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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주일설교 누가복음23:44-49
본문:누가복음23:44-49
제목:십자가에서 죽으시다!
오늘은 누가복음23:44-49의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히9:27)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일은
한번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우리는 봅니다.
그렇게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도, 엄청난 지식을 가진 사람도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안 죽을 줄 알고 안 죽을 것처럼
살던 사람도 결국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 죽음을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전도한 이보다
죽으면서 전도한 이가
더 많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교회에서도 조부모님의 죽음을 보고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예수를 잘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 또한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이렇게 목사로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죽으심을 봅니다.
우리의 주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상의 칠언이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마디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단 한 마디만
하신 걸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따라
일어난 일들 혹은 기적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살피면서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1.해가 빛을 잃었다.
제 육시는 낮 열두시를 말합니다.
낮 열두시는 해가 정 중앙에 떠 있어서
그림자조차 없는 때 곧 가장 밝은 때입니다.
그런데 낮 열 두시부터 세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 죄를 향하신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그 얼굴의 빛을 가리우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밝아야 할 그 시간에
가장 어둡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때가 유월절이기 때문에 보름이었고
개기일식도 일어나지 않는 때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기 일식은 최대 8분
실제 관측할 수 있는 시간도 2-3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해가 빛을 잃은 시간은
세시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루살렘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은 이전 역사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셔서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
온 백성들이 다 집중하여 보는데서
언약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때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래서 우리의 죄가 그에게 담당시키었음을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속죄의 피를 흘리시며 죽으신 때도
이와 같은 징조와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오 밝게 빛나던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가득하여 오후 세 시까지 그러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불신의 세상을 위하여
하나의 표적이었습니다.
대낮에 어둠이 임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휘장 곧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그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 성전에서 일하던 제자장들과 레위인들의
마음을 놀라움으로 눌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 휘장이 있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표시였습니다.
일 년에 한번씩 그것도 대제사장 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해가 빛을 잃었을 뿐 아니라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막힌 담이 헐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이고
그것은 곳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 예수를 따라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며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일이었고 역사에 단 한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징조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본성의 어리석음과 불신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실 때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기적적인 일들을 일으키시는 것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간에
강권적으로 인간의 눈을 뜨게 하시며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난 과거에도 자주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복음 시대를 시작하시면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는 비웃고 불신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연의 운행도 정지시키실 수 있습니다.
땅이 있으라 명령하시듯이
쉽게 창조의 체제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놀라운 일들을 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해를 가려 어둠이 있게 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을 찢어 길을 열어 주시고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예수님이 열어 주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 열심에 우리는 응답하여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본문은 주님이 죽으실 때
하셨던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말씀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평범한 사람의 단순한 죽음과
다른 신비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하신 분은 인간이시면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성과 신성은 불가분리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신성은 죽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7-18)
그리스도는 우리가 늙거나 병들어서
죽는 것처럼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의 뜻을 따라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주님의 죽음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죽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감당하지 못해
공포감으로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정복된 원수로 취급해야 합니다.
죽음이 주는 모든 공포나
고통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무력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잠시동안은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으나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원수가 다가오는 것을
침착함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가 쓰러진 후에,
우리의 장막이 무너진 후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어가는 스데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이들어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1:12)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까지 그가 나를 지키실 줄 확신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으로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그런 복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은 그런 복된 자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3.백부장의 선언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십자가 형을 관활하는 자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지켜본 결과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이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백부장만이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을 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도 다 보았지만
백부장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뭔가 느낀 것은 있었는지
단지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구레네 시몬처럼 그 후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 가운데서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관리로서
그 자신이 불의한 행위를 지휘하고 있으며,
무죄한 사람을 십자가 형에
처형했다는 확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라보던 무리들이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고
온갖 말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잘못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알았기에 마음이 찔렸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날 밤 무거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초조하게 갈보리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그냥 갈보리를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현장을 지켜본 결과 이러한 일이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였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의인이심을 죄 없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알고 보았기에
그렇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양심에 따라 그는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이 양심에 따라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고백하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구경하러 모인 이들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한 일이 괜한 짓이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무모한 짓을 하고
잘못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역시 백부장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이 정녕 의인이라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슴만 쳤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양심의 소리를 들었지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힘이란 큰 것입니다.
양심이란 사람의 마음에 행사하는
영향력이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권좌의 앉은 군주들의 마음도 공포에 떨게 합니다.
양심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떨고 흔들리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회개시키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이 있다는 것은
동물과 다른 사람의 가장 축복된 부분이며,
복음 전파자를 위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베드로가 전했을 때
사람들은 양심에 찔려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슴을 쳤기에 그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적인 평안을 바라는 사람은
그의 양심에 거스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양심을 잘 활용해야 하며, 굳게 지키며,
그것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로 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양심이 성령으로 깨우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도록
매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요한의 말슴을 매우 의미심장 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쩌면 양심의 소리에 바르게
응답하는 자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죽음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되어 지는 일을 보고도 마음에 흔들림도 없고
회개도 없고 행동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최소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른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