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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빛으로 나아가는? 빛으로부터 숨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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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빛으로 나아가는? 빛으로부터 숨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가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기의 죄악이 다 드러나기에 나아가지 않고 숨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주님이고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빛이지만
죄를 지으면 영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제로도 빛이 두려워 숨습니다.
어려서 제가 돈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남의 집에 갔을 때 방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졌습니다. 돈을 훔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저는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렸는데
집에 와서 그 돈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차츰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집을 나가서 밤늦도록 밖에서 떨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죄의식이었고,
어린 제게는 밤이 무척 무서운데도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의 두려움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짓고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었는데
죄 드러나는 것의 두려움이 하느님의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죄를 숨기려던 것이 하느님과 단절케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시편 139편에서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듯 하느님은 다 아시는데 숨느라 하느님과 단절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지만,
다윗도 처음에는 바세바와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고,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 사실을 드러나게 하시자
시편 51편에서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노래하고,
139편에서도 앞에서 본 것처럼 노래한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죄를 숨기려다가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하느님과 단절되고 마는데, 오늘 저는 결이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삶을 성찰코자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 차원 말입니다.
저의 경우 프란치스코를 알면 알수록
제가 프란치스코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프란치스코를 닮으려 애를 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프란치스코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더 있어봤자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수도회를 떠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저와 같이 수도회를 떠나지 않더라도 프란치스코를 알수록
자기의 한계를 보는 것이 괴로워 프란치스코에게 나아가기를 중단하고
차라리 다른 성인들 얘기를 강론이나 강의 때 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꼭 따라야 하지만 다른 성인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의 공동생활에서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잘살고 있는 형제들 곧 빛이 되는 형제들도 있는데
그런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부담스러워 편한 형제들과만 어울리거나
더 안 좋은 경우는 유유상종하며 공동체의 어두운 면만 뒷담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인가?
나는 빛으로부터 숨는 존재인가?
오늘부터 한 주간 모 수녀회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녀님들을 위한 강론입니다.
감안해서 들어주시고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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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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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저는 사제수품 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성찰은 합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 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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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부터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어느덧 28년 전입니다.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교우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성지순례를 신청했습니다. 친한 동창신부님들도 8명이 함께 신청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성지순례에 대한 이해도 적었습니다.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공생활을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곳(Holy Land)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사도들이 선교한 곳, 교우들이 순교한 곳, 성인과 성녀들이 살았던 곳(Holy Place)도 성지가 되었습니다. 해외에도 성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도 성지가 많습니다. 교우들이 순교한 곳, 순교한 교우들이 묻힌 곳, 성인과 성녀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들이 있습니다. 절두산, 새남터, 미리내, 솔뫼, 치명자 산과 같이 한국에서 성지가 많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왜 성지순례를 가는 걸까요? 저는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과로를 했으면 얼굴의 모습이 까칠 할 것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자녀의 문제로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분노와 불만이 있다면 화난 모습일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생기가 가득한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굴은 환한 미소가 보일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자선을 베풀면 온화한 얼굴이 될 것입니다. 성지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생각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의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듬뿍 안고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를 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기에 앞서서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9일 기도를 하면서 특별한 기도 지향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왜 성지순례의 목적을 이야기할까요? 28년 전에 저는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성지순례를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9일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간다는 즐거움에 성지순례의 목적과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주변의 경치는 보았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수위권 성당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은 찍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 주님탄생 성당에서 경배하면서 저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봉헌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기보다는,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기보다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3년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성지라는 거울에 비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잡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자캐오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 한걸음씩 걷겠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처럼 저도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올리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 성당에 있는 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십시오.” 주님!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하시어 순례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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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기도가 너무 어렵다는 분을 만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도 힘든데, 평상시에 시간을 내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힘든 일일까요? 물론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도 얻고,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어서 분명히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가 너무 힘들다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정의하지요. 아주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절친’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만났고,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고서 ‘절친’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만나고 대화해야지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를 한 뒤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양치질을 하실 것입니다. 원래 인류는 양치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양치질한 지는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양치질합니다. 양치질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본인이 찝찝해서 못 견딥니다. 하다못해 껌이라도 씹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습관이 되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양치질이 인간 치아 건강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우리 삶에 기도는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도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을 만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하십니다(요한 3,16 참조). 따라서 주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데 집중하는 습관이 가장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습관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둠의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 어둠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빛으로 나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습관을 나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양치질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기도와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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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에디 리켄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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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의 선택, 선택의 은총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이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2.6)
참 좋은 화답송 시편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대한 영문주석이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부분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이야기는 사도들과 유다 지도자들간에 점증하는 긴장으로부터 ‘우스꽝스런 구원(comic relief)’을 마련해 준다. 천사가 그들의 죄수들을 풀어줌으로 야기된 산헤드린 최고의회의 당황함은 참으로 ‘익살맞다(funny)’. 그것은 신적神的 경솔함의 섬광閃光이다. 누군가 알아채고 한말이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진지함 때문이다.’ 오늘 두 독서의 가르침은 ‘가볍게 하라!(lighten up!)’처럼 보인다”
심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함, 엄중함, 진지함은 참영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유머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가볍게, 밝게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계되어 읽은 글도 생각납니다.
“심각함은 덕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악덕이다. 엄숙함은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웃음은 도약이다. 무거워지기는 쉽고, 가벼워지기는 힘들다. 사탄은 엄숙함의 힘에 의해 추락했다. 천사들은 자신을 가볍게 함으로 날 수가 있었다.”
선택이 답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이왕이면 행복을 사탄이 아닌 천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선택이 저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우연히가 아닌 은총의 선택입니다. 뜻밖에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사순특강을 동영상으로 감명깊게 공감하며 재미있게 보고 들은후 원장수사에게 휴대폰을 알아 아빠스와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아래 두 경우 저의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 또한 선택의 은총임을 절감했습니다.
“뜻밖에 유투브에서 아빠스님의 사순특강 재미있게 감명깊게 보고 들었습니다. 정말 준비하시노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부활 축복 가득 받으세요!”
“신부님의 격려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셔서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세요.”
주고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이 참으로 저를 행복하게 했고, 즉시 원장수사를 불러 차 한잔 하며 이 기쁨을 나누었으니 실로 몇 달만에 은총의 선물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분이 보내준 사진이 너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라 주고 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 병실에 있었더니 직원 간호사님이 옥상 여행 시켜주었습니다. 꽃구경 봄바람 구경했나이다.”
“사진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환상적입니다. 두분이 정말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들같기도 하고 천사들같기도 합니다.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간호사님께 고맙다는 인사 전해 주세요.”
“네 신부님, 감사하옵니다.”
주고 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에 참 행복했고 긴 여운의 향기로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분을 선택할 것을 간곡히 권하는 느낌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참 인상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와 연상되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는데, 그 아드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새삼 두분에게는 사랑이 답이요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도 심판도,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어리석어 무지로 인해 이 좋은 선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요 빛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어둠의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사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런지요! 어디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제가 조선 선비들의 평전을 읽으며 결정적인 아쉬움은 초월적 희망과 기쁨이, 파스카의 희망과 기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치명적 결함입니다.
그러니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구원이요 희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지혜로운 선택은 없습니다. 무거워지기는 쉬워도 가벼워지기는 힘듭니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무거움 때문이요 천사가 날 수 있는 것은 부단히 자기를 비워 가볍게 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할 때 날로 가벼워져 천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탁월한 선택은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행복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탁월한 모범은 사도행전의 사도들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봅니다. 주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수인들이 된 사도들을 풀어줌으로 최고의회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마치 빛이신 하느님과 어둠의 세력간의 싸움같습니다. 다음 두 구절이 사도들의 완전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의 사필귀정의 결론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새삼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보고가 점입가경입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예수님뿐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생명의 말씀이자 행복인 주님을 날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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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저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라는 이 구절을 오늘의 기도 구절로 정했습니다.
찬찬히 하루라는 공을 들여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성찰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산다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진실로 나의 모든 것, 즉 마음과 정신과 힘과 영혼을 다해서 빛을 사랑하고 따라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살펴보고 또 살펴볼수록 어둠이 많이 보입니다. 하느님께 보이기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어둠이 보입니다.
제 안에 있는 어둠이 다시는 제 마음을 사로잡지 않도록 하고 싶지만,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는 저는 늘 실패하고 맙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초라함이고 동시에 한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내면의 어둠을 마주할수록 빛이신 그리스도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다면 어둠을 어둠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어둠 안에서 어떻게 어둠을 구별하겠습니까?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어서 우리는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어둠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어둠을 발견할 수 있다면, 후회하고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여러분 또한 빛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을 찾되 어둠을 따라가지 말고 빛을 따라가십시오. 점점 더 밝은 빛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걸어갈 수 있다면 우리의 어둠은 점점 그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 들려주신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라는 말과 합치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둠은 우리가 나약한 인간이기에 늘 우리에게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힘이 아닌 빛의 힘으로 그 어둠을 소멸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가 빛으로 나아가는 한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모두 조금씩 밝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란 관찰이다.
아이작 뉴턴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가치 있는 발견을 했다면,
다른 능력보다
참을성 있게 관찰한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가치 있는 발견의 바탕에는
관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이렇습니다.
참을성 있게 우리 내면을 봐야 합니다.
쉽게 지나치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내면의 감정과 아픔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으로 주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면의 대화이고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도 관찰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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