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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O-LEE CLUB 원문보기 글쓴이: 이창수
< 황태성 조카사위 권상능 심층증언 황태성> 모교 교정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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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씨가 내려온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른 아침에 김민하씨가 우리집을 예고없이 방문했어요. 김민하씨는 우리 부부와 어린 시절을 같이 지냈고 나와는 경북사대부속중학교 동기동창이죠. 또 저의 매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며칠 전 학교로 북에서 황태성씨가 찾아왔고 지금 자기 집에 머물러 있는데 우리 내외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순간 긴장이 감돌았죠. 우리 내외는 바로 흑석동 김민하의 집으로 달려갔지요. 내 아내(임미정)는 황태성씨의 조카딸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모친이 황태성씨의 누이동생이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석달 반 정도 지난 시점이군요. 그런데 황태성씨는 왜 김민하씨를 찾아갔습니까?
원래 황태성씨는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김성곤씨가 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사에 찾아갔습니다. 황태성씨와 김성곤씨는 인연이 깊은 사이입니다. 그때 김성곤씨는 국제언론인협회 회의차 외국에 나가 있어 만나지 못했죠. 그런데 황태성씨가 조카딸인 제 아내 임미정을 찾아나선 겁니다. 우선 조카딸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했죠. 그 사람이 바로 당시 중앙대학교 강사로 있던 김민하씨였습니다.
-황태성씨가 김민하를 만나면 조카딸의 주소지를 찾을 수 있다고 판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하씨는 4·19 혁명이 나기 전 해인 1959년 5월 17일 제 누이동생과 결혼식을 올렸어요. 이 자리에 참석했던 우리 부부도 가족사진을 찍었죠. 그런데 이 사진이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김민하 맏형인 김재하씨에게 전해졌고, 다시 이북에 있던 김민하씨 작은형에게 보내졌습니다. 황태성씨는 북에서 이 사진을 보고 조카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 황태성씨가 이미 김민하씨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렇죠. 사실 김민하씨와 우리 부부 그리고 황태성씨는 일찍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황태성씨는 김민하의 선친(김원출)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예요. 청리(靑里)에서 양조장을 하던 김민하의 집과 담 하나 사이로 이웃하며 살았죠. 또 김민하와 내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며 가족들과도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내가 김민하를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9월 대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대부중에 입학해서였죠. 그때 같은 학교에 입학한 김민하와 한 반이 된 겁니다. 그는 우리집 바로 이웃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어요. 또 우리집 이웃에는 김천에서 이사온 황태성씨가 살고 있었고 제 아내는 당시 외삼촌 황태성씨의 집에서 경북여중을 다녔습니다. 그때 김민하는 대구여중 교사로 근무하는 누님과 함께 고향 어른인 황태성씨의 집에 함께 기거한 일도 있었죠.
그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기 위해 밀사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한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남조선에서 군사쿠데타가 났을 당시 김일성 수상은 쿠데타 주체의 과거경력과 관련해 어떤 가능성을 내다보고, 쿠데타의 성격이 무엇인지, 박정희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 수상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 가운데 박정희와 잘 아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자진해서 내려가겠다고 나섰다.’ 황태성씨는 자신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있다”며 자신이 내려온 사실이 외부기관에 알려지지 않도록 당부했습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임무도 얘기를 했습니까?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첫째는 5·16 직후 군사정권이 북으로 공작원을 파견한 진의를 파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황태성씨는 “1961년 7, 8월경 남쪽의 군사정부가 국제문화협회 소속의 이정현이라는 사람을 북쪽에 보내 서부전선에서 영관급 군인으로 이루어진 남북협상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북 내부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결과 제안의 진의를 확인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황태성씨에게 이 임무가 부여됐다는 겁니다. 둘째는 남쪽의 제안이 진실이라면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간의 대치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적인 통일을 하자는 뜻을 전달하고, 이를 위해서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남북에 비밀무역대표부를 설치하자는 안을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셋째는 박정희 의장에게 모종의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태성씨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그는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중형(仲兄) 박상희씨가 사실은 자신의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맞선을 보지도 않고 결혼할 정도로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즉 박상희씨 부인 조귀분여사를 황태성씨가 소개한 겁니다. 조여사는 김종필씨의 장모죠.
“결혼식 때 처음 봤는데 아주 추녀더라”고 농담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어요. 그럴 정도로 황태성씨와 박상희씨는 허물없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반신반의하는 상태였죠. 황태성씨는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박정희는 어릴 때 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갈 때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하러 왔었다. 자신의 신상에 관한 것을 일일이 자문받으러 왔고 해가 바뀔 때마다 세배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정희는 만주로 갈 때도 나와 상의했다. 나는 어디 가든지 자신을 위해 단련한다면 좋겠다는 뜻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
- 당시 황태성씨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왕학수 고려대 교수를 통해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태성씨의 생각이었습니까? 처음에는 신당동이던가 태극당 뒤에 있던 박정희 의장 공관에 몇 번 가보고, 청파동 김종필씨 집에도 몇 번 가 직접 접촉하려고 했으나 경비가 있어서 포기했어요. 황태성씨는 본래 박정희 의장의 형수인 조귀분여사를 통해서 박의장과 만날 생각을 하고 내려온 것 같아요. 박정희 의장이 형보다 형수를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조여사는 “디딜방아 찧어서 시동생 공부를 뒷바라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또 조여사는 저의 장모, 즉 황태성씨의 누이동생과 가까운 사이였어요. 두 사람은 일제시기에 여성운동에 참여해 근우회에서 같이 활동하기도 했죠. 그래서 제일 먼저 조여사와 간접적인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못했죠.
김종필 장모 조여사, 황태성이 중매 차선책으로 황태성씨와 상의해 왕학수 교수를 통해 박정희 의장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왕 교수와 박 의장은 대구사범 동기동창이고 당시 최고회의 기획위원으로 박 의장과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한 것이죠. 게다가 김민하씨와 왕 교수는 동향(상주)이고 사제지간으로서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우리와 평소 자주 어울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관계였어요. 왕 교수가 박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에게도 얘기를 전달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전달된 면담 요청에 대한 답변이 없어 왕 교수가 또다시 면담 요청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내외에게 직접 경북 구미의 조여사 댁을 방문해 서신을 전달하고 조여사와 함께 상경할 것을 부탁했어요. 황태성씨는 조여사를 만나서 함께 박 의장이나 김 정보부장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습니다. 황태성씨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조여사에게 건네며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황태성씨가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가시자”고 했더니 무척이나 당황해했습니다. 그때 황태성씨는 조여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역에 나와 있었죠. 결국 조여사가 동행을 마다해서 대신 저의 집 주소를 남기면서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한 후 돌아왔어요. - 황태성씨는 박 의장 면담 요청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습니까? 황태성씨는 계속 김민하씨 집에 있었죠. 가족들의 안내로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었어요. 영화 <상록수> 였습니다. 일제시기에 지식인들이 좌절하는 장면에서 황태성씨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억나는 일은 이때 황태성씨의 부탁을 받고 장손녀를 만나게 한 일이에요. 우리 내외가 구미에 다녀온 후 제게 부탁하시더군요. 처음에 내려오자마자 제 아내에게 손녀딸의 안부를 물었는데 공적인 일의 중대성 때문에 유보하고 있던 상태였죠. 황태성씨의 장남 황경옥씨는 일본 메이지대 출신으로 1949년 대구지하항쟁의 주모자로 처형됐는데 그의 외동딸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죠. 당시 동덕여중 1학년이었는데 제가 동덕여중으로 찾아갔어요. ‘시골에서 오신 친할아버지 친구가 너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니 함께 가자’고 했죠. 흑석동으로 함께 데리고 가서 혈육 상봉을 주선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손녀는 친할아버지를 몰라봤지만 이렇게 황태성씨는 감격적인 해후를 한 바 있습니다. 황태성씨가 1946년에 월북했고, 둘째 아들(황기옥)은 세브란스 의대 재학중 월북, 당시 평양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체포는 언제, 어떻게 됐습니까? 구미 조여사댁을 다녀온 지 5, 6일 정도 지난 어느 이른 아침에 김민하의 집으로 중정 요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집 주소를 묻고 만날 것을 제의했어요. 김민하는 시내 광화문 소재 금난다방에서 오후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그들을 돌려보냈죠. 우리는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하고 다시 한 번 황태성씨에게 ‘지금이라도 판단이 바뀌시면 되돌아가시라’고 권했지요. 조여사에게 제 집주소를 알려드렸는데, 중정 직원이 김민하 집으로 찾아온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태성씨는 ‘신분이 확실하고 김 정보부장이 보낸 사람이라면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김민하와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갔어요. 중정 요원 세 사람이 나왔더군요. 우리는 그들을 따라서 중정 사무실로 갔습니다. 황태성씨는 김민하의 집에 대기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흑석동으로 가서 황태성씨를 대동하고 왔고, 우리는 그날 저녁 늦게 귀가했습니다. 며칠 후 10월 24일 정보부 사무실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출두하니 그날로 구속됐습니다. - .
박정희, 대통령 취임 사흘 전 황태성 사형 집행 2년간이나 확정판결이 내려지지 않다가 선거과정에서 크게 말썽이 나자 갑자기 서둘러 처형한 느낌이었죠. 그리고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고 제3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니까 박 의장의 대통령 취임식 사흘 전에 황태성씨를 총살처형한 겁니다.
황태성을 직접 신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군정당국은 미국의 압력을 끝내 뿌리치지 못해 한때 황태성을 미국 수사기관에 넘겼습니다. 체포된 후 황태성씨는 가족 외에는 면회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면회를 가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집사람은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하며 구명운동을 했습니다.
황태성씨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소문해보니 미군정보기관에 갔다고 하더군요. 일부 글에서 보면 일주일 정도라고 나와 있더군요. 당시 느낌으로는 약 2주 동안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황태성씨가 돌아온 후 면회 때 다시 만나보니 미군정보기관이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주로 신문했다고 하더군요. 황태성씨는 “이놈들이 박정희와의 관계를 물어보는데 내가 일주일 이상 묵비권을 행사하니까 싫은 소리를 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중정이나 미군정보기관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황태성씨가 ‘미군정보기관’이라고 했습니까? 그때 ‘대방동’이라고 했습니다. 미군첩보부대가 대방동에 있었는데 그곳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황태성씨가 처형된 후 ‘처형하지 않고 살려두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때문에 국회에서도 황태성사건 진상조사단이 구성될 정도로 떠들썩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어느 주간지에 황태성씨가 북에 살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습니다. 저는 1963년 8월 25일, 구속된 지 1년8개월 만에 출감했습니다. 제가 출감한 후 정확히 3개월 20일째 되는 날, 황태성씨는 인천 군부대 형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시신은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그날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토요일이라 바로 인수를 하지 못하고 12월 16일 월요일에 서대문형무소로 황태성씨 막내동생과 우리 내외 그리고 친지분들이 함께 갔습니다. 총상을 입은 황태성씨의 시신은 처참했습니다. 집사람이 황태성씨에게 회색 마고자를 들여보내곤 했는데, 그 옷을 입은 채 피가 뒤엉켜서…. 차마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더군요. 인수 절차가 다 끝난 후 서대문형무소 뒷문으로 나가 홍제동 화장터로 갔습니다. 화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화장한 유골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보문동에 있는 조그만 절에 안치했는데, “유골을 왜 받았느냐”며 절 주지가 경찰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시신이 무슨 말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당시 정치상황이 그랬어요. 그 래서 어쩔 수 없이 제 셋방살이 집에 선반을 놓고 그 위에 모셨어요. 그러다가 이듬해 한식날 경북 상주의 선산 가족묘에 안장했습니다. 상주에 연락을 해두고 가보니 동네의 남녀노소할 것 없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만큼 고향에서 황태성의 신망은 높았습니다.
“김종필 정보부장 만났다?” -1963년 10월 10일 박정희는 기자회견을 갖고 황태성과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면서 치안국의 한 경찰관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으로 위장시켜 조선호텔에서 황태성씨를 만나게 했다고 밝혔습니다. 황태성씨는 박정희나 김종필을 실제로 만났습니까, 만나지 못했습니까?
‘본인을 만나서 할 말을 다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보부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황태성씨가 처외삼촌인데, 처가쪽 집안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인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군요. 장인 임종업씨는 중앙고보와 보성전문 출신으로 6·10만세, 광주학생사건 때 황태성씨와 같이 항일학생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중국 연안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하셨고 일제 때 8년간 감옥살이를 한 분입니다. 해방 후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애국자였습니다. 미군정에 체포돼 복역하시다가 6·25 전쟁 직전, 경찰이 신병 명목으로 보석을 시켜 1950년 초 김천 보도연맹 간사장에 강제로 앉혔어요. 전쟁이 나자 김천의 모든 보도연맹원을 한 곳에서 총살했는데 그때 장인도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진명여학교 출신으로 일제 때 여성운동(근우회)에 참여해 김천지부를 창설했고, 형제들이 모두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해 김천에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남쪽에서 먼저 사람을 밀파하여 전한 남북협상 제의에 대한 사실 확인과 민족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북에서 온 ‘밀사’를 처형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두번 다시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조국의 통일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애국열사들의 뜻을 받들어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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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대구국민학교와 경북사대부속중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중인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홍익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한국근대사를 전공했다. 전후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정책을 반대하는 진보적 청년운동조직 ‘경향회’를 결성, 고(故) 이상두(진보당사건 관련), 고(故) 김질락(통혁당사건 관련) 등과 함께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미성기록영화사를 설립해 <자라나는 우리서울> 4·19 혁명 때는 시위 현장을 촬영해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고 말았다. 1961년 황태성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1970년 ‘조선화랑’을 개관,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이 발표한 황태성사건은 ‘거물 간첩 황태성’ 사건이었다. 당시 황태성사건을 둘러싼 야당의 공세도 주로 황태성의 공작금이 공화당 조직자금으로 쓰여졌다는 등 ‘박정희-황태성 커넥션’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후 황태성 사건이 본격적으로 조망되면서 그를 ‘북의 밀사’로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민하씨(전 교총회장)는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라 ‘북의 밀사’라는 주장을 제기한 최초의 증언자라고 할 수 있다. 김민하, 권상능은 황태성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증언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권상능씨의 경우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황태성의 조카사위로 가족접견을 통해 대화를 이어갔던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직접 이 사건을 들었던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증언은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이라는 책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북에서는 ‘박정희, 유원식, 김종필에 대한 접근공작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들에게 ‘연방제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 협상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황태성은 서울 도착 즉시 ‘무사 도착’ 소식을 타전했으며, 그뒤 9월 한달 동안 계속 ‘접촉 준비중’이라는 보고만 올라왔다고 한다. 그런데 10월 말경 연락이 끊어지면서 곧이어 일본의 총련쪽에서 황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당시 “황이 체포된 뒤 바깥 출입을 자유롭게 한다는 정보가 있어 한때 그가 변절하지 않았나 하는 지적도 있었으나, 사형집행 후 이 정보가 그릇된 것임이 확인됐다”고 증언했다.
사건 당시 미 CIA의 비밀요원 래리 베이커는 ‘박정희와 황태성이 3번이나 만났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한 바 있다. 이 내용은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본지 고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소개됐다. 그는 “황태성이 온 다음 두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3번 만났는데, 여기서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정희는 황을 투옥시키지 않다가, 1961년 10월 경찰이 황을 체포하자 중앙정보부에서 그를 가로채 비밀리에 군사재판에 회부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정보당국은 박정희를 비롯해 김종필, 이주일, 장태화 등이 사실상 공산주의자이며 그 래서 황태성사건을 미군정보당국에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감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미 CIA의 에드워드가 (미국 원조 쌀을 얻으려면) 황태성을 넘겨달라고 요구해 미군정보당국에 넘겼으며 그 대가로 미국산 원조 소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김형욱의 회고록에 따르면 권상능씨가 조귀분과 만난 그날 저녁, 조귀분이 사위 김종필을 만나서 ‘간첩 신고’를 했고 이를 통해 황태성을 검거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증언들을 종합하면 황태성씨가 박정희나 김종필 등 쿠데타 핵심세력과 직접 만났는지 여부와 미국의 관여 정도, 그를 사형시킨 이유 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증언자들이 한결같이 그가 ‘간첩’이 아니라 ‘북의 밀사’였음을 확인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황태성씨가 얘기한 남북 비밀접촉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서해 용매도 등지에서 진행된 남북 정보당국간의 비밀접촉을 의미한다. 이 회담은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한국과장을 역임한 투가첸코의 1992년 《월간조선》 7월호 기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남북 비밀접촉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남측 수석대표였던 강성국씨(75세, 캐나다 거주)를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1961년 9월 말부터 1962년 8월경까지 북측 지역인 용매도, 불당포 등지에서 8차례 비밀회담이 진행됐다”고 털어놓았다. 강씨가 단장, 보좌관으로 김석순 대위, 속기사, 카메라맨 4명이 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1차 회담은 9월 28일, 이때 대표요원 교환, 문화교류, 인사교류, 경제교류 등 4개항으로 된 의제를 합의했다. 그는 “회담장에서 같은 시기 넘어온 황태성 파견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면서 “미군 모르게 일을 추진했다”는 것과 “나중에 본부로부터 북의 고위층이 내려왔다는 얘기를 듣고 회담을 서둘러 끝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비밀접촉은 처음부터 남측이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정치회담을 가장한 ‘첩보극’이었다는 주장도 개진된 바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서해지구 첩보부대장 이영호의 증언을 통해 당시 비밀접촉이 ‘첩보부대(HID)가 대북공작 차원에서 생각해낸 것’이라며 ‘안전하게 접촉하면서 혁명(쿠데타)정부가 안정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계산’에서 시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를 논의하자는 연막을 치면서 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간 직접 연결돼 있는 첩보부대가 과연 미군정보기관 모르게 서해상에 배를 띄우고 작전을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북쪽이 황태성이란 이름을 거명하면서까지 부상급 특사를 파견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황태성 남파 사실을 남쪽 핵심세력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 김지형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