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사동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삼청동 가는 길 덕성여중고 지나 왼쪽에 첫 번째 만나는 갤러리가 있다. 총 40평 조금 넘는 복층 규모의 이화익 갤러리다.
2019년 7월16일 삶을 내려놓은 정두언님은 MB정부 인수위원에 참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MB세력들은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았다”
경제성장에 대한 큰 기대를 모으고 탄생한 MB정부는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가장 큰 실망을 주었다. 이런 원인 중에 하나가 이권을 위해 권력을 이용한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국정농단 세력들의 연령은 사오십 대로 그 인원이 팔백 명 정도였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세력들이 다시 현재 권력을 이용해서 국정농단을 하고 있다고 한다.
권력을 잡기 위한 입놀림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한 복판에서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각오하고 말한 정두언 같은 분들이 지금 얼마나 있을까?
권력을 이용해 여사의 활동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만으로 진솔하게 미술활동을 하고 있는 정두언 전의원의 부인 이화익 여사의 모습이 역시 귀감이다.
정두언과 이화익은 76학번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1976년 대학교 개강파티 때 미팅주선자로 만났고 정두언은 서울대 사회계열 3반 대표였고 재학시절에는 ‘나 어떻해’로 대상을 받은 그 유명한 샌드페블즈와 서울대 라이벌인 운동권 성향의 보컬그룹 ‘Spirit of 1999’ 멤버로 활동을 했다. 이화익은 이화여대 문리대 3반 대표였고 미팅 준비를 하며 친해져서 때때로 전화로 연락을 하는 남사친 여사친이었다고 한다.
이화익은 이후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사학과를 전공하며 시간강사로 활동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원에 들어갔다. 정두언은 대학원을 마친 이화익에게 몇 년 만에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이화익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면서 맞선을 보러 다니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종교가 일치하고 서로 신뢰감이 높아져서 1984년 결혼했다. 정 의원의 음악열정은 결혼이후도 꺼지지 않아 2009년 4집 앨범 ‘희망’을 발표하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다.
이화익 대표는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계에서 활동하며 6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했다. 이후 2년간 미국으로 가서 미술연구를 했다.
정두언은 대학시절 행정고시에 붙었다. 당시 사시나 행시에 붙으면 장교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정두언은 이런 혜택을 거절하고 일반사병으로 복무를 하고 제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