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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도전과 모세의 시련
출 5: 1-23
모세는 형 아론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으며 애굽으로 가서 왕 바로 앞에 섰습니다. 손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권능의 지팡이를 들고 섰습니다. 과연 모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요?
1. 바로와 모세의 첫 대면 (1- 5)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군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니, 가기를 허락해서 여호와의 재앙이 우리를 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의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니 당장 해방시키라." 고 하는 요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한 것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놓으라는 당당한 요구였으며, 온역이나 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것이 아니라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애굽땅에 내릴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가 말을 듣지 않는데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을 바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모세의 판단에,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말해서는 어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바로는 대 제국 애굽의 왕인데, 내가 가서 아무리 강하게 나온다고 해도 왕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나만 잡혀가서 고된 고문을 당할 것 아니냐, 그러니 왕이 이해가 되도록 말하자.’ 이것이 언제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한 것입니다. 사흘 길 쯤 광야로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 놓고, 허락해 주면 광야로 갔다가 거기서 멀리 도망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닌데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분석해보고,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은 믿지 않을 거야, 그러니 믿을 만한 말로 바꾸어 말하자. 전도를 해도 그렇고 봉사를 해도 그렇고 항상 자기 생각대로 분석하고 변경해서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하십니까?
그러나 그게 통하겠습니까?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나 아론의 말솜씨나 재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염려와 방법이 하나님의 일에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라면 말씀하신 그대로 해야 일이 풀리는데, 우리가 괜히 염려가 앞서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말을 바꾸고 방법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가 가로막히고 감쇠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안됩니까? 해도 해도 길이 안보입니까? 될 듯 될 듯하다가 끝에 가서는 일이 꼬입니까? 그렇게 잘못된 결과만 오는 이유가 혹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에 맞게 수정하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에도 통했고 지금도 통하고 영원히 통하며, 그 어떤 시대,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제품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는 첫 걸음부터 완전히 잘못 접근했습니다.
2. 바로의 반응 (6- 14)
첫째 반응은, “여호와가 대체 누군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나는 여호와를 모르므로 이스라엘도 내 놓을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신인 여호와가 어째서 애굽 왕인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말인데, 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산골짜기에서 목축하는 사람들이나 다스리는 신인에, 왜 당신의 영역이 아닌 평지 애굽까지 간섭하느냐는 반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각 지방마다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지역마다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엌에는 조왕신이 있고 곳간에는 업신이 있고 물에는 물귀신, 산에는 토지지신, 바다에는 용왕신이 다스린다고 믿었으니, 4,000년 전의 애굽이 전능하시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은 애굽의 신이 다스리고, 가나안 땅은 가나안 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페루에는 안데스 산맥이 지나가기 때문에 5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산길을 갈라치면, 위험한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보이는 위쪽에 개집만한 하얀 집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을 모셔놓은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저렇게 많으냐고 물었더니, 거기서 보이는 모퉁이를 지키는 예수님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 계신 데가 없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길거리의 보이는 한 모퉁이나 지키는 ‘모퉁이 수호신’으로 전락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남미의 카톨릭이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 애굽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바로의 말은 그런 무지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또한, 바로의 교만심에서 나온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큰 나라의 통치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고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고, 일본의 왕은 천황이라 하여 자기를 신으로 섬기게 했으며, 로마의 황제도 자기를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당시에는 애굽이 세계의 최고 큰 나라였으므로 애굽의 왕도 당연히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신인데 어떤 신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느냐” 라는 투로 교만한 마음을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반응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는커녕 그날부터 더욱 심한 노동을 시켰습니다. 흙을 이겨서 벽돌을 찍어 굽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는데, 진흙에 여물을 넣어서 벽돌을 만들어야 벽돌이 튼튼해집니다. 그동안은 그 여물용 짚은 애굽에서 제공해 주었었는데 그날부터는 짚을 주지 않고 너희가 짚을 구해다가 전과 같은 수량의 벽돌을 찍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를 구해다가 같은 양의 벽돌을 찍어내느라고 할 일이 배나 많아졌습니다. 배나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독들이 전보다 심하게 압제했습니다. 일의 감독관들은 모두 애굽 사람들 이었고, 패장이라고 하는 조장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뽑았는데, 감독들은 이 패장들을 채찍질하면서 압박했고, 패장들은 자기 동족의 등에 채찍을 가하면서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고통은 모세가 오기 전보다 훨씬 더 심하게 되었고 그것은 모세에게 심한 낭패였습니다.
3. 패장들의 반항 (15- 21)
패장들은 자신들이 감독의 채찍을 맞으면서 자기 동족의 등을 채찍으로 때리며 일을 시키다가 양심의 괴로움과 육체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바로 왕에게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이 같은 고역에 매질까지 하십니까?" 라고 왕에게 호소했더니, “너희가 한 없이 게을러서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잔말 말고 가서 시키는 일의 분량이나 채워라.” 하고 쫓아 보냈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고 쫓겨난 패장들은 모세를 향하여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모세를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구원하려고 사람을 보내셨다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와서 바로와 대결을 하기 시작한 날부터 자신들의 일이 더욱 고되어지고, 채찍에 맞기시작하자, 금새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일 앞에는 큰 어려움과 수고가 있기 마련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기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좋은 결과는 바라지만 고난은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얄팍한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일은 크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일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수고롭게 전도하여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전도는 하지 않고, 총동원주일이 되어도 자기 혼자만 달랑 오는 사람, ‘전도를 하자’ 하면 핑계만 많이 하는 사람이, 우리교회는 왜 이렇게 부흥이 안 되냐고 투덜거리기나 하고, 남의 탓이나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고는 감당하기 싫고 영광은 얻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원망한 이스라엘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맙시다.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을 몹시 원망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와 애굽인에게 미운물건이 되게 하는 도다! 너희가 가만히 있는 그들에게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원망했습니다.
“위문이 폐문이 되었다”는 말처럼,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화 된 이스라엘을 도와서 구원하려고 갔는데, 오히려 동족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미안하고 가슴 아프고 답답했겠습니까?
모세는 동족들에게 미안했을 것이고, 한편, 조금도 참아주지 못하는 자기 민족이 원망스러웠을 것이고, 하나님께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사양했는데도 나를 잡아다가 되지도 않을 일을 시켜가지고 이런 원망과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아마 이런 원망이 모세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생각하기에 바로는 완고해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사람이 아니라고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 바로가 생각하기에는, 모세라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착한 노예였는데, 모세가 와서 선동하니까 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순종하지도 않고 항의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작전은 그들의 일을 전보다 훨씬 무겁게 시킴으로서 모세 때문에 해방은 고사하고 괜히 일만 배나 힘들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이스라엘과 모세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로의 작전은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로왕의 자비에 기대를 걸었던 모세나, 쉽게 해방을 얻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이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일은 이렇게 꼬여갔습니다.
4. 모세의 원망 (22-23)
22-23 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 어찌하여 이 백성들로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이럴 줄을 알고 내가 오지 않으려 하니까 억지로 가라 하셔서 왔는데,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지만 바로는 우리를 한층 더 학대하기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치 아니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보내지도 아니할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여러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친 후에야 그들이 패물을 너희에게 주며 나가게 하리라.” 3장 19-22에서 아주 명확하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깊은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모세가 아직 모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내 백성을 내 놓으시오, 하는 모세의 말 한마디에 바로가 얼른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 주신 말씀이 틀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신 것이고, 더구나 바로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알지도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러는 체 하는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순탄하게 애굽에서 나왔다고는 할지라도 가나안까지 인도해 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애굽 왕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이스라엘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바로의 마음이 좋아서 인심 쓰고 보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가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바로가 굴복하고 그들을 석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도 인정해야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쉽게 석방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의 말 한마디에 이스라엘이 석방되었다면, 앞으로 애굽의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그들이 거주해야 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먼저 광야에 인도하여 거기서 단단히 훈련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백성들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먼저 심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두려우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두려우심을 보이기도 전에, 모세의 말 한마디에 바로가 인심을 쓰고 당장 내놓은 것이 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서우심은 아무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모세의 첫 번 요구는 거절되어야 마땅했고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몰라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불평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몇 번 기도를 하고는 금새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린 기도가 만일 단번에 응답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응답보다는 우연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우연히 때가 맞아서 그때 이루어진 것이고, 기도하지 않았어도 일은 거의 다 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을 실감 있고 확신 있게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은 노력을 다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자기의 능력이 바닥을 다 드러내고,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다가 그것도 지쳐서 완전히 두손, 두발 다 든 다음에 해결되면, 그때는 “아, 이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거야, 이건 세상에 별 방법으로도 안 되는 것이었어, 이건 완전히 하나님이 해 주신거야”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기도하는 첫날 응답을 받게 되면, 오래 기도하고 오래 연단 받은 뒤에 얻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달라는 것을 언제나 즉시 다 해주어보십시오. 아이들은 부모의 은혜를 모르게 되고, 부모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안 해주면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아이는 버릇없는 아이고, 그 사람이 자라면 배은망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당신의 백성으로 키우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세의 첫 번 요구에 바로가 응답 하지 않게 하신 것이고, 도리어 고난이 심해졌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원망스러운 호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 모세는 일시적이나마 낙심하였습니다. (22,23)
그러나 그는 일을 해가면서 점차 하나님은 강한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참 일군이 되어갑니다.
모세는 첫 번째 시련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3장 19-22절과 4장 21-23절에서 하나님은 재차 말씀해 주시기를, 바로가 처음에는 반발하며 거절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금은 패물까지 주면서 해방 시킬 것이라고 하신바 있습니다. 모세가 조금만 기억을 더듬었어도 주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모세는 위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바로가 쉽게 항복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말 한 마디만 하면, 금방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와 치열하게 싸워서 바로가 하나님 능력 앞에 항복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모세에게도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말씀해 주신 바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해 주신 말씀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위기의 형편에 있습니까?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낙심합니다. 말씀을 모르면 고난 속에서 방황하고 길을 못 찾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한 필요 없는 염려와 불안과 고난을 얼마나 많이 당하였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기억해 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곁길로 돌아가는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헤아려 보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때때로 필요한 상황마다 거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떠오르고,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고난 앞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약속을 의지하고 힘을 낼 수 있으며 결국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가장 지혜로운 길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당장의 현상만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큰 일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바라보고 붙잡는 사람은 시련 앞에도 무릎 꿇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를 하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중심의 삶으로 범사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 요구에 따른 고난
출 5: 1-23
자신은 힘이 없고 무능하며 언변이 없다면서 네 번씩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던 모세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어 애굽으로 가는데,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까닭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이행해야 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방인과 언약 백성을 구별하는 할례조차 자신의 아들에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의 신약적 의미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골 2:11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손으로 양피를 베어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수술 칼을 들이대 사 나의 더러운 죄악을 제거해 버리고, 깨끗한 새 영혼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할례를 받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백성 중에서 끊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사명자도 할례의 언약을 어겼을 때 그를 죽이려 하셨던 엄위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우리 모두 마음에 할례를 받아 영원한 천국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놓인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급히 차돌을 취하여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제야 비로소 모세를 죽이시지 않고 애굽으로 갈 수 있도록 놓아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하면서 한사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했던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형 아론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먼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며 이적을 행하였더니, 백성이 그들의 말을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모세와 아론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재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역정을 내면서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령하기를, 다시는 벽돌을 만드는데 필요한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고, 벽돌은 전에 하던 수효대로 똑같이 만들어 내도록 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게으르므로 쓸데없이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간역자들과 패장들은 바로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간역자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가로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당일 일을 당일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며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줄 알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은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모세는 여호와께 고하기를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고 하면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본문 내용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일시적으로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바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전에는 벽돌을 만들 때 소용되는 짚을 주었으나, 이제는 짚을 주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짚을 줍게 하면서 벽돌 수효는 전과 다름없이 만들어 내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박해를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보면 박해를 받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성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닥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 왕 바로가 자기 밑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는 것을 싫어하였듯이, 마귀는 성도들이 자신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을 핍박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처럼 세상이 말씀대로 살려는 여러분을 핍박할 때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세를 꺾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마침내는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할 때 믿음과 인내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인내로 모든 고난을 이겨낸 자를 위해 하나님은 놀라운 상을 하늘에 준비해 두고 계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에게는 고난이나 위기도 축복의 방편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서 희생을 드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가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이전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핍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매우 당황해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불신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로의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퍅해짐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여,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며칠 동안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영원히 애굽에서 해방을 얻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해방이라는 최후의 승리와 축복을 향해 점점 더 나은 상황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려는데, 주변 상황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거나 낙심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악화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승리와 축복으로 인도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나쁜 상황이란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더 나은 축복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할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갑자기 고난이나 위기가 닥쳐온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여러분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인하여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닥친 어떠한 상황도 반드시 여러분을 승리와 축복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고 확신할 때 고난이나 위기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도가 서로 신뢰할 때 교회가 평안해집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많은 노역을 하게 한 것은, 백성들이 불평함으로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바로는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과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질함으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려는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바로와 같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성도 사이를 이간질시켜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원수 사단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하여,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생활을 가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이간하는 자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훼방하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이 교회를 훼방하고 성도 사이를 이간하는 사단의 도구가 되지 않나 항상 살펴 이간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남의 험담을 하고 거짓말로 성도들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겉으로는 성도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하여야 하며, 때로는 그의 가르침과 요구가 힘들지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 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함으로써 교회를 하나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평안해지고 성도들도 더욱 굳건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바로의 간역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혹독한 노역을 시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바로의 간역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생각을 막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폭력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악 중에 얽매어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로마의 악한 황제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박해를 가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은 더 빨리 전파되어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복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맡은 성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하면 어쩌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비웃고 무시하면 어쩌나? 또는 과연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를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살아 역사하는 힘과 운동력이 있어,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심령 골수를 쪼개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 그 마음을 감동케 하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5.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먼저 호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은 바로의 간역자들이 짚도 주지 않고 전과 같은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하며 자신들을 때리고 핍박하자, 바로에게 찾아 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패장들의 태도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애굽의 절대 권력자로 그의 조치에 따라 현재의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하소연을 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을 핍박하는 세상의 지도자인 바로에게 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바로로부터 게으르다는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이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부딪쳤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합니까? 가장 먼저 자기 부모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보다 자식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헌신적으로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닥친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도움의 손길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달려가 그분께 모든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모든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6.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삶이 평안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패장들이 바로의 간역자들의 매질과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호소할 때, 바로는 간역자들의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게으르다고 비난 섞인 책망을 하며, 여전히 짚을 주지 않고 동일한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부당한 명령에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절대 권력자로 그들의 주인이었던 바로의 처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처럼 악한 주인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종이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의 평안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두 종류의 주인 중에서 하나를 섬겨야 하는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주인이란 죄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또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기 원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죄의 종이라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죄는 자기 종으로 하여금 불의한 일을 하게하고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반면, 하나님은 자신의 종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불의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는 악한 주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거룩함과 영생을 얻도록 하는 선한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편안해집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죄라는 악한 주인을 만나 죽음의 고통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심으로 영생의 기쁨을 맛보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할 때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그 길을 막은 바로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핍박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앞에서 너무 나약하고 힘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워 떨거나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의 관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핍박자였던 바로가 곧 패배자 멸망당하는 자가 되고, 박해를 받던 이스라엘이 승리자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잠시 잠깐이요, 곧 영원한 승리가 여러분의 것임을 기억하고, 최후 승리를 거두기까지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굳센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출애굽기 5장
출애굽기 5:1-14
모세와 아론은 함께 바로 왕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선포하였다. 모세가 말한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절), 또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3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절기”나 “희생”이라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정해 주실 희생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유월절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됨의 의미이다. 구원이란 단순히 내가 천국간다는 차원으로 내 중심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나 바로 왕은 인간을 노동 생산성의 효용 가치에 두고 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가 아니면 바로의 관점에서 보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로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예컨대, 새신자가 들어오면 우리 교회 일꾼이 될만한가 하는 것으로 따진다. 교회 일꾼이 많으면 힘있는 교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 교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힘으로 삼는 교회이다.
본문에서는 이 두 사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1절)라고 나타내는 반면 애굽의 간역자들은 “바로의 말씀에”(10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과 바로의 말을 따르는 두 패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그 둘은 본능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바로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들고 인간의 말을 더 신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법, 교회의 전통적인 관습, 우리가 만든 신앙고백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2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여호와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애굽이라는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데 여호와라는 신에 의해 방해받기 때문이었다.
바로가 무시하는 여호와 그분이 예수님으로 이 땅을 방문하셨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사 53:3) 자기 백성들조차도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급기야는 그분을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인간들의 대접이었다.
자신의 발전과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예수는 좋은데 만약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다른 신으로 대치해 버리는 것이 죄인들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큰 사업을 하는 일에 아무래도 방해되는 분이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사람을 많이 모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함께 죽자고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세상적인 복을 주는 예수님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짜 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할지 모르나 복음의 내용은 숨긴다. ‘십자가’라는 말은 할지라도 십자가의 의미는 왜곡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인과 같은 자들이며 마귀의 하수인이다.
결국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임한 자는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따라서 참된 신자란 말씀이 이끌고 가는 곳으로 갈 뿐이다. 설령 그곳이 망하는 자리가 되더라도 말이다.
출애굽기 5:15-21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노동을 극대화시킴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학대를 선언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바로는 벽돌에 넣는 짚을 주지 않으면서 전과 같은 분량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은 더욱 심한 고통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모세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는데 과연 바로의 노림수는 무엇이었을까?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만났을 때에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라고 원망한다. 결국 바로가 원했던 것은, 모세와 아론이 같은 동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배반당해 스스로 낙심하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여호와라는 신보다도 위대한 바로 왕의 이미지를 조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이미 “바로의 종”(15절)으로 “바로 왕의 백성”(16절)으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증명된다.
여기서 왜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그쳐지지 않고 더욱 심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답변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중되는 고난을 통해 그들의 죄된 애굽적 심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애굽을 떠날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애굽을 더 좋아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부끄러움과 아픔들을 철저히 공개하기를 원하시고 또한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현실을 넘어서 장차 주실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롬8:18). 우리는 자신의 자존심이 있는 한 절대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의 자존심이 철저히 짓밟힌 자리에서 주님은 보이게 되어 있다.
교회란 서로 폼 잡고 경건의 자랑을 하기 위해 모이는 의인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이기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요모양 요꼴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이렇게 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자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렘 9:24). 그러므로 교인들은 목사에게, 목사는 교인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란 도리어 자신의 허물을 통해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에 불과하다.
출애굽기 5:22-23
모세는 바로 왕으로부터 단호한 거절과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로부터 소외와 심한 모욕을 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기에 예상된 일들이었다(3:13,19; 4: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다시 간구하게 된다.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절)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자기 백성들이 학대를 당하지 않고 속히 구출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이 좀더 하나님다운 모습이 아닐까? 모세의 항변은 “주의 이름으로”(23절) 말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도리어 더 많은 학대를 당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원하는 구원은 항상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요구한다. 자기가 원하는 구원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이란, 영생의 차원이 아니라 이 땅을 계속 유지시키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구원이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사고방식이 하늘의 사람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이 땅에 내려오기 위해서라면 이 땅의 것은 모두다 불타 없어져야 한다. 그 아들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하나님은 이 땅을 멸하실 것이다(계 1:7).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다른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면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속에 담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