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완시인의 「천사들의 마당」을 읽고
우 승 순
나는 가끔 타임머신을 탄다.
살다보면 시간을 되돌려 지난 세월 어디쯤으로 날아가 그때 그 상황을 바꿔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내 삶이 바뀐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반대로 미래의 어디쯤으로 날아가 내 인생이 언제쯤, 어떻게 마감되는지를 알게 된다면 내 삶의 가치관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가을이 깊어간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버릇이 도져 일주일을 바삐 보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춘천수필문학카페에 올린 박정완시인님의 수필 두 편을 읽으며 미루었던 「천사들의 마당」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박시인을 처음 뵌 것은 2017년 춘천문화원의 문예창작반에서였다. 깜짝 놀랄 만큼 재기발랄한 농담과 에너지 넘치는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박시인은 그런 문우시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유머가 넘치면서도 깊은 사색이 있는 씩씩한 할머니다.
「천사들의 마당」은 시와 산문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책 말미에 있는 이영춘시인님의 상세한 해설을 곁들여 감상하니 더욱 새삼스러웠다. 산문 역시 은유와 해학이 넘쳐난다. 미수(米壽)였던 2019년에 이 책을 펴냈으니 내년이면 망백(望百)이시다. 마음이 아무리 청춘일지라도 몸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러다보니 나이와 병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고 명랑함 뒤에는 ‘세월에 대한 허기(虛飢)’ 또한 읽힌다. 그렇듯 유머가 넘치는 분에게 어떻게 이렇듯 깊은 내면세계가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하나, 둘 “내려놓기”로 씩씩하게 부활한다. 이렇게.
노년은 서산에 기우는 낙조처럼 피곤하다. ..... 뜨겁고 치열하게 젊은 세대에 도전하던 내 모습. 그러나 한 뼘, 한 뼘 놓아 버리는 시간이다. ..... 나이는 기억력이 지나간 자리에 통찰력을 남긴다고 했던가. ..... 내 나이만큼 주렁주렁한 언저리를 가지치기로 했다. 그리고 드높은 가을하늘을 보았다. 티 하나 없는 空虛 얼마나 좋은가!
- 언저리를 가지 친다 - 중에서
서예에도 단계가 있다. 처음 졸필(拙筆)에서 시작하여 능필(能筆), 달필(達筆), 도필(道筆), 신필(神筆)까지 이르는데 약 40여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최고 단계인 신필을 일명 아동필(兒童筆)이라고도 하는데 경지에 이르면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과 같이 삐뚤빼뚤 ‘무형식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형식에서 초월하여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자의 산문을 읽다보면 한 문장, 한 문장의 은유와 철학과 해학이 마치 달관의 경지 같다.
새벽을 여는 태양이 하루라는 하늘을 건너 서산에 기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고 보람되고 아름다울 것인가를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기우는 태양의 아름다움처럼 나의 노년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모색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허상이다. 그동안 살아 온 외면의 겉치레를 불식하고 아주 순순한 본연의 나로 사는 것이 아름다울 것 같다.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나로 둔갑한다. 나의 구겨진 얼굴이 활짝 펴진다.
- 내가 둔갑한 날 - 중에서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툭하면 “꽉 쥐었다 놓은 마른 행주”, “젖은 행주 펴지듯”등과 같이 행주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다보니 어디를 가나 나이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백 마이너스 13세예요”와 같은 기발한 재치문답이 이어진다. 너무나 재미있어 소개를 안 할 수가 없다. ㅎㅎㅎ....
세상은 손익계산 속에서 살아간다. 저울질 하고 값을 매기고 따지고 절하하고 소유하기에 혈안이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늘 만나는 두 세 살 쯤 아래인 체격이 좋고 점잖은 노신사가 있었다. 어느 날 그와 둘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노신사가 뜬금없이 물었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울컥 짜증이 났다. 나이는 왜 물어! 알아서 어쩌려고..... 그러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차분하게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했다. 노신사는 기겁을 하듯 어쩔줄 몰라하며 헛기침을 연발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쌩쌩 거리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 나이 값을 저울질 한다 - 중에서
마음이 여린 저자는 노신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훗날 이 부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술회한다.
살다보면 문득 타이머신을 타고 싶을 때가 있다. ‘늦가을의 25시’라는 글이 그랬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영화 「타이타닉」의 그 장면, 할머니가 되어 과거의 열정적인 사랑을 회상하던 케이트 윈슬렛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 25시, 그래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25시다. 어쩌면 후회가 있는 과거는 모두 25시일지도 모르겠다. 그 절절한 회한은 이렇게 시작한다.
“평생 지워버린 그 늪에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 (서울의) 명동거리를 걸었다”
‘늦가을의 25시’를 단순히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절박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된 그 기억은 평생 동안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3시에 만나기로 했던 그 천금 같던 약속. 깜빡 잠이 들어 5시간 후인 8시에 깨어 숨을 헐떡이며 중앙시장 건너편에 있는 쎈다방에 들어섰을 때, 마담이 안타까워하며 저 자리에서 기다렸다고.......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가슴이 아려오는 뜨거운 눈물을 길 위에 뿌렸다”
저자는 평생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순간으로 수없이 날아가 봤을 것이다. 상황을 바꾸어보는 꿈도 헤아릴 수 없이 꾸었을 것이다. 계절은 늦가을이었고...... 그 인연을 찾아 오늘 또다시 서울 명동거리를 걷다가 문득 꿈에 그린 ‘그 얼굴’을 만난다. 환영(幻影)이었을까?
불쑥 자기도취에 빠진 나를 잠 깨우듯 저 앞에서 해맑은 얼굴 하나 다가온다. 찰나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디서 본 듯한 낮익은 얼굴. ....... 나의 머릿속은 그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하늘의 별밭을 누비며 줄다리기하듯 지렛대 받쳐 들고 시계바늘을 돌려 나갔다.
평생 지워버린 그 늪에서 멈칫 머뭇거리던 해맑은 얼굴이 뭉게구름 피어나듯 내 기억 속을 파고든다. 나는 깊고 긴 세월을 나르는 시간에 쓰러질 듯 지쳐갔다. 용광로의 불꽃 튀듯 젊음이 이글거리는 커피숖을 찾아들어 갔다. 한 구석에 쪼그려 앉는다. 석양에 끈적이는 전설 같은 사연이 뜨거운 커피 잔 속에 김 서리듯 피어오른다.
- 늦가을의 25시 - 중에서
차라리 픽션의 소설이라면 이렇듯 허허롭진 않았을 것이다. 행간 저 너머에서 전해오는 회한과 탄식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파도친다. 그리움의 대상이 ‘해맑은 얼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푸른 청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경춘선열차타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 옛날 ‘그 얼굴’이 서울로 갔기 때문은 아닐까.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이 느낌 역시 “세월에 대한 허기”라면 잠시 타임머신에서 내려야 할 것 같다.
모든 생명은 시간의 함수다. 연륜이 지긋한 분들의 수필을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깊은 감정의 파노라마가 있다. 외로움과 공포감이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어쩌다 잠들면 가위에 눌리고 악몽에 시달리는 것은 노을 뒤에 오는 캄캄한 어둠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인생의 통과의례......너무도 빨리 흐르는 시간이다. 문학의 의미와 쓰임새와 가치는 뭘까? ‘저녁의 허기’라는 글에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허기진 나의 두 동공이 어둑어둑 아파오는 까닭은......”
나는 다시 타이머신에 시동을 건다. 이번엔 태어나기 이전으로.....
첫댓글 와! 요즘 집안 일로 바삐 지내다 이제 이 글을 읽었네요.
박정완 선생님의 <천사들의 마당>이 멋진 평론으로 더욱 반짝입니다.
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
박정원님의 시와 산문 그림, 못 하시는 게 무엇인지 묻고 싶은 박 선생님의 글이 우선생님 손에서 더욱 아름답고 근사한 정원으로 펼쳐진 느낌입니다. 그 정원에는 나비도 훨훨 잠자리도 팔랑거리는 것 같아서 우리들도 덩실거리고 싶습니다. 차 한 잔 준비되었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