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가 틀립니다.
강순희(향원)
“비밀번호가 틀립니다.”
새벽 3시,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록에서 난데없이 안내 음성이 튀어 나왔다. 누군가 도어록의 뚜껑을 위로 열고 비밀번호를 잘못 누른 것도 아닌데 비밀번호가 틀렸다니 참 황당한 일이다. 한 번의 안내 음성으로 끝나지 않고 잠시 뒤에 또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도어록이 오작동을 한 것은 그날 새벽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한 달 전부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상황과 맞지 않은 안내 음성이 들리고 “비밀번호가 틀립니다.” “입력이 바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경보음까지 “왱왱.” 울렸다. 이상하게도 한밤중이나 새벽에만 잘못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쁜 사람이 문을 열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정말 무서웠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등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의 그 곱고 상냥한 목소리가 오작동을 하면서 새벽에 들으면 섬뜩하기까지 했다. 분명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인기척도 없었고, 문을 열어서 확인해 보면 번호 키에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 이 편리했던 디지털 잠금 장치는 왜 이러는 걸까? 음성이 흘러나오면 우리 집 강아지 푸들은 시끄럽게 짖어대고 이웃에 소음 피해까지 주겠다 싶어서 처음 설치해 주셨던 열쇠, 전기, 도장 분야에서 프로인 가게 아저씨께 도움을 청했다. 이것저것 살펴보셨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단지 건전지 4개를 갈아 끼워 주셨다. “아픈 곳은 많아서 환자가 증상을 호소하는 데 의사는 정확한 병명을 얘기해주지 못하는 상황 같다.”고 하시며 한번 사용해보라고 하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며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낮에는 조용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결국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 전날 밤에 심하게 오작동을 해서 새것으로 교체하고 안내 음성도 들리지 않게 설정했다. 현관문을 부드럽게 여닫는 장치인 도어 클로저도 새로 바꾸었다. 돈을 듬뿍 들이고서야 다시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디지털 도어록은 기존 열쇠 대신 비밀 번호나 반도체 칩, 스마트카드, 지문 등 디지털화한 정보를 열쇠로 활용하는 첨단 잠금 장치라고 하는데 오작동을 하니 오히려 더 불편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옮겨 가면서 우리는 엄청난 변화와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늘 최신 기기들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앞사람이 잘 사용하던 복사기도 내가 하려면 종이가 끼여 고장이 나기도 하고 많은 양의 업무를 앞두고 있으면 인터넷이 안 되는 등 컴퓨터는 꼭 말썽을 부렸다.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것으로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업무시스템에 의해 전산화 된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요즘 도시열차를 타보면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께서도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 뉴스를 보고 계신다. 버스 정류장에는 정보시스템에 의해 전광판이 버스 도착 시각을 알려 준다. 사람들은 손 안의 작은 컴퓨터,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소통한다. 나도 뒤늦게 스마트폰으로 바꾸었지만 꼭 필요한 몇 개의 기능만 익혀서 사용할 뿐이다. 편리한 반면 디지털 시대의 이면과 부작용도 생기다 보니 아날로그란 말에 애착이 간다. 전자시계 보다 초침, 분침, 시침이 움직이며 시간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집 벽시계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지난 수요일 버스를 타고 두 번째로 박물관 대학에 갔다. 강당에서 구석기시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인류 도구 발달의 99%는 구석기시대에 이루어졌고 0.1%의 시간 속에서 현대 문명이 탄생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약 25만년 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였고 구석기인들은 현재의 모양과 같은 뼈바늘을 사용해서 옷과 신발을 만들어 입고 추위를 이겼다고 한다. 또 맘모스의 뼈와 가죽을 사용하여 집을 짓기도 했으며 우리와 똑같이 생긴 손으로 손자국을 찍어 동굴 속에 벽화로 남겨 놓았다. 정교한 손은 모든 의식주를 지배했다. 우리나라에도 20만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강, 하천, 동굴 주변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특히 구석기의 종류가 너무나 많고 기술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기능이 다 달랐다는 점이 놀라웠다. 불을 사용했고,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소화가 빠르고 영양 공급을 통해 인지 능력이 더 발달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고기가 익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경우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구석기인들이 벌써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수십만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그들이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돌과 나무와 진흙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익숙함일까? 현대 문명을 탄생시킨 0.1%의 시간 속에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첨단 디지털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아날로그 방식에 향수를 느낀다. 모든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그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첨단 제품을 팔면서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를 하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서가에는 책이 넘쳐나며 길고 널찍한 테이블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백발의 노신사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책을 고르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가는 도심 한가운데 시간이 멈춘 듯한 낭만적인 장소가 있음을 발견했다. A중고서점이다. 한 권의 책을 고른 나에게 여직원은 컴퓨터가 있는 쪽으로 안내하며 인터넷서점의 회원 가입을 권했다. 그 자리에서 회원가입을 했더니 스마트폰으로 알림톡이 왔다. 모바일 사이트에 가입 신청을 해 주셔서 고맙다고.
“어휴! 모바일 사이트는 또 뭐야?”
2017. 4. 1
첫댓글 문명의 이기가 오히려 발목을 죄는 격이네요. 디지털의 편리함 뒤에 그런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을 적절한 비유로 잘 풀어 놓으셨습니다.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디지털도어록은 이상 징후가 있을 때 미리 조치하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외출시 고장으로 잠겨버려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디지털도어록은 충격에 약하므로 보조도어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옛날 구석기인들의 지혜를 생각해 보니 현대의 디지털 문명도 상업성의 결과이고 그렇게 까지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한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세대들의 비극이라 할까? 휴대폰 지하철 자동차 신제품은 온통 디지털로 도배 되었지만 편리함 전에 답답함을 느낄때가 많읍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을 수 밖에 ...
현대인이 공부하는 학문의 대부분은 몇 백년, 혹은 몇 천년 전의 고전이라고합니다. 성경 불경은 물론 공자, 맹자,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모든 학문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현대인의 정신세계도 그들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을 옛사람들을 무식하고 미개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아마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참 답답한 분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제품들의 디지털화로 편리하기는 하지만 올바른 사용을 하기가 쉽지않으며. 고장이 났다면 통채로 교환을 해야하는 문제도 있는거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경주안압지 발굴때 나온 다리미가 어릴때 우리집에서 사용한 것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문화는 천천히 변해가야 낭만도 있지만 기계문명만 남을가 염려도 됩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