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횡성으로 터를 옮긴 지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든 그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안개가 마당을 감싸고 있었지만, 집 뒤편으로 펼쳐진 작은 텃밭으로 향하는 발걸음만큼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손수 일군 백 평 남짓한 이 땅은 그에게 단순한 밭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그가 인생의 후반부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수행의 도량이었다.
정성껏 가꾼 텃밭에는 파릇파릇한 작물들이 저마다 싱그러운 생기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마당 한편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오갈피나무들이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채 의젓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 녀석들은 횡성으로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홍천에서부터 인연을 맺고 정성껏 옮겨 심은 것들이었다. 처음엔 낯선 땅에 뿌리를 제대로 내릴까 걱정되어 노심초사하기도 했지만, 자연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니 어느새 튼실하게 자라나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흙을 만지고 풀을 뽑으며 작물들과 눈을 맞추는 이 고요한 시간은, 복잡했던 세상사로 인해 엉클어졌던 마음을 차분하게 정화해 주는 가장 소중한 명상의 순간이었다.
흙냄새와 함께 오래전 복잡한 도시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날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렸다. '성공'이라는 목표 하나를 향해 질주하며,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질세라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이라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무거운 짐이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곧 내 인생의 성공이라 여기며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했고, 주변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늘 마음 졸이며 바쁘게 발을 구르곤 했다. 때로는 원치 않는 모임에도 억지로 나가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관계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살아오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지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밀려오는 허무함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 횡성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바라본 지나온 삶은 사뭇 달랐다.
그토록 마음을 태우며 애썼던 일들의 상당 부분은 참으로 부질없고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최근 우연히 접한 한 영상 속의 지혜로운 가르침이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상은 예순 이후의 평안한 삶을 위한 세 가지 지혜를 전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이 편안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 하거나,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의 인생이나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 주려던 그의 과거 행동들도,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집착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누가 묻기 전에는 먼저 조언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는 너그러운 여유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것은 간섭 대신 존중을, 부담 대신 편안함을 선물하는 지혜였다.
두 번째는 사람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바란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해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바람처럼 변하는 법이다. 타인에게 행복의 중심을 두고 기대를 품는 순간, 마음은 늘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그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사랑은 하되 기대는 내려놓을 때 비로소 관계도 가벼워지고, 실망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강조된 것은 혼자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 고요한 정막함을 외로움이나 공허함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사색에 잠기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과 교감하는 이 시간이 가장 큰 위안과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텃밭에서의 고요한 노동을 통해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텃밭 고랑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깊은 호흡을 내쉬자, 횡성의 맑은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억척스럽게 버텨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거칠어진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그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했고, 때로는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기 바빴다. 실수하면 자책했고, 남들보다 뒤처진다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숱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고 여기까지 기어코 걸어온 것만으로도, 수많은 계절을 감내하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참으로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짙게 깔렸던 새벽 안개가 걷히고 아침 햇살이 텃밭 너머로 따스하게 쏟아져 내리며 초록의 생명들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마당 툇마루에 앉아 따뜻한 오갈피차를 한 모금 마시니, 온몸으로 온기가 퍼져나가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평온함으로 가득 찼다. 복잡했던 세상의 걱정과 욕심은 아침 이슬처럼 조용히 사라지고, 눈앞에 펼쳐진 소박하고 정겨운 자연과 그 속에서 함께 숨 쉬는 생명들이 온전히 품에 안겨왔다.
남은 날들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지치거나, 오지 않는 행복을 기다리며 불안해하는 삶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속도를 지키며 소박하게 웃을 수 있는 따뜻한 날들로 채워가면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횡성에서 찾은, 예순 이후 가장 자유롭고 영리하게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 천천히 눈을 감고 잔잔한 바람 소리를 듣는 그의 얼굴에는 깊고 편안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f_ywN6aFpas?si=27d_wNbCk8Rtkx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