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山 정원규님의 『법화경 강설(불광출판사), 초판 1쇄』, 이건 아니다(01)
爾時 世尊 四衆圍繞 供養恭敬 尊重讚歎
爲諸菩薩 說大乘經 名無量義 敎菩薩法 佛所護念
(序品 第 一)
●이 경문에 대한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때 사부대중은 부처님을 둘러싸고 주위를 돌며,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였다.
모든 보살을 위하여 무량의경(無量義經)이라는 대승경전을 설하시고,
보살을 가르치는 법으로서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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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경문: <爲諸菩薩>, <敎菩薩法 佛所護念>
첫째, <爲諸菩薩>
1) 글자 <爲>에 대해
글자 <爲>에는 <~을 위하여>라는 뜻이 분명히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한다.
특히 친구들끼리 술 한 잔 할 때, 첫 잔을 들어 올리며 외치는 바로 그 <위하여!>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러나 첫 잔보다 더 중요한 이 글자의 의미는 <~을 한다> 혹은 <~이 된다>이다. 동사다.
우리가 사전에서 단어를 찾으면 중요한 의미부터 번호를 매겨 그것의 뜻을 차례차례
알려주는데, 한자사전에서 이 글자를 보면 <~을 위하여>라는 뜻은 한참 뒤에 나온다.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의미인 <~이 된다>로 풀어야 법화경이 제대로 굴러간다.
2) 글자 <諸>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 글자의 의미는 <모든>이다. 형용사다.
<諸君> 또는 <諸國>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자는 <모름지기> 혹은 <무릇>이라는 중요한 의미도 지니고 있다. 부사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의미다. 그렇지만 한문에서는 부사로도 사용되는 글자다.
법화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모름지기>라는 부사로 풀어야 법화경이 제대로 굴러간다.
따라서 <爲諸菩薩 說大乘經 名無量義>는 당연히
<모름지기 보살이 되라고 무량의라는 이름의 대승경을 설하셨다>라고 번역해야 법화경의
취지에 맞다.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문에서 보는 것처럼, 또 시중의 모든 번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보살을 위해 무량의라는 이름의 대승경을 설하셨다>라고 번역하게 되면
법화경의 취지는 뒤집어진다.
모든 대승경은 모든 보살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가르치기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법회에 참석한 모든 중생들을 향하여 <모름지기(모두, 무릇)보살이 되라>고 부처님께서
무량의경이라는 이름의 대승경전을 설하셨다, 는 말이다.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대로라면 법화경을 포함한 모든 대승경전은 일제중생이 아니라,
모든 보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경전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시중의 모든 법화경 번역서가 그런 취지로 번역되어 있다.
이 법회에 참석한 팔만 명의 보살이 그들이고, 법화경 가르침의 대상이라 해설하는
覺山 정원규님의 번역해설서도 법화경의 취지를 잘못 짚은 오류 중의 하나다.
둘째, <敎菩薩法 佛所護念>
이 구절은 바로 앞의 <무량의>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다. 다시 말해 무량의경이라는
대승경전이 어떤 경전인가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1) <敎菩薩法>은 <보살법을 가르친다>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보살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중생들을 대상으로 보살법을 가르치는 경이 무량의경이라는 말이다.
위 번역에서처럼, 보살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법이 무량의경이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敎生滅法>은 생멸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생멸법을 가르친다는
의미지, 생멸을 앞에 앉혀 놓고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닌 것과 같다.
또 <敎交通法>은 교통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교통법을 가르친다는 의미지,
교통을 앞에 앉혀 놓고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닌 것과도 같다.
2) <佛所護念>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께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왜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계신가? 때가 무르익으면 언제라도 끄집어내서 설하기
위해서다.
지금부터 설하시고자 하는 법화경이 바로 그런 경우다. 중생들이 법화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금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이다.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정원규님의 위 번역문은 모든 일본어, 모든 한국어, 그리고
모든 영문 법화경에서 공히 볼 수 있다.
세 개의 언어로 번역된 법화경이지만 그것의 뿌리는 일본어 법화경이라 본다.
영어권의 법화경 번역문이 일본어로 된 번역과 꼭 같다는 것은 이해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화의 길을 걷게 된 일본이 법화경을 최초로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어권에 뿌려놓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자문화(漢字文化)에
익숙하지 못했던 서양인은 일본이 오역하고 그것을 다시 영문으로 번역한 법화경으로
불교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문으로 된 법화경이
일본의 오역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한자문화권의 조선 사람이 오역으로 가득한 일본어 법화경을 그대로 베껴
지금까지도 써먹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잊는다.
일본보다는 조선의 문화가 한 수 위임을 늘 내세우는 우리 아닌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식으로 중국어를 전공하신 분까지 나서서 이러시니 할말이 없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번역문이 우리글 문법에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앞으로 펼쳐질 법화경의 가르침은 그것의 내용에서, 그리고 그것의 취지에서 계속 꼬여만
간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을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글을 통해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다.
●이 경문에 대한 나성거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때 세존께서는 사부대중이 둘러싸고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는 가운데, 무릇 보살이 되라고 하시며
대승의 가르침을 펼치고 계셨으니 그 가르침의 이름이
무량의인 바, 보살의 법도를 가르치는 경이요, 부처님께서 잠시도
잊지 않고 마음에 늘 두고 계시던 가르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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