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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9월28일(토요일) 고양누리길 제 11코스 송강누리길 탐방일정
탐방지 : 고양누리길 제 11코스 송강누리길
[제 11코스 송강누리길 : 풍광이 아름다운 하천변 메타세콰이어 길!
북한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장관인 공릉천 물줄기를 따라 걷는 평화로운 길이다. 쥬쥬테마동물원에서 출발해 공릉천 원당교를 지나면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장관을 이루는 가로수길을 걸을 수 있다. 공릉천 물길과 전원마을을 따라 걷다보면 조선조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정철 선생이 시를 지었던 송강마을과 월산대군사당을 볼 수 있다
코스안내
코스 쥬쥬테마동물원 ▶ 원당교 ▶ 메타세콰이어길 ▶ 송강문학관 ▶ 월산대군사당
거리 총 6.6km 소요시간 약 1시간 40분
교통정보
테마파크 쥬쮸(쥬쥬테마동물원)으로 오실경우
마을버스 038 일반버스 85, 1082
필리핀참전비로 오실 경우
마을버스 025, 037 일반버스 30, 82, 9709, 9710
주요기점 안내
쥬쥬테마동물원
쥬쥬테마동물원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고양의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쥬쥬테마동물원에는 어린이들이 호기심을 갖게하는 악어와 뱀 등 파충류 다량 보유하고 있는 전문 동물원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오랑우탄과 원숭이도 많이 있다. 전시시설은 작고 오밀조밀하나 직접 만저볼 수 있는 생생한 관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관람시간 : 3월~10월 (봄~가을) 10:00~19:00 / 11월 ~2월 (겨울) 10:30~18:00
* 폐장 2시간 전에 입장을 해야 원활한 관람이 가능
경기도 덕양구 관산동 290
02-909-0497
메타세콰이어길
공릉천 둑방길에 있는 아름다운 가로수길. 원당교를 지나면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가 장관을 이룬다.
천천히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은 길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보와 송강마을
송강보는 조선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이 낚시하며 유유자적 시를 썼던 곳이었으며, 송강마을은 정철이 시묘살이를 했던 마을이다. 송강을 사모했던 강아아씨묘도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월산대군사당 - 문화재자료 제79호
월산대군 이정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중수한 것이다. 네모난 담장 중앙에 삼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당을 모셨는데 담장은 개인 사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대석을 하단으로 축조하였고 석조 배수구까지 갖춘 특이한 구조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 맞배기와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앞면은 齋戒行事에 알맞도록 1칸을 개방하였고, 영조 대왕이 친히 ‘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다. 신주를 운반할 때 쓰던 요여가 당내에 보존되어 있다.
경기도 덕양구 신원동 427]
탐방코스: [필리핀참전비 버스 정류장~송강시비공원~강아아씨묘~월산대군 묘~월산대군 사당~쥬쥬테마동물원~쥬쥬테마동물원 정류장]
탐방일 : 2024년09월28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12분 소요)
11:00~11:25 연신내역.연서시장(중) 정류장에서 9709, 9710, 9709N, 9710-1 버스를 타고 필리핀참전비 버스정류장으로 이동 [25분, 13개 정류장 이동]
11:25~12:05 필리핀참전비 버스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메타세콰이어길을 거쳐서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570 번지에 있는 송강시비공원으로 이동 [2.5km, 40분 소요]
[굿모닝 내셔널]'송강 시비공원' 개장…400년 전 문학 체험
중앙일보 기사 입력 : 2018.03.10. 00:01
전익진 기자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늘 같은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갑사오리.’
(해석)
‘아버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께서 나를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셨더라면 이 몸이 살아 있었겠는가.
하늘같이 높으신 은덕을 어느 곳에 갚아 드리오리까.’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인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이 지은 시조 ‘훈민가(訓民歌)’의 첫 구절이다. 송강 선생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한글 가사와 83편의 시조, 760여 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훈민가는 송강 선생이 1580년(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부모에 대한 효심을 주제로 지은 작품이다.
훈민가의 주요 내용을 담은 시비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 내 39번 국도변 ‘송강 시비공원’에 설치돼 있다. 최근 개장한 송강 시비공원에는 송강의 작품 내용이 암석에 새겨진 시비 12개가 전시돼 있다.
고양시 덕양구를 가로지르는 ‘공릉천’ 일대가 송강 정철의 이야기를 담은 ‘생태문화 공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경기도는 2015년 12월부터 추진해온 ‘고양 공릉천 고향의 강 정비사업’을 지난달 12일 준공하면서 송강 시비공원을 조성했다. 이 사업은 고양 덕양구 신원동에서 대자동 일원 공릉천 2.4km 구간에서 진행됐다.
경기도는 송강이 고양 공릉천변에 머물며 부모의 묘를 보살피고, 작품활동을 했던 이야기를 기초로 ‘만남의 길’, ‘사랑의 길’, ‘약속의 길’ 등 3개의 테마 공간으로 공원을 꾸몄다. 총 사업비 154억6000만원을 들여 홍수방어벽과 제방·석축 등을 보강했고, 송강 시비공원 등 생태문화 체험장과 생태 학습장·잔디광장·산책로·자전거 쉼터·잔디공원 등을 마련했다.
안용붕 경기도 하천과장은 “공릉천 고향의 강 정비사업은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지역의 명소를 만드는 사업”이라며 “수해로부터 안전하고 주민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는 하천 공간을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업은 하천의 홍수 예방은 물론 하천 변에 문화·체육시설 등을 설치해 역사와 문화·자연 등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으로 하천을 정비해 나갈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송강 시비공원 탄생의 숨은 주인공은 ‘송강 시비공원 조성위원회’ 위원장인 이은만(77) 문봉서원 원장이다. 그는 1997년부터 사비를 털고 시민들의 참여를 받아 송강이 살았던 이 마을에 시비와 표지석을 갖춘 자그만 시비공원 조성에 나섰다. 이후 경기도의 공릉천 정비사업과 병행해 시비공원 완성에 기여했다.
그는 송강마을과 송강 선생의 각별한 인연에 착안해 사업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송강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송강마을에 살았고, 이곳에서 부모가 별세하자 3년씩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공양 올리는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수년간 살며 작품활동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곳은 400년 한국 가사 문학의 과거와 현재·미래가 소통하는 문학 관광 명승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비는 개인과 단체의 후원으로 기증받고 있다. 그는 시민들로부터 송강 가사집에 있는 시를 새긴 빗돌 30여 개를 추가로 기증받아 올 연말까지 공원 내 산책로 주변에 시비를 새로 설치할 예정이다. 현재 시비 5개가 추가 기증된 상태다. 시비 뒷면에는 기증자 이름과 이력 등도 희망에 따라 새겨 넣는다. 문의는 송강 시비공원 조성위원회(010-2276-7215)]
12:05~12:20 송강시비공원에 있는 송강정철시비를 사진촬영
12:20~12:30 강아아씨 묘로 이동
[송강 정철과 송강마을
송강보는 조선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이 낚시하며 유유자적 시를 썼던 곳이었으며, 송강마을은 정철이 시묘살이를 했던 마을이다. 송강고개 방향으로 100m쯤 올라 우측의 임도 같은 묘소 길로 들어서면 송강을 사모했던 강아아씨의 묘를 만날 수 있다. 강아아씨묘 옆에는 송강의 바로 위의 형 정황의 묘와 그의 딸이며 선조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의 묘가 있다. 정철의 조카였던 정귀인은 자녀를 두지 못하고 병으로 23세에 돌아가셨다. 묘지명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최립이 지었다고 한다. (행주대첩 초건비도 최립이 지었다.)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정철의 큰형 부부와 부모님이 묻혀 계시고 그 묘소 아래 송강의 초장지가 있다.
송강 정철은 돈령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 을사사화에 부친과 형이 연루되기 전까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손자 정양이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할 때까지 송강은 부묘 묘 앞에 71여 년간 묻혀 계셨다. 진천으로 묘가 옮겨지면서 강아 아씨와는 그렇게 멀리 이별하게 되었다.]
[자미화, 그대 이름은 강아
강아와 정철의 사랑이 원조교제? 천만에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00.12.05. 16:31
글 : 송복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송강 정철의 '자미화'라는 시다.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기에 거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말라는 내용을 시에 담아 남겼을까. 어쩌면 이 시를 지은 정철의 속마음에는 이 여인에 대한 예찬과 질투가 함께 들어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너무나 고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혹, 그랬다간 민들레 홀씨처럼 훌쩍 떠나버릴 지도 모를 그래서, 시속에 우려와 경고를 섞어 노래한 것인지도...
이토록 정철이 시에 담아 극찬을 한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시는 정철이 1582년 9월, 전라도 관찰사로 있다 도승지에 임명되어 한양의 임지로 떠나며 지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 시는 누군가와 헤어지며 지어진 별곡이라는 얘기다. 정철의 주특기인 별곡 말이다. 자미화는 백일홍을 가리킨다. 백일홍의 미색이야 누군들 모를까. 그렇다면 이 백일홍에 비견되어진 여인은 누굴까.
바로 이 여인의 묘가 고양시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이라는 곳에 가면 이 여인의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사연 때문인지 봉분의 오롯함이 주는 맛은 남다르다. 이름하여 강아(江娥) 아씨.
이 봉분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한성대 정후수 교수에 의해서였다. 정철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강아 아씨와 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강아 아씨의 묘비문과 묘 정비가 이루어져 제대로 된 봉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강아와 정철의 만남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건 1581년, 16세의 꽃 같은 나이였다. 그러나 당시 정철의 나이 46세. 16세의 처녀와 46세의 중년남자의 만남은 지금으로 말하면 원조교제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데 하물며 나이가 무슨 장애가 될것이겠냐마는 요즘 눈으로 보면 어쨌든 수상쩍을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에는 방식이 있는 아닐까. 아마 강아와 정철의 사랑방식이 요즘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분명 원조교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조교제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70년대 '아저씨'영화로 분류되는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도 10대와 중년남자의 사랑 얘기다. 그러나 그걸 원조교제로 보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강아와 정철의 사랑얘기가 원조교제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것은 남원에서였다. 강원도관찰사로 있다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의 신분에 비해 당시 강아의 신분은 기생이었고 이름도 자미였다. 당시 풍류객들이야 기생과 시, 여행을 빼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 정철 역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울 풍류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미와 정철의 만남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다음해인 1582년 9월 정철은 도승지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나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둘의 교제는 그게 전부이다.
당시 관아에는 객지에서 관리를 하는 벼슬아치에게 아내를 대신할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하는 기생제도가 있었다. 자미의 임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1년 동안 강아는 정철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철은 자미화 어쩌구 하는 시 한 토막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여기서 얘기가 끝났다면 우리는 강아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강아와 정철의 남원생활을 월탄 박종화는 '자고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서 지고순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1년 동안 정철은 자미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으로 자미를 대했고, 자미 역시 지성으로 정철을 모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미를 강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강(江)은 정철의 호 송강의 '강'자를 따온 것이고 아(娥)는 자미의 뛰어난 미모를 비유해 붙여진 것이었다.
강아와 정철의 재회는 남원에서 헤어지고 근 1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정철의 유배지에서. 정철은 1591년 6월 명천의 유배를 시작으로 진부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게 된다. 정철과의 재회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강아였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정철이 있는 강계로 강아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에 정철은 유배지에서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정철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로 향한다.
이때 강아는 정철에게 같이 가게 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한다. 왜군이 우글거리는 전쟁터로 가는 길에 아녀자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남원에서의 만남 이후 강아가 정철을 다시 만나 보낸 기간이 약 1년여 가까이 되지 않나 싶다. 이 재회가 이승에서 만난 강아와 정철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내려가 있던 정철은 다음해 1593년 1월 다시 북쪽의 조정으로 돌아온다. 1월 8일 평양성 함락작전이 펼쳐졌고, 선조는 의주를 떠나 곡산을 거쳐 정주에 이르러 있었을 때이다. 1월이면 강아는 왜장 고니시의 품안에 있을 때이다. 정철을 지아비처럼 섬기던 여인이 왜장의 품안에서 놀아나다니?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도체찰사를 맡아 남으로 내려가는 정철에게 동행을 거절당한 강아는 정철이 있는 남으로 내려가다 왜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의병장 이량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왜군의 군사정보를 빼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것이 강아가 당시 왜군 주력부대의 수장인 고니시에게 몸을 맡기게 된 사연이다. 논개와 비슷한 이야기구조이지만 여기서는 정철과의 애뜻한 사랑얘기가 주가 된다.
정철은 1593년 5월 중국 명나라로 사은사로 갔다가 12월, 돌아오자마자 그 달 18일 강화에서 죽음을 맡는다. 장사는 다음해 2월 부모의 묘가 있는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지내졌다. 그때 정철의 나이 58세요 강아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어느 해부턴가 정철의 묘에는 계절에 따라 들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곤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 가끔 띄는 사람은 고운 자태의 비구니였다. 그녀는 묘소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정성껏 주위의 잡풀을 뽑곤 사라졌다.
언제부터 누구의 입에서였는지는 몰라도 비구니의 법명은 소심(素心)이요, 정철을 사모하던 강아 아씨라는 말이 전해졌다. 왜장 고니시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철에게 사죄하기 위해 강아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속세와의 인연을 뒤로하는 출가승의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차마 잊지 못할 속세의 인연 하나, 강아 아씨 소심은 끝내 정철을 잊지 못하고 정철의 근처 절에 있으면서, 계절마다 묘를 돌보는 것으로 못다 이룬 사랑을 달래고 있었다. 그 뒤 강아 아씨 소심은 결국 송강마을에 돌아와 살다 이승을 하직했고, 정철의 선영에 묻히게 되었다.
이 얘기의 대부분은 월탄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들이다. 문헌의 출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현재 강아 아씨의 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로 보여진다.
또 문중에서는 제사 때 강아 아씨의 묘에 물림상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어쨌든 강아와 정철의 이런 사랑얘기라면 훔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라면...
덧붙이는 글 | 송복남 기자는 시사월간지 GYpeople의 편집장으로 있으며 우리나라설화와 전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철을 사랑한 의기(義妓) 강아의 사랑과 한
글 : 제이풍수사
글 작성일 : 2022. 11. 3.
1. 강아와 정철의 만남과 이별
1) l58l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던 정철은 남원의 광한루를 신화적 공간으로 만들면서 오작교 등의 이름을 붙였고, 자미(紫薇)라는 어린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었다. 자미는 배롱나무를 가리키며, 여름날에 백일 동안이나 빨간 꽃을 피워 열녀나 충신의 묘 앞에 주로 심는다, 꽃도 예쁘지만 매끄러운 줄기가 구불구불 뻗어 관상수로 격이 높고 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한다.’이다. 정철이 그녀를 사랑하자 남원 사람들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이름을 따와 ‘강아(江娥)’라고 불렀다. 그런데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된 정철은 한양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때까지 노류장화로 실컷 즐기고선 혼자만 쏙 빠져나가는 암체 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벼슬아치에게 기생은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어 정철의 아래의 시를 강아에게 지어주며 아쉬움을 대신했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가 곱게 펴 一園春色紫薇花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纔看佳人勝玉釵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莫向長安樓上望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네 모습 사랑하리라 滿街爭是戀芳華
2) 강아는 첫사랑에 대한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애꿎은 정철이 피해를 입는다는 게 괴롭고 서글펐다. 그래서 10년 동안이나 정철을 만나지 못하다가 그가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천 리 길을 달려가 잠깐 만난 뒤 또 다시 헤어졌다. 한양으로 내려갔던 강아는 임진왜란 중 다시 강계를 찾았으나 그때는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이 강계를 떠난 뒤였다. 정철이 평양을 향해 떠났다는 말을 들은 강아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왜적에게 붙잡혔다. 궁지에 몰렸을 때 정철의 제자인 이량(李亮)을 만났고, 그의 권유로 자신의 몸을 바쳐 일본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유혹해 조선군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고니시에게 몸을 더럽힌 강아는 더 이상 정철을 섬길 수 없자, 소심(素心)이란 여승이 되어 남은 생애를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정철의 한을 푸는데 바쳤다. 강아의 사랑은 오직 한 남자를 향한 정절 그것이었다. 그 후로 정권이 바뀌어 정철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자 송강 마을을 찾아와 어깨조차 다독거려주지 않던 정철의 묘를 돌보다 그곳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철의 가혹함을 원망하며 그녀를 정철의 묘 근처에 묻어주었다.
2. 홀로 외로운 강아의 무덤
1)고양의 송강마을
1)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 마을은 장의동, 지실마을에 이어 정철에게 세 번째 고향이다. 그곳에는 부모의 묘가 있어 정철이 6년간이나 시묘를 살았고, 그리고 많은 시간을 보내며 시작(詩作)에 몰두한 곳이라 곳곳에 그가 머물던 자취를 돌아보게 한다. 현재 송강 마을은 화산(華山) 자락에 20여 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대개는 규모가 큰 갈비음식점이다. 마을 입구에는 고장의 자랑거리가 된 ‘송강정철시비’가 우뚝 서있고, 마을 안쪽에는 산을 배경으로 정갈한 한옥의 모습인 송강문학관이 있다. 그곳에는 현재 송강 고개, 송강 저수지, 송강 낚시터 등 정철의 호를 딴 지명들이 남아있고, 송강문학관의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는 시작(詩作)에 몰두했던 문인의 자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진천에 있는 정송강사와 달리 고양의 송강문학관은 운영이 초라하다. 정철 가족의 족보와 정기명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을 뿐 그 외에 문학작품, 친필, 유품 등 정철과 직접 연관이 있는 자료는 없다. 1570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정철은 신원동의 화산에 묘를 썼고, 3년이 지나 모친이 또 사망하자 쌍분으로 모신 뒤 여막을 짓고서 효의 근본을 실천했다. 그가 시묘를 살던 여막은 아직도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현재 연일 정씨 선산에는 정철의 부모 묘, 셋째 형인 정황(鄭滉)의 묘 그리고 장자인 정기명과 장손인 장운의 묘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부친의 묘 아래에 있던 정철의 묘는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빈터로 남아있다.
2)송강 마을은 농촌의 정취가 아직 남아 사위가 고즈넉한데, 큰 음식점들이 들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송강문학관을 지나 좌측의 산을 오르면 정철의 부모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유침은 마흔 살이 되도록 벼슬이 없다가 큰딸이 인종의 후궁에 간택되자 음보로 돈녕부 판관이 되었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리면서 유배를 당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었다. 묘비에는 '有明朝鮮贈議政府領議政迎昌府院君行敦寧判官鄭公惟沈之墓.贈貞敬夫人竹山安氏祔左'라고 씌어 있고, 묘역에는 상석과 문인석 그리고 망주석이 격식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묘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정철을 사랑했던 강아라는 기생의 무덤이다. 송강문학관에서 우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나타나는 작은 묘가 그녀의 것으로 본래 그곳에 있던 정철의 묘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었다.
2) 홀로 있는 강아의 묘
1)마을 가운데를 지나 산 넘어 가는 오솔길 오른쪽 능선에 강아의 묘가 있다. 묘 앞에는 널찍한 상석이 바닥에 철석 놓여있고, 오른쪽에는 ‘義妓江娥墓’라고 쓴 사각형 묘비가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돌보지 않았던 묘지는 주변의 초목을 베어내 전망은 트여 보이나 봉분은 주저앉아 한쪽이 무너졌고 높이는 두자도 되지 못할 만큼 작아졌다. 보기가 참 안쓰럽다. 그것도 잔디가 모두 벗겨져 나가고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슬프다 못해 서러운 모습으로 비춰진다. 정철의 묘는 사후 72년이 지나 진천으로 화려하게 이장되었다. 하지만 언덕을 너머에 있던 낭군만을 바라보던 강아는 아직도 함께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다. 평생 동안 외줄타기로 한 남자만을 사랑한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한이 되어 남았을까? 매년 4월이면 이름 모를 붉은 꽃이 마치 피를 토하듯 그녀의 무덤 위에 피어난다고 한다.
2)강아 묘는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모든 사랑을 겸손하고 진실되게 만들고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강아의 묘를 바라보면 뜻 없는 눈물이 그렁그렁 눈에 맺히고 목이 멘다. 때때로 슬픔은 보석처럼 아름답다.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 우린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가 싶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슬픔을 통해 삶의 본질이 드러나면서 잃었던 인성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강아는 살아서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정철 대신 외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우측의 임방(壬方)과 을방(乙方)에서 도래한 물이 병방(丙方)으로 빠지는 수국에서 묘에는 축간 잠룡(丑艮潛龍)이 입수했고 묘의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3. 정철과 기생 진옥의 해후(정철과 진옥이 남긴 시조를 근거로 고제희 창작글)
(때는 조선 중엽, 평안도 강계 고을의 어느 술집이다. 허름한 초가집이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반 쯤 열려진 사립문 가론 “酒(주)” 자가 솟대 높이 펄럭인다. 앵두나무에 그늘 진 샘물 옆엔 장독대가 아담하고,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보름달은 우물 속에 가득하다. 밟으면 삐걱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툇마루, 그 아래 댓돌에는 먼 길을 온 듯한 남자의 태사화(太史靴)와 여인의 나막신 한 쌍이 나란히 놓여있다. 창호지에 비친 등잔불은 소소한 바람에 깜박거리고 술상을 마주한 남녀의 그림자 또한 정답게 어른거린다. 지붕 뒤쪽에는 늙은 감나무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잔가지에 붙은 이파리와 몇 개 남은 홍시가 둥지로 날아드는 까치의 날개 짓에 놀라 흔들거린다. 텅 빈 마당은 교교한 달빛이 밝기만 한데, 부엌에선 아직도 저녁연기가 훈훈히 새어 나온다. 방안에서 나누는 남녀의 나직막한 음성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섞여 분명치가 않다.)
진옥: (술잔에 술을 따른다) 나리, 지난 일은 덮어두시고 오늘 밤은 어둠을 밝혀 인생의 덧없음이나 얘기하시죠. (호족반 위에는 술이 담긴 호리병이 놓여있고, 그 옆에는 여인이 동네를 몇 바퀴나 쫓아다니며 기필코 잡아 올린 암탉이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나자빠져 있다. 종지에는 간장이 찰랑거린다)
정철: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언제인가 그랬지. 암행어사가 되어 자네 집을 찾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 때만 하여도 자네의 얼굴은 참으로 고왔지. 경국지색이란 말은 아마도 자네를 두고 한 말이었을 걸세.(다시 눈을 감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진옥: 아이, 나리도 참. 잘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천한 것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오셨으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세상에 귀한 것도 많으나 남여의 정분 또한 잘만 가꾸면 금은보화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여인이 닭살을 발라내더니 간장에 찍어 권한다)
정철: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언제던가? 그러니까 내가 1562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야. 관북지방으로 암행감찰을 나가던 차에 여기를 들렸지. 아, 그 때만 해도 세상은 부러울 것이 없었고 인생도 자신 만만했는데…. (빈번한 유배 생활로 정철은 많이도 늙어 보였다)
진옥: 호호, 나리처럼 패기있고 호방한 사내는 처음이었어요. 스스로 정진사(鄭進士)라고 소개하셔서 저는 정말로 진사인 줄 알았어요. 어명을 받들고 암행감찰을 나온 어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 날 밤, 나리는 고을 군수와 함께 총석정에 올라 진탕하게 노셨지요. 두주불사로 술을 마시고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저를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 날로 저는 죽는 줄만 알았어요. 왠 남자가 그렇게도 힘이 솟는대요. 호호.(진옥의 웃음에 교태가 자르르 흐른다)
정철: 허허, 그랬던가. 그 때처럼 내 마음이 사로잡혀 보기도 처음일세. 몇 일을 더 묵고 싶었지만 어명을 받고 암행감찰을 나가던 신분이라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지. 헤어지면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생각나는가?(정철의 얼굴에 잠시 아쉬운 빛이 내비치더니 술잔을 들어 진옥에게 권한다)
진옥: (황공스러운 듯 술잔을 옆으로 비켜 술을 받는다) “십 년 후에는 감사가 되어 다시 오리라.” 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 대답은 사실 괜히 해 본 말이었어요. 서운했다면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암행어사라면 당연히 신분을 숨긴다고 들었어요. 헤어진 옷에 갓도 찢어지고 잠은 주막에서 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리는 어사 신분에 맞지 않게 사또를 부추기더니 보란 듯이 광란의 밤을 보냈어요. 그러니 어떻게 나리를 어사라고 생각 들겠어요. 기껏해야 고관대작의 개망나니 아들이나 사또의 약점을 잡고 행패를 부리는 건달로만 알았지요. 지난 일이지만 죄송해요.
정철: 그래서 “감사는 귀하고 높은 벼슬입니다. 그러니 그 보다는 찰방(察訪)이 얻기 쉽고 빨리 올 수 있을 겁니다.”하며 되바라지게 쏘아 댔구먼.
진옥: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진옥이 눈을 찡긋하며 치마를 살짝 들썩인다. 여인의 살 냄새가 정철의 코로 뜨겁게 파고든다)
정철: 허허. 죽고 사는 일은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내가 자네의 생사를 주관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시상이 하나 떠오르네. (술잔을 든 정철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십 년 전의 약속이/ 감사냐 찰방이냐 였는데/
비록 내 말이 맞기는 했으나/ 모두가 귀밑털이 반백으로 세었네
진옥: 나리의 시재(詩才)는 참으로 천하의 으뜸입니다. 비록 일연탁생(부부의 인연)의 맹세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죽도록 모셔도 후회가 없을 분입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진옥은 호기심이 가득하여 술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정철: 나는 아니꼬운 것을 보고는 도저히 못 참는 성질이야. 명종 임금은 나를 보고 ‘백관들 가운데 우뚝 솟은 관리요, 궁전의 호랑이다’라고까지 말했지. 조정이 동서로 갈려 박 터지게 싸우자 나는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됐지. 그리고 꼴같잖고 돼 먹지 않은 동인 놈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쫒아 내려고 했지.
진옥: 저도 소문을 들었어요. 이발과 논쟁을 벌이던 중 그가 대들자 그의 얼굴에다 침까지 뱉었다면서요. 점잖은 선비로서 너무 경박하게 행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1997년 여름의 일입니다. 신한국당에서 대통령에 출마할 후보를 경선으로 뽑았는데 이회창씨가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도 치루기 전에 황낙주라는 의원은 그의 부인을 ‘영부인’이라 불렀어요. 늙은 나이에 체면을 잃어 세상의 비웃음을 샀어요. 역사는 한 인간의 가치를 가장 적고 추한 것에서 찾아 내 그를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 꽃다운 이름은 백 년을 가고, 더러운 이름은 만 년을 간다)이란 말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작은 것을 소흘리하면 모두가 빛을 잃고 말아요.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씨 역시 그랬어요, 대통령에 오른 뒤, 햇볕정책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아들들이 뇌물 비리로 감옥을 가자 무력한 통치자로 낙인찍힐 지경이었지요. 공인은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도 엄정히 관리해야 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잖아요.
정철: (멋쩍어 머리를 긁적이자, 비듬이 술상에 눈발이 되어 떨어진다.) 허허.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나. 임금이 눈이 어둡고 마음이 바르지 못해 동인들을 조정에 세우자, 나는 벼슬을 버리고는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갔어.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화병이 생겨 죽을 지경이었어.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 그래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담아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같은 가사를 많이 지었지. 후세 사람들이 모두 가사문학의 백미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이야. 하모!.
진옥: (눈을 훑기며) 세상에서는 나리를 대 시인이며 풍류가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렸어요. 오히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변덕도 심한 모순투성이 인물에 가까워요. 그리고 나리가 지은 가사들은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부른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벼슬길에 대한 한과 향수를 달래는 넋두리에 불과해요.
정철: (진옥이 자기를 기회주의적 위선자로 낙인찍어 독설을 퍼붓자 속이 타는 지 술잔을 급히 털어 넣고서 진옥에게 술잔을 넘긴다) 허허. 성미 하나는 옛날과 추호도 변함이 없구먼. 혹시 자네는 벌 띠가 아닌가?
진옥: 나리, 벌 띠가 어디 있어요? 혹시 치매에 걸리지 않았어요? 치매는 무서운 질병이어요, 만약 계단에서 엎어졌을 때, 내려가다 엎어졌는지 혹은 올라가다 엎어졌는지 생각나지 않으면 중증이어요,
정철: 됐네, 됐네. 하도 쏘기만 하니까 해 본 말일세. 그렇지만 그 가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네. 생각해 보게. 모두가 한문으로 지은 글만 선비의 글로 여기던 시절이 아닌가. 한글로 지었으니 창작성도 돋보이고 또 백성들도 쉽게 뜻을 알아 한글의 보급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네. 한글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 타 만든 소리글자로 매우 과학적이며 위대한 문자야.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보물로 인정받을 날이 올 걸세. 선각자는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의 본분을 지켜야 해. 그래야만 잘 되었을 때 그 잘된 것이 더욱 빛나는 법이야. 만약 어렵다고 해 본분을 지키지 못하면 잘 된 후에도 그 빛을 잃어. 사람이 명성은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순식간이지. 그렇지 않은가?
진옥: 옳으신 말씀이여요. 자, 어서 술이나 더 드시지요. 모두가 허망한 인생이고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 뒤죽박죽 세상이여요.
정철: 나에게 황금시절이 있었다면 아마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시절일거야. 미개한 백성들이 불쌍해 ‘관동별곡’을 지었고, 그 노래를 기생을 통해 유행시켰어. 노래가 널리 퍼지자 백성들의 마음도 많이 순화되었지. 지금 와 다시 읽어보아도 금강산의 절경과 관동팔경의 승경(勝景)을 너무나 잘 표현한 거야. 길에 얽힌 고사(故事)와 인생의 회한까지 노래했으니 당연히 가사문학의 백미일 거야.(다리를 풀고 자세를 느긋이 고쳐 잡는다)
진옥: 나리, 그렇지 않아요. 선정으로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할 목민관이라면 당연히 빠른 일정을 택하여 부임해야 했어요. 그런대도 나리는 오랜만에 찾아온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일부러 먼 길을 택했으니, 사치스런 정치인이 유람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시인이 아닌 정치가로 볼 때, 나리의 마음에는 진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신연군(忠臣戀君)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워요.
정철: (자세를 바로 앉으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허허. 내가 지어 퍼뜨린 훈민가도 있지 않는가. 백성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그래서 거친 마음들도 많이 순화시켰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걸세.
진옥: (손을 내 저으며) 거짓말도 성심성의껏 해야 통하는 법이지요. 300년이 흐른 뒤에 신응조(申應朝)라는 사람이 강원도를 갔데요. 그런데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래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가 노래를 알고 있는 늙은 기생을 찾아가 다시 유행시켰다고 합니다. 노래가 오래도록 전해지지 못한 것을 각박한 민심 탓으로 돌리면 잘못입니다. 나리의 뜻이 아마도 민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정철: (말이 딸리자, 정철은 화제를 노련하게 돌린다) 자, 이제 부질없는 인간 사를 버려두고 그대와 함께 술이나 마셔 만고의 시름을 잊고 싶네.(정철이 ‘장진주사’를 허무와 적막에 휩싸여 읊는다)
한 잔 멋세 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산가지 꺾어 수 놓고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줄이어 매어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우러보나(생략)
진옥: (감격에 겨워) 나리는 역시 호방하고 풍류를 아는 분입니다. 비록 전원을 즐기고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술을 핑계 삼아 세상에서 몸을 보전하셨지만 그래도 나리만한 어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철: 하하. 이제야 자네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구먼. 이항복은 나를 가리켜, ‘반쯤 취했을 때 손뼉을 치며 얘기하는 것을 보면 신선과 같다.’라고 했지. 자, 술이나 따라보게.(진옥이 술병을 들더니 잔에 가득 따른다)
진옥: 그런데 나리,(닭살을 큼직하게 발라낸 진옥이 술을 털어 넣은 정철의 입에 황급히 넣어준다. 흐뭇한 정철의 눈빛은 어느 새 여인의 살 냄새를 집요하게 쫒는다)가을이 되니 외롭고 또 뭔가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내가 싫어요. 더 괴롭기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거여요.
정철: 세상 사람들은 알건 모르건 뭔가를 찾아 모두가 목말라 하고 있지. 특히 사십 고개를 넘은 여자라면 응당 더 심하지. 자네는 그것이 뭔지를 아는가?
진옥: 글쎄요.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세요.
정철: 아마도 ‘자기’일 거야. 주기만 하고 살아온 자신을 가엾게 생각하는 또 다른 자기일거야.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자기’를 막연히 다시 찾고 싶은 거지.(술잔을 든 정철이 또 다시 한 수를 읊는다)
밤이 되니 차가운 빗물 대나무를 울리고/ 가을이 되니 풀벌레 소리 가깝게 들리네/ 가는 세월을 어찌 잡겠는가/ 머리에 쌓이는 눈 어쩔 수 없네
진옥: 삶이란 결국 뜬 구름과 같다고 했어요.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거고요.
정철: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닭 살점을 입에 넣으며 오물거린다) 오늘 같은 밤이면 한무제가 지은 ‘추풍사(秋風辭)’가 생각나는구먼. 자네가 한 번 읊어보게나.
진옥: (감정이 복받치던지 아니면 인생이 슬픈지 옷고름을 담겨 눈부터 훔친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하겠어요. 다만 목소리까지 늙어 민망합니다.(소리를 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는데, 눈가에는 잔주름이 그득하다)
정철: 세월을 막을 장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은 나이를 먹는대 따라 그 나름대로 멋도 우러나오는 법이라네. 요즘 TV를 보니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하더군, 맞는 말이야. 세상에는 육십 청춘도 있고, 스물 노인도 있는 법이니 결국 마음이 문제지? 그러니까 어서 읊어나 보게.
진옥: 예, 그럼. (거문고를 끌어당긴 진옥이 옷깃을 바로잡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윽고 고요히 줄을 튕겨 나간다. 옛날과 추호도 다름없는 음색으로 오히려 세월이 내려 앉아 형용하기 어렵도록 청아한 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가을바람 건듯부니 흰 구름이 날고/
초목은 시들어 떨어지는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네/
난은 수려하고 국화 향기 기득하니/ 가인을 생각하여 잊을 수가 없구나
다락 달린 배를 띄워 분하를 건너니/ 강 중간에 이르니 흰 물결이 이네
소고를 울리고 뱃노래를 부르니/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도 커지도다
젊음은 언제까지 일까? 늙음을 어찌하리
정철: (정신이 황홀해져 진옥의 손을 덥석 잡는다) 여보게, 자네는 선녀일세. 어디를 뜯어보아도 티끌하나 없는 소리라네. 특히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이 더 한다(歡樂極兮哀情多)"라는 구절은 마치 우리 처지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하네.(술을 연거푸 마신다)
진옥: 고맙습니다, 나리. 그런데 이토록 술을 많이 드시면 관직을 또 삭탈 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제는 그만 드십시오.
정철: 무슨 소리야. 이제야 간에 기별이 갔구먼. 자네는 이태백이 한 말도 모르는가? ‘석 잔의 술에 큰 도에 통하고, 한 말의 술에 자연과 한 몸이 된다(三盃通大道一斗合自然)’라고 했지 않는가?
진옥: 소문에 선조 임금은 나리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라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면서요.
정철: 그것은 왕세자의 책봉 문제 때문이야.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옹립하자고 주장했는데, 이산해가 쌩까고 신성군을 옹립하는 바람에 그런 거야. 신성군을 예뻐한 선조는 속 좁게도 나만 미워한 거지. 그 바람에 나는 벼슬을 삭탈당하고 명천·진주·강계로 유배를 다녀야 했어. 아이, 짱 나.(술에 취한 정철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린다)
진옥: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끝이 없고요, 백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살 걱정을 하는 게 사람이라고 했어요.
정철:(얼굴에 홍조를 띠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진옥을 불렀다) 진옥아. 이제 푸념은 그만하고 내가 시조 한 수를 읊을 테니 그대는 이 노래에 화답을 해라.
진옥:예, 읊어보세요.
정철: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진옥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진옥:(정철의 시조창이 끝나자, 이번에는 진옥이 얼굴에 홍조를 띄며 받았다)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鍱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정철:(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보게, 살송곳과 골풀무는 참 탁월한 비유일세. 그렇지 않은가?
진옥: 그래요, 나리. 그러니 이제 잠자리에 드시지요.(술상을 한쪽으로 치운 진옥이 이불과 요를 편다)
잠시 후, 사각 사각하며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불이 꺼진다. 집 멀리서는 부엉이가 울어대어 두 사람의 해후를 세상에서 가려준다.
"부엉, 부엉!" ]
12:30~12:40 강아아씨묘를 사진촬영
12:40~13:00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 16-35 번지에 있는 월산대군묘및신도비로 이동 [1.2km, 20분 소요]
13:00~13:05 월산대군묘및신도비를 사진촬영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月山大君墓─ 神道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新院洞)에 있는 조선의 종친 월산대군 이정(1454~1489)의 묘 및 신도비.
1986년 6월 16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덕종(추존)의 장남인 월산대군 이정의 묘로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다. 이정은 일찍 월산군에 봉해지고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서책을 가까이 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자주 찾았다.
월산대군의 봉분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직사각 모양의 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는 비두를 얹었으며 규모는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이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 (長板石)을 놓았는데 가로 270cm, 세로 155cm의 규모이다.
신도비는 1498년(성종 20)에 왕명으로 세웠으며, 약 90cm 규모의 이수(용의 형상을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와 긴 사각 모양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18cm, 폭 94cm, 두께 32cm인데, 전액(篆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심하게 마멸되어 있다. 비문과 전액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썼다. 주변 명소로 월산대군 사당, 서삼릉 효릉(孝陵), 원당 종마목장, 고려 공양왕릉 등이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자 자미(子美), 호 풍월정(風月亭), 시호 효문(孝文)
출생 – 사망 : 1454년(단종 2) ~ 1488년(성종 19)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형인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추존왕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이다. 성종의 형으로,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노비·구사(丘史) 등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좌리공신의 책봉은 월산대군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왕위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조처였다.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어떤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곧,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종실의 대표자격이며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던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권신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조치의 하나로 좌리공신을 책봉하였다.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왕위를 놓치고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이로 인해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후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하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 뒤에 소혜왕후로 추존)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두 아들이 있었다.
1473년 이후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해 덕종의 맏아들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덕종이 종묘에 부묘되면서 월산대군의 위치는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으며,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13:05~13:16 경기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43-39 번지에 있는 월산대군사당으로 이동 [838m]
13:16~13:25 월산대군사당을 사진촬영
[월산대군사당 - 문화재자료 제79호
월산대군 이정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중수한 것이다. 네모난 담장 중앙에 삼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당을 모셨는데 담장은 개인 사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대석을 하단으로 축조하였고 석조 배수구까지 갖춘 특이한 구조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 맞배기와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앞면은 齋戒行事에 알맞도록 1칸을 개방하였고, 영조 대왕이 친히 ‘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다. 신주를 운반할 때 쓰던 요여가 당내에 보존되어 있다.
경기도 덕양구 신원동 427]
13:25~14:15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로458번길 7-42 번지에 있는 쥬라리움 매표소로 이동 [3.2km, 50분 소요]
14:15~14:20 사전에 온라인 구매한 쥬쥬랜드 고양로봇박물관 입장권을 매표소에 제시하고 쥬쥬랜드로 입장
[쿠팡에서 온라인 구매시 1인 입장권 1인권 : 정상가인 28,000원에서 52% 할인된 13,500원
유효기간: 2024.08.22 ~ 2024.09.30]
14:20~15:30 쥬쥬랜드 탐방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고양로봇박물관
경기일보 기사 승인 : 2024-08-08 13:39
윤원규 기자
로봇시대,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일까. 2022년 기준 국가별 산업용 로봇 밀집도 현황이 놀랍다. 1천12대의 한국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위 싱가포르 730대, 3위 독일 415대, 세계 평균이 151대다. 인공지능(AI)까지 장착한 로봇이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있다. 식당에는 로봇이 음식을 나르고 집 안 청소를 담당하고 있다.
동물과 사람, 로봇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공간이 있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로에 위치한 ‘쥬쥬랜드’가 바로 그곳이다.
생태동물원 ‘쥬쥬랜드’는 동물과 사람, 그리고 로봇을 주제로 하는 가족형 종합 테마공원이다. “동물과 어울리고 미래 첨단기술을 한곳에서 두루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는 양희준 팀장의 소개말이 이어진다. “2002년 문화관광부에 국내 유일의 민간 동물박물관 252호로 등록한 쥬쥬랜드는 관람 중심의 동물원에서 벗어나 동물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평생학습의 장으로 활용돼 고양시의 나들이 명소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멸종위기종 보존에 힘을 쏟아 2015년 12월, 국내 최초로 오랑우탄 순수 혈통 번식에 성공한 일은 쥬쥬랜드의 큰 자랑이다. 동물박물관인 쥬쥬랜드에 로봇박물관을 설립한 것은 2020년 8월이다. 개관 4주년을 맞은 고양로봇박물관(관장 소순희)은 작지만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21세기를 주도할 미래산업인 로봇은 이미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세대인 어린이들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로봇의 과거와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즐거운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 동물원에서 로봇 친구랑 놀자
고양로봇박물관은 전시보다 직접 로봇을 조종하면서 체험하는 프로그램 중심이다. 작은 로봇들이 로봇박물관 마당을 지키고 있는 로봇박물관으로 들어서니 타원형의 작은 무대가 나타난다. 맨 먼저 로봇들의 춤 공연을 감상한다. 6대의 댄스 로봇은 인간을 모델로 한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음악이 흐르자 자그마한 로봇들이 가슴에 불빛을 반짝이며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음악은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뽀로로, 겨울왕국, 터닝메카드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주제가는 물론이고 케이팝과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한 로봇들의 댄스공연이 이어진다. 공연 중 넘어지거나 동작에 방해를 받아도 스스로 일어나 춤동작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안정성을 갖춘 댄스 로봇이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얼굴 로봇과 같이 공연 중이다. 다음은 철봉 로봇이다. 철봉에 매달린 로봇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츰 동작이 커지더니 한 바퀴를 돌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로봇의 활달한 춤사위는 관람객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자동차 경주용 로봇 등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멋진 재주를 펼친다. 20분간 이어지는 로봇 공연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밌다.
로봇 공연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에는 세 번, 주말에는 여섯 번 진행된다. 예술가처럼 모자를 쓴 로봇은 또 무엇일까.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로봇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키를 누르니 카메라가 얼굴을 촬영한다. 잠시 후 로봇 팔에 달린 펜이 움직이며 관람객의 얼굴을 그려 나간다. 카메라로 얻은 정보를 이미지의 선을 인식해 최단 거리를 파악하는 로직을 활용해 재빠르게 초상을 완성한다. 화가 로봇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돼 있어 체험자와 대화할 수 있다. 완성된 초상은 기대에는 살짝 못 미쳤지만 로봇이 그려준 특별한 것이라 기념으로 간직한다. 로봇박물관의 규모가 좀 더 크고 전시물이 좀 더 많아지고 콘텐츠의 구성이 좀 더 보강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로봇과 사람, 동물이 어울리는 복합문화공간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은 칭찬받을 만하다. 8천평의 자연환경에서 동식물과 교감하며 첨단 과학 기술과 자연의 조화 및 공존을 생각하게 이끌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역할이 작지 않다. 전시실에는 무엇이 전시돼 있을까. 격투 로봇, 스키 타는 로봇, 자동차 경주용 로봇, 장애물을 피해 다닌다는 물고기 로봇 등 다양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로봇으로 각종 운동경기를 해 볼 수 있고 증강현실 체험도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자연과 과학의 융합을 통해 어린이들의 꿈과 정서가 풍성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은 로봇 코딩과 프로그래밍 교육기관도 만들 예정입니다.”
■ 소외된 이웃과 함께 여는 미래
고양 로봇박물관은 2022, 2023년 경기도와 고양시가 지원하는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을 통해 고양 로봇박물관은 지역의 문화소외계층인 다문화가정, 지역아동센터, 장애우 어린이를 월 2~3회 초청해 문화학습체험 기회와 100여종 360여마리의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동물원 관람을 함께 진행했다. 로봇 공연과 4차산업 증강현실에 기반 한 VR스케치북, 미니코딩 체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울러 110여종의 다양한 야생동물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동물원 투어도 함께 진행했다. “지역 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에 작으나마 이바지할 기회를 가져 기쁩니다. 앞으로 장애인, 아동복지시설 등 문화소외계층으로 사업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싶습니다.”
공연과 체험은 재미가 있었지만 박물관의 규모나 전시물이 많지 않은 점이 아쉽다. 로봇박물관을 단독으로 이용할 수 없고 쥬쥬랜드 입장권을 사면 로봇박물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로봇박물관을 나서니 8월의 푸른 숲이 눈부시다. 무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실내동물원에는 도마뱀. 뱀, 거북, 사막여우, 기니피크, 토끼, 앵무새, 악어 등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빛난다. 모양은 쥐, 크기는 토끼와 비슷한 기니피크와 햄스터 같은 작고 귀여운 동물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작은 동물에게 먹이를 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화려한 빛깔의 앵무새도 아이들의 손바닥에 올려진 씨앗을 쪼아 먹는다. 새와 아이가 하나 되는 순간이다. 실내동물원을 지나면 야외동물원이다. 염소와 산양, 라마, 말이 산다. 카페에 들어와 더위를 식히는 새끼 양은 아이처럼 장난꾸러기다.
■ 사랑과 연민을 배우는 곳
동물과 어울리며 첨단 정보기술(IT)과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을 체험하는 고양로봇박물관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생명의 신비를 밝힐 수 있을까. 로봇은 인간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까. 생명과 첨단기술의 공존과 조화를 위해 무엇을 서둘러야 할까. 대여섯 살 여자아이와 어울리던 새끼 양의 장난스러운 몸짓이 춤추는 로봇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겹친다. 로봇의 역사를 훑어보며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할 2050년대를 상상해 본다.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필요한 것은 토끼처럼 연약한 생명체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새끼 양에게 먹이를 전해주던 여자아이의 선한 눈빛이 떠오른다.
고양시는 경기도에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장 많은 도시에 속한다. 한국인의 유전자를 형성한 쌀의 역사를 알려주는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향긋한 꽃 향기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장천꽃박물관도 가까이 있다. 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손때 묻은 유물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배다골민속박물관과 유진민속박물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물을 소장한 중남미박물관도 빠뜨릴 수 없다. 주제를 가진 국립여성사전시관과 증권박물관도 마땅히 찾아야 할 곳이다. 고양아람미술관을 비롯해 고양어린이박물관,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 항공우주박물관을 찾으면 무더위도 잊을 것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15:30~15:37 쥬쥬테마동물원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7분, 468m 이동]
15:37~15:40 쥬쥬테마동물원 정류장에서 벽제교.관산삼거리 정류장으로 가는 1082, 85 버스 승차 대기
15:40~15:42 1082, 85 버스를 타고 쥬쥬테마동물원 정류장에서 벽제교.관산삼거리 정류장으로 이동 [2분, 2개 정류장 이동]
15:42~15:46 걸어서 벽제교.관산삼거리 정류장에서 관산삼거리 정류장으로 이동 [4분, 253m 이동]
15:46~16:00 관산삼거리 정류장에서 연신내역.연서시장(중) 정류장으로 가는 9709, 9710, 9709N, 9710-1 버스 승차 대기
16:00~16:31 9709, 9710, 9709N, 9710-1 버스를 타고 관산삼거리 정류장에서 연신내역.연서시장(중) 정류장으로 이동 [31분, 19개 정류장 이동]
고양누리길 제 11코스 송강누리길
지도
강아아씨묘 위치도
쥬쥬랜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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