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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70)가 현역 시절 아라카와 히로시(80) 요미우리 타격코치 앞에서 일본도로 창호지를 자르는 장면. 두 이에게 야구는 도(道)였다. 아라카와의 이야기는 야구 이상의 의미가 있다(사진=아라카와 히로시) |
1905년 한국 최초의 야구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야구단’이 창단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해 다카하시라는 일본인 교사가 관립중학교(한성학교의 전신)에서 야구부를 조직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10년 서울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서 열린 황성 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이 땅에서 맞붙은 최초의 한국식 야구와 일본식 야구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춘추>가 ‘황성 YMCA-한성학교전’ 100주년을 기념해 야구(野球)와 야큐(야구의 일본식 발음)의 만남을 모색했다. 수준 높은 야구 담론을 통해 ‘숙명의 맞수’이면서 ‘아시아야구의 동반자’인 두 나라 야구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모색해보자는 게 기획의도다.
<스포츠춘추>의 ‘야구·야큐 위클리’는 1편 <한·일 야구기자 대담, ‘프로야구의 한국, 야구의 일본’>, 2편 <외다리 타법의 창시자, ‘야구는 도(道)이고, 타격은 검(劍)’>, 3편 <한·일 야신의 대화, ‘야구는 하나다’> 4편 <한·일 스포츠저널리즘의 고민, ‘무엇을 쓸 것인가’> 5편 <요미우리 백업 포수 류환진, ‘일본야구의 심장을 말한다’>로 구성될 예정이다.
# 1954년 11월. 마이니치 오리온스(현 지바롯데 마린스)의 왼손 교타자 아라카와 히로시는 애완견과 산책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없는 평범한 산책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한창 진행 중인 중학교 야구경기도 일상의 풍경이었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경기를 지켜보던 아라카와의 눈에 한 건장한 소년이 들어왔다. 큰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소년이었다. 배트 스피드도 무척 빨랐다. 언뜻 봐선 그 팀의 홈런타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년은 첫 타석 삼진, 두 번째 타석에서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며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재미난 건 소년이 왼손 투수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좌투우타’였던 것. 소년의 세 번째 타석 때 아라카와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이봐, 어째서 마운드에선 왼손으로 던지면서 타격할 땐 오른쪽 타석에 서는 거지?” 아라카와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연필과 주판 그리고 젓가락은 반드시 오른손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격도 오른쪽 타석에서 하지 않으면 언짢아하시기에…” 소년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군. 하지만, 야구는 왼손잡이가 훨씬 더 유리해. 괜찮다면 다음 타석 때는 왼손으로 쳐봐.” 아라카와는 소년의 등을 ‘툭’치며 격려했다.
이윽고 타석에 들어선 소년. 소년은 뭔가 결심을 한 듯 오른쪽에서 왼쪽 타석으로 위치를 바꿨다.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던 아라카와는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을 내고 만다. 거짓말처럼 소년이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친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훗날 '세계의 왕(王)'으로 불릴, 오 사다하루(왕정치, 王 貞治)였다.
우연한 운명 와세다실업고 시절 오는 와인드 업 없이 바로 투구하지만, 완봉승을 밥 먹듯이 거두는 초고교급 투수였다(사진=아라카와 히로시)
오 사다하루가 14살 때 처음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당시 오는 14살의 소년이었어요. 전 24살의 프로선수였고요. 처음 오를 보자마자 “왼쪽 타석에서 쳐보라”고 권유했던 게 잊히지 않아요.
처음 본 이에게 조언하고, 처음 본 이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더라. 어쩐지 운명적인 만남 같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운명…그렇군요. 어느 선수가 경기 중 지나가는 이가 왼쪽 타석에 서보라고 한다고 정말 서겠습니까. 운명이 아니고선 할 수 없지요.
오가 왼쪽 타석에서 2루타를 치리란 예상은 하셨나요.
아니요. (고개를 흔들며)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오가 첫 타석에서 홈런이나 3루타를 쳤다면 어땠을까. 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랬다면 우리의 인연은 바로 끝났을 겁니다. 인연이 되려니까 장타도 나온 것이 아닐까요(웃음).
오의 와세다실업고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제가 오에게 그랬어요. “자네, 와세다실업고에 입학하지 않겠느냐고”고. “좋다”고 하더군요. 당시 일본에선 ‘와세다’란 이름이 붙여진 곳은 어디든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묘한 표정으로) 생각해보니 오를 왼손 타자로 만든 것도 나, 와세다실업고에 입학하도록 한 것도 다름 아닌 나였군요(웃음).
당시 와세다실업고는 야구 명문으로 유명했습니다.
명문인 만큼 입학조건이 까다로웠습니다. 오를 받니 안 받느니 하더군요. 그때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
“오가 입학하면 너희는 무조건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한다”라고 말이지요(웃음).
# 원래 오는 공고 진학을 희망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전기 기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선발 시험에서 1점 차로 떨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아라카와의 주선으로 와세다실업고에 입학한다.
그의 재능은 고교 때 활짝 핀다. 고1 때 외야수 겸 투수로 여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오는 이듬해 봄 고시엔 대회에선 투수로만 출전해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연장 11회 노히트노런을 포함해 4경기 완투승을 거둔 것. 오의 대활약으로 와세다실업고는 마침내 봄 고시엔 대회에서 대망의 우승컵을 거머쥔다. 아라카와의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었다.
‘세계의 오’가 되기 위한 대항해의 시작 여든의 고령에도 아라카와는 유소년 야구지도와 티볼 보급에고 앞장서고 있다. 일본은 은퇴 후 야구계를 기웃거리는 대신 이렇게 야구에 받은 사랑을 되갚는 야구인이 부지기수이고, 그것이 상식으로 통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59년 오가 계약금 1천500만 엔, 연봉 140만 엔이라는 파격적 대우를 받고 요미우리에 입단합니다. 하지만, 큰 기대와는 달리 3년째까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는데요. 오와 다시 만난 게 그 즈음이셨지요?
196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이듬해 요미우리 타격코치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오와 재회했지요. 당시 오는 매우 침체상태였어요. 팀 내 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고요. 트레이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님이 절 부르시더니 “앞으로 네가 오를 키워라”고 하시지 뭡니까.
오를 맡으라고요?
(눈을 크게 뜨며)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가와카미 감독님은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를 키우면 요미우리는 세계 최고의 팀이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려면 “대학에서 모든 걸 배우고 온 나가시마보다 고졸인 오를 성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그때 오는 보통 선수로 전락해 있었어요. 타석에 서면 “홈런왕 왕(王)!”이 아니라 “삼진 왕!왕!왕!”이란 놀림을 받았으니까요.
입단 3년 차까지 오는 홈런왕이 아니라 삼진왕이었다.
가와카미 감독이 진단한 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게으름이었어요. 사실 가와카미 감독님은 오가 연습에 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게 “반드시 오의 게으름을 고치라”고 특명을 내리셨습니다(웃음).
그래 오와 대화를 나누셨나요.
제방으로 불렀지요. 오를 앉혀두고 첫마디로 “세계의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는 타자가 되자”고 했습니다. 오가 “네”라고는 했지만, 깜짝 놀란 표정이 역력했어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방황하는 타자에게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자고 했으니 놀랄 법도 하겠지요. 황당한 표정의 오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너는 너무 게으르다”고 따끔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랬더니 오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그라운드에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넌 그라운드에서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해선 절대 세계의 오가 될 수 없다”라고.
음.
오에게 “오늘부터 3년간 술·담배·여자를 멀리하고 오직 훈련에만 몰두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의 베이브 루스를 넘어 세계의 오가 되자”고 했습니다. 오가 두말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전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소질보다 중요한 건 노력입니다. 그리고 노력보다 중요한 건 꿈입니다. 꿈이 없는 노력은 '표류'에 지나지 않아요. (비장한 목소리로) 목표를 향해 전진할 때 그때 비로소 ‘대항해’가 시작됩니다.
그날 이후부터 ‘세계의 오’가 되기 위한 ‘대항해’를 시작하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요. 단언하건대, 다음날부터 오는 세계야구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노력을 하는 선수가 됐습니다.
오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0시까지 훈련에만 매달렸어요. 경기 전·후 가릴 것 없이 시간만 나면 스윙연습을 했습니다. 어떨 땐 스윙연습을 하다가 해가 뜨는 걸 본 적도 있어요. (활짝 웃으며) 한번은 아침까지 스윙연습을 한 오를 보고 가와카미 감독이 놀라 “오늘 경기에 뛰어도 괜찮겠느냐”며 매우 걱정을 하기도 했어요.
감독이 걱정할 정도면 훈련량이 무척 많았다는 건데요. 선수도 선수지만, 코치의 고통도 컸을 듯싶습니다.
일반 코치는 선수를 집까지 데려와 연습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집으로 오를 불러 보충훈련을 시키곤 했어요. 왜냐? 그라운드에서 하는 건 ‘팀플레이’일뿐이니까요. 대선수가 되려면 그보다 몇 배의 개인연습이 필요합니다.
오, 다리를 들다 외다리 타법으로 변신한 오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 ‘오 사다하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외다리 타법’이다. 학처럼 한쪽 발을 들고 치는 외다리 타법은 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당시 미국의 한 TV채널에서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탑 10’가운데 하나로 외다리 타법을 뽑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세계야구계에서 오의 외다리 타법은 생경한, 그러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오가 처음부터 외다리 타법이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도 ‘외다리 타법의 대가’가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가 외다리 타법을 쓰기 시작한 건 아라카와 코치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아라카와는 오의 나쁜 버릇을 교정하려고 일시적인 연습타법으로 외다리 타법을 가르쳤다.
오가 외다리 타법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의 타격폼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테이크 백(타격 시 팔을 뒤로 빼는 동작)’이 너무 컸어요. 그 탓에 강속구를 능숙하게 처리할 수 없었어요. 두 번째는 타격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공을 치려고 몸이 앞으로 나가기 일쑤였어요. 그것이 모두 당시 잘못된 지도 때문이었습니다.
아라카와는 "외다리 타법은 멋이 아니라 핸디캡이 많은 선수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오의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차용한 수많은 타법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상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잘못된 지도요?
1950년대 미국 야구기술이 일본으로 들어오면서 ‘스트라이드 먼저 하고 스윙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진리로 둔갑했습니다.
(양미간을 찌푸리며) 어처구니없습니다만, 요즘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러나 스트라이드를 하고 난 뒤 스윙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힘의 연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가 대표적이었어요. 완전 발과 팔이 따로 놀았습니다(웃음).
오 이전에도 외다리 타법을 이용한 타자가 있었나요.
있긴 했어요. 하지만, 극소수였어요. 지도자들이 간혹 외다리 타법을 가르치긴 했지만, 선수들이 “한발을 들고 치면 뭐가 좋으냐”는 질문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지도자들도 원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신비에 싸인 외다리 타법으로 오의 결점을 바로 잡으려고 하셨는데.
오에게 가장 어울리는 타격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다행히 외다리 타법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어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외다리 타법은 한쪽 발을 든 상태에서 스트라이드를 하면 테이크 백이 짧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게다가 ‘투수가 다리를 올리면 타자도 다리를 올리고, 투수가 다리를 내리면 타자도 내린다’는 식의 단순한 행동은 타격 타이밍을 맞추는 데 큰 효과가 있습니다. 외다리 타법에 무슨 대단한 원리라도 숨어 있는 것 같지만 이처럼 원리는 단순합니다.
원리는 단순해도 익히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땀 역시 말도 못하게 흘려야 하는데요.
사실 처음엔 그리 많은 연습을 하지 않았어요. 제 집에서 스윙연습을 하고, 한발로 몇 분씩 서 있는 연습을 하는 정도였어요.
외다리 타법이 실전에 등장한 건 언제였나요?
1962년 7월 1일 다이요 웨일스전이었어요. (눈을 감으며) 참,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투수코치가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건 순전히 타선이 나쁘기 때문이다. 네가 맨투맨으로 지도하는 오부터 전혀 치질 못하고 있다”라고 불만을 터트렸어요. 그때 저도 모르게 “왕이 홈런을 칠 떼니 두고 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 뭡니까. 속으론 어땠느냐고요? ‘아차’싶었지요(웃음).
# 아라카와는 오에게 “오늘은 삼진을 두려워하지 말고, 외다리 타법으로 스윙하라”고 지시한다. 이때까지 타석은 고사하고 프리배팅에서도 외다리 타법을 쓴 바 없는 오였다. 그저 스윙연습을 하며 감을 익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는 군말 없이 “네”하고 스승의 말을 따랐다.
오의 첫 타석. 다이요의 선발투수 이나가와 마코토가 다리를 올리는 순간 오도 오른쪽 다리를 들어 타이밍을 맞췄다. 그리고 이나가와가 다리를 내리는 순간 함께 다리를 내리며 스윙을 하는데.
깨끗한 우전안타였다. 역사적인 외다리 타법의 첫 안타였다. 더 놀라운 건 다음 타석에서 오가 외다리 타법으로 우월 홈런을 때린 것. 1루를 돌던 오를 아라카와는 눈물로 반겼다. 여든의 나이지만, 지금도 아라카와는 당시를 회상하면 눈가가 뜨거워진다.
외다리로 세계를 든 오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일본야구 '최고의 별'인 오 사다하루. '친구 이상의 벗'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장훈)가 한국인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귀화를 거부하고 있듯 그 역시 중국인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아직도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제2회 WBC에서 <스포츠춘추>와의 인터뷰 중 환하게 웃고 있는 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오가 외다리 타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나 격렬하게 스윙연습을 하는지 다다미(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가 하루에 한 장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특수주문해 비싼 다다미로 바꾸니까 그나마 버틸 만하더군요. 그래도 1달을 넘기지 못했어요. 만약 다다미가 버티는 날엔 오의 발가락이 못 버티고 찢어지곤 했어요. 그래도 오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 외다리 타법으로 무장한 오는 1962년 38홈런으로 첫 홈런왕 타이틀을 따냈다. 이후 센트릴리그 홈런왕을 무려 15번이나 차지했다. 오는 1980년 은퇴할 때까지 22년 동안 통산 2천831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1리, 2천786안타, 868홈런, 2천170타점을 기록했다. 868홈런은 한·미·일 프로야구 최다홈런기록으로 웬만해선 깨기 어려운 대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오 이후 많은 타자가 외다리 타법을 사용했지만 성공한 이는 거의 없었다. 아라카와의 아들 다카시도 아버지로부터 외다리 타법을 배웠으나 실패했다. 1990년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뛴 타이완 국적의 다이호 야스아키가 그나마 성공사례였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외다리 타법이 죄다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흉내 내기도, 습득하기도 무척 어려운 타격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타격폼은 역시 두 발을 땅에 대고 치는 겁니다(웃음). 그렇게 해서 홈런을 칠 수 있다면 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외다리 타법은 테이크 백이 느리거나 타격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타자에게만 유용한 타격폼입니다. 오처럼 말이지요.
다다미방에서 오의 외다리 타법을 지켜보고 있는 젊은 시절의 아라카와. 오와 아라카와에게 야구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도(道)이자, 머나 먼 대항해였다(사진=아라카와 히로시) |
야쿠르트에서 성적부진으로 도중하차한 아라카와는 이후 야구계를 기웃하지 않는다. 다시 감독이 되려고 로비를 하지도 않았다. 후지 텔레비전, 니혼TV의 해설가로 활동하다 ‘야구에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며 유소년야구 지도와 티볼 보급에 앞장섰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아라카와는 매주 두 차례 스무 명 안팎의 학생들을 직접 지도한다.
도쿄 시부야에 ‘아라카와 야구학원’이 있더군요. 이곳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야구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7살 때부터 17살까지에요. 이 시기가 눈도 가장 좋고, 기술도 잘 받아들일 때에요. 저 같은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야구에 받은 은혜는 어떻게든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아이들의 호응이 꽤 높은 것으로 압니다.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야구는 억지로 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금방 질려요. 저는 재미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재밌게 해야 뭔가를 배웠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다시 제발로 찾아올 수 있어요.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셨습니다. 오 같은 대스타를 배출하시기도 했고요.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지도자는 인내와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선수에게 “몇 번이나 했는데 이걸 못해!” 하는 순간 둘 사이의 신뢰는 금이 갑니다. 선수가 변하지 않았다고 실망해선 절대 안 됩니다. 끝까지 성의를 다해 정중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오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 번 아니 십만 번이 넘게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지도자 할 것 없이 이걸 꼭 아셔야 합니다. ‘선수는 알고도 못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못 할 뿐’이라고. 그것을 알게끔 하는 게 지도자의 몫이라고.
선수들이 성공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단연 노력하는 자세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질을 타고나도 노력이 부족하면 그만입니다. 오는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요구하든 대답은 언제나 “네”였습니다. 조금도 저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우연을 필연의 운명으로 바꾸는 힘, 그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타격코치만큼 힘든 자리도 없는 듯합니다. 그 많은 선수의 타격폼을 하나하나 지도해야 하니까요.
(신중한 표정으로) 지도라, 그보단 조언이란 말이 낫겠군요. 제가 가르친 선수들의 폼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똑같은 폼이 아무도 없어요. 타격코치는 선수들이 자신의 개성과 체형에 맞는 타격폼을 찾도록 도와주는 도우미입니다. 이 선수가 성공했다고 다른 선수에게 그 폼을 적용하는 획일화는 절대 금물이에요. 암, 그렇고 말고요.
‘야구는 칼의 노래’ 아라카와 씨가 합기도의 기본원리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아라카와 야구’의 기반은 무엇일까. 그는 다소 생뚱맞게 “합기도”라고 했다. 사연은 이렇다. 1956년 아라카와는 일본 ‘합기도의 거목’ 우에시바 모리헤이 아래로 입문한다. 당시 그의 주변에선 “프로야구선수가 어째서 합기도를?” 하며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합기도의 원리를 잘 이해해 야구에 접목하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우에시바는 아라카와에게 합기도의 원리를 설명하며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는지 알려줬다. 코치가 됐을 때 아라카와는 이윽고 자신의 야구철학이 집대성된 ‘합기의 야구, 합기의 타법’을 주창한다. 오에게 사사한 외다리 타법도 실은 합기도의 원리를 기반으로, 그만의 야구철학으로 탄생한 새로운 타법이었다.
오가 세계신기록인 756호 홈런을 친 뒤 두손을 들어 기뻐하고 있다. 그의 뒤에서 하리모토가 그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야구와 합기도라, 글쎄요. 잘 조화가 안 되는데요.
합기도는 힘의 움직임을 중시합니다. 합기도를 처음 배울 때도 어떻게 힘을 이용하는지를 가장 먼저 배웁니다. 특히나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법을 배우지요.
(옆 사람을 일으키며) 자, 절 잡아보세요. (30대 청년에게 몸이 결박된 80살의 아라카와는 그러나 3초도 안 돼 결박을 풀었다.) 보셨지요? 상대에게 아무리 ‘꽉’ 잡혀도 힘을 다스릴 줄 알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야구는 투수의 힘을 타자가 역이용하고, 반대로 타자도 투수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의 싸움입니다. 일종의 도(道)이지요. 실제로 전 야구를 ‘야구도(野球道)’라고 부르곤 합니다.
오에게도 합기도의 원리를 가르치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에요. 이 말을 빼놓았군요. 타석에 서면 가슴이 두근두근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고개를 흔들자) 기(氣)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에요. 계속 가슴이 두근거리면 결국 중심이 흔들려 타격에 지장을 받습니다. 그럴 때 오는 단전으로 호흡하며 기를 다스렸어요. 사실 전 단전의 중요성을 메이저리거에게 배웠습니다.
메이저리거요?
뉴욕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가 일본을 찾은 적이 있었어요. 따지고 보면 그도 외다리 타법을 하고 있었어요. 왼발을 들고 쳤거든요. 우연하게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타격할 때 중심을 어디다 두고 치냐?”라고 물었습니다. 대뜸 “배꼽에 둔다”라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합기도를 하면서 디마지오가 가리킨 배꼽이 단전임을 알게 됐어요. 야구의 고수들은 국적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모두 같습니다(웃음).
오의 훈련 가운데 천장에 매단 실 끝에 종이를 붙이고 일본도로 자르는 게 있지 않았나요? 사진에서 본 듯한데요. 이것 역시 합기도의 영향인가요?
맞습니다. 종이는 창호지였어요. (A4용지를 들며) 자, 보세요. 일본도로 종이를 자른다 칩시다. 가장 좋은 각도가 어딜까요? 그렇지요. 종이가 수직으로 세워졌을 때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야 종이를 정확히 두 동강 낼 수 있습니다. 타격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배트는 검(劍)입니다. 스윙은 ‘베기’에요. 검으로 대나무를 베듯 타석에서 타자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배트를 휘둘러야 합니다. 사진을 말씀하셨는데…원래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 누구도 오와 제가 훈련하는 걸 찍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딱’ 한번 허용했는데 (멋쩍게 웃으며) 그게 세계로 전해졌더군요. 한번은 베네수엘라에 갔는데 저와 오가 일본도로 훈련하는 사진이 있더군요(웃음).
# 1995년 아라카와는 한국을 방문해 삼성 라이온즈 타자들을 가르쳤다. 잠시였지만, 삼성 타자들은 오의 스승에게서 뭔가라도 배우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 가운데 19살의 ‘아기 사자’ 이승엽(현 요미우리)도 있었다.
지난해 오와 만난 아라카와. 이제 두 사람 모두 일흔을 넘었다(사진=아라카와 히로시)
이승엽을 가르친 적이 있으시다고요.
1995년일 거예요. 10일 정도 삼성 캠프를 찾아 선수들을 지도한 바 있습니다. 그때 ‘승짱(이승엽)’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전 기억하지 못했지만, 승짱이 찾아와 “과거 선생님께 타격지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더군요(웃음). 아, 김태균 선수가 지바롯데 마린스로 오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전 성공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타격에 절도가 있어요. 몸의 중심을 제대로 옮길 줄 알더군요. 개인적으로 세이부 라이온스의 나카무라 다케시를 좋아하는데, 김태균이 나카무라와 비슷한 유형인 듯합니다.
야구에도 국적을 부여하곤 합니다. ‘한국식 야구’ ‘미국식 야구’ ‘일본식 야구’가 그것인데요.
(낮은 음성으로) 기본적으로 야구에 ‘일본식’ ‘한국식’ ‘미국식’은 없습니다. 특히나 타격은 그렇습니다. 날아오는 공을 잘 치면 그것이 야구이고, 그 나라 야구입니다.
70년 동안 야구인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선생께 야구는 무엇이십니까.
(먼 산을 바라보며) 인생입니다. 휴우-. 난 바보예요. 70년 동안 야구밖에 모르고 살았으니. (기자를 보며) 그래도 꽤 즐거운 인생이었다고 생각해요. ‘세계의 오’를 키운 ‘세계의 아라카와’. 멋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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