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하여 기말고사를 준비하다 보았던내용을 참고해보자면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불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나 혼간지로 유명한 일본의 정토진종(또는 일향종一向宗)도 원효의 책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의 영향하에서 세워진 종파다.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원효의 손자인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薛仲業)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자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내용은 원효대사와 의상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여러 인터넷 자료를 뒤적이다가 접한 부분으로 수업을통해서 더욱더 세밀하게 알았으면 재밌었을거 같다고 생각한 부분입니다.
한국사상의 특이점을 가장 잘 이야기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지는데 단순히 사상의 수입만이 아닌 재가공을 통한 수출이 가능한게 매력이며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얼이라는 단어처럼 무엇인가 바탕을 두고 그위에 색을 여러겹으로 덮씌우는 작업으로 이어져 가는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한국사상의 오묘한 매력은 마치 도가처럼 말로형용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받아들이는 저의 자세가 부족하여서 이러한 부분의 대한 고찰로 까지 이어지지 못한게 올해의 아쉬운점이나 준비함의 있어 약간의 즐거움이나마 저에게 준 이대목을 한번 다시 유심히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생각이기에 이부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사의 매력적인 인물로 오다노부나가를 본적있기에 야망이 떠올라서 그랬던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