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방앗간에서 일하는 흥배형이 우유를 시켜 먹자고 했다. 몽곡리 쪽에 홀스타인 젖소를 키우는 목장이 생겼는데 새벽에 우유를 배달해준다고 아버지께 얘기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집에 우유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새벽이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우유를 유리병에 담아 비닐로 감싸고 고무밴드로 몇 번 감은 우유를 자전거에 싣고 왔다. 딸그랑 딸그랑 유리병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자전거가 도착하면 그 고소한 우유가 먹고 싶어 눈을 부비며 부엌을 서성거렸다.
우유는 두 병이 배달 됐다. 하루는 아버지가 그 중에 한 병을 내게 건네시면서 대접에 반만 담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무심결에 대접에 우유를 붓고나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대접에 있는 우유를 어떻게 반으로 나눌지 방법을 몰랐다. 무작정 쏟아붓지 말고 우유병에서 우유를 반만 따랐어야 했다. 되담으려니 병의 작은 주둥이로 붓다가 줄줄 흘릴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접에 있는 우유를 골똘히 쳐다 보아도 반으로 나눌 궁리가 서질 않았다. 사과를 자르듯 반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자 다른 방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부엌칼로 대접의 우유를 반으로 잘라보았다. 우유는 칼로 잘라지질 않고 금세 다시 붙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 매고 있을 때 아버지가 재촉하며 호통을 치셨다.
“대접에 우유 반만 담아오라넌디 뭐헌다고 이렇게 시간이 걸리넝겨?”
결국 누나가 나와서 부엌칼로 대접의 우유를 반으로 자르고 있는 나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같은 크기의 다른 스뎅 대접을 꺼내더니 반을 붓고 높이를 갈량해서 맞추었다. 나는 왜 그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스뎅 대접에 부엌칼이 닿는 소리가 우유를 뚫고 서걱서걱 거리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우유가 잘라지지 않으니 우유도 나도 우유부단했다.
이렇듯 나는 어려서 아주 모자라고 더딘 애였다. 대접의 우유를 반으로 자르려는 시도 같이 모자란 행동이 겹치면서 점점 뒷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가을 바심이 다 끝나서 한참 늦게 익은 뒷벼는 여간 성가신게 아니어서 나를 그렇게 부른거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보고 다녔고 침을 많이 흘렸다. 침을 얼마나 많이 흘렸던지 복숭아 나무 진액이 좋다며 내게 여러 번 먹였다. 나는 숨을 코로 쉬지 못하고 입으로 쉬는 버릇이 있었다.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으면 마실 온 아줌마들이 늘 그런 나를 놀려댔다.
“쟤는 오디 뜀박질허구 온 늠 마냥 숨을 저렇게 입으루 몰아서 쉰댜?”
“저게 홍역 앓을 때 바람 씨먼 저렇다던디”
“쟤가 홍역을 앓은 기억이 읎넌디 온제 저렇기 딨댜.”
그럼 나는 얼른 코로 숨을 쉬었지만 나도 모르게 다시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홍역을 앓을 때 바람을 맞게 한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나중에 중학교 2학년 때 반에 홍역이 돌았는데 나도 걸렸다. 입으로 숨을 쉬는게 홍역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뒷벼 소리를 들으며 국민학교를 다닐 때 나는 어떤 종류의 운동 시합에도 쉽게 끼질 못했다. 키도 작고 몸이 둔해서 나를 놓고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쪽이 데려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운동장에서 뛰어 놀기보다 책을 읽거나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게 더 좋았다.
내가 뒷벼란 별명에서 벗어 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 때였다. 독서반이었던 나는 소공자, 괴도루팡, 기암성의 비밀 같은 소년 문고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독서반 지도 선생님은 운동회 마스 게임을 지도할 때 사납기로 소문난 이삼철 선생이었다. 그날 과제는 위인전 중에 하나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는 것이었다. 모두 제출 하지는 않고 호명 된 사람만 앞으로 나와 독후감을 읽는 거였다. 그래서 독후감을 써가지 않고 요행으로 걸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운이 없게도 두 번째에 내가 호명 됐다. 무서운 이삼철 선생에게 매 맞는 것이 겁나서 나는 빈 원고지를 들고 나가 펴 놓고 읽는 시늉을 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윤봉길 의사 위인전의 줄거리와 느낀점을 이야기 했다. 중간중간 빈 원고지를 넘기고 시선은 원고지를 읽는 것 처럼 하면서 연기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삼철 선생은 아주 잘 썼다며 그걸 도 글짓기 대회에 보내보자고 원고지를 달라고 하셨다. 빈 원고지를 들켜 버린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삼철 선생은 어떻게 빈 원고지로 독후감을 그렇게 길게 발표 할 수 있었냐며 오히려 나를 칭찬하셨다. 그렇게 긴 분량을 외운거냐고 아주 훌륭하다며 나를 치켜 세우셨다. 다른 애들도 대단하다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 봤다. 나는 그 상황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었으면 기억이 생생한데 그 줄거리와 느낀 점을 왜 원고지에 써서 읽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더이상 뒷벼가 아니었다.
그날 방과후 축구에서 나는 열심히 뛰어 다녔지만 공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고 끝이 났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힘든 일이 있고 대충해도 쉬운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내가 목장 우유를 부엌칼로 자르고 있던 나인지 원고도 없이 독후감을 발표하던 나인지, 나는 내가 늘 걱정스럽기만 하다.
첫댓글 어릴적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게 합니다.
저는 고덕면 용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만초, 고덕중 졸업했습니다.
저는 고덕초 고덕중 졸업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