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8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대림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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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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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dNnQOUSTNk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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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우리에게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어디선가 푸드덕푸드덕 소리가 들려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져있었습니다.
첫 비행에 실패한 어린새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비상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면 들고양이 밥이 될 것 같아, 도와주려고 다가갔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린새의 모습은 가련함 그 자체였습니다.
오래전 어쩌다 부모와 사별하고 어린 나이에 저희 시설에 입소했던 꼬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가 백방으로 노력해도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각별한 부모사랑을 듬뿍듬뿍 받는 모습을 볼 때 더 안쓰러웠습니다. 거친 세상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측은했습니다. 그저 틈만 나면 꼭 안아주고 달래주는 일 외 그 어떤 일도 할수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복음선포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눈에 비친 군중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께서 군중을 보시자 마자 즉시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들처럼 이리저리 시달리며 기가 많이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가장 근저에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수많은 군중을 가르치시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는 군중을 가엾이 바라보시는 연민의 정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표현은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본심, 곧 측은지심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방치하고 이용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신랄한 지적을 통해 당시 사이비 목자들의 악행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키엘서 34장 2~4절)
당신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런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질 부족한 목자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양들의 현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꽤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내 양 떼를 찾아 보살펴주겠다. 나와 함께 일할 협력자들, 참된 목자들을 직접 선택하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떼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떼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떼를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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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오랜만에 가까운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도생활한답시고 바쁜척하며 미루다 미루다 보니,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나 뵌 것입니다. 사람 도리도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회한도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저희 이태석 신부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태석 신부님 때문이라도 선택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료 수도자인 저보다 더 이태석 신부님의 생애며 신부님과 관련된 최근 돌아가는 동향을 더 잘 꽤뚫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삶의 흔적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과 영향을 끼쳤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비록 짧은 삶을 살다 가셨지만 참으로 우리 교회와 사회를 위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하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이태석 신부님께서 월간 생활성서에 기고하신 글을 묶은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생활성서) 이후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괄목할 만한 필독서가 최근에 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신부 이태석’(김영사)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전기 문학의 대가이신 이충렬 작가께서 오랜 시간 공과 정성을 들여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작가께서는 집필 과정에서 저희 살레시오회의 충실한 자문을 구하셨고, 여러 관련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분석하셨을 뿐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공식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이태석 신부는 제임스 신부를 따라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을 방문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빈 들판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리고 톤즈의 너른 벌판에서 의술만 믿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와 선교 사제가 되겠다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러나왔다. ‘인간 이태석’이 무너지고 ‘사랑의 선교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 동방의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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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은 ‘난 아무래도 괜찮아!’ 뒤에서 자란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시리즈에서 언니 엘사와 동생 안나를 이어주는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가 있습니다. 바로 눈사람 ‘올라프’입니다.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괴이한 능력을 타고난 언니 엘사는 동생 안나가 자신의 마법 때문에 다칠까봐 일부러 동생을 피합니다. 그래도 동생은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심장이 얼어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동생을 위해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하나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올라프입니다. 올라프는 눈이 오면 엘사와 안나가 만들던 눈사람이고 나중엔 성탄절만 되면 올라프 인형을 만들어 서로 선물하곤 하였습니다. 엘사가 집을 떠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자신의 마법으로 가장 처음 만든 것이 올라프입니다. 자신도 올라프가 살아 움직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올라프가 안나와 함께 머물며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캐릭터가 됩니다. 올라프는 안나를 끊임없이 엘사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올라프 덕분으로 안나는 항상 엘사와 재회하게 됩니다. 올라프는 얼음공주인 엘사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올라프는 무한긍정 캐릭터입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절대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 없습니다. 엘사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겨났으니 팔다리가 뽑히는 것도 불에 녹아버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난 아무래도 괜찮으니 당신만 좋으면 돼.”라는 사랑의 캐릭터입니다. 1편에서 심장이 얼음이 되어 죽어가는 안나 앞에 더욱 따듯하게 모닥불을 피워주고 자신은 녹아서 죽어갑니다. 그러며 걱정하는 안나에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네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거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을 당신께 이끌어올 중개자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 중개자들은 진정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내어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따듯한 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 엘사에게 다가가지 못해도 엘사의 마음이 표현된 올라프를 통해 안나가 엘사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올라프가 생명도 아끼지 않는 무한 긍정과 기쁨의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안나도 자신의 심장을 얼음으로 만든 언니를 끝까지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 관계 안에는 항상 올라프 같은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신앙을 위해서도 그런 캐릭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항상 이웃이 원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으라는 뜻입니다.
멜비 콕스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간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1833년 그는 당시 ‘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졌던 서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그가 그곳에 복음을 들고 가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라이베리아에 가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며 백인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콕스는 소명을 확신하고 목표를 굳게 잡았습니다.
웨슬리안대학에서 한 학생은 “당신의 관을 준비해 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콕스는 그 학생에게 “내가 아프리카에서 죽는다면, 나의 묘비에 글을 써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뭐라고 써 드릴까요?”라고 조롱하듯 말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천 번 죽어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멜빈 콕스는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다섯 달도 못 되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교정신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사람들을 선교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했습니다. 잡히기만 하면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던 그들도 그분의 목숨을 건 선교에 감복하여 그분에게만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다 그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려 했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 덕분입니다. 생명은 거저 받은 것이고 그분이 또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당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천 번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주님의 추수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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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사제관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같은 서울대교구 신부님들이 있는 곳에서는 며칠씩 더 머물 때가 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거리가 많기도 하고, 동창 신부님인 경우에는 부담 없이 며칠 더 지내곤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제가 심심하지 않도록 등산을 가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교우들과 저녁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 저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편이기에 그렇게 미리 약속을 해 놓으면 편합니다. 그러나 거절도 잘 못하는 편이기에 너무 약속이 많으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편히 쉬라고 하면서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어디 가자고 하면 그때는 기꺼이 같이 가줍니다. 저도 편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강론 준비도 하고 모처럼 푹 쉬는 시간을 가지니 좋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정을 잡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심심하기도 합니다. 저도 신문사에 손님 신부님들이 오면 숙소는 마련해 주지만 제가 일정을 잡아서 안내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식당은 아는 곳이 많으니 같이 가지만 다른 것들은 뉴욕에 살아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젊은 신부님들은 뉴욕에 처음 왔어도 저보다 더 잘 알아서 다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불의는 정의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원망과 불평은 감사와 행복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후에 선포했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참된 자유와 참된 평화가 시작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날은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나의 삶에서, 나의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주님의 날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주님의 날’입니다. 마리아가 노래했던 ‘주님의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다시 갈망이 생기는 만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 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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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강 검진을 받을 때는 걱정이 되곤 합니다. 혹시 몸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결과가 나와서 별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카프 병원(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서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 봉헌 미사에 참석하기 어려워서 축하 화환을 보내면서 홈 페이지를 방문했습니다. 홈 페이지에는 ‘음주 습관과 알코올 중독’을 알아보는 자가진단 테스트가 있었습니다. 한잔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약간 걱정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건전한 음주습관을 가진 것으로 나왔습니다. 술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는 말처럼 술자리를 줄여야 하는데, 연말이 다가옵니다.
한국으로 유학 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0일 정도 지났는데 걱정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한국말을 배우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한국말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된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저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0년 전에 저도 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조금 여유를 가지면서 한국에서의 생활을 즐기라고 말 해 주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도 근심의 바람, 두려움의 바람, 욕망의 바람, 시기의 바람 때문에 흔들리곤 합니다. 조계사에도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의 검거를 피해서 몸을 의탁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자비를 따르는 사찰에서, 찾아온 사람을 내보내는 것도 어려움일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무조건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폭력시위와 데모를 불허하는 정부에게도,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도 겨울바람은 더욱 차갑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계절이 겨울로 바뀌는 것을 막기는 어렵지만, 얼어붙은 우리 사회를 희망과 사랑으로 녹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집회를 관리하는 경찰에게 따뜻한 국화빵을 전해주는 시위대를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주장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물을 뿌리기보다는 온풍기를 틀어 주면 좋겠습니다. 중압감을 주는 차벽보다는 잠시 쉴 수 있는 천막을 설치해 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 경기를 응원했던 그 뜨거움으로 자신들의 바람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삶의 주변에서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70이 넘으신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예전에 살던 곳의 집을 팔고 이사 왔습니다. 한동안 미움과 원망 때문에 소화도 안 되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어느 날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미워하게 된 사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찾아가서 오히려 나도 잘못이 있다고 용서를 청하고, 미움과 원망을 털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가슴 속에 있었던 큰 덩어리가 없어졌습니다. 소화도 잘되고 사는 것도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 때문에 나의 영혼이 더 많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회개는 나를 다시금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함께 했던 많은 분들이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한 자매님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쉬는 교우 댁을 방문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나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앞으로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시어머니는 ‘내가 개신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앞으로 성당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보를 전해 드릴 때 주보에 전화번호와 좋은 글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던 형제님도 많이 누그러지셨고, 개신교회에 다니던 할머니도 웃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이 세상 한 번 뿐이고, 죽으면 어찌 될지 모르니 신앙을 가져 볼 것을 권했다.’라고 합니다. 이웃들도 그럼 성당에 한번 나가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와 전교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 자매님의 말씀이 제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크고 화려한 성당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제와 주교,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따뜻한 미소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작지만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쌀쌀맞게 대하는 쉬는 교우들에게 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 번 찾아가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망할 일이 있어도,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도 주님을 따라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에게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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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복음과 병의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가셨으며 행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우리는 선행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만일에 우리가 욕을 먹고 선행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을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다음에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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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의 선발과 파견,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요약하면서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아픈 이를 고쳐 주며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고 파견되어 ‘사도’로서 수행해야 하는 복음 선포 활동은 마태오 복음 9장 35절에 묘사된 예수님의 활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곧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그분을 대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가 수행하는 권한은 ‘파견한 이’와 ‘파견된 이’의 정체성을 밝히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은 파견한 이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파견은 복음 선포로 하늘나라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고 하느님의 신적 현존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도로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은 분명하고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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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연민과 용서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서술합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이제는 숨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강생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는 날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축복과 행복과 풍요의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죄악으로 고통받는 군중,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흩어진 군중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양들과 수확의 표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목의 절박함을 보여주십니다. 곧 열두 제자에게 복음화의 내용(“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과 표징(“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과 무상성(“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에 근거한 주님의 분부에 따라 사도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권한을 제자들, 곧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주십니다.
예수님 사명에 비추어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사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화로 구체화하는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인간적인 해방의 표징을 통한 메시지의 보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전하고 증언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믿음으로 초대하시며, 새로운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써 이웃들과 참된 형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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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주님의 특기>
동창 신부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신학생 시절 ‘과연 우리가 신부생활 똑바로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혼자 생각하기에 우리 모습들을 보니까 못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성질도 못되어 보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렇단 말이지요.
근데 신부생활 하는 것을 보니까 이건 완전히 대박입니다. 10년 동안 같이 살아왔지만 ‘저 친구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하면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못난 놈을 특별한 놈으로 바꾸시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시원찮은 채로 내보내시지 않고 안을 꽉꽉 눌러 채워주시거든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고칠 수 있는 사랑의 마음과 능력, 당신을 전할 수 있는 지혜를 가득 채워서 보내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협력자들에게 제까짓 것 능력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 힘을 발휘하는 도구로 살라고 보내셨기에 그런 것이지요. 주님의 일꾼은 ‘못나야 제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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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일꾼>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일꾼>
주님께서 뽑으시니
주님의 일꾼
주님께서 맡기시니
주님의 일꾼
주님의 일을 하니
주님의 일꾼
주님처럼 일하니
주님의 일꾼
주님의 뜻 이루니
주님의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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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라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써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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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기분 나쁠 때는 혼자서 자기감정을 삭힐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더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폭발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정신건강에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공동체에는 최악이 됩니다. 기분 나쁘고 또 맘에 안 든다고, 그래서 바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는 절대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구성원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은 금방입니다. 감정을 폭발하면 후련함을 잠시 가질 수는 있겠지만, 더 큰 불편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걸러야 한다고 많은 심리학자가 조언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본인 역시 편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70대의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80대의 할머니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다가가 이렇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왜 젊은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그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70대나 80대나 똑같이 본당의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는데, 70대 할머니들과 80대 할머니들 사이에도 벽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긴 조그마한 꼬마들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감정을 폭발하면 이렇게 벽이 세워집니다. 함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벽이 치워집니다.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굳이 부족함이 많은 제자를 뽑아서 이러한 특수한 권한까지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서 힘들어하는 모든 인간을 구원의 길, 참 기쁨의 길인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목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길 간절하게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폭발해서 벽을 쌓는 그래서 자기만족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사는 세상에서 적합한 나의 모습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인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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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순(耳順)>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기가 꺾인 사람들이고, 주님은 그런 우리를 가엾어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며 그래서 대림절에 이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과 대림절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묵상이랄까 성찰을 하였습니다.
기가 꺾인 우리의 기를 세워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인 것이 내게 좋을까?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기가 꺾여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과 기가 하늘로 솟은 것이 만장이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좋을까요?
인간적으로만 보면 기가 꺾인 사람은 가여운 사람이고, 기고만장한 사람은 좋게만 볼 수 없더라도 가여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본다면 기고만장한 사람은 분명 가엾고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대림절이어도 주님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만 빼놓고 오실 리 없으시지만 그에게 오셔도 그는 필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자기 기가 센 사람의 특징이지요. 약자나 병자들이 하느님에게든 인간에게든 남의 기를 받지 기가 센 사람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기를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면에서는 기가 센 것보다 기가 꺾인 것이 차라리 낫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기가 죽어 있을 뿐 주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성찰해봅니다. 옛날의 저는 두말할 여지 없이 기고만장했습니다. 교만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때와 비교하여 기가 많이 죽은 지금이 오히려 전보다 나은 상태라고, 공자가 나이 60이 되면 이순이어야 한다고 한 대로 이순(耳順)의 상태라고 곧 듣기를 순히 듣는 상태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침 오늘 독서 이사야서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대림절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너희의 눈이 스승을 뵙게 되리라.” “뒤에서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그러니 우리의 이순이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도 이순이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에 이순이어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순히 들은 우리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았느니 주라는’ 오늘 마지막 주님 말씀대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고 기를 세워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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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늘 주님께 배우고 치유받읍시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시편147,3)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평생 배워야 합니다. 으뜸 스승은 주님이시고 눈만 열리면 삶 전체도 스승이 됩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우는 삶자체가 아름답고 인간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느 수도승 신학자가 말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공자에게도 호학好學은, 배움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를 설립해야 하겠다”하며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했습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만 46세로 병사하기 까지 참 불꽃처럼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성인으로부터 참 많이 배웁니다. 잠시 성인의 삶을 나눕니다. 예수회 창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절친했던 동료로 16세기 동방 선교에 참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포르투칼을 떠난지 13개월후 1542년 인도에 도착한후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1545년에는 말레시아 말라카를 찾았고 이어 뉴기니와 인접한 몰루카 제도와 필리핀에 가까운 모로타이 섬을, 그리고 일본에서 수년간 선교사로 활약했으며 중국 선교를 앞두고 중국 광저우에서 30마일 떨어진 상천도에서 열병으로 쓰러진후 객사합니다.
흔히 성인은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립니다. 성인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성인이 개종시킨 교우 수만해도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성인은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립니다. 그는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함께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에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의 선교에 열정의 노력을 다했던 삶자체가 살아 있는 성경책처럼 감동적이라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은 성인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는 스승이자 치유하는 의사로 묘사됩니다. 배움과 더불어 치유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주님께 많이 배우고 치유받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들으리라.”(이사30,20-22)
그러니 언제나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스승이신 주님께 귀울여 듣는 겸손의 경청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가르침과 더불어 뒤따르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이어지는 치유에 대한 묘사 말씀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지요!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도랑들이 생기리라.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이사30,25-26)
그대로 대림시기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께 가르침과 치유를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다음, 말씀 선포의 가르침과 치유에 온힘을 다 쏟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9,7-8)
가르침과 치유가 한 쌍을 이룹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동시에 뒤따르는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온전한 사람보다는 괴물이나 폐인의 병자들이 참 많고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무서운게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신 주님 부재시 무지와 허무주의, 절망의 병입니다.
육신은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영혼들도 많을 것이며 온갖 영적 나병들도, 마귀에 들린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악마가, 마귀가 따로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의 편견이나 이념이 광신적이 되어 극단적이 될 때 바로 그대로 악마가, 마귀가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소통의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온통 악마들이 횡행하는 시대같습니다. 온갖 불통과 분열들 바로 죄의 징후이자 악마의 소행입니다. 분열로 인한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통합도 요원해 보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나 이제나 악순환의 반복같습니다.
답은 최고의 스승이자 의사이신 주님께 겸손히 진리를 배우고 영육이 치유받는 길뿐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시편147,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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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세상 구원을 위한 열정과 땀!>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회 사제로 사목하셨고, 특히 사도 바오로처럼 먼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하셨습니다.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으로 선교 사목을 하셨고, 중국 선교를 하러 가시는 도중에 선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마태9,35-10,1.6-8)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세상 구원을 위해 흘린 땀과 열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9,35)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위해 정말로 열정적으로 땀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직접 뽑으시고, 땀과 열정의 사명을 주시면서 그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도 그렇게 파견되신 또 하나의 사도이시고, 또 그렇게 세상 복음화를 위해 열정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통해 뽑힌 사람들입니다. 뽑힌 이들에게 주어진 사도직 사명은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의 사명'입니다. 내가 먼저 거룩하게 변모되고(사제직),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예언직), 너를 위해 희생 봉사하는(왕직)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예수님과 사도들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처럼 땀을 흘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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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t7TFatw2w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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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 36)
모든 고을과
마을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열정같은
사랑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복음의 뜻은
언제나
낡지 않고
새롭기만 합니다.
새로워지는
사랑은 가르치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은 수확의
참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을 수확할
일꾼들이
적습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러운 영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줍니다.
길 잃은 양들의
목자가 됩니다.
강렬한 실천의지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하늘 나라가
정녕 가까이 왔음을
제자들의 기쁜 삶으로
선포하게 하십니다.
가까이 온
기쁜 소식은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마귀들을
쫓아냅니다.
이러한 권한은
주님께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댓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행복입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새 마음과
새 뜻입니다.
끝까지 실천하는
이들이 누리게 되는
수확의 기쁨입니다.
기가 꺾인
양들에게
필요한 것은
목자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대림시기는
더더욱 참된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의 참된 방향은
참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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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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