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동물 보호소 / 김명기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 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니
남은 문장들이 일제히 눈가에 젖어든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
-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20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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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기 시인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유년기와 청소년기 강원도 태백에서 성장. 관동대학교 졸업
2005년 《시평》 등단.
시집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 2022년 고산문학대상 및 만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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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의 현장_슬픔의 계보학
책상에 쌓인 시집들 속에서 또 한 시집이 운다.
김명기의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 사람, 2022)이다.
그는 슬픔의 갱도를 찾아 떠돈 시인답게 견고하고 진실하다.
슬픔이 감상이 아니라 감성일 때, 슬픔은 진실이 된다.
많은 사람이 감염될까 두려워 슬픔 근처에도 가기 싫어할 때,
시인은 슬픈 것들의 무수한 계보를 울면서 들여다본다.
화자는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유기견들은 흰 개, 검은 개, 누런 개, 큰 개, 작은 개가 아니라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들이다.
존재 전체를 '슬픔으로 환치하는 것은 시인의 권한이다.
버려져 안락사를 기다리는 존재들에게 '슬픔' 이외의 어떤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화자에게 시는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이다.
시는 슬픔의 연원을, 슬픔의 과정을, 슬픔의 결과를 궁구하는 기제이다.
왜냐하면, 슬픔의 존재의 모순, 배리背理, 이어성(異語性, heteroglossia)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받던 유기견들은 왜 버려졌는가. 사랑하는데 왜 버리는가.
멀쩡한 육신이 왜 강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이 모든 모순의 역사 뒤에서 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슬픔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렇게 '존재물음'을 가능하게 하므로 시적인 것의 질료가 된다.
하이데거의 죽음이 그러하듯이 슬픔은 '비본래적 실존'을 '본래적 실존'으로 돌려놓는다.
슬픔은 '존재사건'의 도화선이다.
한 마리의 슬픔이 짖을 때,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하나의 "아픈 문장"이 다른 문장들의 "눈가"를 적신다.
이렇게 "다 같이 슬퍼야"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시는 슬픔의 보편성을 알려주는 기제이다.
우리는 다 슬프다. 시는 울음으로 울음을 위로한다.
-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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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김명기 시인의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를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간만에 시집 읽는 기쁨을 온전히 느꼈다.
뭇 생명을 향한 시인의 애잔한 눈길과 진정성이 깃든 연민에 마음이 아렸다.
찾아보니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모든 버려진 생명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과 폐기 처분되는 존재들에 대한
순정한 연민이 절절히 와 닿는다”라는 심사평에 고개를 끄덕인다.
직장 근처에 유기동물 보호소(경주동물사랑보호센터)가 있다.
매년 버려지는 유기동물이 10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36.6명이라는 통계만큼 충격적인 숫자이다.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짓는다”에서 울컥하더니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에서는 끝내 눈물이 터졌다.
참 좋은 시집이다. 일독을 권한다.
- 김현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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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를 읽으면서
속으로 눈물방울이 한 점 두 점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몸으로 부딪쳐서 생산된 절절한 시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집인 셈이다.
살면서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날 때가 잦다.
인생 자체가 슬픔이라는 정조가 그 밑바탕에 편만하게 깔려 있기에.
‘유기동물 보호소’는 자유시다.
하지만 구조면에서 볼 때 묘하게 사설시조 형태를 갖추고 있다.
첫째 문장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를 초장으로 보면 된다.
버려진 개와 떠나버린 사람의 시집은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을까. 미묘한 시적 장치다.
그러면서 화자는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라면서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이라고
여러 유형의 슬픔을 열거하면서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라는 심장을 쿵하게 하는 표현을 보인다.
그런 후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니
남은 문장들이 일제히 눈가에 젖어든다, 라고 말한다.
시의 가장 아픈 문장과 남은 문장과의 연관성이 또한 뭉클하게 다가온다.
끝으로 시의 화자는 꼭 하고 싶은 한 마디를 토로한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 라고.
이 대목이 종장 구실을 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가슴을 쿵 치는 결구다. 실로 그러하다.
슬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다 같이 슬퍼야 가능한 일이 맞다.
모여 있던 이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슬픔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유기동물 보호소’는 잔잔한 흐름이지만 강력한 울림을 안긴다. 삶의 진정성을 일깨운다.
함께하는 슬픔을 통해 참다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조용히 환기시킨다.
김명기 시인은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 동안 밥벌이가 바뀌었다고 한다.
중장비 기사에서 유기동물 구조사가 된 것이다.
시를 쓰는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그는 시를 통해 위로를 적잖게 받고 있다.
밥과 시 사이에서 늘 고뇌하면서 삶을 쟁쟁 울리는 시편들을 앞으로도 부단히 보여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이정환 (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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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을 혼자 나른 적이 있었다.
배낭에 넣어 등짐으로 지고, 짐수레에도 가득 실어 밀어 옮겼다.
내 짐을 나 혼자 지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턱 앞에서 끙끙대고 계단에서 멈칫거릴 때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때 한 택배 기사님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더니 수레를 같이 밀어주었다.
이 무거운 걸 혼자 다 나를 거냐고,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힘을 보태준 것도 고맙지만 사실 그 질문이 고마워서 오래 잊지 못했다.
매일 이고 지고 나르던 그는 짐 지기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남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힘듦과 절망,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은 크고 깊어서 고작 상상 따위로는 닿을 수도 없다.
세상에는 보이지도 않은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많다.
가끔은 안 보이는 그 짐을 남에게 들킬 때가 있다.
반대로 우리가 타인의 짐을 알아차릴 때도 있다.
짐이 짐을 알아볼 때, 그것은 서로에게 기대어 고달픔을 나눈다.
짐의 총량이 줄어들 리가 없는데도 우리의 발걸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그것을 김명기 시인은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고 썼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라고도 썼다.
이 말은 진심이고 진실이다.
슬픔에는 슬픔이, 아픔에는 아픔이 친구고, 이웃이며, 쉼터가 된다.
- 나민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