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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대만 여행 1
어제 밤 도착... 내일 모래 또 연길로... 우선 시작만 후딱 하나 만들고 ..
(여행이라면 바로 급 흥분 무드인 나, 비 정상인가요 )
나는 여행이라면 바로 급 흥분 무드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날에 그런 것처럼 꼭 그렇게 가기 전부터 급 흥분에 젖어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상상이 줄 이어 가기 전 날 밤은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 이번 대만 여행도 증세는 똑 같았다. 더욱이 40년도 더 지난 옛 친우들과 같이 가는 여행이라니 그 충동감은 이루 말로 표현 못한다. 그 중 한 친구는 고등학교 2년하고 3년 줄곧 내내 짝이었던 친구(나는 22번 친구는 21번)인데 그와 어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친구는 그 시절 일부러 키를 맞춰 서 기꺼이 내 짝이 되었었다. 친구는 부잣집 막둥이라 짜장면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에 갈비탕만 주로 얻어먹고 호사를 누렸었다. 그것도 종로통에서도 알아준다는 집에서.
그런 친구를 그간 안 보고 산 것은 아니지만 동숙을 한 것은 고2때 설악산 수학여행 때 같이 고고 춤을 신나게 추고는 처음인 셈이다. 평생 남 이빨 손질만 하던 놈, 장구한 시간 어떻게 변했을까. 사실 수십 년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별로 만난 적도 없는데도 만나면 서슴없이 불식간에 야! 기성아 아니 께끼야 소리가 쑥 튀어나오고 만다. 참 이상한 의식구조다. 옛 친구들은 그 이상한 의식 형태로 참 편하고 거침이 없어 좋다. 욕먹어도 실수해도 괜찮고 잘난 척 해도 곱게 받고 돈 모자라도 대꾸 없이 그냥 대신 척척 대준다. 아마 이번 이 박사(이광석 박사)가 그러지 않을까 내심 그대가 크다. 그는 이번 여행비를 우선 다 지불하고 나중 정산처리 하자고 했다. 아무리 추워도 내가 술 사먹지 옷 사입나 했던 어느 시인 말처럼 나는 질질 끌며 정산에 쉽게 응하지 않을 태세다. 아무튼 이 박사 역시 내 옆옆 순번(24번)이라 고만고만한 키에 같은 이과 반으로서 2년을 같은 반으로 살아 너무도 속속들이 잘 아는 처지다.
거기에 근무처도 같아 수 십 년을 같이 사는 셈인데 그것도 모자라 아파트도 내 바로 앞 동에서 나를 지키듯 1층에서 내 쪽을 보며 산다.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하는 짓은 나보다 최소 3살은 위다. 그 당시 연합고사 무시험 뺑뺑이 배정 때 친구는 올백을 맞은 전국 통 털어 열 몇 명 중 한 명으로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이 우수학생이 우리학교에 왔음을 알리는 선전에 모델이 되었던 수재 중 수재다. 그 친구는 많은 친구들에게 귀감이 되었지만 그래서 또 우리를 낙심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 존재다. 별로 공부를 안 하는데 성적은 늘 1 아니면 2였다. 내일 시험 보는 데 유도복 입고 운동하는 아이. 그 친구하는 대로 하다간 꼴찌를 면하기 힘들 텐 데 죽어라 판 놈들이 등수를 보고 어디 성질이 안 날 수 있는가.
근무처에서 거미 망 같이 얽힌 영문 좌표를 손쉽게 만드는 그의 어느 일과를 보고 치밀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친구는 한미원자력 협상의 숨은 주역이다. 물론 이번 여행 기획은 짧은 여정이지만 그가 기획하고 총감독을 했다. 돈 관리까지도. 또 같이 가는 우 사장이란 친구는 수학교수나 할 놈이 일찍이 연구단지에 입성해 전자통신이라면 연구소 중에서도 잘나가는 곳인데 그곳에서도 실장 직함을 엄청스레 빨리 달고서는 어느 참 독립을 해 자수성가를 한 친구다. 요즘 같은 세상 사장이라면 누구든 나는 존경스럽다. 네 가족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 식솔 수백을 책임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짓은 정녕 아니다. 나는 그한테 거는 기대가 누구보다 크다. KT쪽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친구가 야심차게 노리는 곳, 인도네시아. 당연 그곳도 경제가 어느덧 무르익어 소프트웨어 확충이 급할 때가 곧 도래하지 않을까. 잘 나간다면 나는 친구 일본속어로 말해 ‘가방 모찌’로 따라 나서 족 자카르타 쪽을 주 목적으로 파고 싶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인도네시아가 갖는 힌두문명 성격의 이상한 문화, 나는 그 아리송함을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친구들 셋에 그들 마누라들 까지 총 7명이, 참 내 마누라는 이번여행에서 빠졌다. 다리도 안 좋고 대만을 하필 작년에 다녀와 안 간다고 했다. 나와 마누라는 여행을 보면 비교가 좀 된다. 나는 마음에 들면 열 번도 더 가는데 마누라는 절대 안 간다. 글 한 편을 쓰자면 나는 자폐에 걸린 양 같은 연주곡을 거짓말 없이 말해 백번은 듣고 들으며 글 마무리를 하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질색을 한다. 나는 여행이란 새로움의 발견이라고 누누이 말하고는 있지만 정작 새로움을 찾는 것은 아내이고 내게는 실상 마음에 끌리는 대로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과연 대만은 마음에 당겨질까.
대만 하면 나는 사실 안 좋은 기억이 둘 있다. 내 안양 친구는 1984년도던가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비를 대만 정부가 대줄 정도였는데 친구가 간 무렵부터 그 제도를 없애 버렸다. 돈 걷어 송별회까지 거창하게 마치고 보낸 친구인데 석 달도 안 돼 돌아오고 말았다. 이유는 그놈의 비행기 한 대 때문이다.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 춘천 미군의 헬기 비행장인 "캠프페이지(CAMP PAGE)"에 승객 96명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 민용항공총국(중국 민항) 소속 여객기 한 대가 납치범 6명에 의해 불시착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중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처음이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간의 한국전쟁 이후 첫 번째 공식 외교접촉이 성사되었다. 중국의 민항총국 국장 심도(沈圖) 외 33명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와 직접 협상을 하였고 그것이 1992년 중국과의 수교에 이르는 발판이 된 것이다. 하필 그 무렵 대만은 가서 되돌아올 것이 뭐란 말이냐. 학자금은 물론 한국 대사관이고 KAL 사무실까지 때려 부수는 통에 친구는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때만 해도 중국어학과를 나온다면 취직 길이 막막했다. 친구는 그 바람에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이후 평생 사무직 평 공무원으로 살았다.
이후 내가 11년 전 쯤 직장 선배들하고 대만을 찾았을 때다. 가이드를 하는 사람은 나보다는 조금 어린 여자였는데 자신을 소개하기를 동대문 초등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한국말을 잘 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어느 말끝에 서럽게 울어댔다. 말인즉 그녀 아버지가 서울 중구에서 짜장면 집으로 잘 나갔는데 다 팔고 모두 대만으로 돌아왔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나라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 아버지는 화교로서 인민군하고 맞서 싸운 6 25 참전 용사였는데 그렇게 믿던 반공주의자들이 단번에 공산당하고 손을 잡다니 더 이상 용납을 할 수 없다고 결의하고 모두 다 국민당 정부의 대만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부모를 안 쫓아갈 수도 없고 참 안타까운 그 마음 알 것도 같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민국은 적국이나 마찬가지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대만은 1986년까지 본국 탈환 기치를 걸고 게엄령하에 산 사람들이다. 내 대학교 친구 한명은 이름이 특이했다. 알고보니 화교였는데 결국 그도 대만으로 돌아갔었다. 물론 배우 하희라나 가수 주현미 처럼 귀화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당시 대만으로 향했었다. 이념이 판치던 세상에선 그런 소소한 아픔은 별개 아니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안 좋은 기억으로 돌아설까봐 사실 나는 내심 그게 걱정이었다. 우리는 새벽녘 일찌감치 길을 나서 10시 쯤 인천공항에 닿았다. 나는 비행기 탑승 전 꼭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두고 온 아내에 대한 미안함, 나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요 하는 중국여성들 틈에 껴 간신히 ‘저것 하나하고 요것 하나요’ 해서 화장품을 챙겼다. 판매아가씨들이 웃기는 게 중국 애들이 오면 나하고 말하는 중간에도 그들 말을 들어주고 방긋 웃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는 거였다. 아니 껴든 여자들 소행도 괘씸한데 거기에 거들어주는 판매원은 뭐냐 말이다. 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는 없다. 엄청나게 사대는 위세에 눌려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다 우리나라 돈 버는 것이고 특히 나는 호텔신라 주식을 수년 째 곪은 상태로 들고 있는 장본인이 아닌가. 그놈의 싸드 때문 애가 탄 것은 바로 나였다. 마누라가 아들 장가 비 에 쓰게 돈을 내놓으라는데 내놓을 수 없는 이 가련한 처지는 바로 저 요우커들 때문이었다.
사고 나니 마음이 한 결 편해진다. 마누라 치하에 사는 나로선 응당 할 의무를 제대로 한 셈이다. 어머니 것도 샀다. 엄마는 수십 년 전에나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아덴을 지금까지 고집한다. 아마 그 시절 분 바를 때 그것으로 특효를 보았다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는데 옆 자석이 대만 사람이다. 나는 영어 통하는 대만사람을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내 바람대로 들어맞는 게 이번 여행은 조짐이 좋다싶다. 그와의 대화는 길고 깊었다. 반도체 공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삼성전자 같은 회사 하나만 대만에 있다면 하는 한 숨 섞인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무척 부러운 모양이다. 나중 대만에서 SKC법인장으로 있다는 친구를 만났는데 SK 하이닉스가 작년 한 해 대만에 판 반도체가 2조원이라고 하니 상기해 보면 그 기분을 알만하다.
그 친구들도 삼성전자 하청업체에 납품을 하려고 한국을 들렸던 것 같아 보였다. 암울한 경제 사정을 말하며 젊은 친구들이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그의 말이 가깝게만 들렸다. 어디 거기만 그런가. 그런 그들의 임금은 우리들의 60%정도로 살기가 빡빡 하다고도 했다. 자기만 해도 3일정도 밖엔 회사를 안 나간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한 세상살이다. 김대중 정부던가, 금 모으기 하던 시절, 대기업의 특혜부조리 운운하며 대우를 날려 보낼 때 반대급부로 중소기업을 대만처럼 육성해야한다고 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게 벤처 업체들이었는데 지금은 대우 같은 업체가 생존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들 말들을 한다.
세상일은 아무도 장담을 못한다. 지금 대만은 거목 역할을 할 자 기업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다. 그런 친구에게 내가 대만을 가는 것은 결혼식에 참석 하러 가는 길이라며 청첩장을 보여주니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다. 그런 그는 대뜸 잠도 결혼식장인 메르디앙 호텔에서 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그곳이 대만서는 3대 호텔중 하나로 하룻밤 숙박비만 40만 원 정도 한다고 말하며 아무나 그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그런 그는 혼주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느낌상으로 유명인사들 자제가 곳의 차지들인지나 혹시나 하며 어느 유명 인사인가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4기중 하나를 폐쇄를 했는데 대체로 쓰는 화석연료 때문 공기오염이 심하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대만도 친환경 정책이다 하여 모두 폐기할 예정이라고 하던데 그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우리게도 시사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 요즘 트럼프가 대만에 손짓을 하고 시진핑이 신경 곤두서 대하는데 대만 사람들은 어쩐가요... 그는 반반이라며 겸연쩍은 듯 웃어보였다. 나는 사진을 찍고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이글을 쓰는 때 메일로 그에게 사진을 보냈다.
참 편리해진 세상이고 세계는 하나가 다 되어간다 싶다. 그렇지만 생활양식은 제각각 다름을 유지하며 저마다를 뽐내고도 있으며 오래 지속적이다. 이는 존재의 존립 성은 전통이나 생활 습성 같은 관습에서 우선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가까워져도 자신의 고유성을 잃으면 결국 존재감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에 있어서 싫든 좋든 스스로뿐 아니라 많은 부분들이 그것에 영향을 받고 좌우된다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만의 고유성으로서 그러니까 닿는 어느 상충 점 내지 교차점으로서 우리를 더욱 극명하게 알게 될 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찢어진 런닝을 입고 질질 슬리퍼를 끄는 한 노인을 아주 멋진 호텔 식당에서 본 적이 있다. 저런 차림으로 그곳에 있다는 것도 신기한 노릇인데 그가 드시는 음식 한 끼가 우리 돈으로 쳐 50만원이라는데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회에서는 워낙 더우니 옷이 때로는 무용일 수도 있으며 오히려 보양식이 더 큰 가치 일 수도 있다. 나는 어디에 치중해 삶을 꾸리는 것일까. 나란 삶에 정작 내 스스로는 소외되었던 것은 아닐까.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도 된다. 나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싶은 게 요즘 부쩍 많이 드는 노릇이다. 하기 싫어도 하고 가기 싫어도 가고 그렇게 산 세월도 꽤 된다 싶다. 이번 여행은 그런 점에서 어느 면 나의 찾기 일환 중 하나다.
나는 몇 년 전 죽기 전 꼭 하고 죽을 것 100가지를 만들었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나는 토트넘 뉴포트축구장을 찾아 손흥민 축구를 꼭 한 번은 보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하고 싶고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해도 별로 시간이 없다 싶다. 물론 이미 반쯤 이룬 것도 있다. 연암 박지원에 대한 나의 글쓰기인데 ‘조선의 꽃 열하일기’를 수필가로서 꼭 남기고 싶었었다. 작고한 허세욱 선생님(고대 중문과 교수로 수필가 원로)이 늘 말하던 말인데 졸작이긴 해도 내가 한 셈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젊을 적 척독(쪽편지)을 발간하는 것인데 시간을 저울질하고 있다. 왜? 글은 다 썼는데 마누라가 돈을 안줘서다. 아무튼 나의 행보는 게으름이 없을 테다. 이번 대만 여행도 마찬가지, 이는 곧 나의 행복이고 내 삶의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대만을 힘차게 이제 막 내딛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는 대만에도 그 답은 분명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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