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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슬람 국가인 줄 알았는데 종교의 자유가 있는 국가다.
실제로 이집트 국민의 91%는 이슬람교를 믿지만, 나머지 9%는 크리스토교라고 한다.
이는 이집트가 인구 수로는 중동 최대의 크리스토교 국가인 것으로써,
1억이 넘는 인구를 생각하면 약 900만명 정도로 적지 않은 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크리스찬은 1%뿐이고, 8%는 콥트교 (Coptic)가 차지하고 있다.
콥트교인들이 이집트에서 대놓고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어서 종교를 숨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콥트교인들은 이보다 많은 최대 20~25%의 인구가 콥트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아랍 지역에서 가장 큰 개신교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등
여러 개신교 종파나 다른 크리스토교 종파 신자도 적지 않다.
현대 이집트인들은 90% 가량이 이슬람을 믿으나 크리스토교를 믿는 이집트인도 의외로 많다.
통계에 의하면 10% 정도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오리엔트 정교회의 분파인 콥트 정교회 신자이다.
10%라 함은 전체 인구에서 절대로 큰 비율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집트의 인구가 1억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수로는 결코 적지 않은 수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이슬람 제국 초기 시절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그동한 수세기 동안은 (적어도 피지배층 내에서는) 콥트교도들이 다수였지만
여러가지 불이익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13세기경 무슬림 인구에게 추월당해 1
7세기에는 그들이 사용한 콥트어는 전례어로만 남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콥트 정교회는 칼케돈 신경을 거부함으로써 가톨릭과 정교회로부터 단성론파라고 이단시되어 소외되었다.
신학적 이유 외에도 경제적 및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이 합성론을 믿고 있다고 하지, 단성론자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다.
동로마 본국에서 표면상으로 신조를 따르지 않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이집트의 콥트교도들 역시 이러한 시선을 불쾌하게 여겨서
독립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게 되어서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이슬람의 3천군사에게 사실상 자진하다시피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이슬람 제국은 일종의 특별세금인 지즈야를 내면
피지배자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줬기 때문이었으며 이슬람 발흥 당시만 하더라도
이슬람을 크리스토교의 이단 분파로 보아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에는 이슬람의 관용이 크게 중요치 않게 되었다.
또한 제도적인 차별은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 천시와 냉대는 엄연히 존재하였기에 결국 지금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정국이 조금만 뒤숭숭해지면 얻어맞는 게 콥트교인들인데
이미 천년 넘게 핍박을 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외부에서 마냥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집트는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인데,
군복무 기간이 고졸 이하는 3년, 대졸 이상 혹은 현 대학생의 경우 1년,
콥트교도, 형제가 없는 집의 남자아이는 군복무가 면제되며 이중국적자도 마찬가지로 면제된다.
또한 30세가 넘으면 징집 대상이 될 수 없다.
콥트교도들은 비무슬림 소수민족이라서 병역에서 배제한 것인데
사실 오히려 콥트교도들은 사회적 냉대를 피하기 위해 무슬림 행세를 하든가
아예 무슬림으로 등록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콥트교도라도 갈 사람은 가게 되는 셈이다.
하다못해 이게 정말로 별 의미가 없는게, 이집트에서는 병역을 치르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할 정도인데다
사지 멀쩡한 남성이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하면 '나 콥트교인이요'라고 대놓고 만천하에 광고를 하는 꼴이라
취직에 심각한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어서 사실상 자영업을 하는 수 밖에 없다.
결국 위에서 저런 조치를 취해도 받을 차별은 받는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1952년 혁명 때부터 무함마드 무르시가 집권했던 기간(2012-2013)을 제외하면
군부가 정권을 좌지우지 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것.
콥트교인들도 군대에 당당히 간다.
물론 성공한 콥트교인들이 있고 개중에는 오라스콤처럼 재벌도 있기는 하지만
상당수 콥트교인들이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남아있는 차별과 높은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이교주의의 한 종류인 케메티즘이 고대 이집트 종교를 복원한 것인데, 주로 유럽에서 발견되고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역시 이 사상에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몇몇 흑인 우월주의자들도 후술할 흑인 이집트설 때문에 신봉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이 고대부터 신앙을 간직해온 사람들일 리는 없고 현대에 들어서 갑자기 생겨난 세력이다.
콥트교?
처음 들어본 종교였다.
콥트교는 놀랍게도 마르코 복음으로 유명한 마르코가 전파한 것이라고 하니...
한마디로 크리스토교의 한 종파였다.
각 나라마다의 언어로 부르는 이름도 제 각각인게 당연하지만,
콥트 교는 크리스토교 중 오리엔트 정교회의 한 종파로서,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래서 콥트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 전례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본 크리스토교와는 다른 점이 많다.
이집트여행 올드 카이로의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 2023-04-07
아기예수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을 보러 올드 카이로(Old Cairo)로 가다.
올드 카이로의 유래
동로마제국 하의 크리스토교국이던 이집트가 이슬람 아랍인들에 의하여 정복된 해가 641년이다.
610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지 31년만에 빠른 속도로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것이다.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제2대 정통칼리프인 우마르(Umar, 재위 634~644)의 부하로서 아랍군 장수인 아므로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푸스타트(Fustat) 벌판에 642년 병영도시를 건설하였다.
969년 같은 이슬람의 파티마왕조가 들어서면서 천도를 하여 새도시 카이로(Cairo)가 건설될 때까지 푸스타트는 300여년간 이집트의 수도 노릇을 하였다. 지금은 푸스타트가 카이로의 일부로 편입되어 올드 카이로로 불린다.
우리가 방문한 올드 카이로는 로마성채 안에 콥트교회가 밀집하여 Coptic Area 또는 Coptic Cairo라고도 하는 지역이다. 이집트의 3번째 세계문화유산인 Historic Cairo(카이로 역사지구)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콥트교회가 다수를 차지한다.
애초에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을 찾아보려고 방문하였으나, 주위에 콥트교회, 공중교회(Hanging Church), 그리스정교회 등 각종 교회들이 밀집하여 있음을 확인하다.
콥트교란?
콥트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주요내용을 아래에 간략히 나열해본다.
올드 카이로 입구에 차량출입이 통제되어 차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간다. 어디에도 세계문화유산 표시가 없다.
올드 카이로 출입문이다.(10:03)
성 조지 교회
맨처음 발길이 닿은 교회는 성 조지 교회(Saint George Church)이다. 자
료를 정리하다 보니 비로소 이 교회가 매우 유명한 교회임을 알게 되다.
여기에도 성 조지가 말을 타고 용을 찌른다.
이집트여행 (6) 올드 카이로의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 2023-04-07|
아기예수 피난경로를 설명하는 지도인 듯.(10:39)
교회 입구이다.
입구 간판에 Abu Serga라는 글자가 보이고, 동굴교회(Cavern Church)라는 표현도 나타난다.
Abu Serga Chuch는 요셉과 마리아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하여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와서 숨어지내던 동굴 위에 교회를 지었다고 하여 동굴교회(Cavern Church)라고 불리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흔히 아기예수 피난교회라고 한다. 아래의 마태복음 구절을 참고로 하자.
박사들이 돌아간 후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너는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서 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라.” 그래서 요셉은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복음 2:13-15)
예배를 드리는 교회 내부의 모습이다.
예배 중이라 지하동굴에 들어가보지 못하여 아래의 동영상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자.
이집트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라마단으로 인하여 술집은 문을 닫고, 식당에서건 가게에서건 맥주를 포함하여 모든 술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는데, 동굴교회 입구의 가게에서 음료수와 함께 맥주를 판다. 목마른 일행이 맥주 한 캔을 시원스레 마신다.
맥주와 콜라를 들고있다.(10:49)
바빌론요새
동굴교회를 나와 로마성채인 바빌론요새(Fortress of Babylon)를 잠시 살펴본다. 규모가 작다. Roman Tower라고도 하는데 BC 30년 경에 지은 아주 오래된 성채이다.
641년 아랍의 아므로 이븐 알 아스 사령관이 이집트를 공격할 때 마지막 난관인 이 바빌론요새를 점령하고서야 이집트를 완전 정복할 수 있었다고 나온다.
공중교회(Hanging Church)
이집트 방문 전 책을 읽다가 이름이 특이하여 기억이 남은 공중교회(Hanging Church)를 발견하고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Saint Virgin Mary's Coptic Orthodox Church이다. 역시 콥트교회이다.
옛 바빌론성채의 남서 두 요새로 통하는 통로에 기둥 없이 얹혀 있어서 알 무알라카 교회(Al Moallaka church)라고도 하는데, 아랍어 무알라카란 ‘매달린’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Hanging Church라고 하며 우리말로 공중교회라 통용되는데, 건물 어디에도 Hanging Church라는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공중교회로 들어간다.(10:58)
이집트여행 (6) 올드 카이로의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 2023-04-7
콥트박물관(Coptic Museum)
콥트교회(Coptic Church) 신자들은 단성론자(Monophysite), 즉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들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이 동방 정교회와 다른 점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주요 언어로 아랍어를 채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중 교회 [Hanging Church]
이슬람이 주력인 이집트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95%가 콥트교 신자라고 한다.
교회와 달리 박물관에는 매표소가 있다.(11:06)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서 1, 2층을 돌면서 관람을 한다.
크리스토교 시대(4세기~11세기)의 콥트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서 귀한 자료가 많은 듯하다.
아래의 해설을 참고하자.
전시품들은 대략적인 연대기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 아스완댐에 의해 수몰되기 전에
여러 마을에서 보존해온 누비안(Nubian) 그림들과,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회화와 직물들, 금속, 나무, 유리,
상아로 만든 수공예품 등이 대표적이다.
꼭대기 층에는 20세기 중반에 이집트 나그하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고대문서가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 부지 안에는 1168년 이후 로마 지배의 흔적인 수도시설, 탑 등이 남아 있다.
최근 이집트 정부가 약 6백만 달러를 들여 3년 동안 개보수 공사를 하였으며, 2006년 6월 재개관하였다.
콥트교? 처음 들어본 종교였다.
콥트교는 놀랍게도 #마가 복음으로 유명한 마가께서 전파한 것이라고 하니... 한마디로 기독교의 한 종파였다. 그리스도교를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라고 부르듯이, 각 나라마다의 언어로 부르는 이름도 제 각각인게 당연하지만, 콥트 교는 그리스도교 중 오리엔트 정교회의 한 종파로서,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래서 콥트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 전례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본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점이 많다.
그래서 올드 카이로에는 과거 그리스도교의 유적과도 같은 교회들이 남아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코스에 속한다.
긴 오래된 책방골목을 지나가면,
골목 안쪽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예수님과 함께 피난왔던 동굴에 지어진 교회가 나타난다. 성지순례로 유명한 5세기에 지어진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아기예수피난교회(아부 세르가, Abu Serga)였다. 예수님 가족이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졌다. 그후 303년 로마 황제 막시밀란에 의해 순교 당한 성자 세르지우스와 바커스에게 바쳐진 교회가 되었다.
입구 위에 피라미드가 있는 이집트로 온 #성가족 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성모 #마리아 와 #요셉 은 #아기예수 를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온 헤롯왕의 병사들을 피해, 3년 11개월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에 있는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교회입구 옆에 아기예수님 피난길의 긴 여정의 지도가 입간판처럼 세워져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경배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헤롯왕은 자기도 경배할 터이니 알려달라고 하였으나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동방박사가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말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과거 지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바닥에 투명유리를 한 곳이 있고...
[출처] 이집트 여행 3. 카이로 (3) 올드 카이로 (1) - 콥트교, 아기예수 피난교회|작성자 토토
카이로의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콥트박물관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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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교회(콥틱 정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콥트교회(Coptic Church)는 이집트의 토착 크리스토교를 말한다. 이집트는 아랍어권에서 가장 많은 크리스토교 인구를 가진 나라로서 크리스토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4-10%로 추산하며, 그들 중 약 85%가 콥트교인이다. 신자의 통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이슬람권의 박해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콥트’라는 용어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어 ‘아이깁토스’(Ai-gyptos)에서 유래했으며, 여러 차례의 변화를 거치면서 정착된 용어이다.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이다. 그 이유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單性論)자로 낙인찍혀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단성론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부인하고 신성(神性)만을 믿는 신앙, 즉 “ 크리스토교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으며, 크리스토교는 완전한 하나님이다”라고 믿는 신앙을 단성론이라고 한다. 이때 콥트교회와 함께 단성론자로 낙인찍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교회들로서 시리아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있다. 이 교회들을 “동양 정교회” 또는 “오리엔탈 정교회”라고 부른다. 콥트교회는 전례와 조직 면에서 동방 정교회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미사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교황제도를 유지하고 있고, 마르코 사도를 그들의 초대 교황으로 삼고 있다. 기원후 40년 경에 마르코 사도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콥트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콥트 크리스토교인들은 640년에 이집트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오늘까지 신앙을 지켜 오고 있으며, 무슬림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초기 크리스토교 전통을 잘 지켜 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들은 크리스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손목에 십자가 문신을 새기는 전통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엄격한 예배의식, 콥트 그리스도인들을 응집하게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 그리고 사막에 은둔하여 많은 영적 지도자를 배출하는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트 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한국에는 2010년경부터 국내에 거주하는 이집트인들을 중심으로 한국 콥트정교회 공동체가 조직되어 서울과 울산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성 마르코 콥트정교회 대성당(카이로, 이집트) 콥트교회(Coptic church, ‘콥틱교회’라고도 함)란 이집트의 토착 그리스도 교회를 말한다. 이집트는 아랍어권에서 가장 많은 크리스토교 인구를 가진 나라이며, 이집트 내 크리스토교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약 4%-10%(350만명-900만명)로 추산하며, 그들 중 약 85%가 콥트교인이다. (신자의 통계가 정확하지 않는 것은 이슬람권의 박해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콥트’라는 용어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어 ‘아이깁토스’(Aigyptos)에서 유래했으며, 여러 차례의 변화를 거치면서 정착된 용어라고 한다. 주후 640년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인들은 이집트의 옛 이름인 ‘아이깁토스’를 아랍화하여 ‘킵트’(Qibt)라고 하였고, 점차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슬람화하지 않은 이집트인, 즉 토착 크리스토교를 계속 믿는 이집트인만을 ‘킵트’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호칭이 유럽으로 건너가 ‘콥트’라는 말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세계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교회이다. 그 이유는 451년 칼케돈 공회의에서 단성론자로 낙인찍혀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단성론(單性論)이란 예수의 인성(人性)을 부인하고 신성(神性)만을 믿는 신앙, 즉 " 크리스토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으며, 크리스토는 완전한 하나님이다."라고 믿는 신앙을 단성론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을 따르지 않고 단성론을 주장해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혔으며, 콥트교회는 그때부터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콥트교회와 함께 단성론자로 낙인찍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교회들로서 시리아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있다. 이 교회들을 ‘동양정교회’ 또는 ‘오리엔탈 정교회’ (Oriental Orthodox Church, Oriental Orthodoxy)라고 부른다. 콥트교회는 전례와 조직 면에서 동방정교회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미사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교황제도를 유지하고 있고, 마르코 사도를 그들의 초대 교황으로 삼고 있다. 주후 40년경에 마르코 사도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콥트교회가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콥트 크리스토인들은 640년에 이집트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오늘까지 신앙을 지켜 오고 있으며, 무슬림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초기 크리스토교 전통을 잘 지켜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들은 크리스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손목에 십자가 문신을 새기는 전통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엄격한 예배의식, 콥트 크리스토인들을 응집케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 그리고 사막에 은둔하여 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트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한국에는 2010년경부터 국내에 거주하는 이집트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콥트정교회 공동체가 조직되어 서울과 울산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집트 콥트 정교회(the Coptic Orthodox Church)는 고대 기독교의 한 종파로 오늘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이집트 콥트 교회에 관해 알아야 하는 6가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성마가와 함께 시작했다. 가톨릭교회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다면, 콥트교회는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 전통에 따르면, 콥트교회는 AD 42년 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던 전도자로부터 시작됐다. 마가의 방문이 이뤄진 후 50년 동안 기독교는 전역으로 확산됐다. 콥트 교회의 수장인 콥트 교황은 성마가 성당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알려져 있다. 2. 이집트 배경 콥트 교회의 본부는 이집트에 있으며 전 세계 지부에 약 1,800명의 교인들이 있다. 이집트는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했으며 신약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헤롯 왕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오기도 했다. 이로써 호세아 11장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말씀이 이뤄졌다. 이사야서 19장 19절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말씀에는 이집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땅으로 묘사돼 있다. 이집트 콥트 교회는 이 예언의 성취로 여겨질 수도 있다. 3. 고대 학교들 콥트 교회는 알렉산드리아 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를 형성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2~4세기에 크게 보급된 기독교의 초기 교육기관으로 마가가 설립했다. 이곳의 교사들은 세례를 받으려는 신도들에게 신자가 지켜야 할 사항들을 문답식으로 가르쳤으며 성직자도 양성했다. 당시 유명한 교리교사로 판타에누스, 글레멘스, 니오니시오, 오리게네스 등이 있다. 1893년 콥트 교회는 학교를 신학대학교로 재건립하고 콥트교 고위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활용했다. 4. 사막의 교부들 콥트 교회의 또 다른 유산은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의 수도사 운동이다. 2세기 기독교인들은 이집트의 사막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며, 사회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고독과 명상을 추구하는 삶을 권장했다. 가장 유명한 교부는 대 안토니우스(Anthony the Great)로 수도 생활의 설립자로 불린다. 콥트 교회는 동방 기독교의 영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양의 베네딕티파 수도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5. 교리의 위기 콥트 교회는 교회의 근본 신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와 그를 반대 아타나시우스 모두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나왔다. 논쟁은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리됐다. 콥트 정교회를 포함한 오리엔탈 정교회는 AD 541년 칼케돈 공의회 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로 다른 정교회들과 갈라지게 됐다. 6. 극심한 박해 콥트 공동체의 또 다른 유산은 오랜 박해의 역사이다. 한 때 이집트를 지배했던 기독교는 AD 639년 무슬림들의 침략 이후 소수 종교가 되었으며, 현재 이집트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10% 가량이다. 콥트 공동체는 최근에도 많은 박해를 받고 있다. 특히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이슬람국가(IS)의 박해가 심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