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비비빅
“엄마,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아까 먹었잖아. 그런데 또 먹고 싶어?”
“응, 근데 이번엔 다른 거 먹고 싶어.”
한쪽 발을 싱싱카에 올리고 서 있던 꼬마는 입술을 삐죽이며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지난번에 치과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지? 군것질 많이 하면 이 썩는다고 했어, 안 했어? 너는 양치질도 싫어하면서, 오늘은 이제 그만.”
아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릴 듯 울상이 되었다.
“치카치카 잘하면? 치과 안 가도 돼?”
“그럼, 치약이 입안의 벌레를 다 잡아먹어 버리거든.”
엄마의 부드러운 말끝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곧 눈물을 꾹 참은 채 환하게 웃었다. 협상은 엄마의 패배로 끝이 났다. 두 손을 꼭 잡은 모녀가 ‘간식 창고’라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투닥거리는 그들을 지켜보던 내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 안개 같은 아련한 그리움과 생강차 향처럼 코끝에 스며드는 쌉싸름한 온기가 눈가를 데웠다.
그 순간 내 안의 작은 소녀가 속삭였다.
“나도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나는 엄마에게 떼를 써 본 적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묵직한 유리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알았다. 아이스크림은 단지 간식이 아니라, 오래전 사라져 버린 엄마와의 기억을 여는 문이라는 것을.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차가움, 막대 끝 바삭한 소리까지,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과거로 통하는 길이 되어 어린 시절 엄마와 나누던 순간들이 몰래 되살아났다. 달콤한 맛과 팥 향이 내 마음을 타고, 오래전 봄날의 골목길과 그때의 웃음까지 스며들었다.
가게 안은 노랑 병아리처럼 산뜻하고 밝았다. 벽면을 따라 진열된 과자는 오색 무지개처럼 화려했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이름도 생소한 과자들을 보는 순간 눈이 커지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곱 대나 되는 냉동고에는 각종 아이스크림이 즐비했고, 음료 냉장고 두 대까지 있었다.
“뭐가 맛있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탐색하던 내게 어린 내가 말했다.
“뭘 망설여, 아이스크림은 비비빅이지.”
“그렇지? 아이스크림은 역시 비비빅이야.”
‘기억의 오류’
기억은 늘 온전하지 않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고, 때로는 보고 싶은 장면만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엄마 이야기도 언니와 동생의 기억이 보태져야 비로소 한 편의 그림이 된다.
낡은 상자 속 짝 잃은 퍼즐 같은 엄마와의 추억, 그것은 어른들 몰래 비료 포대와 맞바꿔 먹던 아이스 깨끼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봄, 항암치료로 지친 엄마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말라버린 나무토막 같은 몸과 손 닿으면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낙엽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마냥 좋았다. 버려진 인형처럼 꼬질꼬질하던 마음이 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나는 물었다.
“엄마, 이제 서울 안 가도 돼? 난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이 제일 맛있더라. 예전처럼 마늘쫑에 햇양파 잔뜩 넣고 볶아서 반찬으로 싸 줘. 앞으로는 할머니와 동생 밥 안 챙기고 공부만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 거지?”
수다스럽지 않은 나는 많은 것들이 궁금했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는 먹기 싫은 밥을 삼키는 듯 힘겨워 보였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인중에 난 코털이 머리카락처럼 길어지는 것도, 화를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으며 참아내는 것도, 황소 같은 고집도 빼닮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내 얼굴에서는 엄마가 떠오르지 않는다.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영정사진 하나 없는 집. 나는 왜 엄마를 기억하지 못할까.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있다.
양지 편 지영이네 집에 새끼 돼지 사러 갔던 일, 상전 밭에서 뽕잎을 따던 일, 콩밭 매면서 힘들다고 투정하면 옆집 과수원에서 자두를 사 주던 일. 그때 자두의 달콤한 향, 갓 따낸 뽕잎에서 나는 풋풋한 냄새, 그리고 엄마가 싸 준 점심 도시락의 참기름 냄새가 뒤섞여 머릿속에 선명히 남았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꿈틀거리는 누에와 함께 잠을 자던 엄마의 모습들이다.
엄마는 늘 일만 했다. 남편 일찍 잃고, 불같은 시어머니와 아이들을 감당하느라 허리를 펼 날이 없었다. 그러다 덜컥 병마가 찾아왔다. 시골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중한 병이었다.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엄마 좀 누워. 내가 군불 땔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사리손으로 방바닥을 덥히는 일,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부엌으로 가던 길에 나는 보았다. 엄마가 쏟아낸 검붉은 피를. 그 순간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피 냄새가 방 안에 번져오는데도, 그저 엄마가 보지 못하게 치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는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어린 딸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돌연변이 세포와 싸우던 엄마는 속이 탔는지 찬 걸 찾으셨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시내에 다녀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비비빅을 사기 위해서였다. 자전거 바람에 섞인 흙냄새와 봄꽃 향이 코끝을 스치며 마음이 조금 풀렸다.
오지였던 우리 마을에는 ‘점빵’이라 부르던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국수나 라면, 뻥튀기 같은 과자를 파는 유일한 슈퍼마켓이었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랬을까. 비싼 얼음과자를 사 먹는 이가 없어서일까. 주전부리는 팔았으나 하드는 없었다.
나의 고향엔 자전거가 많기로 유명했다. 그 시절엔 그것이 교통수단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겁이 많은 나는 양쪽 페달에 발을 올려놓고 굴리지 못했다. 마치 싱싱 카를 타듯 한 발로 밀면서 끌고 다녔다.
읍내는 자전거로 한 시간 거리였다. 덜컹거리는 흙길 위를 한 발로 밀며 자전거를 끌던 동안, 나는 넘어질까 봐 두렵기도 했지만 ‘엄마가 드시고 싶다’는 마음이 발걸음을 더 세게 밀어주었다. 돌덩이처럼 꽁꽁 언 아이스바를 골라 와도 집에 도착하면 이미 물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묵묵히 드셨다. 아니, 마치 아이스크림 속 달콤함과 차가움까지 삼키는 듯, 그 순간의 맛을 마음으로 음미하시는 듯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다. 한 입 베어 문 비비빅은 이가 시리도록 차고 딱딱했다. 입안 가득 달콤함과 함께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소한 팥 향, 막대 끝에서 나는 바삭한 크런치 소리까지, 어린 시절 엄마와 나눴던 모든 감각이 순간 돌아왔다.
달콤한 맛과 향이 내 마음을 타고, 어린 시절 골목길과 엄마의 미소까지 스며들었다. 오래 묻혀 있던 기억이 조용히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번 추석에 벌초 갈 때 비비빅을 사갈까? 엄마가 좋아하시겠지?”
내 안의 작은 내가 대답했다.
“보냉백에 넣어서 가져가 봐. 엄마가 놀라실 거야?”
“왜?”
“뭘 왜야? 살아생전 제대로 된 비비빅을 한 번도 못 드셨으니까. 단춧구멍만 한 눈이 왕방울처럼 커질지도 몰라.”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미숙아, 이게 뭐냐?” 하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비비빅은 단지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불러내는 시간의 열쇠였고, 사라진 목소리를 다시 듣게 하는 기억의 다리였다.
지금도 냉장고 속 그 막대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미소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엔 각자 ‘비비빅’이 하나씩 있다는 것을.
사소하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가장 소중한 사람의 얼굴이 저녁노을처럼 우리 마음에 다시 피어난다는 것도.
첫댓글 비비빅.. 가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저는 퇴근길에 비비빅은 추워서 ㅜㅜ 가슴속 따뜻하게 데워놓은 2천원으로 붕어빵 한봉지 사서 들어가겠습니다. 행복한 주말되십시오.
아이스크림과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인데,
저도 따끈한 붕어빵이 더 당기네요.
편안한 주말되십시요!!
지금도 냉장고 속 그 막대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미소와 마주하는 일이다.
부족함이 없는 시대지요,
마트를 가든 편의점을 가든 언제 어디서든 엄마를 마주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작가님은 엄마의 미소를 마주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지네요.
포근한 주말이 기다리고 있는 금요일 입니다.
마지막 가을을 만끽하세요
나 어렸을 때는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없었죠.
그냥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지금 생각하면 아주 비위생적이었던 것 같아요.
네~~
엄마 몰래 비료푸대와 양은 그릇으로 바꿔 먹던 아이스깨끼가 왜 그리 맛있었는지...
그걸 먹고도 건강하게 잘 자랐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죠
아이스깨끼 장수가 마을에 들어오면 .
아이들이 몰려들던 개티마을이 있었지요 .
잘 감상했어요
엿장수, 아이스께끼 장수, 찹쌀떡 장수.....
동시대의 아련한 추억들이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점빵, 어릴 적 잠깐 우리집에서 했었는데요. 맨날 몰래 몇 개씩 먹어치우느라 바빴어요. 참 철이 없었어요. 엄마는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동분서주 뛰셨는데ㅠㅠ
엄마가 생각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새우깡, 꿀꽈배기, 라면 10봉 교자상에 올려놓고 그걸 팔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 점빵을 하기전 동생과 늘 함께 등교를 했는데, 그 점빵 후 우린 각자 따로 등교를 했었습니다
철없던 그 시절..... 그마저도 소중한 추억입니다
삶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며
드문드문 기억의 메모를 합니다
지영이
뽕잎
점빵
누에
나름의 연관어들입니다
작가님의 이야기로
여러 긴 추억의 이야기들이 많은 이에게서
들춰질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또한 그러니까요.
이 새벽
그런 마음으로 염치불구하고 댓글 올립니다
왠지 따끈한 국밥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제 글이 작가님의 잠을 방해한 건가요?
어려운 경제상황이 잠을 설치게 한 것일까요?
쿨쿨 잠을 잔 제가 웬지 미안해지는 아침입니다
12월에 모든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시간들로 마무리되길 바래봅니다
할머니와 동생 밥까지 챙기며 공부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비비빅이 그렇게 오래 전부터 나온 아이스크림인지 몰랐어요.
비비빅을 먹으며 엄마를 만나는 순간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영정사진도 없어 가물가물해지는 엄마를
기억의 오류인지도 알 수 없는, 이 집착에 가까운 그리움을
아이스크림 봉지만 봐도 기억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작가님 수필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먹먹해져와요ㅜㅜ
저도 횟집하시던 엄마가 밤에 왜그러셨는지 먼저 잠자지말라고 하셔서 아이스크림 사주면 안잔다고 했어요
엄마가 주신 돈 들고 신나게 아이스크림사와서 먹고 바로 잠들었죠
왜그런지 그때 생각만 하면 죄책감이 들고 아련해요.. 저에게도 아이스크림은 엄마의 기억이네요
ㅎㅎㅎㅎ 작가님 답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한여름 늦은 저녁에 밥을 물고 잠들었던 제 모습이 생각나고
'지금도 냉장고 속 그 막대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엄마의 미소와 마주하는 일'에 공감해 주시니 행복합니다
오래전의 아이스크림에 관한 기억
잊을 수 없는 일이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몇 안되는 퍼즐조각 같은 기억을, 글로 남겨 영원한 기억으로 저장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연이어 접하는 기쁜 소식, 출간기념회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비비빅! 추억 돋네요. 그 기억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 아련한 행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