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헌지(왕獻之 344 – 386)
왕희지의 7째 아들이다. 서법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서법을 개발하였다. 왛희지와 왕헌지에 대한 세평이 왕희지가 더 뛰어나니, 왕헌지가 더 뛰어나니, 하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는 왕헌지가 아버지인 왕희지와는 서법이 다르므로 서법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의의를 둔다. 왕헌지의 초서는 장초에서 금초(今草)로 나아갔다고 한다. 왕헌지의 초서는 초서도 행서도 아닌 서체이다. 초서처럼 용필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행서의 맛을 내는 새로운 서체이다.
왕헌지의 서법은 왕희지 보다 수려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骨氣가 모자란다고 한다. 왕헌지의 진첩으로는 鴨頭丸帖, 이십구첩, 十二月帖이 있다.
그외 왕씨 가문에서 많은 서법가가 나왔다. 그 중에 王珣(350 – 401)은 왕희지의 4촌으로 백원첩을 썼다. 백원첩은 書風이 二王의 중간쯤 된다.
첫댓글 부자간의 명필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설강 선생님의 도록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