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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묘정절신초계정공휘창기적비(端廟靖節臣草溪鄭公諱昌紀蹟碑).
인터넷 자료.
※다음은 《금왕읍지, 1999년》에서 <정창 절의기적비(鄭昌節義紀蹟碑)> 원문을 옮기고 번역문을 실은 것이다.
○정창(鄭昌, 출생 미상~ 1463년(세조 9):
본관은 초계(草溪). 호는 죽계(竹溪). 정수도(鄭修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회(鄭澮)이고, 아버지는 정효순(鄭孝恂)이며, 어머니는 최숭(崔崇)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교리가 되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일세에 그 이름을 떨쳤다.
단종 초 시사(時事)의 어려움을 예견하고 일찍이 물러설 것을 결심하고 외직을 자청하여 진천군수가 되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청렴하고 처사가 공명정대하였다. 세조가 왕위를 선양받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원문>
◇정창 절의기적비(鄭昌節義紀蹟碑)
소재지 : 금왕읍 도청리 마을 입구
규 모 : 전체높이 525cm, 오석 귀부대좌 이수형 시 대 : 단기 4323년(1990년)
《端廟靖節臣草溪鄭公諱昌紀蹟碑》
竹溪草溪鄭公諱昌節義紀蹟碑銘幷序
公姓鄭氏諱昌號竹溪草溪人也 我東國古家名閥斑斑可譜然或始盛而終衰中室(원문에는 窒字이나 室字가 맞으므로 고친다.)
而遂不振至於世繼簪纓彌六彌昌者草溪之鄭有焉 始於麗朝益顯於李朝矣 以高麗文宗朝 諱倍傑官禮部尙書中樞使贈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諡弘文公 一云匡憲公爲一世始祖公之十五世祖也
生諱文宣宗朝擢翰林轉右拾遺殿中內給事知制
誥出知開城府事入爲刑部員外郎肅宗朝以秘書監如宋謝恩後拜刑部尙書政堂文學兼太子
賓客睿宗朝檢校司空禮部尙書贈特進左僕射參知政事諡貞簡公請立箕子祠兩世繼以爲東方儒學之宗 三世祖 諱福公初諱復公太中大夫刑員外郎三傳至 諱弼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參知政事兼判戶部事太子保諡宣僖公生諱孚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兼吏部事特進三重大臣上柱國上將軍太子師諡昭懷公生諱至平銀青光祿大夫壁上三韓特進三重大臣
都僉議中贊兼判吏部事典理司事上護軍世子師生諱(片頁)三重大匡廣陵君密直使生諱自臣太中大夫宗正卿生諱允吉奉翊大夫密直副使公之高祖也 曾祖諱修道號勿齋禑王癸亥文科始
仕李朝判宗簿寺事知西州事 祖諱澮
抱川監務中郎將 考諱孝恂知龍川郡事 妣淑夫人江華崔氏監務崇女 公生於李太祖二年癸酉卒於世祖八年癸未享年七十一 配淑夫人永川李氏判中
樞大提學膺女 無育繼配淑夫人全州李氏府尹漸女公歷事世宗文宗端宗三朝堅持一節始終
自靖而爲莊重忠義之臣也卽世宗十四年壬子與朴彭年同年等生員試二十年戊午與成三問河
緯地等同等文科二十四年壬戌以集賢殿學士與成三問河緯地研學於三角山津寬寺累拜爲
藝文館待敎侍講院文學集賢殿敎理弘文館應敎與成三問朴彭年諸公齊名而交厚際遇於世
宗以校理爲經筵官講論經書于世子而多有編纂書籍文宗大王自世子時與諸學士際遇己篤
而日平座於御榻而下言於諸學士而緊託幼世子之輔翼故諸學士皆垂淚感激誓以盡誠忠矣
至端宗朝以姦兇輩之作亂故有悒悒憂嘆而不樂於朝廷疾而以母老乞養得除鎭川縣監世祖
卽位累徵不就朝家疑之使人覘之散髮而如狂人看路傍木石則責之謂不拜奎杖之使者歸而
告之以得免禍至端廟禋位棄官歸竹州田舍自號竹溪散人其後朝家以成均館直講累徵而稱
病不就終老於竹州以時登家後山上向寧越而燒香望哭 世人稱日望哭峯茯庵李基讓撰墓
碣曰爲親屈者忠孝兩全銘曰露梁則碑越則壇些委魄於陰魂兮往其問些是則可以表現忠義
者也後士林追慕忠義而肅宗二十四年戊寅十一月定稱魯山君廟號以端宗大王遂以士林齊
義建立道莊祠於現陰城之道莊里而享祀之至高宗七年庚午以朝令廢撤至檀紀四千三百年
丁未以上士林公議攸同遂重建而進配翠琴軒朴公於西主壁以其與公同節忠義也至檀紀四千
三百十五年壬戌十月二十四日以肅慕殿備會齊議追配公於肅慕殿則可想夫惟公在天不寐
之英靈可得以伸戀君之誠而肅然喜悅矣是知其徵顯晦明之厥理有常者也公有三子長曰諱
伯元進士宣務郎次曰諱仲元歷任牙山靑陽二縣興殿中御史皆有聲譽季曰諱應元有孫曰璜
進士曰璋郡守曰璘長房出曰珩蔭彰信校尉忠武尉副司直贈司憲府執義曰瑗曰琛秉節校尉曰
瑀曰琅敎官曰玕參牟次房出曰弼大季房出會孫曰仁壽蔭仕宣敎郎童蒙敎官璜出曰仁後璋
出曰景福蔭展力副尉曰景楨曰景祥將仕郎贈左承旨曰承宗出系仲父瑗後曰景禮蔭歷洪川
金城二郡贈左承旨珩出曰景佑順副尉司正琛出曰景祿曰景禧曰景棋贈左承旨瑀出曰景
祐珉出曰景祖曰景稱拜出曰汝昌展力副尉弼大出玄孫曰詮清道郡守贈參判曰諒平海郡守
贈戶曹參判仁壽出曰謙將仕郎仁後出曰軾忠武衛司直景福出曰輪蔭泰陵參奉贈左承旨戶
曹參判景祥出曰德麒號戇軒文科歷京畿都事吏曹佐郎兵曹正郎承文院博士益山縣監海
美巖光載寧郡守行愛民善政而有聲譽爲配享道莊祠曰德麟出系叔父承宗後曰德鳳贈左承
旨曰德龜生員曰德鵬武科三水府使景禮出曰帨景佑出曰光世禦侮將軍將軍龍驤尉副司果
景祿出曰德麪軍資監奉事曰德鵰宣宣武武科宣傳官錄亨難原從勳曰德鄕參奉景祺出曰
淵曰潭景祐出曰夢先副司直景祖出曰香敦汝呂出來孫曰大復贈左承旨曰天復折衝將軍龍
驤尉副護軍詮出曰善復益山郡守司僕寺正靖社原從一等勳諒出曰大觀武司果謙出曰壽男
通政曰貴男參奉軾出曰國柱禮賓寺正曰國樞壬辰以功拜副正以壽陞同知中樞曰國樑折衝
將軍贈參判曰國櫓參奉贈參議曰國彬武科宣傳官歷任庇仁茂山二縣至嘉善訓練都正輪出
而五兄弟皆特有孝行自朝家褒旌壬亂時丁憂兄弟五人侍墓踔步不離墓側倭兵改容禮之日
勿侵孝子村孝行之感人如是也亂平後自上命褒五旌閭世稱五孝之家曰時泰折衝將軍副護
軍德麒之系子生父德龜曰時赫進士判官曰時喆曰時煜德鳳出曰時泰出系德龜出曰時榮德
麟出曰時翼司馬軾出曰連國訓練斂正光世出曰時瞻副護軍曰時豪戶曹正郎德麪出曰時賢
曰時敏德鵰出曰時鳴曰時允主簿德鄕出曰大立淵出曰石遜潭出疑秉節校尉曰旻曰臺夢先
出曰善亨香敦出六代孫以下不盡錄噫公惟以氣之灝氣之美稟其全粹以煥平智猷文章魁居
于文科與當世碩儒交厚可以期大用於世矣以世違之故官止於校理縣監是位不滿德也然確
持莊重之操承先王顧命之訓克守忠義之節先知兇逆絶而不濡於其迹而可得以免禍則是
乃知賢邪進退係世消長而居職制行皆本於忠孝之彛倫而刑于國者也故公迺棄官歸故里孝
養九老之母以克致務本之道是忠乃移孝而備全大節也公之逝世已經五百二十八年于今矣
裔孫業盛如盆羽之振振皆謹厚以忠孝自顯祇愼職壽簪纓袍笏錚映一世公之福祿善餘之慶
蓋其永與未艾而天之報施忠義有如是而世代之繁榮門戶之熾昌愈久愈新也尤配享於肅慕
殿廉而與同節之生六臣同堂配食者是知大節鴻名垂諸百世而不朽也是故僉儒同言曰此苟
非端廟之聖靈默顧於冥冥之中後孫報本之誠上徹于昭昭之天則烏得有此盛典乎公之忠義
事實已見於端廟忠義錄又載於肅慕殿備會錄不必多記公之來孫戶曹參議諱國櫓公之十一
世孫祖憲博學多聞歷任成均館典學典儀與陰城鄉校典校克輸護聖衛賢之誠虔奉道莊祠而
克致念祖修德矣
今沒已過七祀而在世日己託余以竹溪公忠義碑文而今乃其仲弟碩憲甫
承其伯兄之遺志以儒林公議攸同與宗中齊議將建立崇碑於道莊祠前而與其宗弟東憲貳憲訪
余而屬爲之銘曰此吾鄕吾門大事也 蓋亦一言其事實以徵諸後余慚非其人而謝不獲已不以
不文茲述其事而繼之以銘曰草溪華閥先蔭基底公焉繼後克趾厥美忠孝至行千秋高義唯是
天得非勉而至疾視兇逆矢不濡迹卓絶毅節終老不易以是銘章不愧我筆茲述懿節我言匪溢
善餘之慶厥理有常配食崇殿身後之光益紳以昌百世流芳士林齊議立石頌揚惟公英靈永保無疆
檀君紀元 四千三百二十三年 庚午(1990년) 六月上澣
原任 成均館 副館長 古阜 李壽源 謹撰
十六代孫 成均館 典學 碩憲 再拜 謹篆
密陽 朴奭遠 謹書
竹溪鄭先生節義紀行碑 建立推進委員會
委員長 道莊祠 都有司 安東 權泰淵
<표점>
죽계정공휘창절의기적비명병서 (竹溪鄭公諱昌節義紀蹟碑銘幷序)
公姓鄭氏, 諱昌, 號竹溪, 草溪人也. 我東國古家名閥, 斑斑可譜. 然或始盛而終衰, 中室( 원문에는 窒字이나 室字가 맞으므로 고쳤다.)而遂不振. 至於世繼簪纓, 彌六彌昌者, 草溪之鄭有焉. 始於麗朝, 益顯於李朝矣.
以高麗文宗朝, 諱倍傑, 官禮部尙書·中樞使, 贈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 諡弘文公(一云匡憲公), 爲一世始祖, 公之十五世祖也.
生諱文, 宣宗朝擢翰林, 轉右拾遺·殿中內給事·知制誥, 出知開城府事, 入爲刑部員外郎. 肅宗朝, 以秘書監如宋謝恩, 後拜刑部尙書·政堂文學兼太子賓客. 睿宗朝, 檢校司空·禮部尙書, 贈特進左僕射·參知政事, 諡貞簡公. 請立箕子祠, 兩世繼以爲東方儒學之宗.
三世祖諱福公(初諱復公), 太中大夫·刑員外郎. 三傳至諱弼,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參知政事兼判戶部事·太子保, 諡宣僖公. 生諱孚,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兼吏部事·特進三重大臣·上柱國·上將軍·太子師, 諡昭懷公. 生諱至平, 銀青光祿大夫·壁上三韓特進三重大臣·都僉議中贊兼判吏部事·典理司事·上護軍·世子師. 生諱(片頁), 三重大匡·廣陵君·密直使. 生諱自臣, 太中大夫·宗正卿. 生諱允吉, 奉翊大夫·密直副使, 公之高祖也.
曾祖諱修, 道號勿齋, 禑王癸亥文科, 始仕李朝, 判宗簿寺事·知西州事. 祖諱澮, 抱川監務·中郎將. 考諱孝恂, 知龍川郡事. 妣淑夫人江華崔氏, 監務崇女.
公生於李太祖二年癸酉, 卒於世祖八年癸未, 享年七十一. 配淑夫人永川李氏, 判中樞大提學膺女, 無育. 繼配淑夫人全州李氏, 府尹漸女.
公歷事世宗·文宗·端宗三朝, 堅持一節, 始終自靖, 而爲莊重忠義之臣也.
卽世宗十四年壬子, 與朴彭年同年等生員試; 二十年戊午, 與成三問·河緯地等同等文科; 二十四年壬戌, 以集賢殿學士, 與成三問·河緯地研學於三角山津寬寺. 累拜爲藝文館待敎·侍講院文學·集賢殿敎理·弘文館應敎. 與成三問·朴彭年諸公齊名而交厚. 際遇於世宗, 以校理爲經筵官, 講論經書于世子, 而多有編纂書籍.
文宗大王自世子時, 與諸學士際遇己篤, 而日平座於御榻而下, 言於諸學士, 而緊託幼世子之輔翼. 故諸學士皆垂淚感激, 誓以盡誠忠矣.
至端宗朝, 以姦兇輩之作亂, 故有悒悒憂嘆而不樂於朝廷, 疾而以母老乞養, 得除鎭川縣監. 世祖卽位, 累徵不就, 朝家疑之, 使人覘之. 散髮而如狂人, 看路傍木石則責之, 謂不拜奎杖之使者. 歸而告之, 以得免祸.
至端廟禋位, 棄官歸竹州田舍, 自號竹溪散人. 其後朝家以成均館直講累徵, 而稱病不就, 終老於竹州. 以時登家後山上, 向寧越而燒香望哭, 世人稱日望哭峯.
茯庵李基讓撰墓碣日: “爲親屈者, 忠孝兩全.” 銘日: “露梁則碑, 越則壇些, 委魄於陰魂兮, 往其問些.” 是則可以表現忠義者也.
後士林追慕忠義, 而肅宗二十四年戊寅十一月, 定稱魯山君廟號以端宗大王, 遂以士林齊義, 建立道莊祠於現陰城之道莊里而享祀之. 至高宗七年庚午, 以朝令廢撤. 至檀紀四千三百百年丁未, 以上士林公議攸同, 遂重建, 而進配翠琴軒朴公於西主壁, 以其與公同節忠義也.
至檀紀四千三百十五年壬戌十月二十四日, 以肅慕殿備會齊議, 追配公於肅慕殿, 則可想夫惟公在天不寐之英靈, 可得以伸戀君之誠, 而肅然喜悅矣. 是知其徵顯晦明之厥理有常者也.
公有三子: 長日諱伯元, 進士·宣務郎; 次日諱仲元, 歷任牙山·靑陽二縣, 興殿中御史, 皆有聲譽; 季日諱應元.
有孫日璜, 進士; 日璋, 郡守; 日璘. 長房出日珩, 蔭彰信校尉·忠武尉·副司直, 贈司憲府執義; 日瑗; 日琛, 秉節校尉; 日瑀; 日琅, 敎官; 日玕, 參謀. 次房出日弼大. 季房出會孫日仁壽, 蔭仕宣敎郎·童蒙敎官, 璜出; 日仁後, 璋出; 日景福, 蔭展力副尉; 日景楨; 日景祥, 將仕郎, 贈左承旨; 日承宗, 出系仲父瑗後; 日景禮, 蔭歷洪川·金城二郡, 贈左承旨, 珩出; 日景佑, 順副尉·司正, 琛出; 日景祿; 日景禧; 日景棋, 贈左承旨, 瑀出; 日景祐; 珉出日景祖; 日景稱, 拜出日汝昌, 展力副尉, 弼大出.
玄孫日詮, 清道郡守, 贈參判; 日諒, 平海郡守, 贈戶曹參判, 仁壽出; 日謙, 將仕郎, 仁後出; 日軾, 忠武衛司直, 景福出; 日輪, 蔭泰陵參奉, 贈左承旨·戶曹參判, 景祥出; 日德麒, 號戇軒, 文科, 歷京畿都事·吏曹佐郎·兵曹正郎·承文院博士·益山縣監·海美·巖光·載寧郡守, 行愛民善政而有聲譽, 爲配享道莊祠; 日德麟, 出系叔父承宗後; 日德鳳, 贈左承旨; 日德龜, 生員; 日德鵬, 武科, 三水府使, 景禮出; 日帨, 景佑出; 日光世, 禦侮將軍·將軍龍驤尉副司果, 景祿出; 日德麪, 軍資監奉事; 日德鵰, 宣武武科宣傳官, 錄亨難原從勳; 日德鄕, 參奉, 景祺出; 日淵; 日潭, 景祐出; 日夢先, 副司直, 景祖出; 日香敦, 汝呂出. 來孫以下不盡錄.
日大復, 贈左承旨; 日天復, 折衝將軍·龍驤尉副護軍, 詮出; 日善復, 益山郡守·司僕寺正, 靖社原從一等勳, 諒出; 日大觀, 武司果, 謙出; 日壽男, 通政; 日貴男, 參奉, 軾出.
日國柱, 禮賓寺正; 日國樞, 壬辰以功拜副正, 以壽陞同知中樞; 日國樑, 折衝將軍, 贈參判; 日國櫓, 參奉, 贈參議; 日國彬, 武科, 宣傳官, 歷任庇仁·茂山二縣, 至嘉善·訓練都正. 輪出, 而五兄弟皆特有孝行. 自朝家褒旌, 壬亂時丁憂, 兄弟五人侍墓, 踔步不離墓側. 倭兵改容禮之日: “勿侵孝子村.” 孝行之感人如是也. 亂平後, 自上命褒, 五旌閭, 世稱‘五孝之家’.
日時泰, 折衝將軍·副護軍, 德麒之系子, 生父德龜; 日時赫, 進士·判官; 日時喆; 日時煜, 德鳳出; 日時泰, 出系德龜出; 日時榮; 日時翼, 司馬, 軾出; 日連國, 訓練斂正; 日光世出; 日時瞻, 副護軍; 日時豪, 戶曹正郎, 德麪出; 日時賢; 日時敏, 德鵰出; 日時鳴; 日時允, 主簿, 德鄕出; 日大立; 日淵出; 日石遜; 日潭出; 疑秉節校尉日旻; 日臺; 日夢先出; 日善亨; 日香敦出. 六代孫以下不盡錄.
噫! 公惟以氣之灝, 氣之美, 稟其全粹, 以煥平智猷. 文章魁居于文科, 與當世碩儒交厚, 可以期大用於世矣. 以世違之故, 官止於校理·縣監, 是位不滿德也.
然確持莊重之操, 承先王顧命之訓, 克守忠義之節, 先知兇逆, 絕而不濡於其迹, 而可得以免禍. 則是乃知賢邪進退, 係世消長, 而居職制行, 皆本於忠孝之彛倫, 而刑于國者也. 故公迺棄官歸故里, 孝養九老之母, 以克致務本之道, 是忠乃移孝而備全大節也.
公之逝世, 已經五百二十八年于今矣. 裔孫業盛, 如盆羽之振振, 皆謹厚以忠孝自顯, 祇愼職, 壽簪纓袍笏, 錚映一世. 公之福祿善餘之慶, 蓋其永與未艾, 而天之報施忠義, 有如是而世代之繁榮, 門戶之熾昌, 愈久愈新也. 尤配享於肅慕殿, 廉而與同節之生六臣同堂配食者, 是知大節鴻名, 垂諸百世而不朽也是. 故僉儒同言日: “此苟非端廟之聖靈默顧於冥冥之中, 後孫報本之誠上徹于昭昭之天, 則烏得有此盛典乎?”
公之忠義事實, 已見於《端廟忠義錄》, 又載於《肅慕殿備會錄》, 不必多記. 公之來孫戶曹參議諱國櫓公之十一世孫祖憲, 博學多聞, 歷任成均館典學·典儀, 與陰城鄉校典校, 克輸護聖衛賢之誠, 虔奉道莊祠, 而克致念祖修德矣.
今沒已過七祀, 而在世日已託余以竹溪公忠義碑文. 而今乃其仲弟碩憲甫, 承其伯兄之遺志, 以儒林公議攸同, 與宗中齊議, 將建立崇碑於道莊祠前, 而與其宗弟東憲·貳憲訪余而屬爲之銘日: “此吾鄕吾門大事也. 蓋亦一言其事實以徵諸後.”
余慚非其人, 而謝不獲已, 不以不文, 茲述其事而繼之以銘.
銘曰:
草溪華閥, 先蔭基底. 公焉繼後, 克趾厥美. 忠孝至行, 千秋高義. 唯是天得, 非勉而至. 疾視兇逆, 矢不濡迹. 卓絶毅節, 終老不易. 以是銘章, 不愧我筆. 茲述懿節, 我言匪溢. 善餘之慶, 厥理有常. 配食崇殿, 身後之光. 益紳以昌, 百世流芳. 士林齊議, 立石頌揚. 惟公英靈, 永保無疆.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1990年)六月上澣
原任 成均館 副館長 古阜 李壽源 謹撰
十六代孫 成均館 典學 碩憲 再拜 謹篆
密陽 朴奭遠 謹書
竹溪鄭先生節義紀行碑 建立推進委員會
委員長 道莊祠都有司 安東 權泰淵
<번역문>
죽계 정공 휘 창 절의기적비명 병서
(竹溪鄭公諱昌節義紀蹟碑銘幷序)
공(公)의 성은 정씨(鄭氏), 휘(諱)는 창(昌),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우리나라의 옛 명망 있는 가문과 벼슬길은 족보에 뚜렷이 적혀 있다. 그러나 혹은 처음엔 번창하다가 나중에 쇠퇴하기도 하고, 중간에 막혀 결국 떨치지 못하기도 한다. 대를 이어 대대로 벼슬길(簪纓)에 올라 더욱 크게 번창한 가문으로는 초계 정씨가 있다.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고려 문종 때, 휘 배걸(倍傑)은 관직이 예부상서·중추사에 이르렀고,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홍문공(弘文公, 일설에는 광헌공)이니, 이분이 1세 시조이자 공의 15대조이시다.
그가 낳은 휘 문(文)은 선종 때 한림에 뽑히고 우습유·전중내급사·지제고를 거쳐 나아가 개성부사를 지내고 들어와 형부원외랑이 되었다. 숙종 때 비서감으로서 송나라에 가서 은혜에 감사하였고, 후에 형부상서·정당문학 겸 태자빈객에 임명되었다. 예종 때 검교사공·예부상서에 오르고 특진좌복야·참지정사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기자사(箕子祠)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니, 2대에 걸쳐 이어지며 동방 유학의 으뜸이 되었다.
3대조 휘 복공(福公, 처음 이름은 復公)은 태중대부·형부원외랑이었고, 3대를 전하여 휘 필(弼)은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참지정사 겸 판호부사·태자보에 오르고 시호는 선희공(宣僖公)이다. 그가 낳은 휘 부(孚)는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 겸 이부사·특진삼중대신·상주국·상장군·태자사에 오르고 시호는 소회공(昭懷公)이다.
그가 낳은 휘 지평(至平)은 은청광록대부·벽상삼한특진삼중대신·도첨의중찬 겸 판이부사·전리사사·상호군·세자사이다. 그가 낳은 휘 ?(諱(片頁))은 삼중대광·광릉군·밀직사이다. 그가 낳은 휘 자신(自臣)은 태중대부·종정경이다. 그가 낳은 휘 윤길(允吉)은 봉익대부·밀직부사이니,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 휘 수(修)는 호가 물재(勿齋)로 고려 우왕 계해년(1383)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처음 벼슬하여 판종부시사·지서주사가 되었다. 조부 휘 회(澮)는 포천감무·중랑장이며, 아버지 휘 효순(孝恂)은 지용천군사이다. 어머니 숙부인 강화 최씨는 감무 숭(崇)의 딸이다.
공은 조선 태조 2년 계유년(1393)에 태어나 세조 8년 계미년(1463)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다. 배필 숙부인 영천 이씨는 판중추 대제학 응(膺)의 딸로 자식이 없었고, 계배(繼配) 숙부인 전주 이씨는 부윤 점(漸)의 딸이다.
공은 세종·문종·단종 3조(朝)를 섬기며 한결같은 절개를 굳게 지켜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바르게 하였으니, 장중하고 충의로운 신하이다.
즉, 세종 14년 임자년(1432)에 박팽년과 같은 해(同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세종 20년 무오년(1438)에 성삼문·하위지 등과 동등하게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종 24년 임술년(1442)에는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하위지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예문관 대교·시강원 문학·집현전 교리·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성삼문·박팽년 여러 공들과 이름을 함께하며 교분이 두터웠다. 세종의 은우를 입어 교리로서 경연관이 되어 세자(文宗)에게 경서를 강론하였고 책을 편찬함이 많았다.
문종대왕은 세자 시절부터 여러 학사들과의 교분이 깊었으며, 매일 어탑(임금의 의자) 아래 평좌하여 여러 학사들에게 말씀하시며 어린 세자(端宗)를 보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다. 이에 여러 학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정성과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단종 조에 이르러 간흉들의 작란(수양대군 일파의 계유정난)이 일어났으므로 답답하게 우려하고 탄식하여 조정에 즐겨 나가지 않다가, 병을 핑계로 어머니가 늙었음을 이유로 봉양을 청하여 진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조정에서 이를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 몰래 살피게 하였다. 공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사람처럼 길가의 나무와 돌을 보며 꾸짖고, 궤장(임금이 하사한 지팡이)을 가져온 사신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보고함으로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은거하시자, 관직을 버리고 죽주(竹州, 지금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일대)의 시골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죽계산인(竹溪散人)’이라 호를 지었다. 그 후 조정에서 성균관 직강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죽주에서 일생을 마쳤다. 때때로 집 뒤 산상에 올라 영월(寧越)을 향해 향을 피우고 바라보며 통곡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봉우리를 ‘망곡봉(望哭峯)’이라 불렀다.
복암 이기양(李基讓, 1744년 ~ 1802년, 문집으로
복암유고(茯菴遺槁)가 있었다고 한다.)이 묘갈명에 쓰기를, “어버이를 위해 굽힌 자는 충과 효를 모두 보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명(銘)에 이르기를 “노량진에는 비석이 있고 영월에는 단(壇)이 있도다. 혼백을 어두운 혼에 맡겼으니 가서 물어보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충의를 표현한 것이다.
후에 사림(士林)이 충의를 추모하였고, 숙종 24년 무인년(1698) 11월 노산군을 단종대왕으로 묘호를 정함에 미쳐, 마침내 사림의 뜻이 모여 지금의 음성 도장리(道莊里)에 도장사(道莊祠)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고종 7년 경오년(1870)에 조정의 명령(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단기 4300년 정미년(1967)에 사림의 공의가 일치하여 마침내 재건하고, 취금헌 박팽년 공을 서쪽 벽에 추배하였으니, 이는 공과 절의와 충의를 같이 하였기 때문이다.
단기 4315년 임술년(1982) 10월 24일, 숙모전(肅慕殿; 단종과 사육신·생육신 등을 모신 사당) 총회에서 논의하여 공을 숙모전에 추배하였으니, 능히 생각하건대 오직 공의 하늘에 계신 영령이 임금을 그리워하던 정성을 펴서 숙연히 기뻐하셨을 것이다. 이로써 어둠이 지나면 밝음이 나타나는 거룩한 이치가 항상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백원(伯元)이니 진사·선무랑이고, 차남은 중원(仲元)이니 아산·청양 두 현감을 거쳐 전중어사에 이르렀으며 모두 명망이 있었다. 막내는 응원(應元)이다.
손자로는 황(璜)은 진사, 장(璋)은 군수, 린(璘)이 있다. 장남 계통에서 형(珩)은 음직으로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을 지내고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으며, 원(瑗), 침(琛; 병절교위), 우(瑀), 랑(琅; 교관), 간(玕; 참모)이 나왔다.
차남 계통에서 필대(弼大)가 나왔다. 막내 계통에서 증손자 인수(仁壽)는 음직으로 선교랑·동몽교관(황의 아들)이었고, 인후(仁後; 장의 아들), 경복(景福; 음직 전력부위), 경정(景楨), 경상(景祥; 장사랑, 증 좌승지), 승종(承宗; 숙부 원의 뒤를 繼後), 경례(景禮; 음직으로 홍천·금성 두 군수를 거치고 증 좌승지, 형의 아들), 경우(景佑; 순부위·사정, 침의 아들), 경록(景祿), 경희(景禧), 경기(景棋; 증 좌승지, 우의 아들), 경우(景祐), 경조(景祖; 민의 아들), 경칭(景稱), 여창(汝昌; 전력부위, 필대의 아들) 등이 나왔다.
현손으로는 전(詮; 청도군수, 증 참판), 량(諒; 평해군수, 증 호조참판, 인수의 아들), 겸(謙; 장사랑, 인후의 아들), 식(軾; 충무위 사직, 경복의 아들), 윤(輪; 음직 태릉참봉, 증 좌승지·호조참판, 경상의 아들), 덕기(德麒; 호 앙헌, 문과 급제 후 경기두사·이조좌랑·병조정랑·승문원 박사·익산현감·해미·암광·재령군수를 역임하며 애민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있었고 도장사에 배향됨), 덕린(德麟; 숙부 승종의 뒤를 繼後), 덕봉(德鳳; 증 좌승지), 덕구(德龜; 생원), 덕붕(德鵬; 무과, 삼수부사, 경례의 아들), 세(帨; 경우의 아들), 광세(光世; 어모장군·용양위 부사과, 경록의 아들), 덕면(德麪; 군자감 봉사), 덕조(德鵰; 선무무과 선전관, 형난원종공신에 녹훈됨), 덕향(德鄕; 참봉, 경기의 아들), 연(淵), 담(潭; 경우의 아들), 몽선(夢先; 부사직, 경조의 아들), 향돈(香敦; 여창의 아들)이 나왔다. 이하 내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내손(來孫)으로는 대복(大復; 증 좌승지), 천복(天復; 절충장군·용양위 부호군, 전의 아들), 선복(善復; 익산군수·사복시정, 정사원종1등훈, 량의 아들), 대관(大觀; 무과 사과, 겸의 아들), 수남(壽男; 통정대부), 귀남(貴男; 참봉, 식의 아들)이 있다.
국주(國柱; 예빈시정), 국추(國樞; 임진왜란 때 공으로 부정에 임명되고 장수로 동지중추에 승진함), 국량(國樑; 절충장군, 증 참판), 국로(國櫓; 참봉, 증 참의), 국빈(國彬; 무과 선전관, 비인·무산 두 현감을 거쳐 가선대부·훈련도정에 뜸)은 윤(輪)의 아들인데, 이 오형제는 모두 특별한 효행이 있었다.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는데, 임진왜란 때 상(喪)을 당하자 오형제가 묘를 지키며 한 걸음도 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왜병들이 모습을 바꾸어 예의를 표하며 "효자의 마을을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효행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난이 평정된 후 임금이 포상을 내려 다섯 개의 정문(五旌閭)을 내리니 세상에서 ‘오효지가(五孝之家)’라 일컬었다.
시태(時泰; 절충장군·부호군, 덕기의 계자, 생부는 덕구), 시혁(時赫; 진사·판관), 시철(時喆), 시욱(時煜; 덕봉의 아들), 시영(時榮), 시익(時翼; 사마시, 식의 아들), 연국(連國; 훈련체정), 시첨(時瞻; 부호군), 시호(時豪; 호조정랑, 덕면의 아들), 시현(時賢), 시민(時敏; 덕조의 아들), 시명(時鳴), 시윤(時允; 주부, 덕향의 아들), 대립(大立), 석손(石遜; 연의 아들), 민(旻; 담의 아들), 대(臺), 선형(善亨; 몽선의 아들) 등이 있다. 6대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오직 넓고 아름다운 기운의 정수를 받으셨으니, 지혜와 도략, 문장이 활달하여 문과에 으뜸으로 계셨고 당대의 석학들과 두터이 교유하셨으니 세상에 크게 쓰이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도리가 어그러졌기 때문에 관직이 교리와 현감에 그쳤으니, 이는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장중한 지조를 확고히 지키고 선왕(文宗)의 고명(顧命; 遺敎)의 가르침을 받들어 능히 충의의 절개를 지키셨다. 간흉의 역모를 먼저 알고 절개하여 그 자취에 물들지 않고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이는 어질고 사악함의 진퇴가 세상의 흥망에 달렸음을 알고,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모든 행동이 충효의 인륜에 근본을 두어 나라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구로(九老)의 어머니를 효도로 봉양하여 능히 근본을 다하는 도리를 이루셨으니, 이것이 바로 충성을 효도로 옮겨 대절(大節)을 전면적으로 갖춘 것이다.
공이 서거하신 지 이제 528년이 지났다. 후손들이 번창함이 깃털이 풍성함과 같아서 모두 듬직하고 두터워 충효로써 스스로를 나타내며, 직분을 삼가고 관작과 벼슬을 누리어 한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다. 공이 남기신 복록과 선행의 경사가 영원히 다하지 아니하여, 하늘이 충의에 보답함이 이와 같아서 세대의 번영과 가문의 창성함이 오래될수록 더욱 새로워진다. 더욱이 숙모전에 배향되어 청렴하고 동절(同節)의 생육신과 더불어 한 사당에서 제향을 받으시니, 대절과 큰 이름이 백세에 전해져 썩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유학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이 어찌 단종대왕의 성령이 어두운 가운데 그윽히 보살피시고, 후손들이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이 밝은 하늘에 다다라 이러한 성대한 전례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공의 충의 사실은 이미 《단묘충의록(端廟忠義錄)》에 나타나 있고, 또 《숙모전비회록(肅慕殿備會錄)》에 실려 있으므로 다 적지 않는다. 공의 내손 호조참의 휘 국로(國櫓) 공의 11세손 조헌(祖憲)은 박학다식하여 성균관 전학·전의, 음성향교 전교를 역임하며 성현을 호위하는 정성을 다 바쳐 도장사를 정성껏 받들고 조상을 생각하며 덕을 다듬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7년이 지났는데, 살아생전에 나에게 죽계공의 충의 비문을 부탁했었다. 이제 그의 둘째 동생 석헌(碩憲) 씨가 큰형의 유지를 이어 유림의 공의를 모으고 종중과 함께 협의하여 도장사 앞에 숭배(崇碑)를 세우고자, 문중 동생 동헌(東憲)·이헌(貳憲)과 함께 나를 찾아와 명(銘)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고을과 문문의 큰일입니다. 그 사실을 한마디 적어 후세에 증거로 삼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스스로 그만한 인물이 못됨을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으나 사양하지 못하고, 문장이 서툴지만 그 사실을 기술하고 이어 명(銘)을 적는다.
명(銘)에 가로되,
초계의 화려한 명문가, 조상의 덕업이 기틀이 되었네. 공께서 그 뒤를 이어 능히 그 아름다움을 다하셨도다. 충성과 효도의 지극한 행실, 천추에 높은 의리로다. 이는 오직 천성으로 얻은 것이니 힘써서 도달한 것이 아니로다.
흉역한 무리를 원수같이 보아 자취를 물들이지 않기로 맹세하고, 탁월하고 단호한 절개, 늙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으셨네. 이 비문으로 기록함에 내 붓끝이 부끄럽지 않으니, 이 아름다운 절개를 서술함에 내 말이 과장됨이 없도다.
선행이 남긴 경사, 그 이치는 항상 유구하여라. 숭모전에 함께 제향되니 죽은 뒤의 영광이로다. 후손들은 더욱 번창하여 백세에 향기를 날리리. 사림이 뜻을 모아 돌을 세워 송양하노니, 오직 공의 영령이시여, 영원토록 무강을 보존하소서.
단군기원 4323년 경오년(1990년) 6월 상한(上澣)
전(原) 성균관 부관장 고부 이수원(李壽源) 삼가 지음
16대손 성균관 전학 석헌(碩憲) 재배하며 삼가 전액(篆額)함
밀양 박석원(朴奭遠) 삼가 씀
죽계정선생 절의기행비 건립추진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