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전성기를 달리다 녹내장에 걸려 야구를 그만둬야 했던 커비 퍼켓의 경우처럼 신체적 장애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특히 수비나 타격, 모두에서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는 야구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모데카이 브라운의 경우처럼 장애를 장애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된 경우도 있다. 브라운은 세 개의 손가락 밖에 없었던 자신의 오른손에서 타이 콥 조차 쩔쩔매게 만들었던 커브를 탄생시켰다.
브라운이 은퇴한 지 73년 후,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도 버티기 힘든 메이저리그에 브라운보다 더 심하게 오른손을 아예 쓸 수 없으면서도 'Impossible is nothing'의 도전 정신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투수가 나타났다. 우리에겐 '조막손 투수'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짐 애보트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
애보트는 1967년 9월 19일, 미시건 주 사우스필드에서 태어났다. 애보트를 낳은 당시 그의 부모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8살의 나이였다. 태어난 아이의 오른손이 조막손인 것을 보고 많은 걱정을 했던 그의 부모님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애보트를 정성껏 길렀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격려와 함께.
태어나지 얼마 안되서 같은 주 플린트로 이사를 하게 된 애보트의 가족. 어렸을 적, 뭐든지 해보라는 부모님의 격려에 애보트가 시작한 것은 바로 야구였다. 고등학교 시절 퍼펙트게임을 포함하여 0.73의 방어율을 기록한 애보트는 또한 미식축구의 쿼터백으로도 활약, 팀을 주 챔피언쉽까지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36라운드에 지명됐지만 애보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학교로 진학했다.(훗날 왜 이때 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애보트는 '단지 장애인에 대한 흥미로 관심을 가져주는 건 싫었다.'라고 답했다.)대학에 가서도 애보트의 활약은 계속 됐다. 그리고 이 활약에 힘입어 1987년, 매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는 '설리번 상'을, 야구선수로서는 최초로 받았다.
금메달을 목에 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로빈 벤추라, 티노 마르티네스 등의 선수가 포함됐던 미국 야구 대표팀에 애보트도 당당히 선발됐다. 결승전에서 선발투수로 나온 애보트는 일본을 상대로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면서 팀에 금메달을 안겼다.(결승전에서 애보트와 맞대결을 펼친 일본의 선발투수는 훗날 다저스에 입단하게 되는 히데오 노모다.)
금메달을 안고 돌아온 애보트를 향해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리고 가장 나은 조건을 제시했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계약을 받아들였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프로무대에 뛰어들게 된 애보트는 처음에 당연히 마이너리그를 거칠 줄 알았다. 하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너무나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덕 래더는 그를 마이너리그로 보내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에 투입시켰다. 역사상 16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선수가 된 것이다.
데뷔 첫 해, 애보트는 12승 12패에 방어율 3.92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루키가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에 12승을 올린 것은 1976년 디트로이트의 마크 피드리치가 19승을 올린 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그 해 신인상 투표에서 애보트는 5위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애보트가 더 잘던질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글러브조차 낄 수 없는 그의 오른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애보트는 다음해에 200이닝을 넘기면 정상급 선발투수로 성장했다. 그리고 최고의 2년이 다가왔다.
1991, 1992년
1991년은 애보트 생애 최고의 시즌이었다. 그 해 애보트는 34번 선발등판에 나서 18승과 함께 자신의 커리어 최다인 243이닝을 소화했으며 방어율은 2.89에 달했는데, AL에서 그보다 많은 승을 올리고 이닝을 소화한 좌완투수는 마크 랭스턴 한 명 밖에 없었으며, 방어율은 AL 전체 4위이자, 좌완투수들 중에서는 단연 1위였다. 사이영상 투표에서는 3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시즌이 끝나고 연봉조정권을 얻은 그에게 에인절스는 다년 계약을 요구했지만 에이전트였던 스캇 보라스는 1년 계약을 맺을 것을 제안, 결국 다년 계약을 맺는데 실패했다. 에인절스에 남고 싶어했던 애보트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1992년, 애보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부상자 명단에 들어가는 등 고전했지만 리그 5위에 해당하는 2.77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19번의 퀄러티 스타트에서 무려 9패나 당할 정도로 빈약했던 타선지원의 부족은 어쩔수 없었지만(1992년 애보트의 성적은 7승 15패)200이닝을 넘기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프시즌이 되자 에인절스는 애보트를 양키스에 주고 그 대가로 J.T 스노우와 러스 스피링거를 받아왔다. 거액을 요구할 것이 뻔한 스캇 보라스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눈부신 노히트노런
양키스에서의 첫 해, 애보트는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며 부상자 명단에 들어가는 등 매우 고전했다. 거기에 빈약한 타선의 지원은 애보트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하지만 부상에서 돌아오고 난 뒤, 애보트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역사적인 9월 4일이 다가왔다.
클리블랜드와의 홈경기. 전 등판이었던 클리블랜드 원정에서 3.2이닝 7실점으로 무너졌었기에 홈경기이긴 했지만 애보트의 고전은 당연해보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애보트가 9이닝동안 볼넷 5개만 내주며 무안타 완봉승을 따낸 것. 양키스 사상 정규시즌 7호 노히트 노런이었다. 설마설마하던 양키스 관중들은 마지막 타자였던 카를로스 바에르가가 땅볼로 물러나자 일제히 기립해서 인간승리를 일궈낸 애보트를 향해 오랫동안 박수를 쳐주었다.
그 이후로 애보트는 더 이상 전성기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플린트의 조막손 소년, ML을 감동시키다
애보트는 통산 87승 108패, 방어율 4.25라는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보잘 것 없는 기록이었지만 장애를 가지고 공을 던져온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가 쏟아졌다. 거기에 아마추어 시절, 외야수 전향을 포기하고 투수가 되었다는 일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져 더욱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2005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애보트는 5% 미만의 지지율을 얻어 기자단 투표로는 명예의 전당입성이 불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많은 팬들은 여전히 애보트가 베테랑위원회에 의해서 헌액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희망이 100% 없어질 때까지 불가능한 일이란 결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장애는 그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단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One must think that nothing is impossible until there is no hope. Obstacles are not more than a stage we must pass in order to succeed.)
지금도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모든 장애우 분들이 들으면 힘이 날, 애보트의 멋진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