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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호.명(字.號.名)
雅 號
1. 號의 意義와 性格
는 名이나 字 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稱號로서 영의의 Pen name이나 Pseudonym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雅號와 堂號로 나누어, 雅號란 藝術家들이 詩文이나 書畵등에 쓰는 本名 외의 優雅한 號란 뜻으로, 堂號는 본래 堂宇의 명칭이지만 이것이 그 堂宇의 主人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였다. 후세에는 號 ․ 雅號 ․ 堂號 등이 모두 같은 의미로 쓰여 졌으므로 여기에서는 號라는 稱號로 일괄하여 표시한다.
名과 字는 부모나 尊長者나 스승이 지어준 것으로 자신의 意義와는 관계없이 지어진 것이나, 號는 자신의 理想 ․ 性情 ․ 癖好 벽호 (좋하는 버릇) ․ 居處 ․ 處地 등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자신이 지을 수도 있고, 타인이 지어줄 수도 있다.
號는 무엇 때문에 짓게 되었는가? 대체로 隱士들이 자신의 姓名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호를 짓고 이름을 감춘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중국 戰國時代에 시작되어, 秦의 甘茂가 渭南 陰鄕의 樗里 저리 에서 살았으므로 自號를 樗里子 저리자 라 하였고, 寒泉子, 鬼谷子를 비롯하여 赤松子 ․ 河上公 등이 모두 이런 類이며, 漢 高祖 時에 太子를 도왔던 商山四晧인 東園公 ․ 甪里先生 록리선생 ․ 綺里季 기리계 ․ 夏黃公 등도 사람들이 그들의 성명을 알고자 노력하였으나 끝내 알 수가 없었고 別號만 전해오는 인물들이다.
晋代에 이르러 名을 숨기고 號를 짓는 이런 풍조가 차츰 일반화 되어 陶淵明이 五柳先生, 陶弘景이 華陽隱居, 鄭道昭가 中岳先生이라는 號를 갖게 되었고, 唐代에는 賀知章이 四明抂客, 張志和가 湮波釣叟 인파조수 및 玄眞子라는 號를 가졌는데, 이들 號는 모두 벼슬하지 않고 隱居하거나 벼슬을 버리고 田園으로 退歸한 뜻을 나타낸 號들이다.
宋代에 이르면 號를 짓는 일이 점차 일반화되어 達官한 貴人들도 號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歐陽修가 六一居士, 王安石이 半山老人, 蘇軾이 東坡居士, 黃廷堅이 山谷道人이라 하였으며 明 ․ 淸代에는 號를 갖는 기풍이 더욱 만연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號를 갖게 되었고, 一人이 수십종의 號를 갖기도 하였다.
호는 본래 中國에서 書齋나 亭子 ․ 別庄 ․ 住居 ․ 出生地등에 연유해서 붙인 이름을 작가의 別名으로 하여 詩文이나 書畵등 작품의 署名에 많이 썼던 것인데, 宋代부터 호의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字까지 避諱하게 되자, 號는 누구나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는 가장 널리 불리 우는 稱號로 바뀌게 되었다. 宋代에 字를 諱한 예를 보면, “朱子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웃어른들을 감히 字로 부르지 못하고 몇째 어른 등으로 부른다.’하였다.”한 것들을 들 수 있다.
廣義의 號속에는 別號 ․ 宅號 ․ 諡號 ․ 佛家의 法名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別號는 本人의 自稱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性格 ․ 處地 ․ 容貌등의 특징을 따서 타인이 지어 부르는 別名과 같은 호를 말하며, 號를 通稱해서 名과는 별도로 부르는 稱號라 해서 別號라고 부르기도 한다.
는 유명인사의 家屋의 位置를 그 사람의 號로 부르는 것으로 積善洞大監宅 ․ 嘉會洞判書宅 등으로 불렀으며, 出家한 女人에게 親庭의 地名을 붙여서 忠州宅 ․ 公州宅 등으로 부른 것도 역시 宅號라 하였다.
은 僧名이라고도 하며, 佛門에 귀의하여 僧侶가 된 사람에게 得道式때에 宗門에서 俗名 代身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이와 같이 號는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어지는 칭호로서, 연령이나 性別이나 지위에 따른 제약아 전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지어 부를 수 있었으며, 15세에 요절한 趙九鎭의 호 聽涼軒과 成世淳의 號 竹軒 등으로 보아 少年時부터 號를 지었던 예도 있었던 듯하다. 號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부터 성인의 名은 君師父 외에는 부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것이 號의 사용을 더욱 촉진 시키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즉 號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字까지 諱하게 되었고, 자를 諱하게 되자 號의 사용이 더욱 촉진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후세인들도 先人들의 名이나 字보다는 號를 더 잘 알게 되었다. 韓濩 한호 보다는 韓石峰으로, 李滉보다는 李退溪로, 李珥보다는 李栗谷 丁若鏞보다는 丁茶山으로 더 많이 부르고 기억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만을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을 缺禮로 알았으므로 號가 없는 사람은 諡號를 붙이거나 (예: 崔文昌 致遠), 官職名을 붙여서 불렀고 (예: 鄭諫議 知常, 金員外 克己), 시호나 관직도 없는 사람은 先生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불렀다.(예: 康先生 日用) 이를 통해서도 우리 옛 선인들이 이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었는가를 알 수 있다.
호는 本人도 자신의 名이나 字대신 사용하였고, 他人들도 名字대신 불러주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었다. 그러나 本人은 전혀 사용한 일이 없는 호를 타인들이 널리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麗末의 유학자 朴尙衷을 世人들이 潘南先生이라 부른 것이 이런 예이다. 또한 후세에 전해오는 호 가운데 堂額으로 전해 오기는 하나 본인이 생시에 사용한 일은 없는 것도 있으니, 成三問의 梅竹軒, 尹宣擧의 山泉齋등의 호가 이런 類이다.
寒微한 가문에서 顯達한 인물이 나온 경우 자신의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미 사망한 祖上의 字나 號를 지어 族譜를 비롯한 각종 文獻에 登載하는 일들도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이 號를 雅號라고도 한다. 雅號란 優雅한 號란 뜻이므로 타인의 號를 雅號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나 자신의 號를 雅號라 稱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號를 높이는 것이 되므로 온당하지 않다. 즉 “선생님의 雅號는 무엇입니까?” “제 號는 ○○입니다.”와 같이 써야 한다.
號를 짓게 되면 親知나 師父 또는 尊長者가 號說을 지어 주어 이를 찬양하고, 號에 含有된 의미에 맞게 修養에 힘쓸 것을 勸勉하기도 하였다.
參考로 號說1편의 예시를 통하여 號를 짓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惕若齋說 척약재설
白文寶
成均館의 直講인 金伯誾君이《周易》乾卦 九三 爻辭의‘惕若’두 글자를 따서 그 書齋의 이름을 붙이고 나에게 說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어찌 족히《周易》의 깊은 뜻을 드러내어 君이 書齋의 이름을 지은 취지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書齋에 대하여는 놀고 휴식하는 의미를 붙이기도 하고, 좋아하며 즐기는 의미를 붙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물건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나는 일찍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남의 걱정을 보고 자기의 걱정으로 생각하며, 남이 두려워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경계가 있으면 마음의 편안하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이조금만 나타나도 나의 기운은 언짢아져서 움츠러든다. 내가 이를 모두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기운을 자연스럽게 가지면, 그런 뒤에 나의 기운은 쾌활하여지고 조금도 움츠러진 곳이 없게 된다.
孟子가 기를 길러서 저해함이 없게 한 방법은 마음이 동요 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惕若齋의 뜻을 보면 그 마음이 벌써 동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치우쳐 있으면 언제나 그 정상적인 것을 지니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공경하거나 거만하거나 태만함에 따라서 언제나 치우쳐 지는 것인데, 君의 마음에는 이러한 상태가 없는 줄로 나는 안다. 내가 어찌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君이 이미 國學에서 講義를 맡고 있고, 여러 학생은 반드시 道學이 있는 學者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닦는다. 道學이 있기를 희망하는 자는 학문을 반드시 닦으며 德을 반드시 향상시킬 것이다. 닦아서 발전되지 못하면 반드시 걱정하며 두려할 것이요, 향상시키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걱정하며 두려워 할 것이다. 종일토록 노력하여 저녁에까지 이르며, 저녁에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위태롭게 여기는데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마음이 두려움을 가지어 정상적인 상태를 갖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거에 동요된 나의 마음이 도리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 걱정하며 두려워 한다는 뜻의 “惕”자는 마음 심(心)자와 바꿀 역(易)자를 합하여 만든 글자이다. 대저 마음은 언제나 보통 때에 아무렇게나 가지게 되는데, 보통 때에 마음을 반드시 바꾸어〔易〕가지는 것은, 경계하고 삼가며 공경하고 두려할 일이다. 경계하고 삼가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학문을 닦지 못하여 덕이 향상되지 못함을 두려워 할 것이니, 그리하면 닦기를 반드시 널리 하며 향상하기를 반드시 높이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높으면 크게 될 수 있으며, 넓으면 長久하게 될 것이다. 처음은 걱정하며 두려워 하다가 발전함을 알아서 장구하며 크게 되는 경지에 까지 발전하여 끝내 아무런 허물이 없게 되며, 끝을 알아서 태연히 여기에 처하게 되면, 이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乾卦의 九三 爻는 이중으로 剛한 것이어서 훌륭한 덕이 벌써 나타나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위치인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進退와 動作과 休息에 있어서 반드시 그 道에 맞게 하며, 날마다 주의하며 두려워하여 남을 위하여 충성스럽지 않은 일이 없었는가, 사람과 사귀면서 믿음성 없게 한 일이 없는가를 열심히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충성과 믿음이란 德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충성과 믿음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한 가지 생각이라도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함이 학문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듯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된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오직 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惕若齋에 대하여 이렇게 說을 지었으니 그대는 노력하기를 바란다.
成均直講金君伯誾 取易乾九三爻惕若二字 扁其齋而屬予說何足發易之微意合君之名齋者也 凡居齋惑以遊息 惑以嗜樂以至乎物色之尙 皆是也 君獨以惕若爲戒者 豈無謂歟 予嘗居乎世也 見人之憂如己之憂 聞人之懼如己之懼 憂懼之戒 心焉未安 此念 纔 겨우 (재) 發 吾之氣便慊然 餒 (주릴 뇌) 矣 吾欲擧而忘此 平其心易其氣 然後吾之氣浩然無是餒矣 孟子之所以養而無害者 不動心也 今觀惕若之意 又不旣動其心焉 夫人心之偏 常不得其正之其所畏敬傲惰而僻焉 吾知夫君之心無是也
吾何動焉 君旣官直講國學 而諸生必就正於有道 欲有道者業必修德必進 修之未至必惕若 進之未之必惕若 終日乾乾以至夕 夕惕若以至厲 此與恐懼乎心而不得其正者異矣 思之向者動吾心者 反不動矣 夫惕者 從心從易 蓋心常忽於常 居常而心必易 戒謹敬畏之事也 戒謹敬畏者如何 猶恐業之不修德之不進 以至乎修之必廣進之必崇 崇則可大 廣則可久 始焉惕若 知至而至于久大 終焉無咎 知終而處之泰然 以此措之天下國家則無難矣 以乾之九三爲重剛 賢德己著而人歸之 此處之未安 進退動息 必以其道 日以惕厲曰 爲人謀而不忠乎 與人交而不信乎 忠信所以進德也 忠信主於心而無一念之不實 所以居業也 此未始不爲惕若者有終也 有始有終 其惟君子乎 予於惕若齋 爲說如此 君其勤旃.
이것은 麗末의 性理學者 金九容이《周易》乾卦 九三 爻辭의 “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종일토록 進德修業에 노력하고 저녁때에 이르러서도 미진함은 없었는가 두려워한다면 곤란한 일이 닥쳐도 허물이 없게 된다.〕”에서 따서 自號를 惕若齋라 짓고, 白文寶에게 청하여 받은 號說이다. 不動心을 가지고 進退動息에 항시 두려운 듯 조심하여 孝悌忠信에 노력한다면 훌륭한 君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 것이다.
1. 作號 法則
호를 지으려면 자기가 짓는 號에 어떤 뜻을 담고자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즉 號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作號者들이 이러한 몇 가지 유형에 맞게 號를 지어서 이것이 號를 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것을 作號 法則으로 보고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作號 法則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李奎報(1168~1241)이다.
옛 사람 중에는 號로써 名을 대신한 사람이 많았다.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한 자들도 있었다. 王績의 東皐子, 杜子美의 草堂先生, 賀知章의 四明狂客, 白樂天의 香山居士, 같은 것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을 호로 삼은 것이고, 陶潛의 五柳先生, 鄭熏의 七松居士, 歐陽修의 六一居士는 모두 그들이 가진 것을 근거로 한 것이며, 張志和의 玄眞子, 元結의 漫浪叟(만랑수)는 얻은 바의 실상(도달한 경지)들이다.
하여 號에는 居處하는 곳을 號로 삼은 것, 所有한 物을 號로 삼은 것, 到達한 境地를 號로 삼은 것 등이 있다고 하였다. 곧 號를 지으려면 이 세 가지 법칙 가운데 하나에 맞도록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用語를 약간 바꾸어 就所居而號之者를 ‘所處以號, 因其所蓄而號之者를 所蓄以號, 以其所得之實而號之者를 所得한 實相(도달한 境地)뿐 아니라 도달하고 싶은 경지까지 포괄할 수 있는 ‘所志以號,로 命名하고, 그가 처한 처지를 號로한‘所遇以號,를 추가하여 4개 條項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所處以號
所處以號는 자신이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處所(地名)로 호를 정하는 것으로 先人들의 호 중에는 많은 수가 이러한 방법으로 지어졌다.
자신이 거주하거나 혹은 인연이 있는 마을 이름(村 ․ 里 ․ 洞 ․ 州 ․ 郊등의 명칭이 쓰여 진 號)이나 山 혹은 골짜기 이름(山 ․ 峰 ․ 巖 ․ 岡 ․ 嶽 ․ 谷)이나 물 이름 또는 이와 관련이 있는 地名(溪 ․ 海 ․ 湖 ․ 浦 ․ 洲 ․ 川 ․ 潭)으로 號를 삼은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러한 號들이 所處以號에 속한다.
所處를 號로 정한 것을 예로 들어보면, 鄭道傳의 三峯은 丹陽의 島潭三峯을, 李滉의 退溪나 陶山老人은 安東의 陶山과 退溪라는 地名을 號로 한 것이다. 李珥의 號인 栗谷과 石潭은 坡州의 栗谷과 海州의 石潭을, 柳馨遠의 號 潘溪는 扶安의 愚潘洞을 따서 지은 것이다. 朴趾源의 號 燕巖은 그가 거주하던 金川 燕巖을, 鄭若鏞의 호 茶山은 그가 19년간 謫居하던 康津의 茶山을 自號로 한 것이다.
이렇게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들은 당시 世人들이 기억하고 부르기가 편리하였으리라고 보여 지며, 號로 사용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處所를 표시하는 것 외에 主觀的인 뜻이 號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特徵이다.
그러나 所處를 號로 한 경우에도 主觀的인 意圖가 나타난 예가 간혹 발견된다. 스스로 世人을 등지고 隱居한 곳을 찾아 卜居하면서 그 地名을 自號로 한 경우에는 隱遁의 뜻이 號 속에 含有되어 있기도 하다.
宋山 趙狷(조견)은 字가 從犬으로 平壤人이다. 初名이 胤이었는데 高麗가 망하자 名과 字를 바꾸었으니 개가 主人을 그리워하는 의리를 취한 것이다. 淸溪山에 隱遁했을 때 太祖가 친히 왕림하자 다시 陽州 松山으로 피하였다. 松山으로 號를 한 것은 松에서 凋落하지 않음을 취하고 山에서 옮겨가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하여, 趙狷이 所處로 號를 하였으면서도 地名의 字意로 高麗에 대한 節義까지 나타내어 그의 호에는 所志까지 含有되어 있다.
宋山 谷雲 金壽增은 성격이 매우 淸高하였으며 春川의 谷雲에 隱居 하였는데 利益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孤靑 樵老(초로) 徐起가 만년에 公州 孤靑山 아래에 卜居하자 四方의 선비들이 다투어 우러러보며 그의 門下로 모여드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였는데, 상기 金壽增의 號 雲谷은 所處로 지은 것이나 隱遁의 뜻도 나타내고 있으며, 徐起의 號 孤靑도 所處로 지은 것이나 世俗에 휩쓸리지 않고 살려는 意志가 나타나 있고, 이에 樵老를 덧붙여서 미천한 身分이어서 宦路에 진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까지 나타내어, 所處로 號를 정하였으면서도 所志와 所遇까지 나타내고 있다.
2) 所志以號
所志以號는 號 속에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경지 또는 志向하고자 하는 目標와 意志가 담겨진 號이다. 즉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號로 한 것이다.
선인들의 號 가운데 다수가 所志를 號로 한 것들이며 이런 류의 號에는 修身의 뜻을 나타낸 것이 가장 많고 隱遁이나 風流를 나타낸 號들도 흔히 발견되며 諧謔的인 성격을 띤 것들도 간혹 발견된다.
所志를 號로 한 예를 들어보면, 李奎報는 자신의 호를 白雲居士라 한 이유를
白雲은 내가 본받고 싶은 것이다. 본받고자 하여 배운다면 비록 그 實相을 얻지 못한다 해도 유사하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구름이라는 것은 뭉실뭉실 한가히 떠서 산에도 막히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표표히 동서로 떠다니면서 행적이 구애 받음이 없고 경각으로 변해서 그 始終을 알 수가 없다. 油然히 퍼지는 군자가 세상에 나와 벼슬함이요 歛然(감연)히 걷히는 것은 높은 뜻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숨는 기상이며, 비를 내려서 마른 생물을 소생시킴은 仁이요 와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고 가면서도 미련을 두는 바가 없음은 通이다. 구름의 靑 ․ 黃 ․ 赤 ․ 黑色은 그 正色이 아니요 華彩없는 白色만이 正色이다.
그 德과 色이 이와 같으니 그를 본받아 배워서, 세상에 나아가면 萬物에 恩澤을 입히고 들어와서는 마음을 비워서 그 결백을 지키고 正常에 處하여,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仙境에 들어가게 된다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알 수 없을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옛 성인이 얻은 實相에 거의 가깝게 되지 않겠는가.
或人은 묻기를, “居士란 칭호는 무엇인가?”하기에 대답하기를, “或 山에 居하기도 하고 或 집에 居하기도 하는데, 오직 道를 즐길 수 있게 된 이후에야 號로 할 수 있는데, 나는 집에 居하면서 道를 즐기는 자이다.
하여, 유려한 산문으로 自號를 白雲居士라 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구름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음 ․ 변화가 자유 자재함 ․ 만물에 은택을 입힘 ․ 세상에 초연함 ․ 집착하는 바가 없음 등을 연모하고, 華彩없는 白色이 구름의 正色이므로 號를 白雲이라 하고, 자신은 居家하면서도 道를 즐기는 사람이므로 이에 居士를 덧붙여 白雲居士라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性理學의 導入者 安裕가 호를 晦軒이라 한 것은,
젊어서부터 性理學을 좋아하여 늘 晦庵의 畵像을 걸어놓고 尊慕의 뜻을 표하며 그 때문에 號를 晦軒이라 하였다,(自少好性理之學 常掛晦庵畵像以致尊慕 因號晦軒)
하여, 性理學을 좋아하고 朱子를 존경하기 때문에 朱子의 號 晦庵을 모방하여 自號를 晦軒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李齊賢은 호를 櫟翁이라 한 이유를
대저 櫟 (상수리나무 력{역}) 자에 딸린 樂은 聲部이다. 그러나 재목이 못되기 때문에 害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나무에게는 즐거워할 만한 일이므로 이것이 樂자가 딸린 이유도 된다. 내 일찍부터 大夫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스스로 화를 면하고 본성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號를 櫟翁이라 하였는데, 행여 재목감이 못되어 天壽는 누릴 수 있었으리라 여겨서였다.(夫櫟之從樂 聲也 然以不材遠害 在木
爲可樂 所以從樂也 矛嘗從大夫之後 自免以養拙 因號櫟翁 庶幾其不材而能壽也
하여, 가죽나무가 쓸모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木手의 도끼에 찍힘을 당하지 않고 天壽를 다할 수 있는 것과 같이 自身도 잘난 채 하지 않고 훌륭한 人才가 못된다는 마음가짐으로 亂世에 身命을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櫟翁이라 號를 지었다고 하였다.
栗谷의 母堂 申氏의 호 師任堂은 胎敎로 훌륭한 아들을 낳아 聖人으로 키운 중국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 太任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이런 목표 하에 栗谷을 양육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대표적인 儒賢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宋純은 老退後에 潭陽에 亭子를 짓고, 俛仰亭이라 편액을 써서 단 후에,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 보면 하늘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정자가 있어 浩然한 기상이 일어난다” 하여, 天地를 俛仰하며, 浩然之氣를 기르고자 號를 俛仰亭이라 정했다고 하였으며, 張仲擧가 以存堂이라 自號한 이유를 燕巖 朴趾源은,
...한 방을 청소하고 문을 닫고 발을 늘이고 살면서 以存이라 크게 써서 堂額을 걸어 놓았다.《周易》에, “용과 뱀이 蟄居하면서 몸을 보존하다.”하였는데 이에서 취한 것인 듯 하다.(“...掃一室 閉戶下簾而居 大書以存 而顔其堂 易曰 龍蛇之蟄 以存身 蓋取諸斯也.......”)
하여, 張仲擧는 용이나 뱀이 겨울에 蟄居해서 몸을 보존하듯 存身을 위해서 隱遁 蟄居하겠다는 뜻으로 《周易》의 “龍蛇之蟄 以存身”에서 以存을 따다가 號를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丁若鏞의 號 與猶堂도《老子》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與와猶를 따다 지은 것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茶山이 人生을 살얼음판을 건너듯 四方의 敵國을 대하듯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으로 이 號로 표한 것이다.
所志로 號를 삼는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예가 많다.
歲寒堂(安宗道) ․ 後凋堂 후조당 (金富弼) ․ 寒松堂(尹哲)등은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에서 따서 號로 삼은 것이고,
三省齋(鄭崇祖)는《논어》의 ‘曾子曰 吾日三省五身......에서
訥軒 눌헌 (李思釣) ․ 訥齋(張沆 ․ 李芮 ․ 朴祥 ․ 梁誠之) ․ 訥庵(金鑽)《논어》에서, 日新堂(李天慶)은《대학》의 “日新 日日新 又日新”에서, 澹簡溫齋 담간온재 (金鍾厚)는《중용》의 末章 “君子之道 澹而不厭 簡而文 溫而理”에서 따다가 지은 號로써 그 文句가 상징하는 뜻을 수양의 지표로 정한 것이다.
그 밖에 知足堂(趙之瑞 ․ 南袞 ․ 權讓) ․ 竹松堂(南景昌) 등의 號도 修身이나 節義를 뜻하는 것들이다.
隱逸이나 風流的인 뜻으로 지은 호로는 逍搖堂(權輪 ․ 朴世茂) ․ 撫松軒(孫大佑) ․ 忘憂堂(郭再佑) ․ 醉庵(李治) ․ 忘世亭( 沈璿 심선 ) ․ 逸休堂( 李䎘 이숙 ) ․ 茅齋(李弘宇) ․ 風月亭(月山大君) ․ 風詠亭(金彦琚) ․ 大笑軒(趙宗道) ․ 醉夢軒(吳泰周) 등은 諧謔的 諷刺的인 뜻을 지닌 號로 볼 수 있다.
이러한 號에는 世俗의 風塵에서 超脫해서 處士나 禪家的인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顧名思義라하여 修養이나 隱遁 또는 風流의 뜻이 담긴 名과 字 또는 號를 지어놓고 항시 이를 돌이켜 보면서 그 속에 담겨진 뜻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생활의 座標로 삼았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所志로써 號를 삼은 것이 많게 되었고, 각도를 달리하여 고찰해 본다면 號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도두 所志가 含有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3) 所遇以號
號를 짓는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號로 표한 것을 所遇로 號를 定한 것이라 할 수 있다. 所遇로 지은 號가운데는 貴해졌거나 부자가 되었거나 건강해 진 것을 나타내는 號는 드물고, 늙음 ․ 괴로움 ․ 가난함 ․ 병들음 ․ 외로움 ․ 허무함 등을 나타내는 號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號들은 대체로
隱(碧山淸隱 金時習 ․ 猊 예(사자) 山農隱 崔 瀣 해 ․ 樵 초 隱 李仁復 ․ 醉隱 宋世林 등)
翁(痼翁 朴世堅 ․ 病翁 申弼貞 ․ 棄翁 兪彦民 등)
叟 늙은 (수) (薄田耕叟 安繼宋 ․ 樵叟 郭鏡 ․ 江叟 林薰 등)
老(野老 李淳 등)
夫(漁夫 成孝元 등)
居士(雲水居士 金光燦 등)
散人(江湖散人 金叔滋 등)
山人(淸平山人 李資玄 등)
布衣(直峯布衣 金宇 顒 옹 등)
野人( 葵 규 藿 곽 野人 安應世 등) 등의 字가 붙은 號들이다.
申從頀 호 의 호 三魁堂 삼괴당 은 19세에 司馬試에 壯元하고 成宗朝에서 大小重試에도 壯元을하여 과거에 세 차례 魁科로 及第하였다하여 이를 號로 정한 것이다.
金大有는 나이가 70이 넘으니 壽가 足하고, 司馬試와 大科에 합격하여 臺省과 州縣의 벼슬살이를 하였으니 榮譽가 足하고 조석으로 酒肉의 供饋 공궤 를 받으니 이 또한 부족하지 않다하여 호를 三足堂이라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호는 예외로 자신이 처한 자랑스러운 처지를 호로 한 것이다.
文益漸 문익점 은 항상 근심하는 것이, 나라의 국운이 떨치지 못함 ․ 聖學이 泯滅 민멸 되려함 ․ 자신의 道가 서지 못함 등 세 가지였으므로 호를 三憂居士라 하였고, 金籥 김약 은 평생의 嗜好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고 담배를 한 대 피워보면 곧 그 産地를 분별할 수 있었으므로 호를 煙客이라 하여 자신의 기호를 號로 삼았고, 李聖任은 筆翰 ․ 文辭 ․ 言語 ․ 歌聲 ․ 容貌등 다섯 가지가 모두 玉과 같다 해서 호를 五玉이라 하였으니 이런 號들도 所遇以號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所蓄以號
所蓄以號는 간직하고 있는 物 가운데 특히 玩好하는 것으로 號를 삼은 것이다. 陶潛의 五柳先生, 鄭熏의 七松處士, 歐陽修의 六一居士 등을 이런 號에 속한다. 五柳先生과 七松處士는 각기 宅邊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이를 自號로 한 것이고, 六一居士는 歐陽修가 가진 것으로는 一萬券의 藏書 ․ 一千券의 集古錄(구양수가 경전을 주석한 책) ․ 一章의 琴 ․ 一局의 碁 ․ 一壺의 酒와 一老翁(구양수 자신)을 들 수 있다하여 호를 六一居士라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號 가운데도 자신이 玩好하는 物을 호로 삼은 예가《號譜》에 있다. 예를 들면 고려 毅宗時에 참소를 당하여 東萊에서 유배된 鄭叙는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고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것으로 戀君之情을 달래면서 ‘築亭種瓜’를 따서 瓜亭이라 하였고, 許震은 居所에 우거진 대숲이 있었는데 壬辰倭亂時에 불타 없어지자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 詩로 짓고 號를 삼아 竹村이라 하였고, 당시의 名公들인 漢陰 ․ 月汀 ․ 西湖 ․ 東嶽 등이 모두 和詩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는 灰燼 재신 (불애타 없어짐)되어 없어진 玩好物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號로 삼은 것이다.
玄若昊는 雅操와 德行이 있는 사람으로 몸소 常綠樹인 松 ․ 栢 ․ 竹을 심고 自號를 三碧堂이라 하자,三淵金昌翕 김창흠 이 三碧堂記를 지어 이를 찬양하였다하며, 文益周는 집 앞 연못의 붉은 연꽃이 白色으로 변하므로 이를 기리기 위하여 호를 白蓮堂이라 하였다 한다.
崔澐 최운 은 집 앞에 연못이 셋이 있어서 世人들이 三池先生이라 불렀고, 權 ■ 지 는 儒城 村舍에 은거하며 한가히 지내는데 짙푸른 솔숲이 집을 에워싸서 속세의 티끌 하나도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호를 萬松處士라고 불렀다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所蓄以號들은 松 ․ 竹 ․ 柏 ․ 蓮 ․ 瓜 ․ 池등을 號로 하였고, 이들이 隱含(含蓄)하고 있는 象徵이 作號者의 뜻과 합치되어 이를 號로 삼은 것이므로 所蓄으로 號를 정한 경우에도 作號者의 所志가 內含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4종의 作號法則 가운데 作號者의 독창성과 개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所志以號이고 몰개성적 비 독창적인 作號方法은 所處以號이며, 위에 열거한 4종의 법칙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號가 있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號로 보기는 곤란하다.
어떤 인물의 居住地〔所處〕가 바뀌었거나 뜻하는 바〔所志〕나 처한 상황〔所遇〕이나 玩好하는 物〔所蓄〕이 바뀐 경우 그에 맞는 號를 새로 지어서 쓰는 일이 흔히 있게 되어 1인이 數種의 號를 갖거나 심한 경우에는 1인이 수십 종의 號를 지어 쓰기도 하였다. 金正喜는 阮堂 ․ 秋史 ․ 禮堂 ․ 詩庵 ․ 果坡 ․ 老果 ․ 揅摝齋 연록재 등 500여종의 호를 사용하였다 하며, 이것이 1인이 여러 종의 號를 사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 외에 李奎報는 三酷好先生 ․ 白雲居士 ․ 止止軒 ․ 四可齋 ․ 自娛堂 ․ 南軒丈老 등의 號를, 金時習은 梅月堂 ․ 贅 췌 世翁 ․ 淸寒子 ․ 雪岑 설잠 ․ 東峰 ․ 碧山淸隱 등의 호를, 許筠은 喬山 교산 ․ 惺山 성산 ․ 鶴山 등의 호를, 李滉은 芝山 ․ 退溪 ․ 陶叟 ․ 陶山老人 ․ 淸凉山人 ․ 退陶晩隱 등의 호를, 李珥는 栗谷 ․ 石潭 ․ 愚齋 등의 호를 사용하였으며, 林悌 임제 는 白湖 ․ 謙齋 ․ 嘯癡 소치 ․ 楓江 등의 호를,
丁若鏞은 三眉 ․ 茶山 ․ 籜翁 탁옹 ․ 俟菴 사암 ․ 鐵馬山樵 철마산초 ․ 與猶堂 ․ 등의 호를 사용하였는바, 이들이 여러 종의 호를 갖게 된 이유도 所處 ․ 所志등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같은 號를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도 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號를 모방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所志나 所遇 등이 같아서 자연히 같은 號를 쓰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같은 號를 多數人이 공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교통 통신이 불편했던 과거에는 자기의 號와 같은 號를 가진 사람이 과거나 현재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니, 역사상 저명한 인물이 사용하여 世人이 公知하게 된 號를 후세 사람이 自號로 하는 예는 극히 드문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이 쓰는 고유한 號를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일한 號를 衆人이 公用하게 된 이유는 이상에 열거한 바와 같이 所志나 所遇등이 같아서이거나 他人이 이미 쓰고 있는 號인 줄을 몰라서였다고 생각된다.
같은 號를 여러 사람이 公用한 號만을 보면,
黙齋라는 號는 13人이 公用하고 있고,
東皐 ․ 松坡 ․ 松齋는 각각 11人이,
竹溪 ․ 竹窓 ․ 孤山 ․ 謙齋 ․ 敬齋 등은 9人이,
松巖 ․ 南谷 ․ 滄洲 ․ 晩沙 ․ 東溪 ․ 東岡 ․ 訥齋 ․ 省菴 ․ 松亭 등은 8人이,
雲谷 ․ 四溪 ․ 松菴 ․ 栗亭 등의 호는 7人이 공용하고 있다.
松 ․ 竹등 節義를 상징하는 松字나 竹字를 호로 사용한 사람이 가장 많고,
東溪 ․ 西溪 ․ 南溪 ․ 東湖 ․ 西村 ․ 東里 ․ 東坡 ․ 東岡 ․ 東皐 등 톡정한 지명을 나타내는 호를 사용한 사람이 다음으로 많으며, 그 외 號들도 대부분이 修身의 뜻을 含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所志以號와 所處以號가 號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字
1. 字의 意義와 性格
《禮記》에, “남자는 20세에 冠禮를 행하고 字를 짓는다.《禮記》卷1 上 ”男子二十冠而字“여자가 혼인을 약속하면 笄禮를 행하고 字를 짓는다.《禮記》卷1 上”女子許嫁笄而字라고 하고 그 註에 “冠禮를 행하고 字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이다. 출가를 약속하였으면 15세에 또한 成年이 되는 의식이므로 字를 짓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 때문에 성인이 된 사람의 名 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稱號가 필요하게 되어 字를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이 名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었나를 살펴보자.
나무가 오래 자라면 산구렁에 우뚝 솟을 수 있고, 물이 오래 흐르면 반드시 바다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사람의 학문도 그러해서 오래도록 중단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룸이 있게 된다. 너의 이름을 ‘久(오랠 구)’로 하노니 너의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감히 방종한 행동을 하지 말며, 감히 놀기를 좋아하지 말고, 오늘 한 이치를 궁구하고 내일 한 이치를 궁구하며, 오늘 한 가지 착한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착한 일을 행하며, 날마다 조심하여 비록 쉴 만한 때라고 쉬지 않고 노력하면 인격과 교양이 구비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날로 퇴보하여 반드시 小人이 될 것이니, 너의 이름이 함유한 뜻을 공경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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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河崙(1347~1416)이 아들의 이름을 ‘久’라고 짓고 그렇게 지은 이유를 설명하고 평생 동안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서〔顧名思議〕수양에 힘써 훌륭한 人格者가 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先人들은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겨 成人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고, 성인의 이름을 君 ․ 師 ․ 父만이 부를 수 있을 뿐이요, 그 외의 이름이 名을 부르면 그를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他人을 부를 때 官職이나 封爵이나 號나 字를 덧붙이지 않고 맨 이름만을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은 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겼다. 예를 들면, “諸侯가 失政을 하여 관할하던 영지를 잃으면 이름으로 부르고, 人倫을 그르쳐서 同族을 滅한 경우에도 이름을 부른다.《禮記》卷2 曲禮 下 ”諸侯失地名 滅同姓名하여 諸侯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를 중죄인으로 취급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각별히 예우를 해야 할 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禮記》에,
上卿과 兩媵(夫人보다 아래이지만 諸妾보다는 위에 있는 여인)은 國君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大夫는 父代부터 부리던 老臣이나 姪娣(姪은 妾의 兄의 딸이고 娣는 妻의 妹로 妻가 시집올 때 따라와 妾이 된 여인들임)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士는 家事를 맡은 사람들의 우두머리와 長妾(妾으로 자식을 낳은 여인)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하여, 아랫사람이라도 권위를 인정해야 할 사람은 名을 부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敬名思想은 자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히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표시로 보아 아무 경우에나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禮記》에,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다.” “아버지 앞에서는 자식이 이름을 부르고, 임금 앞에서는 신하가 이름을 부른다.”고 하였다. 즉 집안에 가장 존귀한 사람이 둘이 있을 수 없으므로 아버지〔家君〕앞에서는 가족 모두가 이름을 부르고, 나라에 至尊은 國君 한사람 뿐이므로 임금 앞에서는 모든 신하가 이름을 부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至尊인 王도 조정의 고관은 名으로 부르지 않고 字로 불러 예우를 해주는 것이 원칙이어서
漢高祖가 이르기를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싸움에 승패를 결정하는 일은 내가 子房(張良의 字)만 못하다.”
하여 臣下인 張良이 名을 부르지 않고, 字를 불렀으며, 南史를 보면,
梁나라蔡撙 이 吏部尙書侍中으로 있을 때, 武帝가 대신들에게 떡을 대접하면서 蔡撙의 姓名을 여러차례 불렀으나 끝내 대답을 않고 떡만 먹었다. 武帝는 그가 기분이 상했음을 알고 蔡尙書라고 고쳐 부르자 蔡撙은 비로소 수저를 놓고 笏을 잡은 후, “예”하고 대답하였다. 武帝가 “卿이 아까는 귀가 먹은 듯 하더니 지금은 어찌 그리도 귀가 밝으오?”하자, “臣이 귀족의 한 사람이고 직책이 納言을 맡고 있으므로 폐하께서도 응당 이름으로 낮추어 부르시면 안됩니다.”라고 대답하니 武帝가 부끄러워 하였다.
하여 제왕이 지위가 높은 신하를 名으로 부르자,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王에게 항의한 기록까지 발견된다. 이렇게 소중한 것이 名이고 出生한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父가 아기의 오른 손을 잡고 吉祥한 글자를 골라 命名한 것이 名이므로 “君子는 父가 死亡한 후에는 名을 바꾸지 않는다.”하여 父母死後의 改名은 자식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名을 존귀하게 여기는 관념 때문에 名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避諱하게 되었다. 避諱는 漢文典籍을 읽을 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의 하나이다. 尊長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려면 감히 그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으므로 대화시에나 글을 쓸 때에 尊長의 名字에 이르게 되면 避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고 글을 쓸 때에도 尊長의 名字에 이르게 되면 이를 避免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이를 避諱라 한다. ‘諱’字는 本意는 ‘피하다’‘꺼리다’등이지만 꺼리고 피해야 할 대상이 尊長의 名이므로 諱의 字意가 ‘尊長의 名’으로 되어 在下者가 존장의 名을 써야 할 때는 ‘諱 某(아무개)’라 하게 되었다.
피휘의 대상은 당대의 帝王과 孔子와 自家의 尊長이다. 제왕의 名을 피하는 것을 國諱라 하며, 예를 들면 漢代에는 漢 高祖(劉邦)의 名인‘邦’자를 휘하여, 漢 靈宰 熹平年間에 刻한 熹平石經에는 《論語》의 ‘邦君爲兩君之好’‘何必去父母之邦’과 《尙書》의 ‘安定關邦’등에 나오는 ‘邦’자를 모두 ‘國’자로 바꾸어 놓았고, 唐代에는 唐 太宗(李世民)의 名을 휘하여, 王世充․虞世南․李世勣 등의 名에 쓰인 ‘世’자를 빼고 王充․虞南․李勣이라 썼으며, 民部尙書의 ‘民’자를 ‘戶’자로 바꾸어 戶部尙書로 쓴 것 등을 들 수 있다.
聖賢의 名을 피휘하는 것을 聖諱라 한다.
孔子의 名은 ‘丘’이다. 司馬遷의 《史記》〈公子世家〉에는, “孔子의 父 叔梁紇의 顔氏女와 尼丘山에 기도를 드리고 공자를 낳았다”고 하였고, 班固의 《白虎通》〈姓名扁〉에는 “孔子의 머리가 魯國에 있는 尼丘山을 닮아서 가운데는 낮고 사방의 둘레가 높아, 尼丘山의 ‘丘’자를 이름으로 삼았다.”하였다. 공자의 名을 피휘한 예로는, 宋 徽宗 大觀 4년에 瑕丘懸을 瑕懸으로 襲丘懸을 襲懸으로 ‘丘’자를 빼고 칭한 사실이 《宋史》地理志에 보이는데 이것이 그 최초의 기록이며, 《至正直記》에, “丘자는 聖人의 諱이므로 자손이 經史를 읽다가 孔丘라 이른 곳이 나오면‘某’라 읽고 붉은 圈點을 찍어 놓는다.”하였고, 淸 世宗의 雍正 3년에 諭旨를 내리기를 “공자의 諱는 이치로 보아 당연히 廻避해야 한다.”하고, 회피하는 방법으로는 四書五經 외의 다른 전적에 나오는 ‘丘’자는 모두 邑部를 덧붙여서 ‘邱’로 쓰도록 하여 章丘라는 地名을 章邱로 바꾸어 쓰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地名 大邱도 본래는 大丘였다가 丘를 휘하여 현재와 같이 쓰게된 것으로 보인다.
自家의 尊長을 피휘하는 것을 家諱 또는 私諱라 한다. 家諱의 예로는, 司馬遷은 그의 父名이 ‘談’이므로 그가 편찬한 《史記》에 張孟談을 張孟同으로, ‘談’자를 ‘同’자로 바꾸어 개칭해 놓았으며, 顔眞卿은 父名이 維貞이므로 그가 쓴 〈元結墓碑〉에 張維瑾을 張瑾이라고 써서 ‘維’자를 빼었고,〈李玄靜碑〉에는 司馬承禎의 시호 貞一을 正一로 고쳐 써서 ‘貞’자를 피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漢 高祖의 妃 呂后의 名이 雉이므로 漢代에는 꿩을 雉라고 쓰지 못하고 野鷄라고 썼으며, 唐 高祖의 外祖가 獨孤信
조심할 (기)
이므로 高祖는 信州의 지명을 ■州로 바꾸었다. 이렇게 皇后나 外戚의 諱를 피하는 것은 恒規는 아니어서 피하는 경우도 있고 피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春秋》”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 부모, 덕행이 훌륭한 사람의 名을 諱하였다. 하여 공자가 지은 《春秋》에 어떤 사람의 名을 부르거나 쓰지 못하였는가를 밝혀놓았고, 《예기》에는 “卒哭後”에는 生時에 쓰던 名을 휘하고, 祭禮時에는 嫌名은 휘하지 않으며, 두 자로 된 名은 그 字가 한字씩 나올 때는 휘하지 않는다. 하였다. 嫌名이란 피휘 해야 할 字와 音이 같거나 유사한 字로 된 명칭으로 평소에는 이것도 휘했으나 제례시에는 피휘 하지 않는 것이고, 二名不偏諱란 말은 예를 들면 공자의 母名이 徵在인데 ‘徵’을 써야 할 알이 있을 때 ‘在’를 잇달아 쓰지 않고, ‘在를 써야 할 알이 있을 때 ‘徵’을 잇달아 쓰지 않으며 한 자씩 부르거나 읽을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禮記》卷4 檀弓 下 “二名不偏諱 夫子之母 名徵在 言在不稱徵 言徵不稱在”우리 풍습에 子가 父名을 말할 때 이름 두 자를 붙여 함께 말하지 않고 한자씩 떼어서 ‘아무字 아무字’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二名不偏諱의 관념에서 나온 말이다.
二名不偏諱의 예로는, “春秋時代 宋 武公의 名이 司空이어서 司空이라는 관직을 司城으로 고쳤다”하여 두 자중 한 자만 고친 것이 그 증거이며, 《朴氏通典》에 唐 武德 원년 6월에 太宗(李世民)이 太子가 되어 萬機를 通覽하면서 命을 내리기를, 二名不偏諱의 禮法에 의거하여 官號 ․ 人名 및 公私文籍에 ‘世’자와 ‘民’자가 연이어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모두 避諱하지 말도록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두 자로 된 名은 두 자가 연이어 나오는 경우 외에는 不諱하던 것이 唐 玄宗代부터는 한 자씩 나오는 경우에도 휘하기 시작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李世勣을 李勣으로 民部를 戶部로 바꾼것이다.
尊長의 名을 피휘하기 위하여 ․ 空字 ․ 缺筆 ․ 改音 등의 방법을 썼다.
改字란 피해야 할 字를 뜻이 같은 다른 字로 대체하는 것으로, 漢 文宰의 名이 恒이므로 恒山을 常山으로 바꾸었고, 景宰의 名이 啓이므로 微子啓를 微子開로 바꾸어 썼으며, 唐 高宗의 名이 治이므로 政治를 政理로 고쳐 쓴 것이 그 예이다. (恒과 常, 啓와 開, 治와 理는 뜻이 같다.)
空字란 피휘해야 할 字를 써야 할 경우, 그 자리를 공란으로 비워놓는 것으로, 許愼의 《說文解字》에 秀(光武帝名) 莊(明帝名) 炬(章帝名) 肇(和帝名 ) 祜(安帝名) 등을 써야 할 곳을 공란으로 비워 놓았던 것이 그 예이다.(후대인이 다시 적어 모두 채워 놓았다.)
缺筆이란 피휘해야 할 字의 末畫을 빼는 것으로, 唐代에 高祖(淵)의 휘를 피하기 위하여 淵을 沜으로 太宗(世民)의 휘를 피하기 위하여 世를( )으로 高宗(治)의 휘를 피하기 위하여 治를 ( )로 쓴 것이나, 宋代에 太祖(匡胤)의 휘를 피하기 위하여 匡을 ( )으로 胤을 ( )으로 쓴 것이 그 예이다. 孔子의 諱 丘를 ( )로 쓴 것도 같은 예이며, 丘에 阝을 加하여 邱라 쓴 것은 加筆의 한 예이다.
諱해야 할 사람의 名을 諱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王 앞에서는 私人의 名을 諱할 수 없고, 《詩經》․《書經》등의 文章속에 諱해야할 字가 나오는 경우에는 諱하지 않았다. 《禮記》卷1 曲禮 上“君所無私諱......詩書不諱 臨文不諱 廟中不諱”
이것은 國無二尊 ․ 家無二尊 사상과 경전이나 史書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詩書不諱의 원칙은 후대에 이르면 지며지지 않아서, 漢石經에는 《尙書》에 쓰여진 ‘邦’자를 모두 ‘國’자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는 漢 高祖 劉邦의 邦자를 避諱한 예이다.
《冊府元龜》에 의하면, “唐 王紹가 兵部尙書로 있을 때 皇太子로 책봉된 분(후의 憲宗)이 王紹와 名이 같았으므로 王紹가 改名하겠다고 하자, 비평하는 자들이 비나하기를, ‘皇太子도 人臣이므로 東宮(太子宮)에 근무하는 사람은 太子의 名을 휘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은 휘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한다. 이를 통하여도 國無二尊의 사상이 얼마나 엄격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諱法은 周代부터 시작되었으며, 名을 지을 때 흔히 상용하는 문자로 지으면 휘하기가 어려워서, 자식의 名을 지을 때 이른바 六不이라 하여 國名․官名․山川名․病名․家畜名․器物名․日月名 등으로 짓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런 用語는 일상생활에 흔히 사용되는 것이어서 휘하기가 어렵거나, 상서롭지 못한 어휘로 이름을 짓는 것을 껴렸기 때문이었다.
避諱제도는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엄격해져서 《唐律疏議》에 의하면, 諱를 범한 사람을 十惡의 罪 중에서 하나인 大不敬罪로 다스렸고, 淸代에 이르러서는 휘를 범했다는 이유로 文字獄을 크게 일으켜 文人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한편 각 왕조의 國諱가 각기 달랐으므로 전적이 간행된 시기와 판본의 진위를 판별하는데 이러한 避諱字를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敬名사상과 존귀한 인물의 名을 避諱하는 관습이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들어와서,
......太宗大王이 즉위했을 때 唐나라 使臣이 詔書를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뜻을 알 수 없는 곳이 있어 王이 불러 물어보니 王 앞에서 한번 보고는 지체없이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王이 놀라고 기뻐하며 늦게 만난 것을 한으로 여기며 성명을 물으니, “臣은 본시 任邦가야 사람으로 이름을 牛頭라 합니다.”하였다. 王이, “경의 두골을 보니 强首先生이라부는 것이 좋겠소.”하고 唐 皇帝가 보낸 詔書의 答書를 짓게 하였는데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지극하여 王이 더욱 갸륵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任生이라 불렀다.
하였는데, 이는 신라 태종무열왕이 强首의 학식과 문필의 능력에 탄복하여 그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任生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늦어도 7세기 경에는 名을 避諱하는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高麗時代에 간행된 각종 전적에는 ‘武’자나 ‘堯’자가 없다.‘武’자를 써야 할 곳에는 ‘虎’자를 써서 신라 文武王을 文虎王으로 표기하였고, ‘堯’자를 써야 할 곳에는 ‘高’자를 써서 檀君이 건국한 시기가 중국 堯의 통치 시기와 같다는 기록을‘與堯同時’라 쓰지 않고‘與高同時’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고려 惠宗의 名이 武이고 定宗의 名이 堯이기 때문에 이를 휘해서 쓰지 못하고 의미가 유사한 다른 자를 대신 쓴 것이다.
옛사람들은 對話時에나 作文時에 본의 아니게 觸諱의 罪를 범하여 困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여행중 숙식을 위하여 남의 집에 들어갈 때는 먼저 휘해야 할 字를 물었다. 한다.《曲禮》券1, 上, “入境而問禁 入國而問諱”客이 오면 주인이 대문 밖에 나와서 객을 맞이하는 것이 禮이며, 그 때에 객이 주인에게 避諱해야 할 先祖의 名字 즉 家諱를 묻는 것은 주인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고 觸諱의 罪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諱法이 文字生活을 制約하자 조선조의 王族들은 名을 지을 때 일상생활에는 쓰이지 않는 僻字로 짓거나 새로 造字하여 짓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觸諱의 죄를 범하지 않고 문자생활을 불편 없이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상술한 바와 같이 名을 尊貴하게 여겨서 성인의 名을 휘하고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되자, 누구나 보편적으로 부를 수 있는 다른 稱號가 필요하게 되어 冠禮時에 字를 짓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字가 周代부터 宋初까지 가장 보편적인 성인의 稱號로서 누구나 제약 없이 부를 수 있었다. 子思가 지었다는 《中庸》에‘仲尼曰 君子中庸小人反中庸’이라 하고‘仲尼祖述堯舜’이라 하여 祖父인 孔子의 字(仲尼)를 그대로 쓴 것이나 屈原이 〈漁父辞〉에서 ‘朕皇考曰 伯庸’이라 하여 父의 字 伯庸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도 字를 弟子나 子孫들도 부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孔子의 제자 子游의 문인들이 지었다는《禮記》〈禮運篇〉에도,‘昔者仲尼與於蜡賓......’이라 하여, 스승인 孔子의 字를 쓰고 있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불리어 지던 字가 號의 使用이 일반화 된 宋代부터는 보편적인 호칭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여 손아랫사람은 윗사람의 字까지 휘하게 되었고, 그 대신 號가 누구나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보편적인 칭호로 다시 등장하였다.
字는 成年禮인 冠禮를 행할 때에 짓게 되는 바 古代에는 관례를 婚禮보다도 중시하였다. 冠禮란 인생살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의식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어른과 아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그 기준을‘머리’에다 두었다. 그래서 ‘머리만 크지 소견은 아이’‘머리 큰 철부지’라는 속담도 있다.
成年儀式도 중점은 머리에 있었다. 남자의 冠禮(元服)는 머리를 가다듬어 冠을 쓰는 儀式이고, 笄禮는 머리를 꾸며서 비녀를 꽂는 의식이다. 머리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아이에서 벗어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人格의 변화를 머리에다 그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머리는 외모(신체)를 대표하는 동시에 생각(정신)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더할 수 없는 靈妙處인 머리는 다른 통과의례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관례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관례에서 주례〔賓〕는 成年이 된 젊은이〔冠者〕에게 세 번 각각 다른 관을 씌워 준다. 평생 쓸 수 있는 관을 한번씩 선 보이는 것인데, 그때마다 축사〔祝〕를 해서 성년이 된 후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 몸가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崔根德, 〈17번째‘成年의 날’에〉,〈조선일보 1989,5,16〉
이렇게 의미 있고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成年이 된 사람으로 항시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德目이 含有된 字를 지어주는 것이다. 字속에는 성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아울러 成年式때에는 字를 지어주는 것은 이제 타인의 존중을 받을 연령에 이르렀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三加禮를 끝낸 후 賓이 冠者에게 字를 지어주고 다음과 같은 祝辭〔祝〕를 읽는다.
이미 예의를 갖추고 좋은 달 좋은 날에 그대에게 자를 분명히 알려주노라. 이 字는 매우 아름다워 훌륭한 선비에게 합당하고 축복받기에 마땅하니 받아들여 길이 보존하라.
純․粹․精․一함을 본받아 生의 指標로 삼고자 해서였다는 것이다. 純이나 粹가 모두 邪惡이나 陰柔가 不雜한 것을 의미 하므로 名과 字가 글자는 다르나 의미는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보면, 金士衡(1333~1407)의 字 平甫는 名에 公平無私를 상징하는‘衡’(저울대)를 썼으므로 字에 同義語인‘平’을 썼고, 安景恭(1347~1421)의 字 遜甫는 名에 쓰인 ‘恭’과 同義語인 ‘遜’을 字로 쓴 것이며, 韓致亨(1465~1502)의 字 通之도 名에 쓰인 ‘亨’과 字에 쓰인 ‘通’이 同義語이다. 金璫(1465~1544)의 字 玉耳는 名과 字가 똑같이 玉으로 만든 귀고리를 뜻하며, 尹殷輔(1468~1544)의 字 尙卿도 名과 동일한 뜻으로 殷나라를 일명 商나라라고도 하며 輔는 輔國者로서 이를 卿이라 하므로 殷輔나 商卿은 完全한 同義語이다. 이렇게 名과 字가 글자는 다르나 의미는 같은 경우는 그 예를 일일히 매거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히 나타난다.
중국 孔子의 제자 宰予(字 子我)의 名‘予’와 字‘我’는 모두 나(일인칭 대명사)라는 같은 뜻이고, 諸葛亮(字 孔明)의‘亮’‘明’도 모두 밝음을 뜻하며, 歐陽修(字 永叔)의 ‘修’와‘永’은 모두 길다는 뜻이고, 曾鞏(字 子固)의 ‘鞏’과 ‘固’도 모두 堅固함을 뜻하여 名과 字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게 지은 것이다.
둘째, 名에 쓰인 글자를 字에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用同字〕
吉再(135~1419. 字 再父)․李冑(?~1504. 字 冑之)․申光漢(1484~1555․ 字 韓之)․ 張志淵(1864·1921 字 志尹) 등도 名에 쓰린 글자를 드대로 字로 썼다.
중국에서는 名과 字를 똑같이 쓰는 일이 많아서, 後周王 思政은 字도 思政이었고 郭子儀는 字도 子儀이었다.
셋째, 名의 意味를 字로 擴充한 경우를 들 수 있다.〔意味擴充(指實)〕
通憲 金景先이 세 아들의 이름을 나에게 지어달라고 청하였다.……맏아들의 이름을 爾瞻이라 하고 字를 子具라고 짓노라. 瞻은 본다는 뜻이요 字를 子具라 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본다는 뜻이다. 《論語》에 “보는 것을 존엄히 하라.”하였으니, 곧 밖으로 드러나는 動作威儀를 통하여 內面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명성이나 널리 알려진 명예를 어찌 언어나 외모로만 얻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內面에 和順함을 함축한 연후에야 꽃다움이 밖으로 발현되는 것이니,……‘瞻’이여! ‘具’를 명심 할지어다. 《詩經》에도 “백성들이 모두 너를 보고 있다.”하였느니라.
이것은 金景先의 세 아들의 名과 字를 지어주고 지은 字設 가운데 長男에 관한 부분이다. 즉 장남의 名을 본다는 뜻인‘爾瞻’이라 하고 字를 모든 사람이 본다는 뜻인 로 한 것은 衆人이 너의 외모와 행동을 보고 너의 內面에 蘊蓄한 和順함을 알 수 있도록 수양에 힘쓰라는 취지에서라고 하였다. 즉 衆人이 본다는 뜻과 外貌로 발현된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함유된 本質․人格을 본다는 의미로 확충하여 字를‘子俱’라 하였다는 것이다.
金汝知(1370~1425)의 字 ‘子行’은 知에는 실천이 따라야 하므로 字를 子行이라 지은 것이고, 李原(1368~1430)의 字가 ‘次山’인 것은 언덕〔原〕보다 높은 것이 山이므로 字를 次山이라고 하였고 李行(1352~1431)의 字‘周道’는 行해야 할 道가 周道이어서였다. 孟思誠(1360~1431)의 字 ‘自明’은 생각하기를 정성스럽게 하면〔思誠〕뜻이 저절로 밝아질 것〔自明〕이므로 字를 이와 같이 지었고 黃致身(1397~1484)의 字‘孟忠’은 몸을 바치는 것〔致身〕이 으뜸가는 충성〔孟忠〕이므로 字를 이같이 지은 것이다. 名의 의미를 부연하고 확충한 字들도 그 예를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보인다.
이는 事나 物의 실제 情況에 맞도록 (즉 名의 情況에 字가 맞도록) 字를 지은 것이므로, 중국 春秋時代 鄭나라 然丹의 字‘子革’은 古代에 皮革은 丹(紅色)으로 물을 들였으므로 名과 字를 이에 맞추어 지었고, 楚나라 公子啓의 字‘子閭’는 古代에는 25家를 里라 하고 里에는 里門이 있어 이를 閭라 하였으며 閭는 밤에 닫았다가 새벽에 열므로 名에 啓(開의 意味)를 쓰자 字에는 閭를 넣은 것이다.
넷째, 名의 뜻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결함을 字로 補充한 경우를 들 수 있다. 〔缺陷補完(對文)〕
중국 韓愈의 字가 退之인 것은 名 愈가‘나아간다〔過也〕’는 뜻이 있으므로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字를‘退之’라 한 것이고, 元나라의 名筆 趙孟頫의 子昻은 頫가 低頭의 뜻이므로 字는 仰頭를 뜻하는‘昂’으로 한 것이다. 權近(1352~1409)의 字가 可遠인 것은 가깝기만 한 名의 결함을 字 可遠으로 보완한 것이기도 하고‘近’을 시발점으로 하여 성실히 노력하면 遠大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으로 字를‘可遠’이라 했다고 볼 수 있다. 즉《尙書》〈皐陶謨〉에, 고요가 왕에게 말하기를“조심하여 그 몸을 닦으며, 생각을 신중히 하며, 九族을 독실하게 대하여, 모든 어진 이들이 힘써 돕게 되면, 그 덕화가 가까이에서 시작하여 먼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방법에 있습니다.”하였는데, 이곳의‘邇(近의 意味) 可遠在玆’에서 名(近)과 字(可遠)를 따다 쓴 것이다. 字로 名의 缺陷을 補完한 字設을 예로 들어보면,
門生인 左副代言 姜隱의 字는 之顯인데 나에게 字設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隱이라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 이치는 隱微하나 사물사이에 발현되면 그 자취가 찬연하게 되니 隱과 顯은 相反되는 것이 아니요, 體와 用으로서 근원이 같은 것이 분명하다.……”
하여, 姜隱이 字를 之顯이라 한 것은 名‘隱’의 뜻이 모든 事物 속에 內在한 本質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字에 쓰인 ‘顯’은 그 本質이 外面으로 발현된 것이니 隱이 體라면 顯은 用오로서 그 근원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顯을 전제로 하지 않은 隱이나 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顯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顯의 所以然과 所有來가 寂然不動한 隱이므로 名에 隱자를 썼으면 字는 당연히 顯자를 써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名이 體에 치우친 결함을 用에 해당하는 字로 보완하여 完全하게 한 것이다.
洪汝方(?~1438)의 字가 子圓인 것도 사람이 모나기만 해서는 안되므로 원만한 품성을 기르라는 취지로 字를‘子圓’이라 한 것이고, 安止(1377~1464)의 자가 子行인 것도 사람이 머물기만 해서는 안되고 행할 일은 행해야 하므로 字를‘子行’이라 한 것이다. 安迢(1420~1483)의 경우 名이 멀다는 뜻의‘迢’이므로 字는 멀리 가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으로‘自邇’라 하였고, 宋千喜(?~1520)의 名이 千 가지 기쁨을 뜻하므로 字는 每事에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기쁨을 누리 수 있다는 뜻으로 ‘懼夫’라 한 것이다.
다섯째, 어떤 사람이 先賢과 名이 같은 경우 字도 그이 字를 그대로 承襲하여 쓰기도 하였다.〔先賢名字承襲〕(思齊)
高麗의 金觀(11世紀人)은 宋의 蘇洵이 蘇軾․蘇轍 등 文名이 높은 아들을 두었던 것을 선망하여 이들의 이름을 소식․소철의 이름을 따서 金富軾․富轍이라 짓고 富軾의 字는 蘇轍의 字 子由를 그대로 썼으며, 李居易(?~1412)가 字를 樂天이라 한 것도 중국 唐代의 詩人 白居易의 字가 樂天이 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自由中國의 曾琦는 宋나라 韓琦를 仰慕하여 名을 그와 같게 짓고 字도 韓琦의 姓을 따서 慕韓이라 하였으며, 莊嚴은 漢나라 嚴子陵을 仰慕하여 字도 慕陵이라 지었으니, 이들의 名과 字도 先賢의 姓이나 名字를 승습한 예로 볼 수 있다.
한편 매우 많은 인물들이 經書의 同一句속에 있는 字를 따다가 名과 字로 삼았다.〔引經典(連類)〕
옛적 大禹의 말을 상고하건대‘惠迪吉 從逆凶 惟影響’宋代에 이르러서는 先儒가 이를 해석하기를 “惠는 順의 뜻이요 迪은 道의 뜻이니 道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吉하고 거스르는 자는 반드시 凶한 것이 마치 형체에는 그림자가 있고 소리에는 메아리가 있는 것과 같다”하였으니 이 말이 멋이 있도다. 이것은 典과 謨(經書의 篇名)가 만세에 교훈을 끼친 것이다. 和州 牧使 金君의 이름이 迪인데 字가 없어 나에게 청하므로 재가 元吉이라고 字를 지어 주었노라.……
이는 金迪(麗末人)《書經》〈大禹謨篇〉에 있는‘惠迪吉’의‘迪’으로 名을 지었으므로 同句속에 있는‘吉’자로 字를 지었다는 것이다.
安省(?~1421).字 日三)은 《論語》〈學而篇〉의 吾日三省吾身〔나는 날마다 매 몸을 세 가지로 반성한다.〕에서 名과 字를 따다 쓴 것이고, 李崇仁(1349~1395. 字 子安)과 鄭克仁(1401~1481. 字 可宅)은 《孟子》〈離婁 下〉의 ‘仁人之安宅也〔仁은 사람이 편안히 안주할 만한 곳이다.〕’에서, 柳雲(1485·1528. 字 從龍)은《周易》〈乾 文言〉의 ‘雲從龍〔구름은 용을 따른다.〕’에서, 金國光(1415~1480. 字 觀卿)은 《周易》〈乾卦〉의 ‘觀國之光〔나라의 빛남을 본다.〕’에서, 邊以中(1456~1611. 字 彦時)은《中庸》의 ‘君子之中庸也 君子以詩中〔군자의 중용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는 것이다.〕’에서, 李德懋(1741~1973,字 懋官)는《詩經 》의‘德懋 懋官〔덕이 높은 이에게는 높은 벼슬을 준다.〕’에서, 각각 名과 字를 따다 지은 것이다. 이런 예는 名과 字를 대부분 이렇게 지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빈번히 나타난다.
이 외에 같은 類에 속하는 物名으로 名과 字를 짓기도 하고〔辨物〕,출생한 地名으로 名과 字를 짓기도 하였다.〔識産〕辨物의 예로는, 중국 春秋時代 衛의 大夫 蘧瑗거원(字 伯玉)은 名 瑗과 字 玉이 모두 구슬을 뜻하며, 우리나라 金璫(字 玉耳)의 名과 字는 모두 귀고리를 뜻하고, 林時莢(字 蓂老)의 名과字는 瑞草인 蓂莢명협(知時草)에서 각각 한자씩을 따다 지은 것이다. 孔子의 아들 鯉(字 伯魚)는 名 鯉(잉어)가 魚類의 일종이므로 字를 伯魚라 한 것이다.
識産의 예로는, 孔子의 父母가 尼丘山에 기도를 드린 후 공자를 낳았으므로 名에 丘, 字에 尼(仲尼)를 쓴 것이며, 公孫龍이 楚의 石龍에서 태어났으므로 名은 龍이라 하고 字를 子石이라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두 자로 된 字에 흔히 쓰이는 父(보)․甫․夫․彦․子등은 남자들의 名字에 붙이는 敬稱․美稱일 뿐 다른 의미는 없으며, 父․甫․夫 등은 뒤에 붙고 (예 : 曺備衡․幹甫 金連枝․謙夫 卓愼 등) 士․彦․子 등은 앞에 붙는다. (예 : 士訥 卞時敏․彦施 邊以中․子行 安止) 등 또 흔히 쓰이는 伯․仲․叔․季 등은 兄弟의 次序를 나타내는 것으로 앞에 붙이기도 하고(예 : 伯牛․叔謙) 뒤에 붙이기도 한다.(예 : 晦叔․震伯 등)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名과 字에는 그 사람이 指向할 人生觀이나 實踐할 德目이 들어있으므로 字를 지어준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사람이 字設을 지어주어 字에 함유된 뜻을 설명하고 그 덕목을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실천할 것을 권면하였고, 특수하고 희귀한 예이기는 하나 字를 名과 연관하여 짓지 않고 號와 연관지어 짓는 경우도 있었고, 弟子가 스승의 字設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權近, 〈義民字設〉, 〈字虛說〉
尊長者나 師父가 字를 지어줄 때에 字設까지 지어주어 字에 함유된 의미를 설명하고 일상생활에서 이를 실천 하도록 권면하기도 하였으며, 有名 文人이나 學者에게 字設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으므로 先賢들의 文集에서 字設을 흔히 찾아 볼가 있다.
참고로 字設 1편만을 게재하고, 이를 통하여 字를 짓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深父說
李穀
鷄林 崔君이 그의 이름을 고치고 나에게 字를 지어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식의 이름을 짓든가, 자기의 이름을 짓는데, 모두들 仁․義․禮․智․龍․鳳․龜․麟․公․卿․輔․弼․邦․國․柱․石 등 이런 수십 자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 사람이 모이면 서로 비슷한 사람이 7,8명이 된다. 그리하여 혹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 서로 서로 저촉되어 분쟁을 면하지 못한다. 처음에 나의 이름이 潪였는데, 내 생각으로는 일반과 다르리라고 했더니, 근자에 어떤 죄를 범한 자가 나의 성명과 음이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江이라고 고쳤으니 다른 사람이 흔히 쓰지 않는 것을 고른 것이다. 그대는 이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를 바라노라.”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면 字를 꼭 지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산은 높기 때문에 쳐다 볼 수 있으며, 물은 깊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 강이라는 것은 많은 물이 모인 것으로, 근원이 멀고 그 흐름이 길다. 또한 모든 개천을 받아들여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된 것이며, 크기 때문에 그렇게 깊게 된 것이며, 깊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므로 침범하지 못하고 자라와 악어와 용과 물고기들이 여기서 살고 있으니, 이로써 그것이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을 볼 수 있으며, 하늘이 이로 인하여 남과 북의 한계가 생겼으니, 이로써 그것이 침범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모든 물건의 이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야만 침범할 수 없게 되는 것인데, 마음을 가지는 것이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감히 이런 의미로 자를 深父라 짓기를 권하면서 책임을 메우려 한다.”
鷄林崔君 更其名 請字於予曰 東方之士名子與自名者 皆以仁義禮智龍鳳龜麟公卿輔弼邦國柱石不出此數十字而已 故十人之會 相似者七八人矣 或困事相犯 未免忿爭 始吾名潪 謂與衆異 近有凶人 與吾姓名其聲相近 故更以江 蓋擇其人所不取者也 吾者其敎之 曰名旣如此 字之何有 山高故可仰 水深故不可測 夫江之爲物 水之者也 其源遠矣 其流長矣 又能納百川而東之 故能成其大 大故能致其深 深故不可測 不可測故不可犯也 龜黿蛟龍魚鼈生焉 于以見其不測也 天之所以限南北 于以見其不可犯也 凡物之理深不可測 然後不可犯 處心行事莫不皆然 敢以彦深父塞責
深父說은 崔潪가 名을 江으로 바꾸고 稼亭 李瑴(穀)에게 字를 지어주기를 청하자 深父라 字를 지어주고, 큰 江은 근원이 멀고 많은 냇물을 받아들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대도 학식과 수양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강처럼 되어야 남이 함부로 범하지 못하고 만물을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字를 深父라고 지어 주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 한편의 字設을 통하여 名과 字의 관계, 字를 짓는 이유 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여자들도 笄禮時에 字를 짓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어서,《禮記》에“笄亦成人之道也 故字之”라 하였고,《春秋左傳》을 비롯한 수많은 典籍에 영자의 字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에게 字를 지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단 許蘭雪軒만은 字를 가지고 있었으니,“蘭雪軒의 名은 楚姬이고 字는 景樊이며 草堂 曄의 딸이고, 西堂 金誠立의 부인이다.”라고 한 난설헌의 아우 許筠의 글을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자.호.명(字.號.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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