾰족하고 날카로워졌다. 약 5천 년 전부터는 돌 가운데 박힌 금속을 뽑아내 청동기 무기를 만들어냈다. 이후 인간과 맹수의 승부는 인간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철기의 등장은 인간 집단 사이에도 현저한 우열을 강요했다. 다윗 시대 이스라엘이 숙적 블레셋에 매번 패한 이유도 그들의 철제무기 때문이었다. 무른 청동기 칼과 쇠칼이 부딪히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쇠칼을 든 골리앗은 다윗의 돌팔매에 무너졌다. 총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한 발 쏘고 난 다음 재장전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한발 쏜 후 한참 시간을 끌어야 했던 총이 연속으로 총알을 내뱉는 기관총으로 발달한 것은 600년 후였다. 1880년 하이럼 맥심이 발명한 기관총은 전쟁의 양상을 또 한 번 바꾸어놓았다. 1898년 영국군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4만 명의 대군을 맞이했다. 전투는 5시간 만에 싱겁게 끝났다. 기관총을 장착한 영국군은 짧은 시간에 1만 명의 적군을 몰살시켰다. 영국군 사망자는 고작 20명뿐이었다. 기관총이 폭격기, 대포, 독가스 등 대량 살상 무기로 바뀌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십 수 년에 지나지 않았다. 1차 대전은 수많은 인간집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군인 900만 명을 포함한 엄청난 호모사피엔스가 희생당했다. 자연에선 가장 강한 집단이었지만 어리석게도 자신들끼리 죽고 죽였다. 인간의 살상능력은 나날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1차 대전에는 그 흔한 전쟁 영웅이 없다. 영광은 사라지고 오로지 비참함만 남았다.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은 물론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르뎅 전투는 역사를 바꾸어 놓진 않았다. 하지만 인류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가장 잔인했던 전쟁의 한 표본으로 역사에 남기엔 충분했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죽음의 땅)’로 변한 베르뎅 일대는 꽤나 이성적이라고 자부했던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차 대전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은 ‘악마의 3형제’로 불렸다. ‘노 맨스 랜드’에는 그 악마 3형제들에 의해 희생당한 인간의 죽음이 사방에 늘려 있었다. 참호의 길이는 무려 760㎞에 달했다. 참호는 적의 기관총과 대포로부터 몸을 보호해주었으나 그 안을 생지옥으로 바꿔놓았다. 높은 습도와 진흙, 시체 썩는 냄새와 온갖 오물은 쥐들의 번식에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쥐들은 점점 크기를 불려 나중에는 고양이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그들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목으로 들어가 간을 파먹기도 했다. 간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다. 노 맨스 랜드는 적군과 아군조차 구분하지 않았다. 가장 어리석은 전쟁 도중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뫼즈강은 원래 독일과 프랑스를 나눈 경계였다. 그 강을 중심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300여 일 간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들이 싸운 이유는 허망했다. ■ 비스마르크의 실각 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베르뎅 전투를 이해하려면 몸통인 1차 대전의 발발 원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차 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의 동맹국이 싸움을 벌인 첫 번째 세계 대전이다. 나중에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2차 대전과 달리 일본은 연합군 편에 섰다. 당초엔 세계대전으로 불렸으나 2차 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과 구분하기 위해 1차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전쟁 종료 후 유럽과 세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4개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이 해체됐고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만들어졌다. 1차 대전의 원인을 알아보려면 유럽 근대사를 통으로 헤집어야 한다. 이는 아마존 강의 시원을 찾는 일 만큼이나 거대한 탐험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독일 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독일은 19세기까지 수 십 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분리되어서는 큰 힘을 쓸 수 없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산업혁명과 식민지 확보경쟁에도 뒤질 수밖에 없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통상 보불전쟁·1870-1871년)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어렵게 통일을 이루었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독일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서부(프랑스)와 동부(러시아)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독일에게는 두 개의 전선을 한꺼번에 감당할 힘이 없었다. 일 대 일이면 어느 나라와도 자신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둘 중 한 나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우려는 1,2차 대전을 통해 현실로 드러났다. 결국 두 개의 전선이 형성돼 그의 염려는 악몽으로 바뀌었다. 독일은 늘 영국을 라이벌로 여겼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오랜 기간 패권국으로 군림한 나라다.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둔 영국은 되도록 유럽 내부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섬나라여서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맞대지 않은 영국은 ‘나 혼자 잘살면 그만’이라며 그들만의 고고함을 누렸다. 왕정이 없어진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영국은 이래저래 왕실끼리 혈연으로 얽혀있었다. 그러니 더욱 그들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를 상대로 ‘영예로운 고립’을 선택했다. 그 편이 훨씬 실속 있었다. 2020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단행한 영국의 심리적 배경과도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전문가답게 동서고금의 가장 유력한 방식으로 독일의 난제를 극복하려 했다.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이었다. 멀리 있는 나라(러시아)와는 동맹을 맺고 눈앞의 프랑스는 힘으로 몰아 붙였다. 비스마르크 외교의 최종 목표는 프랑스의 고립이었다. 독일은 나폴레옹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했다. 비록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되갚아 주긴 했지만 프랑스 육군은 여전히 유럽 최강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땅만 넓었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줄타기 외교를 벌여 통일 독일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변덕스런 빌헬름 2세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새 황제는 독일의 외교 정책을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축구에서 브라질 축구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불만을 표시했다. 새 황제는 눈에 가시였던 비스마르크를 퇴임시켰다. 닥치고 공격을 추구한 황제는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공격은 수비보다 배나 체력 소모가 크다. 독일에겐 무리한 벌크업이었다. 독일이 덩치를 키우자 이번엔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었다. 독일에겐 뼈아픈 외교적 손실이었다. 한창 몸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던 빌헬름 2세는 커져가는 자신의 근육에 도취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간과했다. 보불 전쟁 승리이후 독일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 무서운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룩해가고 있었다. 근육이 커지자 점점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됐다. 독일의 이런 변화를 유럽 여러 나라들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1908년부터 1차 대전 직전인 1913년을 전후해 유럽 제국은 저마다 50% 이상 국방비를 늘려갔다. 너도 나도 격투기 수업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싸움판이 벌어질 만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발칸반도였다. 그곳이 유럽에서 가장 화기에 취약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발칸반도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여러 인종, 종교, 국가가 뒤엉켜 있었고, 유럽의 덩치 큰 제국들은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다했다.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종주국이었다. 오스트리아는 20세기의 중세로 남아있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합스부르크왕가라는 봉건 왕조를 유지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헝가리 황제를 겸했다. 세르비아는 헝가리의 제후국이었으니 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세르비아로 구성된 피라미드의 정점이었다. 20세기 초 발칸반도라는 사각의 정글 주변에는 두 명의 헤비급 복서가 버티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슬라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러시아였다. 최근까지 이곳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제국의 체급은 미들급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도 순순히 뒷전으로 물러서려 하진 않았다. 강대국끼리의 몸싸움에 인종, 종교 문제까지 뒤엉켜 발칸이라는 화약고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스만은 이슬람인데 반해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러시아는 정교였다. 발칸 반도 내의 종교 분포도 덩달아 복잡했다. 세르비아는 오래 동안 오스만 제국 아래 있었지만 주민 대부분 정교를 믿었고, 크로아티아인의 대다수는 가톨릭인 반면 1차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린 보스니아는 이슬람 40%, 정교 30%, 가톨릭 15%의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화엄경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時方)이라는 경구가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의미다. 우주가 130억 년 전 작은 점에서 비롯돼 팽창했다는 ‘빅뱅이론’과 맞닿아 있다. 1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 역시 한낱 작은 일에서 비롯됐다. 세계대전(世界大戰)까지 비화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 그랬듯 여러 개의 우연이 모여 뜻밖의 필연을 만들어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세르비아계 청년 암살단 6명이 그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과 세르비아인은 슬라브 민족의 피를 공유했다. 오스트리아는 그들과 엄연히 구분된 게르만족이다. 암살단은 첫 번째 기회를 놓쳤다. 두 번째로 그들 중 누군가 황태자의 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애꿎은 구경꾼 몇 명만 부상 입히는 데 그쳤다. 황태자의 차는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경호 원칙에 따르면 황태자는 즉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강한 면을 과시하고 싶었다. 약한 사람은 의외의 대목에서 불쑥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는 반쪽짜리 황태자였다. 황실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우겨서 강행한 대가였다. 평민 여성과 결혼하는 대신 자식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니 권력의 절반만 가진 물 황태자였다. 그는 황실 내부의 따가운 시선을 무던히 참아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기회가 되면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다. 황태자는 남은 일정을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격론 끝에 노선을 살짝 변경하는 선에서 수행원들과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한 운전기사는 원래 예정된 길로 가고 있었다. 수행원들이 기사에게 급히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황태자와 부인을 태운 차는 큰 길에서 천천히 후진을 했다. 차를 돌리기 위해서다. 하필 그곳에 암살자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은 기막힌 우연에서 비롯됐다. 암살자는 황태자와 부인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성일만 기자 세계대전(世界大戰) 「1」 『역사』 세계 여러 나라가 관여하는 큰 규모의 전쟁. 「2」 『역사』 독일ㆍ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과 영국ㆍ프랑스ㆍ제정 러시아의 삼국 협상이 대립하여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1914년 7월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를 후원하는 독일이 세르비아를 후원하는 제정 러시아ㆍ프랑스ㆍ영국과 개전하여 시작되었다. 일본ㆍ루마니아ㆍ그리스ㆍ이탈리아가 삼국 협상 쪽에, 오스만 제국ㆍ불가리아가 삼국 동맹 쪽에 참전하여 세계 전쟁으로 확대되었는데, 1918년에 독일이 항복하고 이듬해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 제1차 세계대전 「3」 『역사』 세계 경제 공황 후, 파시즘 체제에 있던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등의 군국주의 나라와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의 연합국 사이에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독일과 소련의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 1945년 5월에 독일,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 제2차 세계대전 |
Марш армії України.The March of the Ukraine Army우크라이나군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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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다녀갑니다
다녀가신 고운 걸음
소중한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沃溝서길순 님 !
오늘도 활기찬
좋은 하루보내세요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다녀가신 귀한 걸음
공감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미소 가득한
좋은 하루보내세요
~^^
1차 세계대전 부터 19세기 20세기 전쟁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쟁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건가?
이 글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합니다.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우리 말입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시간이 되십시오.
안녕하세요
바다고동 님 !
훌륭한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인적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것은 어쩌면 전쟁보다도
힘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고운밤 되시어요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오늘도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편안한 쉼이 되는 시간 보내세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유와 웃음있는 평안한
저녁시간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