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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세 번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살펴볼 복스러운 성도의 덕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의 덕을 가진 자가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앉아서 자기에게 몰려온 군중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의 조국 유다가 로마 제국에 식민지가 되어 서럽게 차별대우받고 살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기들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요 칼과 창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차별대우를 당하고 권력자들에게 수탈당하는 것도 다 힘이 없고 돈이 없고 권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반전의 말씀, 역설의 말씀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교훈은 분명 역설적인 말씀이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교훈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성품과 행동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복스럽다 말씀하신 온유함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온유한 것과 비슷하지만 아닌 것들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온유함은 유약함과 다릅니다. 유약함은 두려워하며 겁이 많아서 늘 뒤로 물러가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지만,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 되어서 무조건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가기도 하지만, 이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유약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 분명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져주는 것이 온유함은 아닙니다.
온유함은 비굴함도 아닙니다. 강한 사람, 가진 사람, 권세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칭찬하며 그에게 비위를 맞춰주는 비굴함은 결코 온유함이 아닙니다. 분명히 온유한 사람은 탄력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고 자존감도 높습니다. 그래서 부자라고, 권력을 쥐고 있다고 무조건 져주지 않습니다. 옳지 않은 일에다가 “예”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함은 비굴함도 아닙니다.
온유함은 자기 연민도 아닙니다. 온유함은 겸손함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열등감을 갖고 바라보는 자기 연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 스스로를 실패한 자로 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불쌍하게 보면서 침체의 늪에 빠져 우울증, 자기 학대의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즐기지 못하고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겸손합니다. 하지만 자유함과 만족감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로움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온유함은 자기 파괴적인 자기 비하, 자기 연민과도 다릅니다.
이 ‘온유하다’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양 극단의 중간 상태 곧 중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쉽게 분노하는 성질과 성질을 전혀 내지 않는 그 중간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은 이 온유를 “사나움과 맹렬함과 잔인함의 반대말”로 생각했습니다. 플루타크라는 희랍 작가는 ‘엄격함의 반댓말’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 ‘온유하다, 온유함’이라는 헬라어 단어 ‘프라오스’ 혹은 ‘프 라오테스’가 ‘관용’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기도 하고 ‘겸손’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혹은 ‘분노라는 개념의 반대말’로도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온유하다는 단어의 어휘적인 배경을 살펴 보았는데, 또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 단어를 영적인 의미로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팔복은 하나님 백성의 내적 심령의 상태요 삶의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나면서 갖는 천성적인 자연적 성품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기서 거듭난 하나님 백성의 영혼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천성적으로 성품이 부드럽고 착하고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세상 사람의 성품을 가리켜 온유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내면 인격과 삶의 자세가 달라진 하나님 백성의 내면의 특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온유한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까요? 성경을 통하여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먼저,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방과 멸시를 잘 참아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세에게서 그 온유함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2:3 말씀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나브’인데, 이 단어의 70인역 번역 성경에서 이 단어를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5 말씀에서 나오는 동일 단어 ‘프라오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과 같은 의미의 아름다운 덕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전후 맥락을 보면, 모세가 마침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은 일로 인하여 모세의 누님인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미리암은 그 일을 기화로 모세만 하나님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도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갖고 모세를 향하여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일을 당하여도 묵묵히 비난을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묵묵히 자기 변호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섭니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과 모세를 불러내어 미리암을 심히 책망하고 벌을 내립니다. 그녀는 즉시 문병병자가 되어 그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벌을 당하고 진영 밖에서 일주일을 따로 지내는 수치를 견뎌야 했습니다.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방과 멸시를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당하게 쏟아지는 인신공격도 묵묵히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적들이 쏟아놓는 비방과 멸시와 수치를 묵묵히 견디신 것과 같이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던져지는 부당한 대우와 공격과 멸시를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과 손해와 비방에 대하여는 묵묵히 참아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의함과 배신이나 사회적 악에 대하여는 참지 않고 분노하는 자가 온유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기도할 때에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변질되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춤추며 경배할 때에 내려와서 그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십자가 돌판을 깨뜨려 산 아래로 던져버린 일이 그러한 분노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성전 안에서 장사하면서 돈벌이 사업하면서 성전의 거룩함을 범하는 장사치들에게 크게 분노하여 채찍으로 소와 양들을 내쫓고 동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도 그렇습니다. 온유하신 주님께서 크게 분노하신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대한 비방과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정당한 정도로, 적절한 기한을 가지고, 분노함으로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자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의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개인적인 비방과 멸시를 참아내며, 마땅히 분노해야 할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의 순간에는 노할 줄 아는 절제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점에서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과 사회적 불의 앞에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닥쳐오는 쥐꼬리만한 비방이나 충고 앞에서는 이성을 잃고 분노를 쏟아내며 자기 절제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려서 분노할 때는 분노하고 참아야 할 때 잘 참는 온유한 자가 됩시다.
또한 온유한 자는 곤욕스러운 상황과 어려운 처지 속에서 하나님께 맡기며 묵묵히 견디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 중 다윗의 시편 37:11 말씀을 인용하여 새롭게 전한 것입니다. 그 전후 맥락의 말씀을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37:1 이하에 이르기를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 37:1~11)
이 말씀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한다고 말씀했는데, 당시 다윗은 많은 불의한 대적들로 에워 싸여 있었습니다. 상황은 너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묵묵히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처럼 그렇게 불의한 자들과 곤고한 상황 속에서도 원망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리는 자가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은 상황에 처하거나 원치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는 상황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불만을 품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다윗이 참으로 온유한 자인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감동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다윗의 나이가 노년으로 넘어갈 때쯤 약 60세쯤의 일입니다. 그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다윗이 급박하게 예루살렘 성을 나와 가족들과 신하들과 얼마 안되는 병사와 이방인 용병들과 함께 피난길을 갑니다. 다윗은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머리칼을 풀어 헤친 채 울면서 맨발로 길을 내려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성 가는 도중에 바후림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다윗과 일행이 그 동네 곁을 지나가자 동네에서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다윗을 향하여 온갖 악담을 퍼붓고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다윗의 장군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말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사무엘하 16:10~12)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의 난을 겪으면서, 이전에 자기가 범한 죄악을 생각합니다. 특히 그가 밧세바를 취하였고 그 남편 우리아에게 행한 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쓰라린 아픔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기막힌 일을 겪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 생각하면서 자기가 받아야 할 징계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방하는 시므이가 다윗이 범치 않을 일까지 만들어서 비방하며 저주할지라도 다윗은 항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자기가 항변한다면 자기 행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적 징벌에 대하여 따지는 것과 같이 느껴져서 다윗은 조용히 그 모든 일들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온유한 자는 이처럼 자기에게 닥쳐온 불운과 불행, 재앙과 시련 앞에서 불평 원망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맡깁니다.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실을 밝혀줄 것을 기다립니다. 자기가 일부러 자기의 의로움을 밝히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진실을 드러내 주시며 머리를 다시 들게 하시고 자기 편에 서서 주께서 자기를 도와주시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도 다윗처럼 그렇게 온유한 자가 됩시다. 우리에게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 곁에 둔 사람들을 원망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를 알아달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려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나셔서 변증해주시고 머리를 들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으로 족하며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면서 선을 힘써 행하면, 때가 이르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순종함으로 받는 자입니다.
온유함은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다 가져야 할 덕성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전도하여 보냈는데, 어떤 성읍은 전도를 잘 받았으나 어떤 성읍들은 교만하여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편은 기쁘면서 한편은 마음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시 초대의 말씀을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11:28 이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백성의 선생으로 자처했지만, 그들은 백성들에게 가혹한 율법과 인간의 무거운 규정의 짐들을 지웠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 짐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매어준 장로의 유전들의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너무 힘들어서 쓰러져 죽게 될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교사로서 오셔서 그들에게 짐을 가볍게 해줍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지워준 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쉽고 짐도 가벼워서 즐거이 행할진대 마음이 평안해지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함으로 그 제자들을 가르치는 영혼의 교사입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인 우리를 심히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약하여 쓰러지면 함께 머물러 주시고 기다려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다시 힘이 나서 배움의 길을 계속 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런 스승을 모신 제자들인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 배움에 게을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스승은 조금난 잘못하면 얼마나 무섭게 책망합니까? 자기 뜻에 안 맞으면 당장 출교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다시 품고 다 도망쳐버린 제자들도 용서하고 품고 격려해서 다시 쓰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좋으신 스승을 모신 우리는 주님을 닮아 온유하며 겸손하며 그 가르침을 배우기를 힘씁시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야고보서 1:21~22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혹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일지라도 우리는 그 말씀을 고맙게 여기고 우리의 영혼의 보약으로 알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과 갓 선지자가 찾아와 책망의 말씀을 전하면 언제나 순종하였습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딱 접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백 퍼센트 옳다고 보고 받아들여 자기 마음에 두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진대, 이 사람은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가르침에 늘 마음을 열고 잘 듣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귀를 열어 두고 사람들과 자연 세계와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도 잘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평생 배워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온유하지 않으면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마음이 딱딱해져서 더 이상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배우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평생을 배우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항상 주변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훌륭하고 낫게 여겨서 잘 귀담아 듣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을 알아가고 생각을 통하여 가다듬고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걍팍한 사람,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은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가 발전합니다.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스승, 친구, 동료, 하나님의 말씀, 어린아이들까지도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 모두 온유한 자가 되어 세월이 갈수록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더욱 온전해가고 성숙해가는 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 잘 길들여진 자입니다.
온유하다는 ‘프라오스’는 가축을 길들인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쟁기질하는 소가 주인 말에 잘 순종합니다. 잘 길들여져서 그러합니다. 그곳이 온유하다는 용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도 하나님께 잘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다스림을 받아 온전히 맞춰 사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 언제나 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언제나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명하실 때에 언제나 순종하며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기꺼이 자기 생각을 접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알면 언제나 자기의 사사로운 소원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그러하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대표로서 우리의 구주,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배움의 길을 걸어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움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으며 육체의 한계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길러가는 일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명은 그에게 참으로 지기 힘든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 우리 구주께서는 감람산에서 통곡하며 울면서 기도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세 번이나 거듭 하셨습니다. 거의 이 기도를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주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드리는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온유한 자의 최고의 모델입니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히 합한 자, 그가 쓰시기에 너무나 편한 자, 하나도 걸리는 것 없고 부딪히는 일도 없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일할 수 있는 자가 된다면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 인간 자신의 교육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 온유한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온유의 사람들을 보면 다 많은 고난 속에 연단받은 사람들입니다. 욥,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다 고난 속에 연단받아 온유한 사람으로 성숙해진 사람들입니다.
야곱을 예로 들면, 그는 연단의 세월을 오래 겪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이십년 동안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연단받았으며, 거짓말쟁이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으로부터 연단받았으며, 자기 곁에 있는 두 명의 자매 아내 라헬과 레아의 질투와 연정과 두 첩까지 얻어 가정 안에서 겪는 고난이 말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의 죽음의 위협과 맞닥뜨려야 하는 시련도 겪었고, 자기 가족 전체가 세겜에서 멸족될 위기도 만났고, 자기 아들 요셉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큰 고통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늘 바라보며 살았고 겸손해졌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온유의 사람으로 달라졌습니다.
요셉 역시 어린 시절 형들의 배신을 당하여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온갖 고생을 하고 감옥살이를 수년간 하는 등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사울 왕에게 쫓기는 삶을 살면서 깨어지고 부서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만 신뢰하는 온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하여 고난의 틀에다 우리를 종종 집어넣곤 합니다. 이 고난을 잘 받아 믿음으로 응전해갈 때에 우리는 온유한 사람으로 점점 빚어져갈 것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 자기를 자주 내어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온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이할 만큼 존귀한 이 하늘나라 시민의 성품인 온유함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에 자연스럽게 맺는 열매인 것을 알고 성령님께 늘 온유의 열매를 맺도록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9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우리에게 초대하고 있으니, 우리의 구주요 스승인 예수님께 늘 가까이 하며 그를 본받고자 힘씁시다.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우리도 주님을 늘 바라봅시다. 자주 바라보면 바라보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4)
이라고 사도가 권면한 대로, 주님의 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기를 늘 소망합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성령께 늘 간구합시다. 그리할진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만지심을 통하여, 주님을 늘 본받고자 사모함을 인하여, 믿음의 선배들의 행실을 묵상함을 통하여 우리도 점점 온유함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온유한 사람은 어떠한 복을 받을까요? 예수님께서 여기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엄청 큰 논밭을 얻거나 넓은 대지를 얻어 맨션을 짓게 된다거나 하는 뜻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다만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상의 삶의 처소인 가나안 땅을 받아 누림을 가리킨데, 실제로 그들은 땅을 빼앗긴 때가 많아서 이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로마를 뒤집어엎고 자기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주님은 칼 대신에 온유함으로 무장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물리치고 칼을 들고 로마와 싸웠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주후 70년에, 그리고 주후 132년 바 코흐바를 중심으로 또 다시 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각각 완전한 패배로 끝나고 그들은 거의 죽고 남은 자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서 이천년을 떠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을 듣고 복음 진리를 온유함으로 전한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교를 당하면서 온유함으로 도를 전파하였던 그리스도의 나라, 새 이스라엘의 왕국은 오늘날까지 모든 나라와 인종과 언어와 부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나라의 완성은 장차 우리 구주께서 영원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그 때에 완성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온유한 자만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자기 고집과 인간의 판단을 내려놓고서 온유하신 왕,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당당히 고백하는 자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만 차지하는 것이 온유한 자의 축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땅의 축복은 이 세상에서도 누리게 됩니다. 물론 현실적인 땅을 소유한다는 것도 있지만, 심령과 마음에서 드넓은 부요함을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6:10 말씀에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늘 마음이 쪼들린 채 불평 불만에 가득하고 짜증이 가득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 온유한 자는 초가집에 살더라도 만족하며 늘 기뻐하며 평안하며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몇 평 안되는 정원을 가꾸며 그것만이 자기 정원이라 생각합니다. 온유한 자는 눈을 들어 산을 보고 저 드넓은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며 바람을 느끼며 저 멀리 바다를 보며 다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만끽합니다. 고린도전서 3:21 이하에서 사도는 그 점을 이렇게 갈파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린도전서 3;21~23)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하여 누립니다. 그것도 시편 37편 11절 말씀처럼 풍부한 화평 중에 즐거워하면서 누립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벌써 놀라운 평화와 기쁨과 풍부한 만족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칼과 창과 재물과 권력을 가져야 힘이 있고 행복할 줄 알지만,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 조건은 마음과 덕성에 있고 그 근본적인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평안합니다. 혼자 있어도 평안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당하여도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공격과 무고한 일을 겪어도 조용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맡기며 축복하며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원망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의 진가를 알고 그를 사랑하며 주변에 모여들고 존경과 사랑을 나눕니다. 이런 사람은 점점 부요해져서 가진 것이 없다고 비웃을지라도 그 사람 안에 천국의 기쁨, 베푸는 사랑,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선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바로 천국은 이런 사람의 몫입니다. 그리고 바로 온유한 사람이 이 땅에서 그러한 천국의 행복을 사람들에게 온 몸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할 때에 풍부한 하늘의 평화가 심령에 넘칠 것이며 영원한 천국을 상속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천국의 행복을 맛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며 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