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국에선 거대한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어요..
1920년대 반일적이던 한국 개신교가 1930년대 친일로 대거 돌아선 이유는..
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튼.. 한번 읽어보세요.. 잘 모르는 부분들일테니깐요..
1920년대 중국 반기독교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강명숙(숙명여대 강사)
1. 머리말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이전에 들어온 근대사상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주의 사상이 사회적 지지를 받게된 것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론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급속한 전파는 그때까지 한국 근대화의 서구적 모델로 기능한 기독교를 반대하는 반기독교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으로 성장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주변국들에서 일어나는 반기독교운동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민중의 호응을 받아 반종교운동에 그치지 않고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중을 기반으로 한 반봉건적 근대화운동의 통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韓人)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고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기재(器材)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중국의 사회주의운동이 국내 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반외세운동에서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발전한 반기독교운동이 식민지 조선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파하였는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사상운동 방법을 어떤 식으로 원용(援用)하였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며 나아가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반기독교운동의 관계를 알아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2. '신문화운동'에 관한 인식
반외세운동으로 봉건성을 극복하지 못했던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제국주의를 표면적이고 감정적으로 이해하였으며 운동 방법도 살인·약탈·방화 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봉건성은 반제국주의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세의 침략을 가중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 대내적으로는 민국혁명과 공화정 수립을 무력화(無力化)하고 원세개(袁世凱)의 전제정치와 제제(帝制)운동, 장훈(張勳)의 청제복벽운동(淸帝復壁運動), 강유위(康有爲)의 공교(孔敎) 국교화(國敎化) 등의 복고운동을 난무하게 하였다. 이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5.4운동을 계기로 민중을 변혁 주체로 만들기 위한 자아의 확립과 청년들의 이념적 각성을 추구하였다. 이 운동은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에 근거를 두고 전통을 재평가하여 자강(自强)의 방법을 획득하려는 '신문화운동'으로 나타났다. 5.4운동을 거치면서 제국주의가 중국의 매판계급이나 봉건계급과 연대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민주적인 근대화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지배계급의 근대화정책과 서구적 근대화의 한계를 인식하였고, 봉건계급의 복고운동이 강고해지면서 현실적으로 서구적 근대화도 불가능해졌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근대화의 이념을 요구하였으며,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최신의 과학적 근대화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려 하였다. 또 민중을 변혁 주체로 만들기 위하여 자아의 확립과 청년들의 이념적 각성을 추구하였다. 자유주의자인 진독수(陳獨秀)와 무정부주의자인 북경대 채원배(蔡元培)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문화운동은 봉건사회의 이념적 억압에서 벗어나 정신개조(精神改造)와 윤리혁명을 통하여 개인의 독립과 개성 해방을 추구하였다. 신문화운동은 전통적인 유교를 부정하고 근대적 민주주의와 그 이념을 기반으로 과학주의를 주장하였다. 이 시기 과학주의는 사회 중건(重建)의 지표가 되었고, 과학적 세계관이 사회를 압도함으로써 과학적 방법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류의 진정한 혁명을 가져온다는 과학만능 사조를 유행시키고 과학구국론(科學救國論)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구국론의 입장에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아니하는 종교를 부정적으로 비판하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종교를 '가증한 권위적인 형식'으로 비판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원세개의 반동으로 좌절된 근대화를 계속하는 방법으로 가장 최신의 소비에트 방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산주의의 종교론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신성한 권위로 성화되어 현존 질서를 안정시키려는 종교는 내세(來世)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피압박자들의 고통을 안무(按撫)하므로 종교는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하여 의식의 자각이 필요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종교는 소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 봉건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증을 동반하지 않은 모든 학설에 대하여 실증할 수 있을 때까지 보류하였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유보적 태도는 B. Russell이 제도적 종교가 진보를 희생시키고 개인적 종교의 유용성도 극히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고무되어 종교의 실용성에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당시 진행중이던 '용(用)과학방법론'의 입론 과정에서 과학은 지식인의 신앙이며 국가의 권력과 위세를 추구하는 상징으로 설정되고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교의는 과학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되고 새로운 사상의 도입과 민족적 발전을 방해하고 서양의 침략을 수월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운동이 이론적 정당성과 보편성, 그리고 사회적 동의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초 근대화의 방법으로 여겨져 왔던 기독교가 원세개의 반동으로 여러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그 유용성마저도 과학주의적 인식에 의하여 부정되면서 기독교 비판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교의가 비과학적이고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후원하며 중국의 교육을 장악하여 국민의 의식적 자각을 방해하고 행정권을 무시함으로써 제국주의 침탈의 주구(走狗)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기독교운동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라는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과학주의라는 합리성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또 청년들을 혁명으로 인도하는 의식적 자각의 방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서구적 근대화의 한계를 경험적으로 알게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청년단체를 형성하여 갓 형성된 공산당과 연결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근대화를 구현하는 세력 확보를 위한 구체적 운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만국기독교학생청년대회를 열어 중국 내에 기독교를 확장하려는 활동에 대하여 사회주의자나 과학주의자들의 적극적 비판이 일어났고 대회 개최 소식에 촉발되어 반기독교운동이 다시 고조되었던 것이다. 1922년의 반기독교운동은 1920년에 결성된 사회주의 청년단의 두번째 사업으로 사회주의 청년단의 내부 정비 이후 사회적인 확산을 도모한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일환이었으며 사회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사상운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개신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과학화·합리화 운동을 과학만능주의 또는 물질만능주의로 비판하는 데 종교적 힘을 모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경에서 만국기독교학생대회를 개최한다는 데에 자극을 받아 다시 일어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곧바로 조선의 일간지를 통하여 알려졌다.〈동아일보〉는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만국기독교학생대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경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점차 가열되어 북경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비밀단체들도 참석하는 대대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도하였다. 결국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종교에 국한된 사소한 운동이 아니라 '문학혁명'이래 주목할 사회현상이며 반기독교운동은 종교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의 고압적인 태도나 영국과 미국의 침략에 반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도하여 반기독교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였다. 여운홍은 반기독교운동이 점차 가열되고 있으며 반기독교운동의 중심 인물들이 "명예있는 교육자"들이어서 장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또한 조선인이 반기독교운동에 대하여 주목할 것은 반기독교운동의 원인이 과학적 입장에서 일어난 것이며 침략주의를 배척하는 것인데 배척의 주대상은 "□□침략자"라고 생각하는 미국이라 하여 반종교운동의 지향점을 지적하였다.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보도와는 달리 소극적인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흥우는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조선에서 듣던 바와는 달리 미약하다고 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계의 보도인 "반기독교적 대단체(大團體)"와 "아교계(我敎界)의 위험기(危險期)" 등〈기독신보〉에 실린 기사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반기독교적 대단체"라는 기사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이 북경대학의 교수와 학생을 중심으로 만국기독교학생청년대회에 반항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면에는 반영미(反英美)적인 색채가 농후하다고 하였다. 즉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선교사를 첨병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지적한다고 하였다. 또 "인류가 그 근성(根性)을 버리지 못하여 인간이 지은 교회가 신의 거룩한 뜻에 위반되지 아니함을 담보할 수 업슬 것이며 반종교론자의 지적이 우리 교회에 업슴을 변명할 웅변이 없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즉 현실적인 잘못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 잘못을 종교 자체의 잘못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반종교운동을 대수(大讐)로 삼을 것은 없다고 반종교운동의 가치를 소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아교계(我敎界)의 위험이며, '만국기독교학생청년대회'의 개최는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여 "태초부터 경영하시던 신(神)의 의사가 가장 현실 우헤서 일우워지게 될 날이 갓가워오게 하는 것이며 향상의 거름이 세계적으로 니르게"하는 대회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반기독교운동이 주장하는 종교 비판의 내용을 인류의 진화를 방해하고 자유와 평등 사상을 속박하면서 박애주의의 간판을 내걸고 인류를 속인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죄에서 벗어난 참된 신앙인의 면목을 갖출 것을 요구함으로 반종교운동의 기독교 비판을 극복하려 하였다. 나아가 상해에서 기독교전국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된 것을 보도하여 중국 기독교의 건재함을 보여 주었고 반종교운동이 잘못한 것을 일본인에게 씌우고자 한다고 반종교운동을 비난하려고도 하였다. 결국 개신교인들은 중국 반기독교운동이 지닌 민족적 정당성을 부정하지 못하였으나 기독교가 받을 피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에 인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계가 중국의 반종교운동의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일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반종교운동의 내용을 선전하려 하였다. 임주(林柱)는 반종교운동의 과정을 간략히 서술한 후 중국에서 반종교운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세 가지로 열거하였다. 첫째는 중국은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나 "위부(偉富)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어 어떤 학설도 자신의 전통적 학설에 비추어봄으로 종교에 대해서도 맹종적으로 숭배하지 않으며, 둘째,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에 힘입어 반종교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셋째는 세계기독교학생동맹회의가 중국에서 개최됨으로써 "중국과 절실히 관계있는 자"들이 자극을 받고 일반인의 축적된 감정을 폭발시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임주는 중국의 반종교운동을 중국적인 전통과 학문에 기반을 두었으며, 사회주의 세력이 주동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사회주의운동 내지 인간의 자각과 연관시켜 반종교운동을 이해하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정백(鄭栢)은 반종교운동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살펴보고 있다. 첫째는 워싱톤회의로 인하여 맺어진 4국협정이 중국 침략을 더욱 강화하였음으로 워싱톤회의를 주재한 미국에 대하여 반미운동을 전개한다고 하였다. 둘째는 기독교적 교육의 침략성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으며, 셋째는 반외세적 정치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넷째는 경제혁명을 전개하기 위하여 반종교운동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정백은 반기독교운동은 급조(急造)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심사숙고하여 전개한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반종교운동자들이 관철하려는 논리는 인간의 행복·자유·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성에 합(合)하고 세계사조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진리이며 생활을 개선하는 '진리교'가 그들의 새로운 종교이며 신조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즉 반(反)기독교 논리는 사회주의에 입각한 것이며 자유를 얻기 위하여 진리와 과학을 존중한 결과 나타난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이해하였다. 종교를 배척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이성적인 자세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종교운동이 기독교를 중점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信者)를 가지고 있어 그 해독이 가장 심하기 때문으로 보았다.
정백은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을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의식적 자각을 이루려는 필연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인식과 연관하여〈동아일보〉사설에서는 중국 반종교운동이 주장하는 요지는 종교와 영.미국의 배척보다 과학을 존중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과학적 합리성에 입각하여 종교를 허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정백과〈동아일보〉의 사설은 반기독교운동이 반제 반봉건의 민족운동에 원인이 있지만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요 인간의 발전이 합리적 이성적 진보로 나아가기 위한 진리 추구 운동으로 이해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며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렇게 이해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대성이 가지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식하고 과학적인 근대화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려 했고 그 통로로 과학주의가 구국론(救國論)으로 사용되었으며 공산주의를 보편적 논리로, 인간 발전의 필연적 단계로 이해시키려 했던 것이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도 사회주의를 전파하려는 입장에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을 근대화 이념에 관한 이해와 운동의 도구로 이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반기독교운동이 추구하는 합리성을 통하여 인간이 미신에서 벗어나 인류 발전에 참여하는 것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인식은 조선적인 상황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추구하던 운동 방향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3. 敎營學校 盟休運動에 관한 인식
세계기독교학생대회를 계기로 고조된 반기독교운동은 선교사들의 교육선교를 주요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 북경대 총장 채원배(蔡元培)와 국민당의 간부인 왕정위(汪精衛)와 호한민(胡漢民)은 기독교의 주요 선교방법인 교육선교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비판 정신이 성숙되지 못한 미성년자에게 특정한 교육(기독교 교육)을 주입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숙을 방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종교교육 반대론은 교육의 보편적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참여도 유도하여 국민적 혁명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중국 각지에서 초등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을 금지한다는 결의가 뒤따르게 되었다.
교육문제를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운동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국민당은 반(反)제국주의운동을 뚜렷한 혁명 목표로 삼으면서 반제 반봉건운동으로 발전한 반기독교운동을 당(黨)의 사업으로 여기게 되었다. 교육문제를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운동은 1924년 영국계 교회학교인 광주(廣州)의 성삼일(聖三一)학교의 교내 분규를 계기로 뚜렷이 부각되었다. 사회주의 청년단의 교회학교 침투방침에 의하여 일어난 성삼일학교 학생연합회사건은 학생들의 퇴학과 광주 학생들의 동조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국민당의 정책적 개입을 유도하였으며, 그 결과 1925년말에는 외인연보설립학교청구인가변법(外人捐補設立學校請求認可變法)이 제정되었고 전국의 성(省) 교육위원회는 이 법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1920년대 전반의 반기독교운동에서 주장한 종교교육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제국주의자들의 폭력(구강사건, 5.30사건) 사용에 힘입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전국학생연합회는 기독교를 통치계급을 위한 압박 구조로, 교회교육은 제국주의 주구(走狗)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규정하는 반기독교운동 결의안을 통과시켜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각지의 학생연합은 수회교육위원회(收回敎育委員會)를 형성하고 기독교의 옳지 못한 사례를 방학 동안 수집 폭로하고, 교회 학교 내의 혁신운동을 원조하며, 학생들의 사상 활동을 방해하는 체육 활동을 방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교회학교 학생들의 집단적 자퇴를 선동하고 지원하여 교영(敎營)학교의 운영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였으며, 평민학교와 의원 설립사업을 통하여 기독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의 확산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반기독교 주간을 설정하고 반기독교 선전을 강화함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의 반제적(反帝的) 성격과 사업을 통하여 5.30운동을 사회주의적 사상운동으로 유도하고 청년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영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퇴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반기독교운동과 학생운동을 반제민족운동에 접합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이 그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교회학교 교육에 대한 부정적 이해는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제국주의적 기독교 교육의 폐해를 인식시키는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국민 교육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교육을 방지하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교회학교의 설립 인가와 경영 내용을 중국 정부가 강력히 통제 규제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교영학교 동맹휴학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조정한 식민지 조선의 학생맹휴운동은 선교사들의 교육선교만이 아니라 일제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어 식민지 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할 소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맹휴운동은 사회주의운동의 통로였다고 할 것이다. 학교 당국이라는 일제의 말단 행정기관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민족운동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학생맹휴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국민교육 수회운동(收回運動)으로 본격화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종교교육에 대한 중국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보도되어 교육권 수회운동이 무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북경대 총장이던 '레-톤 스추아드'가 중국에 있는 외국선교회 소속의 고등교육기관은 축소하여야 한다는 입장발표를 놓치지 않고 보도하였으며, 장강일대(長江一帶)를 점령한 혁명군은 교회학교에 매주 한 시간씩 손문(孫文)을 기념하는 시간을 갖도록 강제하고 종교교육을 정규교육에서 뺄 것을 요구하였으며, 교영학교는 관할청에 신고하며 신고치 않을 경우 폐교하도록 조치하고, 국민당대회를 통하여 교육문제를 다루려는 의도가 강하였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이렇게 보면 선교사의 종교교육이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감독 요구에 순응하여 가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보도는 기독교 교육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보여준 교육의 자주권 확보[敎育權 收回]에 대응하여 선교사들은 기존의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서 확보하였던 교육기관을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선교회에 조처를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선교회는 '북아메리카외국선교회 중국교육위원회'(이하 중국교육위원회로 표기)를 구성하여 중국에서 관립학교와 교영학교의 상황을 시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기독신보〉에는 중국교육위원회의 교육 시찰 보고서만이 2회 실려 기독교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교육권수회운동(敎育權收回運動)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선교사와 중국인 교역자로 '중국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5개월간 중국 대도시에 있는 36개처의 관공사립학교를 시찰하고 정리한 입장을 보고하였다. 선교사들은 초등교육에 대한 종래의 입장(감동하기 쉬운 아동시기에 종교교육을 시행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선교하려 함)을 유지하나, 교육선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중국정부의 요구에 맞는 교육 여건을 갖추고, 외국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중국교회에 속하게 함으로써 교육권수회운동의 공격에서 교영학교를 유지하려 하였다. 결국 식민지 조선의 개신교는 중국 반기독교운동이 추구하는 교육선교의 폐지는 모면할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였고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지는 민족적 성격이 조선에 소개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막고 종교적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기독교의 교육선교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비판하고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민 교육을 지켜 정신적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면에서 전개되고 있었으나 식민지 조선의 개신교는 교육권 수회운동을 애써 외면하려 하였다.
교육권수회운동에 관한〈동아일보〉기사는 '중국교육위원회'의 위원들이 경성을 경과하여 중국에 간 것을 간략히 보도하고 있을 뿐으로 일반 여론을 크게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주의해서 살펴보면 교육권의 수회운동이 전적으로 무시된 것은 아니다. 식민지 조선의 선교교육을 회수하려는 작업은 아니었으나 식민지 조선의 교육문제가 일반의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취학연령문제, 보통학교 건립문제, 교과서 보급문제, 수업료 문제 등 국민교육의 당면문제가 사회문제로 부상되었다. 이러한 교육의 당면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맹휴가 주요한 사회문제가 되면서 교육 자주화가 구체적인 이해의 통로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의 교육권 수회 진척 기사가 1927년에 이르러 나타나고 〈조선일보〉와〈시대일보〉에 조선인 교원채용과 교육의 공민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즉 국민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반식민지인 중국에서는 국민교육의 수회가 본격적으로 요구되었으나 국민교육을 담당할 주체를 상실한 식민지에서는 조선인을 위한 교육은 조선인이 담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할 것이다.
민족교육을 위한 노력은 구체적으로 극렬한 맹휴가 일어났던 고창군에서 나타났다. 학교평의원회에서는 해(亥)년도 고창군 학교 세입 세출 예산고금 806,939원을 사정하면서 교장의 사택비가 문제시되었다. 교장의 사택비에 많은 예산을 사용하여 학생의 증가에 따른 학교 증설에 충당할 예산이 모자람을 지적하게 된 것이었다. 즉 사택비가 들지 않는 조선인 교장의 채용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또 교원 강습시에 지급되던 숙박료가 일인과 조선인에게 차등 지급된 사실을 보도하여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게 되었다. 보통학교의 입학난에 대한 비판은 근대적 교육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고 교과서 보급과 수업료의 문제도 재원과 시간의 부족에서 오는 일반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 있는 사안(事案)들이다. 그러나 임기가 끝나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인 교장들의 사택비 문제는 식민지 교육이 가지는 일인(日人) 독점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조선인의 직접적인 피해를 이해시키는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즉 동맹휴학에서 문제삼았던 일인 교사들의 횡포가 제도적 인사문제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타났던 것이다. 식민지 교육이 본격적으로 사회문제화되어 조선인 교원의 수, 봉급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 조선민족을 위한 민족적 교육과 국가적 차원의 근대적 교육이 질적인 면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초등교육뿐 아니라 중등교육의 공민화도 문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반(半)식민지인 중국과 완전 식민지인 조선은 교육문제에서 형식적 구조를 달리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최소한이지만 국민적 교육을 담당할 국가기관을 가지고 있던 중국은 교육권수회운동이 국민정신의 자주성 확보를 위한 민족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형식적인 기관마저 상실한 식민지에서는 교육권수회운동이 이해되기에는 자기문제를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였으며, 방법에서도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이 거론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기독교운동에서 추출된 교육권수회운동은 조선에도 영향을 주어 식민지 교육의 문제점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은 교영학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동맹휴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중국의 교영학교에서 일어난 동맹휴학과 유사하나 당시 사회에 나타난 영향력이나 결과는 매우 상이하다. 조선에서는 선교사나 개신교의 경영자측 모두가 학교 승격문제와 선교사들의 인격적인 결함이 중점 과제였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이 교영학교의 종교교육을 문제삼고 그것을 민족교육으로 개혁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음으로 영향의 개연성이 가장 많은 조선에서 중국의 사정을 전혀 무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교영학교의 맹휴가 반제국주의의 구체적 방법으로 사용될 가능성, 즉 제국주의 침략이 직접적인 생활(신앙과 교육)과 연결되어 있으며 새로운 독립운동의 논리인 사회주의를 인식시켜야 할 첫번째 대상으로 학생이 주목되었을 때 학생들의 맹휴는 정밀한 고찰을 요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교영학교의 맹휴를 구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접근하고자 한다.
4. 선교사 배척에 관한 인식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는 기독교 선교에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증대하였으며 교회 건립도 허용되었다. 또 청(淸) 정부에게는 교회 보호가 의무로 주어졌다. 한편 중국과 정치적 관계를 갖지 못하였던 프랑스는 1843년 중국교회의 보교권(保敎權)을 획득하고 중국 선교에 힘을 기울이면서 중국에서의 프랑스의 발언권을 찾으려 하였다. 천주교 선교부는 중국을 압박하여 교회재산의 반환과 기독교 탄압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에 이르러서는 선교사의 자유로운 내지(內地) 활동과 교회 건물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강희·옹정제 시기에 몰수되어 학교·묘지·전답·주거지 등으로 사용되던 천주교당과 그 부속 부동산에 대한 반환이 명문화되었다. 더욱이 선교사의 자의적(恣意的)인 조약문 조작을 통하여 선교사는 토지 조매권(租買權)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몰수되었던 천주교당과 그에 부속된 부동산 반환 요구는 몰수되었던 기간 동안 개인 가옥·공소·회당·회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으로 수많은 중국의 관민(官民)들과 소송을 야기하였다. 또 선교사들은 조약상의 영사재판권을 확대 해석하여 중국인 신도를 치외법권의 대상에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지방 관청과 행정적인 마찰도 빚게 되었다. 나아가 유교적 전통을 무시한 서구 우월적 비타협적 선교는 중국 지식인들의 반감도 사게 되었다. 때문에 기독교의 선교대상은 관(官)과 지식인을 제외한 사회의 하층민들이었으며, 하층민들은 교회 자산(資産)에 기대어 생존을 유지하거나 지방관이나 토호의 억압을 피해 교회의 비호를 받으려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지방관의 권위와 행정력을 초월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기독교로 유교를 대체하려 하였음으로 중국의 지식인과 관리, 그리고 일반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선교사와 중국인들과의 갈등은 현지 조달하는 선교부 재정과, 사치와 향락을 위하여 어떤 일도 하는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에서도 나타났다.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토지 경영(소작)은 중국인 지주를 위협하였으며, 아편무역에도 참여하여 증국인들의 경제와 건강을 침탈하였다.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은 매우 활발하여 1900년에 이르러서는 540만 달러의 토지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제조업과 유통업에도 진출하여 확고한 경제권을 가지고 중국 침탈을 주도하였다.
게다가 수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대민접촉(對民接觸)이 많은 선교사들의 활동은 중국사상을 노예화하고 무법(無法)과 탈법(脫法), 악행을 자행하고 경제적 침탈을 선도하는 '양귀자'(洋鬼子)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중국을 침탈하고 중국인의 존엄성을 훼파하는 양귀자의 대표인 기독교에 대한 저항은 민족적 감정과 결부되어 애국정신으로 무장하고 지속적인 반외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이전 중국에서 활동한 천주교 세력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전초적 역할을 하였으며, 침략 이후에는 수탈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여 중국인들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기독교의 선교를 빙자한 제국주의 침략을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선교사와 교민들은 물론 외국과 연관되는 것은 무조건 반대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무분별한 기독교에 관한 배타적 감정은 무고(無告)한 사람을 희생시키고 서양의 진보적 사물을 맹목적으로 부정하여 진보적 인사(人士)와 반(反)기독교 투쟁을 격리시키는 시대적 오류를 범하였다. 더욱이 모호한 배외주의로 인하여 사람들의 시비 분별력을 잃게 만들었으며, 운동의 방법으로 폭력·방화·살해를 주요 투쟁방법으로 사용하여 반기독교운동을 야만적 폭동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봉건적인 반기독교운동은 제국주의의 침탈을 감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제국주의 침탈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방해하여 중국의 매판계급(買辦階級)과 봉건 지배자들이 제국주의와 연대하여 중국 인민을 착취한다는 사실의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즉 반(反)제국주의를 통한 근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외세운동으로서 반기독교운동은 민족적으로 정의로운 것이었으나 형식적인 면에서 낙후되어 반외세의 고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의 방법상 낙후성은 5.4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방법을 얻게 되었다. 파리평화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의 행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국내 봉건세력이 야합하여 어떻게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고 저지하는가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근대화 세력들은 비서구적인 근대화의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사회주의를 반(反)제국주의적 근대화의 방법론으로 주목하였다. 그 결과 근대화 추진을 위한 과학적 합리적 사회주의 이론의 도입과 대중화가 요구되었고 대중운동을 위한 징검다리로 반기독교운동이 부각되었다. 기독교 세력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비합리주의적 신앙이 반제국주의와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근대화 세력의 타도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다. 반기독교운동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저지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기초 사상 운동으로 기능하였으며 주요 방법론으로 문서활동, 대중계몽운동, 학생들의 동맹휴학운동 등이 등장하여 전통적인 반기독교운동의 폭력성을 불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기독교운동의 폭력성은 다시 부각되었다. 국공합작의 결렬로 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이 폭력화되면서(上海 5.30사건, 漢口 6.11사건, 廣州 6.23사건) 중국의 반기독교운동도 다시 폭력성을 가지게 되었다. 선교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악화하자 선교사들이 살해되고 약탈당하는 사건이 다수 일어났고 영국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의 철거를 명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풍옥상(馮玉祥) 장군이 5.30사건에 대하여 전세계 기독교도에게 호소문을 발표함으로써 위협은 더욱 가중되었다. 풍옥상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만행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교사들을 피살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교회를 폐쇄하고 피난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은 지역적으로도 넓어져서 남(南)중국 중심으로 일어나던 반기독교운동이 동북3성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운동의 방법도 문서활동이나 강연회를 통한 선전뿐만이 아니라 선교사 살해나 교회재산에 대한 방화 등 민간의 격렬한 폭력적 행동이 주요 운동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나아가서 정부에서도 교회의 부속재산을 몰수하거나 세금을 부과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었다. 드디어는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최소한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외국인으로서 누려 왔던 특권을 포기하게 되었고 본국 정부도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이 당하는 인명 피해 기사는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을 고비로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 살인 방화 재산 약탈 등 극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반기독교운동의 폭력화가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면서 중국 정부의 자주성 확보 노력이나 선교사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려는 중국 기독교의 노력도 놓치지 않고 전해졌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 배척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인식은 중국의 자주성 도모보다 선교사의 인적 물적 피해에 주목하고 있었다. 선교사 배척운동에 관한〈기독신보〉의 기사는 외국인 선교사가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아 인질이 되거나 목숨을 잃은 경우를 보도하여 선교사들에 대한 신변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보면 반기독교운동자들을 일괄적으로 토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야만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나던 반기독교운동이 중국의 반제 반봉건 근대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민중운동으로 일어나는 반기독교운동의 말폐적 현상인 살인·방화·약탈 등의 현상만을 극대화하여 반기독교운동을 야만적인고 비인도적인 폭동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나 시베리아 지역 한인(韓人)교회가 피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중국적 기독교의 특성은 전혀 무시하고 종교적 핍박으로만 이해하고 피해를 당한 것은 철저한 순교로 평가하였다. 이에 더하여 선교사들이 중국에 남아 있으면서 선교를 계속하는 것을 죽음을 무릅쓴 신앙의 표본으로 격상시키며 그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중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고 찬양하였다. 특히 풍옥상 군대의 기독교화를 대대적으로 게재하여 중국의 기독교화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였다. 결국 식민지 조선의 개신교는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을 중국적 반제 반봉건 민족운동으로 평가하는 데에 인색하고 마적(馬賊)이나 토비들의 살생과 방화, 재산의 약탈이라는 폭력적 파괴적 운동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자들은 중국의 선교사 배척운동을 본받아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먼저 교회내의 선교사 배척운동을 사회적으로 전파시키려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감리교의 웰취 감독의 망언사건, 구세군사건, 정명여학교사건, 허시모사건, 간호원양성소 등지에서 일어난 맹휴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선교사 배척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나아가서 선교사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에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간섭하려 하였다. 성서공회의 직원해임문제, 마산자치교회와 분쟁중에 있던 맹호은 선교사를 비방하려는 이선이 위자료사건(李善伊慰藉料事件), 신성학교증축청부문제 등을 일으켜 선교사를 배척하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려 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건을 빌미로 민중을 선동하여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선교사 배척운동은 언론의 주요 기사로 부각되어 조선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었다.
1927년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은 상당히 거세게 일어나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의 위협을 피해 인접한 조선으로 피난오는 경우가 많았다. 1927년 5월경에는 200여 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800여 명 정도였으며, 그 가운데 600여 명이 선교사들이었음으로 초기 피난온 선교사들은 알맞는 자리를 찾았을 수도 있으나 이후 다수의 선교사들이 피난옴으로 마땅한 직임을 찾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당시 조선에서도 나타나고 있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종교강연회에 연사로 나가거나 중국 사정을 기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7년 6월 26일 군산기독청년회는 중국에서 피난온 미국 선교사 명락림(明樂林)을 초빙하여 중국 상황과 반기독교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명 선교사는 조선의 신문들이 중국 상황을 보도하는 것은 황금에 매수되어 허위 보도함으로 조선에서 알고 있는 중국의 상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구교(仇敎)운동이 매우 격심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던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반제 민족운동으로서의 반기독교운동을 이해하기가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반기독교운동 양상을 전하는 신문 보도를 사실 무근의 허위라고 강연한 것은 조선의 실정이나 식민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입장을 반영한 태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상을 알고 있던 군산 기자단은 선교사의 발언을 문제삼고 선교사의 사과를 요구하게 되었고 군산 기자단의 강경한 요구에 부딪친 明선교사와 당시 통변을 담당했던 미국 선교사 버드 윌리암(Baird William M. J ; 夫緯林)는 점점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인식하고 전북 기자단의 조사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진의(眞意)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는 변명을 함으로써 잘못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주의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고조되어 철수하게 된 서양 선교사들은 근접한 조선에 피난하여 자신의 사정을 호소함으로 선교지를 이탈하게 된 사정을 이해시키고, 조선 개신교인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강연회는 편파적인 입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은 배척을 받던 선교사의 입장이나 식민지 조선 개신교의 교권적 입장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중국의 입장,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식민지 조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교사들의 경망한 행동이었으며 종교의 옹호를 빙자한 제국주의 침략자의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기자들은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지는 반제 민족운동의 의미를 간과하지 않고 있었으며, 중국혁명이 반제 반봉건의 민주혁명으로 진전되는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피난온 선교사의 눈에는 중국 반기독교운동의 반제성(反帝性)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이었음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보도마저 허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즉 제국주의 침략자의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종교적 충절이라는 명분 하에서 중국 반제 민족혁명을 비난하였던 것이며, 이 점에서 조선의 기자단은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을 비판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주의 선전의 중요한 통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막을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5. 맺음말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사회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열풍은 민족운동의 이념과 운동의 구체적 방법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청년과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하고 사상교육을 전개하여 청년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민족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의 전파가 요구되었으며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기폭제가 필요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면에서 당시 중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기폭제로 사용한 반기독교운동이 조선에는 어떤 의미로 전달되고 있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이나 사상운동, 그리고 선교사 배척운동 등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중국의 신문화운동이 표방한 반종교론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유교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용과학'사상으로 발전하여 과학구국론이 맹위를 떨치었다. 중국의 '용과학적' 사상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진화론에 의거하여 기독교를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이 부분에 관한 분석은 후일을 기약하겠다.
중국에서 교육권수회운동으로 발전한 교영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도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교영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국민교육의 수회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조선의 동맹휴학운동은 국민교육의 획득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공립학교에서도 극렬하게 전개되어 일제의 말단 행정기관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교육문제를 통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투쟁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폐단을 이해하고 민족교육을 확보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직면에서도 선교사 배척운동을 통하여 학생들을 동원하고 사상교육을 강화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또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선교사들을 배척함으로써 일반의 반기독교적 감정을 고무하고 서구 우월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전파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한편 서구 우월주의 비판을 매개로 일제의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풍토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국민들의 전통적인 반기독교 감정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전파시키고 반제 반봉건의 근대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이론적으로도 약하고 사회주의운동의 경험이 없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주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운동 방법을 조선에 원용하였다고 보인다. 사회주의운동의 전개에서 보이는 운동 부분과 방법상의 유사성은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 사회주의의 급속한 전파는 이러한 방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본보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이 전개한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전파시키는 기폭제로서 사회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이용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반기독교운동은 학생운동·사상운동·사회운동 등에서 전면적인 검토가 요구되며 운동방법의 수용이 가지는 성과 여부와 사회주의운동의 방향 전환의 문제도 이러한 면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지는 반제국주의적 의미가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반기독교운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 식민지 조선의 반기독교운동도 반제국주의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은 서구가 아닌 일제의 식민지였으며, 일제는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서구에 저항하는 반기독교운동은 오히려 일제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유리한 계기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 관한 검토도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