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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헌에 표현되어진 백두산
오타 키구오(太田喜久雄)
1936년 (일본산악회 제31년 제1호)
1.
이번 겨울 교토대학 원정대의 기록적인 등반에 있어서 동서 양쪽 조일신문이 시끌벅적하게 취재하였던 결과, 조선만주 국경에 솟아오른 백두산의 존재가 극명하게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백두산 또는 장백산은 우리 일본 국정교과서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조선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또는 특수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산의 존재를 망각하였고, 말하자면 이름은 알고 있으나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 현재의 실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산은 신흥 만죽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 황족의 조상, 청나라의 발상지인 영산의 하나로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인 점도 일본 만주 양국관계의 극히 밀접하게 연결되어져 있는 오늘날에 시의적으로 흥미가 있는 문제라 하겠다. 이 조선 만주 국경의 최고봉은 일체여하를 떠나서 매우 의미를 지닌 존재의 산이겠지만, 고래로 중국인들은 대체 이 산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등의 문제에서 중국 문헌에 표현되어졌던 백두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고찰을 시도하여 보았다.
이미 백두산에 관한 문헌은 재서방(梓書房)에서 발행되어진 교토대학 원정대의 보고서 권말에 열거되어져 있고, 지질광물학상의 문헌은 와타나베다케오(渡邊武男), 나가사와요시오(長澤佳雄) 두사람이 『조선함북의 산들, 관모봉 궤산봉 및 백두산』(산악. 제 27권 제2호), 야마나리(山成不二麿)의 『백두산』(지학잡지 제40년), 와타나베다케오(渡邊武男)의 『백두화산』(화산, 2권 제1호) 후미에 열거되어져 있으며, 또한 조선광업회에서 다떼이시이와오(立石巖)가 1933년 10월에 『조선에 있어서 지질 및 광물의 조사연혁 문헌』을 편찬하였기에 특히 이 방면에 흥미가 있는 독자는 참조하여 주시기 바란다.
2.
우선 첫 번째로 백두산이라는 산이름의 유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백두산은 조선에서 불리워지는 호칭이었으며 현재 중국인들은 그곳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북새기략(北塞記略)』의 ‘백두산고’에 ‘백두산. 무산부 서쪽 삼백육리에 있다. 고래로 불함산이라 하였다. 중국인들은 장백이라 하였다. 동방 사람들은 백두라 하였다. 모든 산들이 극히 드높았다.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었고, 그 이름의 이유였다.’ 라고 기재하여 이 점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백두산은 무산부서쪽 삼백오십리에 있다’ 『해좌지도설(海左地圖說』에 ‘백두산은 그머리를 서북쪽에서 들어올렸다. 그 직하는 대단히 황망하였다. 지극히높은 봉우리들이 일어섰고 그 최고봉은 높이를 알 수 없다. 산이 쌓인 곳에 호수가 있다. 마치 사람의 숨구멍 같았다. 주위는 가히 이삼백리에 이른다. 물 색깔은 매우 검어서 측량이 불가능하다. 사월에도 눈과 얼음이 쌓여있다. 바라볼수록 막막한 것이 마치 은빛 바다 같았다. 산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면 백자를 뒤집어 놓은 자태였고 또 마침내 산봉우리를 올랐다. 사방 둘레로는 미묘한 요철이 있었으며 그 자태가 옹기토 입구마냥 위를 향하였고 밖은 흰색이었고 안쪽은 붉은색이었다. 사면의 벽들이 서 있었고 또한 붉은색 풀칠을 하여 놓은 것 같았다. 그 북쪽으로 조금 먼 거리에 물이 넘쳐흘러 폭포를 이룬다. 즉 흑룡강의 원류이다. 척추를 이루는 낙하는 3-4리 정도. 여기에서 역시 압록의 원류를 이룬다.’
『영조조보감(英祖朝寶鑑)』에는 ‘정해년 가을 7월에 좌의정 한익모가 말하기를 백두산이라 함은 즉 우리나라의 조종산(朝宗山)이다. 북쪽을 이루면서 또한 우리나라 조선의 발상지이다. 북악으로 받들어 모신다. 이번에도 또 백두산에 모시게 되었다. 상하의 대신들이 모여서 상의한 결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기에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은 그 발맥이 모두 백두산이고 이 산에서 흘러나왔으며 또한 열성시조들의 발상지였기에 나라를 세운지 어언 사백년이 되었다. 그 모든 발맥은 백두산이다. 아직도 이렇게 받들어 제사를 모신다. 공경함으로 우리 궁궐 내에서도 집전을 한다. 즉 백산에 대한 제사이다. 신하들이 아무리 논의하여도 소용이 없다. 윗대를 따라야 한다. 함경도 도백에게 명하여서 갑산부 팔십리 부근의 장소를 택지하여 운룡보 북망덕평에 사당을 세우고 백두산에 대한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제50권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조에 ‘백두산, 즉 장백산이다. 도호부에서 7-8일 걸리는 서쪽에 있다. 산은 전체적으로 삼층으로 이루어졌다. 높이는 약 2백리. 폭은 약 일천리이다. 그 꼭대기에 호수가 있다. 주위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이 된다. 북쪽으로 송화강을 이룬다. 즉 혼동강(混同江)이다. 동북방으로 흘러가서 소하강(蘇下江)이 된다. 소위 속평강(速平江)이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된다. 대명일통지에 의하면 동쪽으로 흘러가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속평강인가 의심된다.’라고 하여 백두산의 명칭을 인용하고 대한제국 광무제 시절 연간에 편집되어진 한국 북계의 경계지역 답사서인 『북여요선(北輿要選)』에는 상편에서 백두고적고, 백두구강고, 백두도본고, 백두비기고, 하편에는 탐계공문고, 감계공문고, 찰계공문고, 사계공문고 등 조선측의 문헌에 풍부하게 백두산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장백산의 만주쪽 명칭은 과륵민산연아림(果勒敏珊延阿林)이다. 果勒敏은 장(長) 珊延은 백(白) 阿林은 산(山)을 의미한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 즉 과륵민산연아림이다. 길림성 동쪽에 있다. 약간 꺾여서 남쪽으로 향한다. 폭은 약 일천리정도. 동쪽에는 자령고탑이 있다. 서쪽으로는 봉천부에 이르고 여러 산들은 이곳에서 그 뿌리가 시작된다. 산 정상에는 호수가 있다. 압록 혼동 도문 세강의 시원이라 이야기된다. 옛날부터 불함산이라 불리었으며 역시 또 태백산으로도, 또한 그리고 백산이라고도 불리웠다.’
『길림통지(吉林通志)』에 ‘장백산, 국어로는 과륵민산연아림이다. 길림성 동남쪽 육백리에 있다. 폭은 약 일천리이다. 본래 한나라 시절에는 토군경(菟郡境)이라 하였다. 위나라 때는 개마대산이라 하였고 후위 시절에는 태백산이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도태(徒太), 태황(太皇)이라 하였는데 모두 같은 산이다. 그 이름이 장백산이 된 것은 금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한 백산이라고도 하였으며 원나라 시절 개원로, 옛 회녕군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명대 삼만위(동북지역 위소衞所 가운데 한 곳)에서 동북 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동쪽으로는 영고탑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개봉부에 이른다. 여러 산들이 이곳에서 그 뿌리가 시작된다. 산의 높이는 약 일백리이고 산정에는 호수가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남쪽 제일봉 약간 아래쪽에 문이 있다. 호수는 지극히 아득하고 고요하다. 폭포는 약 오십장을 이룬다. 주위는 약 3-4십리. 산의 사방에는 약 백개의 샘이 치솟는다. 서남쪽으로 흘러들어 바다에 이르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르고, 동남방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을 도문강이라 이른다. 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을 혼동강이라 이른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장백산은 길림성 오랍성속(烏拉城束)의 남쪽에 있다. 폭은 일천여리. 동쪽으로는 영고탑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봉천부에 이른다. 뭍 산들은 이 산에서 발흥한다. 정상에는 호수가 있고 압록 혼동 애호(愛滹) 세 강의 시원이다. 고래로 불함산이라 하였고, 또한 태백산이라 하였다. 또한 백산이라고도 하였으며 도태산이라고도 하였고, 태말산이라고도 하였다.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그 시원이 금나라였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장백산이라고도, 또한 그 외 명칭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로서는 이 산의 형태에 따른 것으로서, 백색이라 이야기되는 느낌이 강하였기에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어졌던 그 느낌이었을 것이다. 산 이름에 대하여는 종래로 많은 변천이 있어왔으며 그 대부분은 백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오가와타쿠지(小川琢治)박사에 의하면 백두산은 그 높은 곳에 위치한 눈의 경계선에 올라가지 못하였기에 고래로부터 백산의 이름이 있었으며, 이 산을 구성하는 용암의 풍화된 백색 부스러기들이 주변의 검은 흑색의 침엽수림에 반사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3.
그러나 이 산이 최초로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대체 어느때 였을까. 말하자면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대황의 땅에 산이 있다. 이름이 불함이다. 숙신의 나라에 있다’라고 하였고, 『진서(晋書)』 ‘동이전’에 ‘숙신씨 일명 파루, 불함산 북쪽에 있다. 부여에서 육십일 거리이다.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있으며, 북쪽 끝은 약수(弱水)에 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매우 넓어 사방 수 천리에 뻗쳐 있다.’ 라는 기사가 있으며, 특히 『통전(通典)』에는 ‘읍루는 즉 옛적 숙신이다. 그 나라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태평현우기(太平寰宇記)』에는 ‘읍루국은 불함산 북쪽에 있다. 부여에서 북쪽으로 천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길림통지(吉林通志)』 『성경통지(盛京通志)』의 저자는 모두 다 하나같이 불함산을 백두산이라 칭하고 있지만, 중국 변강에서 활약하였던 숙신민족의 정확한 지역이 어디인가에 대하여서는 의문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서는 당연히 불함산이 백두산에 해당하는지 아니한지에 대하여도 단정하기 곤란한 점이 따른다. 그러함에도 불함산은 『태평어람(太平御覽)』, 『한원(翰苑)』의 주석, 『사기정의(史記正義)』 및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의 주석을 인용하면 ‘숙신국기(肅愼國記)’의 숙신의 경계에 관한 문헌에 대하여는 특별히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겠다. 『산해경(山海經)』의 불함산은 지리상의 지식에 기반하게 된다면 이야기하였듯이 이 글의 성질상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 곤란한 점이 있다. 『진서(晋書)』의 불함산은 산해경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것을 읍루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편저자의 엉터리 편찬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불함산은 불명의 산이 되어진다. 『북새기략(北塞記略)』의 ‘백두산고’에는 ‘불함산을 포함하는 동쪽 역사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말갈을 막고 있다 하였으니 그 모두가 불함산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유추하면 결국은 우리 국가 경내에 있어야 한다. 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산이 바로 불함산이다. 지금까지 백두산을 불함산으로 이르는 자들은 대체 어느 근거였기에.’ 라고 하면서 불함산의 백두산이라는 근거의 박약함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만주 지방에 있어서 백두산은 가장 최고로 유명한 산이었기에 혹은 그에 해당하는 말을 붙임에도 또한 부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산에 관하여 약간이라도 상세한 기사로 문헌상 발표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은 『위서(魏書)』의 ‘도태산(徒太山)’ 『북사(北史)』의 ‘종태산(從太山)’이다. 『위서(魏書)』 제 100권 ‘물길국열전’ 조에 ‘물길국 남쪽에 도태산이 있다. 위서에서는 태백이라 언급하였다. 호랑이 표범 곰 늑대가 있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 위에서 오줌을 눟지 않는다. 좁은 길로만 다닌다. 모든 만물이 풍성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또한 『북사(北史)』 제94권 ‘물길국열전’조에 ‘물길국에는 종태산이 있다. 화황과 태황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받든다. 사람들은 산 위에서 오줌을 눟지 않는다. 좁은 길로만 다닌다. 모든 만물이 풍성하였다. 산 위에는 곰과 표범과 호랑이 늑대가 있다.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 역시 살생을 하지 않는다.’
결국 위서에는 도태산, 북사에는 종태산이라 기록되어 있었고, 『신당서(新唐書)』 ‘말갈전’에 ‘말갈은 숙신땅에 살았다. 속말갈이 가장 남쪽에 살았고, 태백산 아래였다. 또 말하기를 도태산이라 하였다. 역시 고려에 접하고 있다.’ 라고 하였고 또 『수서(隋書)』에는 도태산이라 기록하여 놓았기에 조심스럽지만 북사의 종태산은 도태산의 오기라고 보여진다.
장백산의 이름이 처음으로 인용되어진 글은 앞의 『길림통지(吉林通志)』에 기재되어져 있는 것과 같았고 또한 『거란국지(契丹國志)』, 『금사(金史)』에 등장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장백산, 령산 동남쪽 일천리에 있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르며 그 산 속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다’ 『금사(金史)』에 ‘여진땅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또한 흑룡강이라 한다. 소위 말하는 백산흑수가 이것이다. 금나라 시조 소조(昭祖) 요무(耀武)가 백산에 도착하였다. 솔빈이 다스리는 땅에 들었다.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주변에 제사를 모셨다. 회령부 회령현에 장백산이 있다. 대정12년(1180년) 유사가 말하기를 장백산에는 흥왕지지의 터가 있다. 예를 갖추어서 존숭하여야 한다. 토의한 결과 작위를 내리고 사당을 짖기로 하였다. 12월 예부의 상학사원 진에게 교지를 짖게 하였다.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였고, 즉시 그 산의 북쪽에 사당을 지어 바쳤다’
‘대정17년(1185년) 신하 진에게 함평부 1천6백여호를 다스리게 하였다. 스스로 모두 장백산에 모여들게 하였으며 석형반심하는 여진인이었다. 수시로 사냥에 나섰으며 이곳에 사는 이들이 모두 그러하였다. 늑돈부라 하였고, 역시 우리의 국력이 흥하였으며 군사력이 더욱 강하여졌다. 그곳에 본부를 두었다. 지금은 을로정이고 모두 그에 따랐다. 장종태화 2년, 유사를 장백산에 파견하였다. 시조인 소조 계열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조요무가 장백산에 도착하였다. 그곳 장백산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산과 이어지는 포미하 강가였다. 강은 늑민하로 이어진다. 소조요무는 청령에 있는 백산에 도착하였고 사로가 보좌하였다.’
이 이래로 장백산의 지명은 중국인이 항시 사용하면서 현재에 이르렀고, 그 이후의 문헌에는 반드시 장백산이라는 명칭이 인용되었다. 예를 들면, 『원일통지(元一通志)』에 ‘개원로 장백산은 옛날 회령현 남쪽 육십리에 있다. 폭이 일천리(400키로)이고 높이는 이백리(80키로)이다. 그 정상에 호수가 있다. 둘레가 80리(32키로)이다. 그 깊이가 아주 깊어 측량이 불가능하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 북쪽으로 혼동강이 된다. 지금은 송아리강(松阿里江)이라 칭한다. 동쪽으로 흘러 애화가 된다.’
『명일통지(明一通志)』에 ‘장백산은 삼만리가 떨어져 있고 동북방으로 천여리이다. 회령부 남쪽 육십리에 있다. 폭은 일천리, 높이는 이백리이다. 정상에는 호수가 있고 둘레가 80리이다. 그 깊이가 아주 깊어 측량이 불가능하다. 북쪽으로 혼돈강이 된다. 동쪽으로 흘러 아아갈하(阿雅
噶河)가 된다. 지금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는 강이 압록강이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이 도문강이다. 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이 혼동강이다. 또한 이 강은 무아아갈하라는 이름도 있다. 옛날하고 지금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다.’
이상으로 설명한 산이름 이외에도 『후한서(後漢書)』 『위지(魏志)』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에 큰 산줄기(大嶺) 이름이 남아있고, 또한 『위지(魏志)』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란 명칭이 등장하며, 『길림통지(吉林通志)』의 편자는 어느것이 과연 백두산에 해당하는 것인가, 직접 이들 문헌을 연구하였으나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단순하게 큰 산줄기라는 의미는 남북으로 가로질러 조선 만주의 국경 분수령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저자는 ‘단단(單單)’이라는 만주어가 善延이랑 유사하다는 점에서, 즉 장백산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었는데 결국 이러한 유추는 동의하여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의 의문이 남게 된다. 개마대산 역시나 북조선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 것이지만 결국은 이것이 장백산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재료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4.
앞에서 열거한 문헌들에 따르면 백두산의 소재는 길림의 동남방에 해당하고, 조선만주 경계지에 솟아오른 최고봉이며, 뭇 산들의 맹주가 되었고 산 정상에서 압록 혼동(송화), 도문(두만) 세 강의 수원이 되는 호수가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선측의 지리는 실지 답사에 의하여 비교적 명확하여 졌으나, 반면에 만주국 측에서 답사를 시작하기에는 울창한 원시림의 한가운데에 맹수의 피해가 예상되고 또 자그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근처에서는 마적출몰의 위험이 너무 커서 주변의 지리가 거의 정확하게 조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들이 원인이 되어 정확한 실지측량도가 출간되지 못하고 있으며, 문헌상으로는 백두산 정상의 천지가 세 강의 수원이라고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실지로의 사정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일본군도에서 보여주는 여러 섬들에 있어서 분수계는 주요산맥의 진행방향과 항상 일치한다. 줄기도 능선에 의하여 비가 내리면 빗물이 항상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개울과 하천이 매우 많고, 수계와 지세와의 관계는 거의 복잡하지가 않은데 반하여, 대륙에 있어서는 이것과 반대로 때때로 수계는 극도로 복잡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암흑대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탐험가들이 경쟁적으로 원정을 떠났던 아프리카 대륙에 있어서의 니제르, 잠베지, 콩코의 여러 큰 물줄기와 상류와의 상호관계,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의 메콩, 메남, 이라와디 제반 큰 강들과 그 수원들, 황하 양자강 상류 유역지방의 복잡하게 얽힌 상황 등은 무엇보다도 근세까지 부근의 지리가 불명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며, 혹은 그러한 상황이 현재까지도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축소시켜놓고 볼 때 백두산 세 강의 수원지 부근의 지세에 있어서도 화강암, 편마암의 지반으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고원성의 지세는 쉽게 접근하기에는 곤라한 점들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 천지에서 유출되어지는 송화강의 원류가 되는 이도강(二道江)이지만, 압록 도문 두 강은 백두산 정상부근의 여러 물들이 모여들어 아래로 흘러내린 것으로 천지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종래 중국문헌에서는 송화강의 수원은 백두산 서북계곡에서 출발하는 두도강(頭道江)을 본류로 하고 있다 하였으나 이는 『길림통지(吉林通志)』 편저자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으로, 결론적으로 단순하게 마무리하면 세 강의 수원지문제의 고증에 있어서는 그것들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5.
백두산은 청나라 조상의 영산으로서 청나라 사람들의 존숭의 대장이었고, 따라서 청나라의 황실을 계승한 신흥 만주국 사람들 역시나 선조들 발흥지로서 신성한 영역으로 숭배하였던 것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야기 하였던 것이지만, 이에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천녀전설(天女傳說)이 전해져 내려오며 건국역사로서 유명한 것이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근계실록에 따르면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다. 그 아래에 연못이 있는데 소위 말하여 포륵호리였다. 전하여 내려오기를 세 천녀가 이 연못에 내려왔고, 그 산 기슭에 포고리호(布庫哩湖)라는 연못(호수)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그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동안에 신작(神鵲, 신령한 까치)이 막내 선녀의 옷에 주과(朱果, 감, 홍시, 만주족의 정기)를 물어다 놓았다.
막내 선녀는 그 주과(朱果)를 먹고 임신을 하였고, 뒤이어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나자 마자 능히 말을 하였고, 자태와 용모가 보통사람들과 달랐다. 선녀는 아이에게 애신각라(愛新覺羅)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성장하자 선녀는 아이에게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하게 하기 위함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구하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선녀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포고리옹순은 배를 타고 장백산의 동남쪽에 이르렀다. 당시 이곳에서는 세사람이 서로 왕권을 놓고 다투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때마침 물가에서 포고리옹순을 만나본 사람이 마을로 내려와 말하기를 "여러분들 싸우지 마시오. 제가 물가에 갔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하늘이 그런 사람을 허투루 태어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성(三姓)인들이 포고리옹순을 찾아가 물으니 "나는 선녀의 소생으로 당신들의 혼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삼성인들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내려 주신 성인(聖人)인데, 그냥 걸어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서로 손을 잡아 가마(기마전할 때 만드는 무등)를 만든 후 그를 태워 마을로 돌아왔다. 삼성인들은 그의 덕망과 학식에 반하여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논의하고, 각각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그를 패륵(貝勒, 지도자, 왕)으로 받들었다. 포고리옹순은 장백산의 동쪽 악다리성(鄂多理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만주(滿州)라고 하였다. 이로서 그 시조가 되었다.
여러 세월이 지나면서 환란을 맞이하였다. 종족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황야를 배회하기도 하였다. 적들이 추격하였으며 신령스러운 까치가 머리를 들어 가리켰고, 추격자들이 까치가 가르키는 망루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늙은 고목이 서 있었다. 추격자들이 돌아가고 마침내 안정이 되었다. 숨어서 사는 것도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서는 황제를 선포하였으며 여기 이곳이 바로 청덕만년 발상지였다고 전하여졌다.’
『성경통지(盛京通志)』 에서도 같은 형태의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결국 청나라 시조인 애신각라씨가 장백산의 동쪽 포고리산 기슭인 포륵호리의 연못 부근을 탄생지로 하여서 길었던 세가지 성들의 싸움을 평정하고, 각다리성에 정착하여 기초를 공고히 하였으며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판도를 넓혀나가면서 중국민족의 본토를 석권하여 명나라에 이어서 청나라 12대 297년의 기초인 북경에 도읍을 정한 유서깊은 발상지로서 주목되어졌던 것이다.
『청사고(靑史稿)』 ‘태조본기’에도 ‘태조는 그 기운이 하늘에 이르렀고 운은 지극히 광대하였다. 성덕은 신령한 공덕이었으니 인자하고 효성스러웠고 용모와 무공을 겸비하였다. 단정하고 굳세었으며 공경하고 편안하였다. 넓은 문리는 정업을 따랐으며 고황제로서 성은 애신각라였다. 휘는 노이합제였다. 그에 앞서 개금유부였다. 시조 포고리옹순이며 어머니가 말하시길 불고륜이라 하였다. 붉은 과일을 먹고서 잉태되시었으며 마침내 세 성의 싸움을 안정시켰고 사람들이 패륵으로 받들어모셨다. 장백산 동쪽에 거주하셨고, 막혜지 벌판의 야아타리성이었다. 그 부족의 이름이 만주라 불리었다.’ 라고 기재되었는 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이야기를 다시 기재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이 청나라에서는 장백산을 존중하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성경통지(盛京通志)』, 『길림통지(吉林通志)』, 『대청일통지(大靑一通志)』 등의 기사에 따라 장백산의 신을 모시는 것인데, 길림성의 서남방 9리(3.6키로)에 있는 온덕형산 즉 망제산(望祭山)에 봉천하여 매년 봄가을 두 번에 걸쳐 제전을 집전하고, 성대한 의식을 행하며 길림장군 부통령이 제주가 된다. 수도 성경 예부로부터 담당관이 파견되고, 대제에는 황제는 제문을 봉헌하여 장백산신의 영혼을 안무하고, 대신을 특파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옹정11년(1733년)에는 제를 올리는 망제전(望祭殿)을 건설하였다. 건륭8년(1742년)에는 어제주필 길림경망앙 장백산의 시가 있으며 동 17년(1751년)에는 어제 장백산 서수가, 동 19년에는 어제 망제 장백산 시가 있고, 황제가 솔선하여서 조종의 영령들을 위무하고 있다. 강희16년(1677년)(『대청일통지(大靑一通志)』, 『성경통지(盛京通志)』, 『길림통지(吉林通志)』 등에는 17년으로 되어있으나 이것은 16년의 오류이다.) 에는 조종의 발상지의 지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칙령을 받들어 내대신 각라무목납등이 등산을 하였고, 동 23년에는 현지 주재의 늑야 등이 장백산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강희16년에 파견되었던 일행의 노정과 여행기는 방상영의 봉장백산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아래 전문을 싣는다.
[盛京通志卷一百二十七 國朝藝文十三 封長白山記]
‘강희16년(1677년) (4월15일), 동 시위 비요색(費耀色), 새호례(塞護禮), 색내(索?) 등에게 명하여 장백산을 첨례(瞻禮)토록 하고, 훈시하기를, “장백산은 조종의 발상지이다. 너 등은 길림으로 가서 길을 아는 자를 골라, (산에 이르러) 첨시행례(瞻視行禮, 살펴보고 예를 행함)하고, 아울러 영고탑의 제지역들을 순시하되, 큰 더위가 오기 전에 역참들을 질주하여 속히 다녀오라.”고 하였다. 5월 기묘일(4일), 무묵눌(武默訥) 등은 경사를 출발하였다. 기축일, 성경(심양)에 이르러 동쪽으로 갔다. 무술일, 길림에 이르러 현지인에게 물었으나, 장백산 길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전에 액혁눌은(額赫訥殷)에 거주한 적이 있었던 사냥꾼 대목포로(岱穆布魯)란 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이르길, 자신의 아버지가 일찍이 장백산 기슭에서 사냥을 하여 사슴을 짊어지고 (액혁눌은으로) 돌아오는 중 길에서 3일을 묵었는데, (장백산에서) 액혁눌은과의 거리가 이와 비슷하며, 멀지 않다고 하였다(似去額赫訥殷不遠). 길림에서 액혁눌은에 이르는 데는, 육로로 10일, 배로는 그 배가 걸린다고 하였다. 영고탑장군 파해(巴海)가 명하여, 17척의 배에 쌀을 싣고 먼저 출발토록 하고, 아울러 호위장(協領) 살포소(薩布素)에게 명하여 무묵눌 등을 호위해 가도록 하였다. 6월 정미일, 무묵눌 등은 3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육로로 온덕형하(溫德亨河), 고랄눌령(庫?訥嶺), 기이살하(奇爾薩河), 포이감하(布爾堪河), 납단불랄성(納丹弗?城), 휘발강(輝發江), 법하(法河), 탁륭악하(卓隆鄂河)를 경유하여 눌은강변(訥殷江干)에 도착하였는데, 쌀 또한 도착하였다. 작은 배에 올랐다. 살포소(薩布素)와는 길을 나누어 갔다. 강 흐름을 거슬러 상류로 향하였다. 병인일, 액혁눌은(額赫訥殷)에서 모여 깊은 산림을 바라보니 길이 없었다. 살포소(薩布素)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앞장을 서서, 나무를 베어 길을 열었다. (그가)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30리를 가면 산 하나가 보이는데, 그 산을 올라 나무위에서 바라보면, 장백산이 백여 리 바깥에 있으며, 군데군데 흰빛이 반사되는 것이 적옥 같고, 이를 바라보면 심히 눈이 부시다고 하였다. 무진일, 무묵눌(武默訥)이 앞장섰다. 기사일, 살포소(薩布素)를 숲속에서 만났다. 임신일, 날 밝을 무렵에 큰 안개가 끼어, 산이 어디를 향하는 지를 분별할 수 없었다.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다가 사슴이 다니는 지름길을 발견하여 순행하였다. 산기슭에 이르러 밀림으로 뒤덮인 사방을 바라보니, 중간부에 평탄하면서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지대가 있었는데, 풀은 나 있었지만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전면으로는 관목숲이 펼쳐져 있고, 흰자작나무(만주자작나무는 몸통이 눈처럼 희다. 이를 국내에 이식하면 약간 흰색이 발현한다)숲은 마치 사람이 심고 가꾼 것인 양 가지런하였다. 이를 둘러 숲 바깥으로 돌았다. 온통 안개로 가득차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어 칙지를 낭송하고 재배하기를 마치니, 안개가 개었다. 산봉우리가 눈앞에 역력하였다. 산을 오르니 길이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세는 웅장하였고, 이미 가까워져서는 산세가 평평하고 또 원만하였다(堂平而宇?). 눈길이 미치는 곳은 다 옥을 쌓은듯 눈부셨는데, 빙설이 응결된 것이었다. 산 높이는 약 백여 리였다. 산 정상에는 못이 있어,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중 네 봉우리는 물에 연하여 한 아름씩 우뚝 솟아 있었다. 정남쪽의 한 봉우리는 차츰 낮아지며, 두 개의 능선으로 갈라졌다. 못의 넓이는 약 삼사십 리였다. 산을 끼고 계곡수가 흘러내렸다(夾山澗水噴注). 좌측으로 흐르는 것이 송화강이요, 우측으로 흐르는 것이 대소 눌은하(訥殷河, 강물)로 되었다. 산 둘레는 다 평탄한 숲이었다. 무묵눌(武默訥)은 우러러 절하고 하산하였다. 산정에서 사슴이 놀라 달아났는데, 그 중 7마리가 넘어져, 무묵눌 등의 앞으로 떨어졌다. 이때 등산한 사람이 정확히 7인이었는데, 다 식사를 거르고 있었다. 산신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드렸다. 1리를 채 못가서 홀연 안개가 일어났다. 계유일, 앞서 전망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다시는 산빛을 볼 수가 없었다. 7월 경진일, 흡고하(恰庫河)에 이르니, 말이 심히 지쳤다. 갑신일, 흡고하(恰庫河)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색극등(色克騰), 도백혁(圖伯赫), 갈이한(?爾漢), 갈달혼(?達渾), 살목(薩穆), 살극석(薩克錫), 법극십(法克什), 다혼제하(多琿諸河)를 경유하여 송화강(松花江)에 이르렀다. 8월 정미일, 길림으로 귀환하였다. 영고탑(寧古塔)의 여러 곳을 순시하였다. 을축일, 경사로 돌아왔다. 소(疏)를 올리니, 조하여 장백산신으로 봉하고, 품계(秩)를 주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오악과 같이 하였다. 17년, 무묵눌(武默訥)에 명하여, 칙서를 지니고 가서 (장백산을) 봉하도록 하였다. 세시 망제함이 전례(典禮)의 규범과 같았다.’
윗글 번역출처 https://m.cafe.daum.net/chosunsa/POVo/5970(역사토론방)
이 글로서 그 연유를 파악하여 보면 6월3일에 길림성을 출발하여서 7월2일에 길림에 돌아오기 까지 꽉채운 일개월의 여정이었으며 사냥꾼을 안내자로 하여서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진행하는 모양새는 각국의 어느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낮에도 항상 컴컴한 밀림지대였으며, 또한 맹수의 위협이 상존하는 만주측에서의 등산은 극히 드문 경우였기에 이 『봉장백산기(封長白山記)』는 거의 유일한 백두산 등고기인 셈이다.
6.
백두산은 만주측에서는 청조 발상의 영산으로 위아래를 막론하고 숭배를 받는 존재였지만, 조선측에서도 역시 선조의 발상지로 영산으로서 같은 존경과 숭배를 표시하고 있는 것은 조선측의 문헌에 의하여도 극히 명료하게 드러난다. 높은 산이 항상 민간신앙의 목표로서 설정되어지는 것은 세계 공통의 사상이었지만 최고의 산악이 우연한 기회에 선조발상의 전설이 결부되어지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점일 것이다. 조선측에서는 이 전설적인 신앙문제 이외에도 조선 만주 국경설정의 정치문제 때문에 고래로 등산하였던 것에 대하여 『북여요선(北輿要選)』, 『북새기략(北塞記略)』 등에 수록되어진 각종의 기사에 의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형이 비교적 간단하여서 등반이 용이하였다는 점도 유리하였을 것이다. 산정 부근의 비교적 상세한 기록은 앞의 기록에 따르는 것 외에도 만주측의 것으로는 민국19년(1930년)에 편수되어진 『무송현지(撫松縣志)』에 쓰여져 있는
‘장백산은 현의 동남방쪽에 서 있다. 현지 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백산이라 한다. 사계절을 바라보아도 흰색인 것이 이상하다. 옛이름은 장백산이다. 가운데 천지가 있다. 천지를 둘러싸고 많은 봉우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백운(白雲), 또는 관면(冠冕), 또는 백두(白頭), 또는 삼기(三奇), 또는 천활(天豁), 또는 지반(芝盤), 작은 것들은 수십개가 되고, 또는 옥주(玉柱), 또는 제운(梯雲), 또는 와호(臥虎), 또는 고준(孤隼), 또는 자하(紫霞), 또는 화개(華蓋), 또는 철벽(鐵壁), 또는 용문(龍門), 또는 관일(觀日), 또는 석병(錫屛), 또는 복용강(伏龍岡), 계관암(鷄冠岩), 율일파(汩日坡), 현설애(懸雪崖), 연석애(軟石崖), 등으로 사방을 둘러쌓고 있다. 연못 좌우로는 세곳의 샘이 솟는데 일금선(日金綫), 일옥장(日玉漿), 일은류(日隱流)이다. 호수 동북방으로 산이 세 개가 있다. 이름하여 인만(麟巒), 봉만(鳳巒), 벽접(碧蝶)이다. 가장자리로 하늘 기둥처럼 푸른색이 어린다. 호수를 따라서 눈을 돌리면 기암괴석들이 서 있다. 반짝이는 물빛에 투영되어 그 기상이 웅혼하다. 산세는 청정하고 장엄하였다. 특별하게 지정하지 않아도 무송현 여러 산들 중에서 최고봉이고 주위 약 삼백리, 무송 장백 안도 삼현에 걸쳐져 있다.’ 의 기사가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7.
이에 의하면 백두산은 조선 만주의 국경에 솟아오른 높이 2730m의 최고봉으로 산정에는 화구호인 천지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화산이며, 지질상의 여러 힘들이 엉키어서 복잡한 고원성의 지세를 이루기 때문에, 송화 압록, 도문 세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면서, 그 수원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설들이 설명되어 있고, 특히 만주측에서는 도끼와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어서 부근의 정확한 지리가 아직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가 않다.
그에 반하여 조선측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삼림지대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고래로 등산자들이 있었으며, 약간은 정확한 지도도 발행이 되어져서 과학적인 조사도 진행되어진 상황이다. 산 이름에 대하여는 옛날부터 매우 많은 이름들이 변천되었지만 결국은 그 외관상의 형식에서 유래된 백색의 산이라 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었다.
산악숭배라는 세계 공통의 유래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이래 특히 존숭의 중심으로 받들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역시나 이곳이 상세하게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조상숭배와 발상지라는 영산의 영역으로서 상당한 신앙을 위아래 더불어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던 곳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