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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9월29일(일요일) 고양시 덕양구 [고양누리길 제 12코스 고양동누리길] 탐방일정
탐방지 : 고양시 덕양구 [고양누리길 제 12코스 고양동누리길]
[제 12코스 고양동누리길
“아빠! 최영 장군이 되고 싶어요!” 꿈과 희망의 길!충신 최영 장군의 아담한 묘와 그 묘로 이어지는 예쁜 숲길을 걸을 수 있다. ‘내 무덤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라는 최영 장군의 예언처럼 묘는 잔디가 없는 적분이었으나 후손의 정성으로 현재는 잔디가 자라나 있다. 장군묘의 고개 하나를 넘으면 고양향교와 중남미문화원이 있고, 누리길 코스는 아니지만 그 아래쪽에 중국 사신들의 숙박장소였던 벽제관지터가 있다. 고양동에서 큰 도로를 건너면 나즈막한 산을 넘어 선유랑마을을 만날 수 있다.
코스거리 및 소요시간
필리핀참전비 ▶ 성령대군사적지 ▶ 최영장군묘 ▶ 고양향교 ▶ 중남미문화박물관 ▶ 메타세콰이어길 ▶ 선유랑체험마을 ▶ 안장고개
총 7.1km, 약 2시간 40분
교통정보
필리핀참전비로 오실 경우 : 일반버스 30, 85, 85-1, 800, 9709, 9710 마을버스 025, 037
안장고개(선유동입구)로 오실 경우 : 일반버스 85, 85-1, 330, 703, 850 마을버스 051, 052번), 053]
탐방코스: [선유동입구 정류장~안장고개~이직묘~해안군이희묘~벽제관지~중남미문화원~고양향교~대자산~최영장군 묘~성령대군묘~필리핀군 참전 기념비~필리핀참전비 정류장]
탐방일 : 2024년09월29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21분 소요)
10:06~10:18 연신내역에서 전철 3호선을 타고 삼송역으로 이동하여 삼송역 6번 출구로 나옴 [12분 소요]
10:18~10:38 삼송역6번출구 정류장에서 선유동입구 정류장으로 가는 053 033번 혹은 790번 버스 승차 대기
10:38~10:54 053 033번 혹은 790번 버스를 타고 삼송역6번출구 정류장에서 선유동입구 정류장으로 이동 [16분, 11개 정류장 이동]
10:54~11:14 선유동입구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안장고개까지 도보로 이동 [20분, 132m 이동]
10:56~경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 51-1 번지에 있는 이직묘로 이동 [2분, 1.0km 이동]
11:14~11:20 이직묘를 사진촬영
[이직묘(李稷墓)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 이직의 묘.
봉분은 사각 묘로 조성하였으며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세운 묘표(墓表)는 훼손된 것을 1975년 새로이 개수한 것이다. 봉분 주변으로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4기 등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 아래 있는 흑요암 재질의 신도비는 1975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1688년(숙종 14)에 대사헌을 지낸 후손 이응협(李應協)이 지은 것이다.
이직(1362~1431)은 본관이 성주(星州)로 1377년(고려 우왕 3) 16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천재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하였고 세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11:20~11:27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 46-1 번지에 있는 해안군이희묘로 이동 [437m 이동]
11:27~11:32 해안군이희묘를 사진촬영
[해안군이희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아들 해안군 이희의 묘.
첫째 부인 진산군부인(晋山郡夫人) 진주 유씨(晋州柳氏) 묘와 둘째 부인 군부인(郡夫人) 거창 신씨(居昌愼氏) 묘와 함께 3기의 묘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화강석의 둘레석으로 둘러싸인 봉분 앞에는 화강석으로 제작한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묘비 앞으로 향로석, 혼유석, 상석, 높이 178cm의 장명등, 높이 193cm의 문인석 2기 등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장명등은 조각된 무늬와 균형미가 뛰어나며 문인석은 조선시대 중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안군(1511~1573)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의(淑儀)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이름은 이희이며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선유동 전주이씨 묘역인 해안군이희 묘역에는 조선 중종의 후궁인 숙원(淑媛) 홍씨의 묘를 비롯하여 중종과 그녀의 아들인 해안군(海安君), 세종의 손자인 귀성군(龜城君) 이준의 묘 등이 있다.]
11:32~12:07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 번지에 있는 벽제관지로 이동 [1.9km 이동]
12:07~12:10 벽제관지를 사진촬영
[조선시대에 경기도 고양시 벽제(현 高陽洞)에 있었던 역관(驛館)인 벽제관의 터. 1965년 2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2:10~12:18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33-15 번지에 있는 중남미문화원으로 이동 [618m 이동]
12:18~13:30 중남미문화원을 관람
[중남미문화원=중남미 지역 문화와 예술을 모아놓은 곳으로, 박물관·미술관·조각공원·종교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엔 중남미 대표 문화인 마야·아즈텍·잉카 시대 유물이 전시돼 있으며 미술관엔 중남미를 대표하는 그림,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조각공원엔 중남미 현대 작품과 함께 산책로, 휴식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운영 시간 : 10:00시~18:00시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09/17 추석 당일 휴무)
가격표
성인 : 8,000원
청소년, 군인 : 6,000원
어린이 : 5,000원
단체(20인 이상) 20% 할인 : 4,000~6,400원
경로(만 65세 이상) 20% 할인 : 6,400원
고양시민 20% 할인 : 4,000~6,400원
국가유공자 20% 할인 : 6,400원
전화번호 : 031-962-7171]
13:30~13:31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33-13 번지에 있는 고양향교로 이동 [93m 이동]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9호인 고양향교(高陽鄕校)는 조선 숙종 때 건립됐다. 향교 옆 담장을 따라 누리길이 이어지고, 향교 뒤에는 내부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포토존도 있다.]
13:31~13:41 고양향교를 탐방
[고양향교 (Goyang Local Confucian School, 高陽鄕校)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지정일 : 1985년 9월 20일
관리단체 : 향교재단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285번길 33-13 (고양동, 고양향교) 지도
최초의 설립연도는 확인되지 않으며, 1428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자리에 향교가 새로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90년에 직제학(直提學) 정회(鄭淮)를 보내 고양향교의 생도인 이옥동(李玉同)·이옥석(李玉石) 형제의 사건을 추국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1535년에는 제사를 지낼 헌관(憲官)으로 당상관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기록들은 고양향교가 조선 전기부터 풍덕(豊德)·장단(長湍)·파주(坡州) 등의 향교와 더불어 도성 인근의 향교로서 조정에서 중시되었음을 보여준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정해지자 향교는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2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건축물은 내삼문(內三門)을 기준으로 전면의 낮은 곳에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고, 후면의 높은 곳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 전사청(典祀廳)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 내삼문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을 보이고 있으나, 명륜당·전사청·외삼문 등은 6·25전쟁 당시 소실되어 새로 세운 것이다. 담장은 1970년에 보수되었고, 명륜당과 전사청은 1975년과 1981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1983년에는 외삼문과 향교 정면의 홍살문을 새로 세워졌고, 1988년에도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해서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5성(五聖)의 위패를 두고 있는데, 정면 3칸·측면 2칸의 크기로 면적은 58.5m²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의 정평주추가 있으며, 기둥은 나무로 만든 둥근기둥이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익공과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무·서무에는 ‘송조 2현(宋朝二賢)’으로 불리는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크기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와 서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오늘날에는 교육은 담당하지 않고 매년 음력 8월 27일에 고양 유림이 주관하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만 행한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3:41~14:08 대자산(210m)을 거쳐서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번지에 있는 최영장군 묘로 이동 [1.2km 이동]
[대자산(大慈山)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과 고양동 경계 지점에 있는 해발 210미터의 산이다. ‘대자’라는 명칭은 성녕대군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부친 태종이 지금의 대자동에 대자사란 절을 짓고 마을 이름을 대자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14:08~14:30 최영장군묘를 사진촬영 후 간식
[최영 장군 묘(崔瑩 將軍 墓)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의 무신 최영의 묘.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지정일 : 1975년 9월 5일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번지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하여 1기의 묘로 만들었다. 사각형의 2단 호석을 두른 사각형 묘로서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묘 앞에는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가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과 문석인 각 한 쌍이 좌우에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사각이며 위편에 최영의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다.
최영은 1316년(충숙왕 3)에 태어나 호군, 대호군을 거쳐 후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고 1388년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좌절된 후 1388년(우왕 14) 이성계에 의해 참형되었다.]
[충정의 상징 최영장군 고양에 묻히다
기자명 윤병열 고양시 일산동구도서관 관장
고양신문 기사 입력 : 2022.11.28. 15:27, 수정 2022.11.28. 16:53
최영장군의 신통력, 산불도 피해가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5년 3월 하순의 일이다. 산불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고양시에서 산림 12㏊를 태우는 큰 산불이 덕양구 대자동 일원에서 발생했다. 그 지역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인 고양향교,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중남미문화원, 성녕대군묘 등 문화시설이 많은 곳이다. 시와 소방, 경찰 당국에서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에 다행히 주불은 세 시간만에 진화됐고 밤 11시경에는 잔불정리까지 마쳤다.
이날 산불진화 과정에서는 하나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최영장군의 신통력이 그것이다. 현장에서 산불진화 작업에 나선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영장군 묘역 쪽으로 향하던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대가 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장군의 묘역만큼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최영장군의 신통력, 영력(靈力)에 대한 일화는 이외에도 많다. 어떤 시민은 최영장군의 넋을 기리는 위령굿을 참관하다가 굿을 주재한 만신(萬神)을 통해 장군의 신기(神氣)를 받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여 그 만신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친에게 받은 유훈 “황금 보기를…”
고양시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하면 고려 말의 충신 최영(崔瑩, 1316~1388)과 임진왜란 3대첩의 영웅 권율(權慄, 1537~1599)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고양시 출신은 아니다. 최영은 지금의 철원 혹은 홍성 출신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있고, 권율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충정과 청렴의 상징인 최영은 충숙왕 3년(1316년) 아버지 최원직과 어머니 봉산 지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를 보면 대대로 문관을 지낸 명문가이며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부 간관을 지낸 올곧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조선전기 성현(成俔, 1439~1504)의 수필집인 『용재총화』에 의하면 그는 최영에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최영은 평생 아버지의 유훈을 가슴속에 새기며 무인으로서는 무서우리만큼 엄격했지만 일상생활과 정치활동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고려 말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도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 고양시 출신도 아닌 최영이 어떻게 고양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나?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최영과 고양시와의 인연은 몇 차례가 있었는데 1365년 여가를 내어 고양 땅(당시의 고봉현)에서 사냥을 했다는 내용이 그 첫 번째이다. 이때 실권자인 신돈(辛旽, ?~1371)은 국가가 어려울 때 한가롭게 사냥이나 즐긴다는 꼬투리를 잡아 대립각을 세우던 최영을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신돈의 실각 후 복직한 이후에는 1382년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우왕으로부터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고양의 땅 300여 결을 하사받지만 백성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세(稅)를 거두지는 않았다. 말년인 1388년에는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 후 주력군에게 패한 뒤 체포되어 고양으로 유배를 온다. 이후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를 당하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현재의 장소(고양시 대자동)에 묻히게 된다. 최영은 이렇게 하여 비로소 고양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는다. 부친의 묘소가 고양시에 자리잡게 된 인연에 대해서는 『고양시사』제2권에서 출신지를 고봉현(고양시)으로 적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구국일념으로 고려와 함께해
최영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공민왕 1년(1352년) 그의 나이 37세 때 조일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정9품에서 정4품으로 특진한 때부터다. 공민왕 3년(1354년)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하나인 장사성의 난을 평정하는데 동원되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다. 이때 최영은 기울어가는 원나라의 실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와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자신감을 더해준다. 이후 여진족, 왜구, 홍건적 등의 수많은 외침과 공민왕을 노린 흥왕사 김용의 난, 기황후가 공민왕을 제거하려고 조장한 덕흥군 사건 등 내부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한다. 이색(李穡, 1328~1396)의 표현대로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전국을 누비며 ‘87전 87승’의 위대한 성과를 올린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은 이처럼 나라를 위해 평생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왕조교체기라는 역사적 운명의 바람 속에서 시대를 거역한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억울한 죽음과 장군신으로 추앙
조선을 건국한 세력 측에서 보자면 최영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대국인 명나라에 대항한, 그래서 자칫 고려의 백성을 전쟁의 도탄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던 대역 죄인이었다. 그럼 백성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권113 「최영 열전」에 당시 백성들의 태도가 나와 있다.
“최영이 죽은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쉬었다. … <중략> … 아이들과 부녀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에 버려지자 행인들은 말에서 내려 조의를 표했다.”
백성들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한 죽음임에 틀림없다. 최영은 죽어서도 백성들의 가슴에 ‘장군신’으로 남아 민간신앙과 무속신앙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진다. 장군이 활약했던 전국 곳곳에는 사당이나 기념물이 세워지고 무속인들을 매개로 백성들은 그의 영력(靈力)에 의지하고 추앙한다.
고양시에는 ‘최영장군 위령굿보존회’가 구성되어 있다. 매년 가을 통일로에서 최영장군 묘로 들어가는 입구인 필리핀군참전비 앞 광장에서 지정자 만신이 주관하는 위령굿이 펼쳐진다. 이 위령굿은 고양시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탄생 700주년이었던 2016년에는 묘역 아래 주차장에 그의 충절과 청렴정신을 기리는 기념비(2017년에 건립)를 세우고 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부친의 유훈인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장군의 업적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숲속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최영장군 묘역에 이른다. 이 길은 고양동누리길(필리핀군참전비~성녕대군사당~최영장군묘~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안장고개, 6.9㎞)의 한 부분으로 사시사철 자연이 주는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걷기 편한 힐링 구간이다. 오솔길을 지나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돌계단을 올라가 묘역에 이르면 먼저 좌측으로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처음엔 최영장군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신앙의 표시로 하나 둘씩 쌓았던 것인데 이제는 일반 참배객들도 소망 쌓기에 동참하고 있다.
묘역은 2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쪽이 부친인 최원직의 묘이고 아래 쪽이 장군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이다. 묘지 앞쪽에는 묘비와 충혼비, 상석, 혼유석 등이 있고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좌측 문인석의 코 부분이 항상 닳아져 있는 것이다. 코를 조금씩 갈아서 미역국에 넣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미신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요즘도 장군의 묘역에는 신기를 보충 받으려는 무속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군인, 도보 여행가들도 자주 찾아와 장군의 충절과 청렴정신을 기리고 있다.]
[정경연의 풍수기행] '웅크린 용' 최영 장군 묘… 조선 망하자 후손 두각
글 :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17.08.17. 00:29 수정 2017.08.17. 10:25
대자산서 현무봉까지 맥 이어져 험한 氣못 털어내 기운순화 안돼
지형의 맥 사람처럼 윤회하는데 노년기 장군묘에 장년기운 남아
고려말기 명장 최영(1316~1388)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에 있다. 주차장에 내려 입구 계단에 들어서면 ‘최영장군묘’라고 쓴 표지석이 보인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표석 후면을 보니 기증한 사람이 전주이씨 종손이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최영을 참형한지 600년이 지났다. 최영의 후손인 동주(철원)최씨들은 조선시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이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실의 견제와 차별이 더 큰 이유다. 당연히 두 집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비록 작은 표지석이지만 이를 보면서 이제 두 집안이 화해를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최영 장군 묘 가는 길은 좁은 협곡이다. 청룡 자락이 백호 자락을 완전히 감싸고돌기 때문에 그 사이가 좁은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를 교쇄라고 한다. ‘자물쇠를 잠그다’의 뜻인데, 대문의 빗장을 위와 아래 것을 서로 어긋나게 가로질러 잠그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협로를 따라 올라가면 둥글게 생긴 작은 공간이 나온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었던 땅인데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이곳으로 주변 골짜기 물들이 다 모인다. 물뿐만 아니라 하늘의 햇볕도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모인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명당은 평탄원만하며 수구는 좁게 관쇄되었다. 이렇게 깊은 골에도 어딘가 기가 모인 땅 즉, 혈이 있다는 뜻이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최영 장군과 부친인 최원직의 묘가 상하로 있다. 두 묘 모두 아래 기단이 사각형인 방형묘다. 전형적인 고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유행되었다. 당시만 해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다는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우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묘지를 그렇게 꾸민 것이다. 이후 땅도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묘지 아래가 둥글게 변했다. 80년대 이전 교과서에는 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무덤’으로 소개하였다. 장군이 처형될 때 “내 평생 탐욕을 가졌으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 했는데 정말 풀이 나지 않았다. 후손들에 의하면 1970년대 후반까지는 실제로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의 주산은 크게 자비롭다는 뜻의 대자산(210m)이다. 한북정맥 호명산(423m)에서 갈라져 나와 앵무봉(621m)과 개명산(560m), 우암산(328.6m)을 거쳐 내려온 맥이다. 대자산에서 현무봉까지 많은 변화를 하면서 험한 기를 털어 내려고 했지만 완전히 순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현무봉에서 묘지로 내려가는 맥도 험한 살기를 가지고 있다. 빗물에 골이 파이고 할퀴며 삭박작용이 진행 중이다. 지형도 사람처럼 유년기·장년기·노년기·준평원을 거치며 윤회를 한다. 최영 장군 묘의 맥은 노년기이지만 아직도 장년기의 기운이 남아있어 생전의 장군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묘 뒤의 입수도두는 생기가 모여 있으므로 순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곳은 풍화작용 중인 돌들이 돌출되어 있다. 기의 탈살이 다 이루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땅은 혈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최영 장군 묘까지 맥이 내려가면서 험한 기운을 한꺼번에 다 떨어버린다. 불과 10m도 안 되는 거리다. 풍수이론의 탈살정혈법(脫殺定穴法)에 딱 맞는 자리다. 그러나 최영 장군 부친 묘는 탈살 전 자리에 썼기 때문에 좋지 않다. 봉분의 잔디 상태를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산들이 가까이 있어 외부 산이 보이지 않는다. 산이 가까이 있으면 혈은 높은 곳에 있는 법이다. 이곳이 명당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전체적인 모습은 용이 또아리를 틀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은산반룡형(隱山蟠龍形)이라고 한다. 최영의 후손들이 조선시대 내내 웅크리고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동주최씨들의 세상 밖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개화사상가로 한국의 근대사상을 성립시킨 최한기, 국학의 대가인 육당 최남선, 국무총리를 역임한 최두선을 비롯해서 무장의 후예답게 장군을 많이 배출하였다.
최영 장군은 본관이 동주(철원)이지만 충남 홍성에서 사헌부 간관을 지낸 아버지 최원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산 설화산 자락 지금의 맹씨행단에서 자랐다. 최영이 16세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라는 말을 남긴다. 오늘날까지 최영 장군이 존경을 받는 가르침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14:30~14:31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69-1 번지에 있는 성령대군묘로 이동 [87m 이동]
14:31~14:36 성령대군묘를 사진촬영
[성령대군묘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동)
이종은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로서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이 되었으며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묘는 대자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장대석 3단을 쌓았으며 주위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묘소의 좌우에는 석호와 석양이 세워져 있고 묘 앞에는 상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신도비는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거북모양의 귀부를 갖추고 검은 수석으로 된 비신을 화강암 우주석에 넣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1418년(태종 18)에 세웠으며 비 전체 높이 300cm, 비신 높이 163cm, 폭 130cm, 두께 25cm의 규모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글씨는 성개가 썼다.]
14:36~15:06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154-8 번지에 있는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로 이동 [1.9km 이동]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
필리핀군 참전기념비는 1974년 국방부에서 건립한 기념물로,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의 자유수호를 위해 참전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 뜻을 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필리핀군은 아시아국 최초로 우리나라를 위해 1000여 명이 넘는 군을 파병해 주었고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해 준 나라이다. 1950년 9월 19일에 참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정전 이후에도 한국의 재건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200평의 대지 위에 기단 높이 4.5m, 비 높이 17m, 동상 높이 3m의 비를 세웠고 부조에 조각된 50명의 모습과 표정은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우리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며 탑신 전면의 부조는 필리핀 고유 민속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비문에는 ‘태양같이 밝고 불타는 정열의 기상을 지닌 삼성좌의 용사들!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피 흘린 488명의 고귀한 영혼 위에 하나님의 가호가 영원하리라’라고 쓰여있다.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는 고양 누리길 11코스 종점이자 12코스 시작점이니 누리길을 거닐면서 그곳에 들려 그들의 명복을 빌고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다. ]
15:06~15:12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를 사진촬영
15:12~15:15 필리핀참전비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8m 이동]
15:15~15:30 필리핀참전비 정류장에서 삼송역8번출구 정류장으로 가는 037, 025, 026, 088 마을버스 승차 대기
15:30~15:41 037, 025, 026, 088 마을버스를 타고 필리핀참전비 정류장에서 삼송역8번출구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9개 정류장 이동]
고양누리길 제 12코스 고양동누리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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