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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글은
2021년 6월 30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생태계를 관찰하면 끊임없이
생명활동을 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식물의 뿌리와 줄기와 그 잎은
끊임없는 생리작용을 하며 건강한 생태환경을 유지합니다.
약육강식, 그 동물들의 먹이사냥은
탐욕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의 원초적 역동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이 녹아있는 자연의 순리는
창조 과학의 지혜와 지식의 보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태공학, 그 창조의 신비는 하늘이 공의의 빛을 뿌리고
땅이 열여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의를 움돋게 하는 창조와 구원의 경륜이요,
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창조와 구원의 경륜과 섭리를 깨닫는 것은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명의 지혜입니다.
몸의 생체리듬에 깨어 있는사람은
웰빙 건강을 위한 건강식과 운동의 조예가 깊습니다.
지구촌의 생태 환경 깨어 있는 사람은
숲의 해설자로 숲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친환경 서정의 생태 리듬을 가졌습니다.
글로벌 시대의 다원화된 세상은 저마다 소통과 공감을 위한
다원주의 가치관의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가졌습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슬로건은
서로 다른 다원주의 가치관, 그 상생의 물결일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그 상호협력의 가치관은 나와 다른 너에 대한 우리의 삶은 평화를 수 놓으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한 상호협력의 이해를 증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국의 현실로 나타난 갈등과 대립의 첨예한 예봉은
성서지대에 가득한 산의 봉우리와 능선과 골짜기와 평지의 지형을 가졌습니다.
성서지대의 응축된 역사 현장은
오늘날 성서지대의 갈등과 대립, 그 이상의 굴곡진 역사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험산준령의 골 깊은 굴곡진 삶의 윤곽은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의 차이로 말미암은 대립과 갈등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요즘 다양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시국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70년 남북의 적대적 대립과 갈등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따뜻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 닭 울기전의 깊은 밤은
고지전의 혈투, 그 촛불과 태극기의 갈등으로 참혹하기만 합니다.
우익과 좌익의 두 날개는
푸른 창공을 나는 상호협력, 그 상생의 날개짓이요,
보수와 진보는 상호 협력과 증진을 위한 상생의 가치관이건만
야수의 발톱을 드러낸 보수를 불태우고 궤멸시키는 적화의 무풍지대는 이념의 양극화,
그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노란 리본은 나비효과의 좌파 진영을 이루고
태극기는 민초의 애국지정이 흐르는 태극기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좌파의 승리, 그 뒤안길에
소위 말하는 문꼴오소리와 경인선과 두루킹의 댓글 조작은
승전을 위한 거짓과 불의의 병기가 되었습니다.
좌파진영, 그 적폐청산의 칼은
역동적인 반전의 키워드가 되어 "빨갱이" 몰이의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적성세력을 향한 총력전은
단기필마의 용장 조원진 대표의 리더쉽과 애국과 정의와 진실의 빛을 발하였습니다.
적화의 무풍지대와 대척지점의 예봉을 가진 태극기 물결은 적벽대전을 치르는 가운데
우파의 분열을 책동하는 가짜 태극기의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좌파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가운데 우파의 내분은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의 반푼이, 칠푼이, 팔푼이의 현상을 낳았습니다.
우파의 반푼이, 칠푼이, 팔푼이....
그들은 누구인가?
타다남은 부지갱이 같은
바보들의 행진으로 미친행각을 일삼는 혼미한 크리스챤들입니다.
종말론적인 시국의 현상에 직면하여 눈을 크게 뜨고 살피는 가운데
극우에서 극좌까지 골고루 분포된 크리스챤의 작대기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천주교와 불교는 거의 좌파 일색으로 하나되었고
한국의 기독교는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었습니다.
신앙과 이념의 분리된 현상은
기독교 안에 침투한 좌파의 진지전 구축, 그 결과일 것입니다.
북한의 전체주의 공산 독재는 기독교를 말살하였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어떻게 붉은 물이 들었는가?
다양한 분석 가운데
한신을 중심한 민중신학의 좌파적 이념은 좌파의 큰 축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대학을 중심한 종교 다원주의 가치관은
한신의 좌파와 연합되었습니다.
또한 WCC를 허용한 절반의 한국 교회는
좌편향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선교를 위한 보수 성향의 종교인은
북한과 교류협력을 증진하고 평화를 위한 기도회로 북한의 적화 공작,
그 전략전술의 좌파적 진지전이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PD와 NL의 주사파 출신이 전향을 하지 않고 신학을 하여
좌파적 이념에 충실한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극우에서 극좌까지 골고루 분포된 화려한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 신사참배의 후예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 교회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알파 영성에 기반을 둔 은사주의와 신사도 운동의 영성신학은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한 천주교 예수회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각종 프렌차이즈식의 교회 성장 프로그램은
인본주의로 신본주의를 무너뜨리는 프리메이슨의 공작이라는 음모설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게다기 자생적 이단과 사이비 신앙의 현주소는
한국의 기독교, 그 혼잡한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라는 큰 덩치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처럼 성서의 본질에 떠난 담무스와 우상으로 가득한 종말론적인 구약시대,
그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적 사관에 함몰된 가치관은
좌파적 시각보다 더 브레인워싱된 자가당착의 모순된 블렉홀을 가졌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종말론적 음모론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통치와 본질적으로 충돌합니다.
프리메이슨의 종말론적 음모론에 함몰된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성경적인 바른 이해를 하는 보수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적 시각은
성서의 종말론을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탄의 미혹, 그 음론의 함정에 매몰되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적 사관에 함몰된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은
종말론적 음모론의 시선으로 성경 해석의 알레고리와 메타포의 깊은 늪에 빠졌습니다.
최근 태극기 물결의 영웅인 조원진 대한 애국당 대표를 조진핑이라고 음해하는 작자들은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적 시관에 함몰된 음모론적 허황된 파편입니다.
잘못된 기독교적 가치관의 망상은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적 사관, 그 망령된 사망의 덫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모론에 매몰된 작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혀 없는 편협한 구원의 사각지대에서 유기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바로 그 곳에
독초인 쑥과 인진으로 자라는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렇게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은
강도 맞아 거반 죽은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더욱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선포된 말씀과 선포하는 하는 말씀의 갈등,
그 자가당착의 모순에 함몰되어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
그 실존적 인본주의 신앙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선포된 말씀이 아닌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믿고 따르는 사이비 신앙은
실존적 인본주의 무속신앙입니다
강단의 복음이 떠난 말씀의 비전, 그 노예로 억류된 한국의 크리스챤은
과연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녹명된 생명책의 보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종말론적인 마지막 사명이 된 카페의 글은 선포된 말씀, 그 복음의 메아리입니다.
필자의 고민은 선지자를 비롯한 성서의 저자,
그들의 고민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선지자와 성서의 저자는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고민을 하였습니다.
성경의 잠언서 20장 12절 말씀은
잠20:12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출애굽기 4장 11절 말씀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모압에서 호렙산 언약을 새롭게 하며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주의 입이 되어 신탁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었어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불가항력의 벽을 가졌습니다.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8-12)
깨닫게 하기 위한 신탁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여 심판하기 위한 신탁은 이사야의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절망적인 기도로 몸부림쳤습니다.
☞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라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사64:1-12)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구원과 심판 사이에서
죽음의 공포, 그 사역의 갈등에 직면하였습니다.
☞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 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20-31)
시인은 시편 94편9-10절 말씀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119편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기 위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시119:27)
☞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119:73)
지혜와 총명으로 충만한 다니엘은
포로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완전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9:10-19)
만인의 구세주되신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완악한 마음의 관성으로 오히려 진리를 깨닫는 것을 두려워하는 악의 덩어리를 책망하였습니다.
☞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4-16)
그러므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꺠닫는 마음을 가진 복된 사람은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자유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는
사도적 사역의 깊은 절망을 진리의 말씀으로 느꼈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11:7-14)
우리는 지력과 논리를 가졌어도
아는 것만큼 모른다는 사실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신29:29)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111:9-10)
사도 요한은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일5:20-21)
시인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시115:5-9)
사도 바울은 계시된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며
선포한 복음의 확신으로 서신서를 기록하였습니다.
☞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참으로 성경의 선자자와 사도와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적 지혜와 지식과 그 말씀의 충만으로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을 온전히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성도의 소원을
복음의 말씀으로 선포하였습니다.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3-18)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루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습니다.
☞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5-29)
그러므로 누구든지 기록되고 선포된 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읽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로 그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한 사역의 직분을 따라 그 말씀을 이루는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깨닫는 마음의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