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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사람/ 누가복음12:16-2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gdmBYFstmRc
오늘은 부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자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록펠러입니다. 록펠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그와 관련된 내용 중에서 그의 인생의 전화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위해 돈 버는 것을 목표로 삼고 30대에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40대에 철도회사와 기업을 병합하여 미국 정유 능력의 90% 이상을 지배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상대방을 착취했습니다. 그는 성공했어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53세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알로페시아라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크래커 한 조각, 우유 한 모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체중이 줄어 폐인처럼 되었습니다. 의사가 일 년도 못 산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인생에 빛이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록펠러는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록펠러는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한 마디 한 마디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정적으로 자기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절이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놓았습니다. 바로 눅 6:38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록펠러는 지금까지 움켜쥘 줄만 알았지 손을 펼 줄을 몰랐습니다. 주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모으기는 많이 모았는데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눅 6:38 말씀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하였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습니다. 재단을 만들고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 페니실린 약품을 개발한 것도 록펠러 재단의 후원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실천하다보니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보람도 생겼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의사가 록펠러는 54세에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98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한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그래 우리 집 창고는 너무 작아. 작은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자. 그리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그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상당히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는 일을 하지 않아도 여러 해 먹을 양식이 있었으니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왜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 말씀드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누겠습니다.
1. 부자는 자기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부자가 자기중심적인 증거가 몇 개 있습니다. 먼저는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나’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여섯 번 나옵니다. 17절에 ‘내가’ 18절에 ‘내가’, ‘내 곳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 19절에 ‘내가’, ‘내 영혼’입니다. 우리 말 번역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나’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12번이나 나옵니다. 이 짧은 독백 속에서 ‘나’를 그렇게 많이 말할 정도로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 내 재산, 내 건물, 내 창고, 내 사업, 내 계획, 내 인생 등 시종일관 '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자기중심의 사람인 두 번째 증거는 그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해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풍성한 소출을 거둔 것은 하나님께서 적당한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밭에서 수고의 땀을 흘린 일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해서 소출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했지 외부의 도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인 세 번째 증거는 그는 자기만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곡식 창고를 크게 짓고 자신의 영혼에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아무 배려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족에 대해서도 아무런 배려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기도마저도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자매가 열심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 자매는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저는 신랑이 필요합니다. 결혼해야 합니다. 좋은 남자 보내주시옵소서”였습니다. 이 자매가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매에게 남자를 보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가 기도 하는 것을 본 목사님이 자매를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자매! 자매의 기도는 너무나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네요.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부모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가 더 성숙한 기도이니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더 잘 상달 되는 거예요” 목사님의 충고를 들은 자매는 즉시 기도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자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사랑하는 부모님에겐 정말로 좋은 사위가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 부모님들을 위해 근사하고 좋은 사위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 예화는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꼬집은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정신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죽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고, 자기가 죽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거절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고 영생을 얻을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산다는 말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 16:2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절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2. 부자는 물질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의 욕심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백만 년의 세월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되나요?”, “백만 년의 세월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1분과 다름없단다.”, “그럼 백만 달러는 하나님께 얼마나 되나요?”, “백만 달러라할지라도 내게는 동전 한 닢에 불과하지.”, 그 사람이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넓으신 하나님, 그럼 제게 동전 한 닢만 꾸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래! 별 어려운 부탁은 아니로구나. 그러면 1분만 기다려주겠니”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우리가 욕심으로 구하는지 아닌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유산 분배에 관하여 주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령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해 주소서” 아마도 그의 부모가 죽으면서 많은 유산을 남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유산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사람에게 돌아온 것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랍비와 상의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 받는 랍비라고 생각해서인지 자신의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지 않고 주님에게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유산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사람의 관심이나 우선순위가 물질보다 영혼이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욕심대로 많은 물질을 소유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탐심은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탐심 때문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 인류에게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사울 왕은 건강한 소와 양에 대한 탐심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간은 시날산의 외투와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심을 우상숭배로 보실 만큼 탐심은 위험한 것입니다. 탐심은 물질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입니다. 탐심은 내가 불행한 것은 재물이 적기 때문이라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대신 물질만을 바라보며 살게 만듭니다.
탐심은 사람과의 관계에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탐심은 형제간의 우애가 사라지게 합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탐심은 사람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에 탐심에 빠진 사람은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탐심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직 재산을 증식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운 계획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오직 쌓아두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돈 버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입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물질로 결정되는 줄로 아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물질을 향한 지나친 욕심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파리와 불나방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배가 고픈 파리가 맛있고 향기로운 꿀단지를 발견했습니다. 파리는 처음에 꿀단지의 주변을 돌면서 조심스레 꿀을 먹다가 나중에는 아예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서 먹었습니다. 파리는 자기도 모르게 날개까지 꿀에 젖고 말았습니다. 파리는 꿀단지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없었습니다. 불나방이 그 모습을 보고 파리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 어리석은 놈아! 네가 돼지처럼 먹기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빠져서 죽지 않니!” 이에 파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둘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불나방은 촛불을 보자 촛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불나방은 촛불 주변을 빙빙 돌다가 차츰 불빛의 아름다움에 취해 점점 더 촛불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다 결국 불나방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파리가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니 저는 훨씬 더 바보구먼!”이라고 했답니다.
19절을 보면 그는 물질로 인하여 영혼이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에 대하여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오직 물질이었습니다. 그는 물질만 많으면 영혼이 만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해 쓸 양식이 있으니 영혼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많이 벌면 인생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위하여, 물질을 위하여 수고하느라고 영혼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돈은 사람들의 삶에 95%는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봅니다. 돈이 없다면 제약을 받는 것이 많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상적인 일들도 못하게 됩니다. 돈이 없으면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겠습니까? 돈이 없으면 밥은 어떻게 먹겠습니까? 돈이 없다면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다면 옷을 사서 입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고 우리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돈이 영혼을 평안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본문에 나오는 부자처럼 물질을 위한 수고는 하지만 영혼을 위한 수고는 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재물에는 부요한 자였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리석은 자는 이 부자처럼 재물만 쌓다가 하나님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영혼이 비참해 집니다.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창고를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고 물질로만 채우면 어리석은 인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 14:1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가진 재물과 시간과 달란트와 은사와 건강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혼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지 물질 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역대상 29:11-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물질이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나는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모든 것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임금님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임금님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의 권위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꾸몄습니다. 국민들은 나귀를 탄 왕을 향해서 갈채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습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서 다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가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자마자 나귀에게는 참수형이 내려졌습니다.
사람은 존귀합니다. 사람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면 존귀도 영광도 모두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까지 주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지혜로운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이나 물질중심으로 살면 존귀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부자는 죽음을 고려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의 영혼을 데리고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는데 마치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15분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유망한 청년이 30세에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만 병이 들어 의사로부터 15분 후면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는 불안과 초조에 떨며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15분, 14분, 13분 흘러갑니다. 그때 “편지요.”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가 배달됩니다. 내용은 억만장자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삼촌이 자신의 전 재산을 이 청년에게 상속해주었다는 변호사의 통보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또 흘러 시계는 이제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다시 “편지요.” 하면서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용은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시간은 이 청년의 생명이 7분, 6분, 5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또 “편지요.” 하면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이 청년의 사랑하는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애인의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고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마침내 청년이 숨을 멈추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납니다. 여러분! 죽음 앞에서는 억만장자의 유산도, 박사학위도, 결혼 허락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15분은 15년이 될 수도 있고 3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그리고 늙으면 다 죽습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고 죽는 것입니다.
어떤 부잣집에 종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종은 너무 어리석어서 그의 주인은 항상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종에게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이 지팡이를 그 사람에게 주어라.” 그래서 그 어리석은 종은 자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 다녔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인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 주인의 방에 가서 병문안을 했습니다. 주인은 힘없이 그를 맞았습니다. “나는 이제 병으로 가네. 내가 가는 길은 아주 먼 길일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야.” 그 말을 듣고 종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나시는데 여행을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네.” 그러자 그 종이 지팡이를 주인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단 며칠을 여행해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데, 주인님은 어떻게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긴 여행을 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셨습니까! 주인님은 참 바보로군요. 이 지팡이는 주인님이 가지셔야겠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인물들도 다 죽었습니다. 성경을 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성군 다윗도, 신약성경의 절반을 썼던 바울도 죽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도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마시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자기나 물질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고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시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