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잘했다는 건가...? 못했다는 건가...?'
'에라이 모르겠다. 집에 가서 물어보지 뭐~.'
운동장엔 작은 누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집을 못 찾아갈 정도는 아닌데도 중1학년이었던 누나는 학교 첫방학을 맞이하는 나를 운동장에서 기다려 주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날.
교문을 나서자 누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익아~ 니 통지표 받았제?"
"응. 보이 주까?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기 있었는데..."
가방에 접어 넣은 통지표를 꺼내 누나에게 건넸다.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내 성적표를 펼쳐든 누나의 표정이 좀 심각해지더니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누부야?"
"와...?"
"가가 좋은 기가 나뿐 기가?'
"가는...... 젤 나뿐 기다..."
누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다시 물어보았다.
"그래도 글자는 가나다라... 순서던데..."
"그건 그래도..."
잠시 수우미양가의 우열에 대한 작은 누나의 강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조짔네. 이 일을 우짜노...
으~~~~ 이런 돌대가리!
핑계를 대자면 이상한 것이 없진 않았다.
자~ 지금부터 기억의 늪을 더듬어 그 시절의 시험지와 그 시절의 지우개를 떠올려들 보세요.
받아쓰기.
만화를 보고 싶어 글자를 학교 가기 전에 약간 깨우친 나는 받아쓰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산수.
가게에 가서 곧잘 물건도 사고 거스름 돈도 실수 없이 잘 거슬러 온 것을 보면 셈도 그런대로 했는데...
문제는 그 시절의 시험지와 지우개. ㅎ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시험지란 것이 아주 잘 찢어졌다.
받아쓰기를 하다가, 산수 더하기 빼기를 하다가, 혹 틀린 거 고치려고 딱딱한 지우개로 문지르면 그 시험지는 너무 쉽게 찢어졌다.
종이는 약한데 지우개는 거칠고...
급한 마음에 침으로라도 지우면 구멍이 뻥뻥.
얼른 시험지를 돌려 뒷장에 써내려 가고...
그러면 채점되어 돌아온 시험지는 20점, 30점... 뒷장은 매겨져 있지 않았다.
막내인지라 학교 들어가기 전 형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의 존엄성에 대해 세뇌가 되어 있던 나는 선생님께 왜 뒷장은 채점해주지 않는지 물어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매월 내야 하는 저금을 하지 않는다고 찍혀있는 처지라.
"익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곰곰 생각하던 누나.
"와?"
"니... 오빠가 니 성적표 가온나 카거든... 무조건 다음부턴 잘하겠다고 캐래이..."
"알았다..."
풀 죽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부야는 괜찬타. 니 다음부터 잘할 수 있다.'
누나의 격려를 받았다. ㅎ
외지에 나가 계신 아버지 대신 동생들 통지표를 받아 든 큰형.
공부 잘하는 4학년 작은형은 아무 탈없이 다음엔 더 잘하란 격려를 듣고 일찌감치 물러갔고... 내 통지표를 들고 말없이 생각에 잠긴 큰형.
조마조마한 내 가슴.
"히야... 다음엔 잘하께..."
"후......"
크게 한숨을 내뿜은 큰형.
"종아리 대."
"어??"
"얼른 종아리 대라."
쭈뼛쭈뼛...
큰형은 14살 차이 나는 나와 잘 놀아주던 이전의 큰형이 아니었다.
아야! 아야! 비명 지르며 처음으로 큰형에게 종아리를 다섯 대나 맞던 그날.
나는 공부 잘하는 우리 가문에 수치를 안겼다.
과목별로는 기억을 못 하지만...
가 네 개. 양 한 개. 미 한 개.
내 첫 통지표였다. ㅎ
첫댓글 그 시절이 아련히 떠 오릅니다.
일제고사라고 하는 시험을 보려 운동장에 나가서
의자를 책상 삼아 시험을 보던 그 때....
추억을 소환하게 해 준 마음자리님 감사하비잗.
아... 입학하고 운동장에 앉아 화판에 신문지 놓고 크레용으로 글자 배운 기억은 나는데 시험을 친 기억은 없습니다. ㅎ
왜 운동장에서 일제고사를 보았을까요?
마음자리 오라버님 댁도 모두 공부를 잘 했군요.
저희 집도 저만 빼고 모두 우수수수~~~행렬.
중간 정도 했지만 집에서 공부 젤 못하는 아이로 낙인..
오학년 때 맘 먹고 공부해서 올~~~백 받아갔는데....
아버지께서...니 친구꺼 베낐제?...(컨닝 했다는 말씀,아마도 신기해서 놀리신다고 그러셨던듯)
뾰루퉁해서 시험지 집어던지고 밤새 울었음....
또 한번 추억 소환시켜 주신 마음자리님께 감사....
오후 시간을 웃고 시작 합니다.~~~
놀리신다고는 해도 아버님이 너무 하셨네요. 밤새 울만 했습니다. ㅎ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는 분인 줄 잘 알고 았습니다. ㅎ
왜 이렇게 우스운지요.
넘 재미있어서 한참 웃고 있어요.
가족간 화기애애함 속에 서열의 엄격함이
느껴집니다.
큰형의 엄격함.
옛날에는 맏형이나 오빠가
아버지를 대신했지요.
귀여운 막내, 마음자리 님~
넘 귀엽습니다.ㅎ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둘 째
오빠는 방학때 집에 오면
동생들 공부를 점검했답니다.
그 무섭던 오빠도 이제 병약한 몸이
되니 마음까지 약해지더군요.ㅠ
이렇게 웃음을 주시는 마음자리 님.
고맙심데이~!!
저도 얼마전에 큰형이 넘어져서 얼굴을 조금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착찹했습니다.
읽어 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귀여운 꼬마모습이 떠올라 웃고 있습니다.^^
저와 달리 형제간에도 사랑 많이 받고 자라셨네요~ㅎ
막내라고 형과 누나들이 많이 아껴주었습니다. ㅎ
ㅎㅎㅎ 맞아요~
국민학교 그 시절 지우개는 딱딱해서
시험지나 공책을 잘 찢어뜨렸지요.
급하면 침으로도.
그 또래 때에는 수가 가득한 성적표 보다
구슬치기로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힘과 방향의 변화를
관찰 습득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것 같은데요.
정말 신기한 기억력 소유자 마음님.
ㅎㅎ 맞지요. 그 시절의 시험지와 지우개. 뒷장도 확인해서 채점 돔 해주시지. ㅎㅎ 지금 돌아봐도 섭섭합니다. ㅎ
넘나 천진난만한 소년 어쩜 좋아요.ㅎㅎ
지우개 때문였다고 변명 좀 하지
그러셨어요ㅠㅠ
선생님 앞에만 서면 벌벌 떨리고
그날은 큰형도 표정부터 싹 달라져서... ㅎㅎ
누구든 초등학교 1학년은 추억의 샘이 많을 것 같아요.
순진하고 천진하고 눈치에 빠르지 못했는 것 같아요.
부모님도 엄격하셨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그런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말씀만 잘 들어도..
선생님 질문에 대답만 잘 해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들어가면서 만난 첫 선생님 트라우마가 있어서 학창 생활 내내 선생님과는 거리를 띄우며 살았습니다. ㅎㅎ
그랬더니 고등학교 졸업 때 제 생활기록부를 보았는데 '과묵하고 성실한 편.' 이렇게 쓰여져 있더라구요. ㅎㅎ
ㅎㅎ
가가가양가가양 받는거 싶지 않아요
가문의 영광~~
아래 답글은 언젠가 풍주방에 올렸던 글입니다.
ㅎㅎ 영광으로 바꿔도 될까요?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성적에 대해 집안에서도 관심이 있었군요.
저희 1학년 때는 한반 학생들도 많고
2부제, 3부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담임선생님은 동생과 닮았다해서
예뻐해 주셨어요.
그래서 아직까지 이름도 기억한답니다.
성적은 뭘 받았나 기억은 없습니다. ㅎ
마음자리님은 시험을 못 본게 아니였네요.
선생님과 형님, 누님에게 순응하는
똘망똘망 마음자리님이셨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전 학교에 처음 들어가니 정신을 못차리겠더라구요. ㅎㅎ
아이들도 엄청 많고 해야할 것도 많고... ㅎㅎ
그당시 학교 성적 떨어지면 부모님에게 많이 맞았지요
지금도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겠지요?
충성
제 어머닌 제가 막내여서인지 성적에 대해서는 압박 주지 않았습니다. ㅎ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셨어요.
아주 옛날 성적표를 기억도 잘하시네.. 그리고 글내용이 재미있어요..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감치 터득하셨군요.. ㅎㅎ
네. 일찌감치 터득하게 부모님께서 도와주셨어요. ㅎㅎ.
막내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라 였습니다. ㅎ
그 시절 언젠가 마음자리님 글에서 본, 경중
경고 다니셨다는 큰 형님으로서는 오호 애재라~
실로 가문 몰락의 충격을 받으셨음..
마음자리님 내공을 보면 우 미 양 가는 인생사
에 없을 분인데 도무지 요해불가올습니다ㅎ
본 법정은 장난으로 판결 땅땅땅!
큰형은 그랬습니다. ㅎㅎ
아마 제 첫 통지표보고 무지 한심하고 실망했을 겁니다.
형이나 누나들이 공부한다고 애 써는 거 보면서 애태우신 어머니는 저보고는 니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라~ 하셨습니다. ㅎ
글이 재밌어서 웃으면서 읽고 있는 데
종아리를 맞으셨다니 웃음을 멈춰야 하는 데
어쩔 수 없이 웃어야겠습니다.
귀엽고 재밌는 걸 어떻게 참아요? ㅎㅎㅎㅎㅎ
ㅎㅎ 웃으세요~~
저도 제 글보고 웃습니다.
그때 그아이 마음자리님은 " 우수수수..."
성적이 오르는 아이로 바뀌셨죠 ?
저는 어렷을적엔 아주 똑똑한 아이인줄 알았는데
결국 변변치 못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
가문의 수치 ..바로 접니다 .
주로 미우미우~~ 했습니다.
딴세상에 관심이 많아서요. ㅎㅎ
아녜스님은 글을 잘 쓰시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