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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찾기 703호]
마음 비우면 비울수록 채워지는 도리 아시나요
나는 통도사 아랫마을 신평이란 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통도사 불교소년회에 다녔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스님이 오셔서 노래도 가르쳐 주시고 설법도 재미나게 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부처님일대기도 들었지요.
대 서사시와도 같은 부처님일대기를 듣고난 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종족이나 나라에 반드시 흥망성쇠가 있듯이 일체형상이나 유위법에는 영원한 것이 없어 반드시 멸한다고 배웠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의 인생에 일대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그당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출세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가장 큰 충효로 알고 있었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1백년도 채 안되는 찰나인생에서 유위법을 닦는 것은 마치 유령탑을 좇는 것과 같아서 결국 허망한 꿈으로 끝난다는 것을 깨닫고는 출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통도사 자장암에 계시던 허몽초스님이 사람을 시켜 입산을 권유했습니다.
몽초스님은 당시 큰 인격자로 사중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생각해봐도 생사를 초월하는 길이야말로 나의 이상과 합치되는 길인지라 동지달 21일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가 17세되던 해였지요.
절에 들어가 처음에는 불목하니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서 생활하다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하려니 제대로 안됐습니다.
김치담그랴 장담그랴 생소한 일도 많았고 서툴다보니 호통을 당하기 일쑤였지요.
하루는 큰법당에서 재를 지냈는데 국을 모자라게 끓였다고 해서 대중들 앞에서 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또 한번은 공양을 빨리 내오지 않는다고 마당에 ‘개구리패치듯’ 했습니다.
은사스님은 힘도 얼마나 장산지 아프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물이 나더군요.
하여튼 밥 푸고 국 뜨면서 눈물 훔친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스님노릇 안하면 안되나, 다 때려치우고 내려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하지만 출장부가 한 번 뜻을 세웠으면 초지일관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천만번 수모를 당하더라도 참고 이겨내기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천부처 만부처, 천조사 만조사가 다 그런 과정을 거쳐 도를 이뤘다는 생각으로
모든 수모를 견뎌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한 번 꾸지람을 들을 때 한 번 아상이 벗겨지고 한 번 패대기쳐질 때 한번 업장이 소멸되는, 소중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조기교육이 중요하듯 출가도 초기의 엄격하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 것이야 말로 일생 수행의 밑받침이 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요.
그리고 행자시절에 ‘하심(下心)’을 닦게 하려고 일부러 은사스님께서 그렇게 모질게 다그치신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아상과 교만과 우월감 분별심을 소멸하고 하심을 키워야만 뒷날 수행을 잘 할수 있는 것이지요.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나서 <사집>을 배웠는데 치문의 사친장(思親章)을 보면 동산 양개선사가 어머니와 서신왕래한 대목이 나옵니다.
선사는 자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있던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가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정을 못이겨 만나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청을 번번히 거절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선사는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하룻밤 묵게해 달라는 선사의 청에 어머니는 “내 아들도 스님이지만 스님들은 모두 매정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허락을 합니다.
시력이 약해진 어머니는 아들을 못알아 본겁니다.
다음날 세수를 하던 선사는 어머니에게 “보살님, 아들이 스님이라 하니 나한테도 어머니합시다. 어머니, 내 발좀 씻어주소”라고 요청합니다. 어머니는 “아니, 이스님 보소.
다 큰사람이 자기가 씻으면 되지, 누구보고 씻어달라 하노?”하며 다가가더니 우두둑 우두둑 소리나게 발을 몇번 문질렀습니다.
선사는 “아이고, 우리 어머니 손이 이렇게 시원하고 좋구나”하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하직인사를 하고 절에 돌아온 동산선사는 발을 씻어달라던 스님이 당신의 아들임을 밝히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답장에 “일찍이 인연이 있어 모자간이 되었는데 형은 세상을 떠나고 아우도 없어지니 말년에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아 아들에게 보냅니다.
다시 선사는 “금생에 불법을 배워서 내생에는 부처님회상에서 다시 만납시다”는 회신을 합니다. 어머니는 마침내 “정히 그렇다면 반드시 목련존자같은 대도인이 되어 무명생사 윤회에 빠진 나를 제도해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냅니다.
이 ‘세족지회’의 고사에서 한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애착과 정이란 게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도의 근본이 다생에 걸쳐 쌓인 탐(貪)·애(愛)·증(憎)에 있으니 이때문에 성불을 못하고 윤회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교리를 배우다 문득 본질로 바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초반 수행에 미진함을 느껴 금강산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옛부터 금강산은 큰도인들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거니와 특히 금강산 마하연은 내노라하는 수좌들이 한 번씩은 거처갈 정도의 유서깊은 고등선원이었습니다.
출가를 위해 고향집을 등졌듯이 구경각을 위해 나는 다시한번 길을 떠났습니다.
혈혈단신 걸망 하나만 달랑 들고 기약없는 길을 나선 것은, 오고 감이 없는 곳에 도달하기 위함이요, 마음의 고향을 찾기 위함입니다.
양파의 껍질을 한꺼풀씩 벗기면 아무것도 남지않듯 내 관념의 허상을 하나하나 벗겨서 텅 빈 허허공공(虛虛空空)에 이르고자 했지요.먼저 서울 선학원으로 갔습니다.
강석주스님이 원주로 계셨는데 나더러 같이 있자고 하더군요.
얼마있자니 경허스님의 제자로서 선풍을 드날리던 송만공스님이 오셔서 친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물끄러미 쳐다보시다 “참선은 해서 뭐할래?” 물으시길래,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하려고 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싱긋이 웃으시며 “그래 한 번 잘해보게”하셨지요. 수행이 일천한지라 더 이상 물을 말은 없었습니다.
선학원에 얼마있다 금강산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소요산 자재암에 들렀습니다.
염불방에는 나이드신 노스님 서너분이 계셨는데 염불을 아주 신심나게 했습니다.
염불소리에다 ‘쿵쿵’ 북광쇠소리 그리고 폭포소리가 어울려 마치 ‘율려음’을 듣는 듯 했습니다. 신심이 차올라 걸망을 털어서 노스님들 대중공양을 해올렸습니다.
빈털털이가 됐는데도 전혀 걱정되지가 않았습니다.
철원 도피안사 등을 거쳐 목적지를 향했습니다. 때로는 70~80리를 걸어도 절을 찾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강원도에는 사람과 소가 울타리안에 함께 거주하는 곳도 있었는데 그런데서도 잠을 얻어 자곤 했습니다.
한번은 자고 일어나니 신발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오도가도 못하게 됐는데 급한 김에 천조각 등으로 임시조치를 해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가다보니 돌위에 등짐장수가 벗어놓고간 구멍난 헌 신발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치 나더러 신으라는 듯이 버젓이 놓여 있었지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진실되고 절실하게 참구하는 구도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도와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단계에 맞는 스승인연도 나타나며 음식 의복 등 필요한 물자가 어떤 형태로든 주어집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비우면 비울수록 넉넉하게 갖추어지는 도리가 있는데…. 사람, 동물 등 유정물과의 만남이 인연따라 이루어지듯 무정물과의 만남도 다 필요한만큼 시절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내금강 장안사에 도착하니 잣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있고 청아한 개울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환희심이 절로 났어요. 하루를 묵고 마하연에 가니 성철스님 탄허스님, 나의 사형이신 성학스님(봉공스님)이 머물고 계셨습니다.
조주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들고 생사결단에 들어갔습니다. 경전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했는데 왜 조주스님은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狗者 無佛性)고 했을까? 왜 무(無)란 말인가? 의문을 타파하기 위해 참구를 거듭했습니다.
막내뻘이었던 저는 구참수좌들 못지않은 기백으로 정진에 임했지요.
그러나 마음은 잡히지 아니하고 잡념망상만 기승을 부렸습니다. 나중에는 갑갑증마저 생기더군요. 그때가 제일 괴로웠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한노인이 썩은 물이 철철 흐르는 송장을 끌고 태산준령을 넘어가다 나더러 “이놈, 젊은 네놈이 이것을 져라”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어찌나 겁이 나던지 잠이 깼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생사관문을 넘어가려면 장애도 많지만 결국 자신이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강산 4사(四寺)하면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 신계사를 듭니다.
장소를 옮겨 한철 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점사 반야암 선방에 갔습니다.
당시는 왜정시대라 식량통제가 심했습니다.
10명의 수좌가 모인 반야암에 5사람이 한철 날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습니다.
대강사인 김설하스님(김용사)도 늦게 발심해서 참선하러 와 계셨는데 “하루 두끼씩만 먹으면 되지 않느냐?
이 좋은 금강산에 온 김에 다함께 법연이나 짓고가자”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하도 고마워서 10명 모두 정진하기로 합의가 됐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의증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지식을 찾아 떠나기로 했습니다. 오대산에 계시는 방한암 큰스님을 찾아뵙기로 했지요.
눈내린 금강산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고갯마루를 지나다 눈구덩이에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렀습니다.
걸망은 걸망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한참 굴러가다 멈추었는데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바짝 정신이 드는데 입에서 배워보지도 않은 생소한 말과 게송이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답답하기만 하던 의증도 사라지고 마음은 한없이 상쾌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읊은 게송이
천지에 눈쌓이니 의심길이 끊어졌네
청천의 기러기소리 떨어지는 그곳에
목마는 길게 울고 돌사람은 춤을 추네
무심코 한바탕웃음 밝은 달은 휘영청
게송을 읊고나자 모든게 여유로워졌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충만했지요. 죽고 사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곧장 한암스님을 찾아갔어요.
혹시 그릇된 경계나 외도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점검을 받아야 했습니다.
게송을 들으신 한암스님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풀밭을 헤매는 까닭은 견성하기 위한 것인데 자네 성품은 과연 어느곳에 있는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앉고 서고 눕고 하는 행주좌와에 다 있건만 한 물건 갖고 이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고 답했지요.
스님께서 또 물으시기를 “내자성을 밝혀 알 것 같으면 바야흐로 생사를 벗는 것인데 숨떨어져 죽는 그순간에 어떻게 벗겠는가?”하셨습니다.
이에 “본래 입은 것도 없는데 뭘 또 벗을게 있겠습니까?”고 화답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에 “큰스님, 제가 가야할 길을 일러 주십시오”하자 스님께서는 “자네 갈길 스스로 가시게”라고 말씀하셨지요.
오대산 상원사서 한암스님을 한 3년간 모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니 몽초스님이 병환으로 몸져 누우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통도사로 내려가니 노장님이 “견성조사 선지식도 무식한 것보다 유식한 것이 낫다”며 경학공부를 권해요. 큰절에 가서 3년동안 능엄경을 비롯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대교과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럴즈음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포교를 위해서는 유교를 비롯한 다른 학문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 선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스님대상 교육기관이었는데 체제가 우수했습니다.
1년과정을 마치고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오대산에 들어갔습니다.
오대산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나올때 한암 큰스님께서 평소에 늘 가슴에 담고 경책하라고 좌우명을 써 주셨습니다. 중국 중봉선사의 법어입니다.
몇가지 살펴보면
도심(道心)이 견고하면 모름지기 성품을 본다
화두를 의심하되 생쇠를 씹는 것처럼 하라
비록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비방받는 사람은 되지말라
도행을 게을리 말고 음식을 배불리 먹지말라
(출처 - 화산스님 / 아비라카페 알맹이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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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5.6.3
관세음보살_()()()_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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