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직업 상담자에게는 진심으로 내담자를 위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대의적 목표와 함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개인적 목표가 있다. 그리고 남들보다는 항상 자신을 우선시하는 인간의 근본 특성상 개인적 목표는 항상 대의적 목표보다 앞 쪽을 차지한다. 따라서 오로지 대의적 목표에 집중하는 오랜 경험을 가진 아마츄어 상담자가 전문 상담자들보다 상담 기술이나 지식은 부족할지라도 내담자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아마츄어의 경험과 식견이 많이 부족하면 언제나 직업 상담자가 낫겠지만 노련한 아마츄어 상담자가 훨씬 더 위대한 상담자라고 볼 수 있다. 상담 이론을 만든 분들의 개인적 목표때문에 생긴 망상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명의 화타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화타의 형이 더 훌륭한 의사였던것처럼...
법륜 스님의 상담은 일반 상담자들이 하는 방법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법륜 스님은 불행의 주된 원인을 내담자에게서 찾고 일반 상담자는 주변이나 세상에서 찾는다. 이는 내담자를 대하는 상담자의 개인적 목표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대의적 관점에서 볼때 법륜 스님은 어차피 세상은 바꿀 수 없으니 내담자를 바꿔서 불행을 극복하자는 주장일 수 있고, 일반 상담자는 병원에 올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한 내담자보다는 환자를 둘러싼 환경을 바꿔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고객 확보란 상담자의 개인적 목표 차원에서 보면 고객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좌우하려는 전략과 내담자를 무조건 편하게 해주며 아부함으로서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상담에 성공하여 획기적으로 행복한 삶을 찾은 극소수를 보면 상담자들의 대의가 맞는 것 같고, 엄청난 돈과 시간만 쏟아붓고 결국 실패한 수많은 내담자들을 보면 상담자들의 개인적 목표만이 살아남아 번성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일시적으로 정신적 위안을 경험하고 근본적 문제 해결은 자연스런 성장과 망각이 맡아서 한다.
내담자를 끊임없이 조롱하는 법륜 스님의 상담 방법은 봉변을 당하기 아주 쉬운지라 일반 상담자들은 쓰고 싶어도 절대 쓸 수 없다. 자칫하면 봉변을 넘어 자신의 사업 자체가 공중 분쇄될 수 있기에 그러하다. 간혹 상담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로 내담자를 노예화하는 뉴스들이 등장하지만 이는 아주 드문 경우에 정말 약한 내담자를 상대로 행해지는 범죄이기에 일반적 대화에선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도대체 법륜 스님은 어떤 용기로 그런 일을 계속 하는걸까? 그것은 그 상담이 무수히 많은 불교 신자과 법륜 스님 팬들의 열광적 지지와 보호 아래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시점에 진리를 만났다고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대중들 속에서 개인이 그에 대항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여 큰 스님에게 뭔가 큰 뜻이 있어 그러시는거라고 합리화하여 받아들이고 큰 도움을 얻은 것처럼 행동한다. 베르나르 쥐스킨트는 그의 소설 향수에서 자기 딸을 죽여서 만든 향수로 세상을 미혹하여 숭배받는 범죄자에게 자기 혼자서라도 대항하려다 군중과 함께 무릎을 꿇는 아버지를 통해 이런 심리를 아주 잘 그려낸 바가 있다.
대중에 대항하지 못하는 마음은 생존 본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다를뿐 모든 생명체는 대중들의 분노를 피해야 살아남는다는 간명한 진리를 유전자 속에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법륜 스님의 상담은 내담자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나쁜 놈들을 상대로 할 때 효과가 있고, 일반 상담자들의 방법은 타인들에게 그 탓을 돌리기에 착한 사람들을 상대로 할 때 효과가 있다. 착한 사람들을 향한 법륜식 상담은 내담자를 더욱 큰 상처 속으로 몰고가고, 나쁜 놈들을 상대로 한 일반 상담은 내담자를 더욱 큰 악마로 성장시킨다.
그런데 그 두 방법 중 현대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법륜식이다. 기독교의 원죄론처럼 모든 지역과 시대에 걸쳐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방법이지만 독재나 왕정 시대라면 이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을 방법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란 이름하에 일반 인간들의 그 어떤 불의로움도 야단치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병폐 속에서 내담자의 마음 속에 은밀히 숨겨진 아주 작은 불의조차 야단치는 법륜 스님의 사자후 속에서 대중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나 자원봉사 상담자처럼 온전히 대의만으로 가득한 상담을 장시간 해본 사람은 알고 있다. 법륜식도 일반 상담자식도 내담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담자를 가장 크게 위하는 상담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분석해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려면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불합리한 마음만 옳지 않다고 밝혀주고, 문제해결과 관계가 없는 보통 사람 수준의 이기심은 너그럽게 품어주어야 한다. 일반적 내담자를 위한 상담은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만일 내담자가 인류를 위한 상담을 원하는 수행자라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마음의 성전처럼 보다 나은 인간으로서의 길까지 보여주어 그를 진정한 성자의 길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누가 또 있어 이런 성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수행의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굳이 수행을 하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래도 꼭 하고 싶다면 수천년의 역사를 가져 부작용이 가장 작은 기존 거대 종교나 명상 단체의 일원이 되라고 한다. 도를 출세를 위한 수단이나 인생의 악세서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채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착각에 빠지면 아주 긴 세월을 허송하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거의 전부이니 기존 거대 단체에서 직업 수행인이 되어 실질적 이익을 노리거나 비직업인의 경우엔 적은 비용으로 만족스런 영혼의 허영을 얻음이 가장 실패가 적다.
진리의 차원에선 법륜스님이나 나나 마음 속 교만을 잘 다스려야 더 크게 대성하는데 법륜스님이 더 위험한 상황이다. 세속적 성공까지 함께 이룬 분이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