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 선지자들 마 [7;15-20]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감,,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는 내내 중요한 이 원칙,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산상설교를 두 집 - 한 집은 반석 위에, 한 집은 모래 위에 세워진 -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로 나타내시며 끝을 맺으셨습니다.
포괄적 진술 속에 공통점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과 우리 모두 최후 심판의 방향으로 일관되고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우리 주는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요, 이 멸망은 최종 심판 후에 불경건한자 에게 따라오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둔하며, 얼마나 더딘가를 아십니다.
수많은 영국 교회(성공회)에서 십계명이 벽 위에 쓰여져 있음을 아십니다.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은 이 잊기 쉬운 경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는 두 특수 경고를 제시합니다.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항상 있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 만일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너희는 전적으로 파멸이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너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좁은 길을 걷지 못하게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너희를 단념시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그 특유의 교활한 유혹을 가지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 들인가?
주께서 양의 가죽을 묘사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그 해석은 흥미와 매혹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가 그의 제2서신 2장에서. '이 자들은 이단을 가만히 몰래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른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아무도 거짓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이런 성격을 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곳이 있음을 여러분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즉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가르침에서나 생활에서나 모두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주는 이것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생활[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못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열매는 성경의 말씀를 가리킨다.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 교훈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어떤 유이 삶을 사는가는, 순전히 그들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온통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옳으나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 잘못되어 있고, 자기네가 위선자들임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의 장면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보기에 너무나 매력적이요, 너무나 붙임성 있고,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호되게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른바 약방의 감초격입니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입니다.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거기 있어서 그를 문제 삼고, 그를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입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는 여러분에게 항상 잘못된 것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그도 잘못이 약간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사가 괜찮으며 잘되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돼 나간다'고 말합니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치며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진상으로써 무섭게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 5:31)란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양의 가죽을 쓰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항상 속 편하게 하며, 매우 안심을 줍니다.
그는 항상 악의가 없고 기분 좋고, 항상 변함없이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들어냅니까?
그의 메시지는 성경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입 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입니다. 그는 성경에 두드러진 기타 진리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결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하고 붙임성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지난 5,60여 년 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대한 설교도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벨렉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설교했을 때와 꼭같이 심판을 다루고 계십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행하거나 전적으로 불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실로 죄가 있음을 믿지도 않으며 그 사악성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바 '죄의 사악성'(롬 7:13) 교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그가 이런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합니다.
그도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이것만이 죄를 위한 보상이요, 화해의 유일한 방법임을 그가 진정코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5-26)하실 수 있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심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그가 믿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 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습니다.
청교도나 요한 웨슬리나 죠지 윗필드나 기타 인물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습니다.
존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란 책에서 자기가 18개월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에는 회개를 위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고 악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것과 지옥 가게 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라 불리우는 이것이 여러분 속에 있음과 여러분이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세상을 버리되, 실제 생활에서는 물론 생각과 전망으로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은 여러분을 바보라고 하거나 여러분이 종교광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금전면에서도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으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모두 괜찮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예수를 따르고'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산상설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비평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심판을 선고하며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의합니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라고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이한 구원이요 안이한 기독교 생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것의 진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whole armour)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이런 유의 가르침을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인즉 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는 멸망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로 이것이 지나친 말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력해졌습니까?
그 원인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 앙양을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유쾌하고 기분 좋고 '현대적'이며 최신식입니다.
그들은 인기 감식력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텅 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