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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잡동사니 스크랩 제8장 포병 단독으로
포병역사 추천 0 조회 198 08.04.15 00: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 포병 단독으로

(Artillery alone)


비록 교리와 전술이 승리의 역할을 했을 지라도, 1939년 폴란드전에서 독일은 기술과 수적인 우위(최신 무기로 장비된 규모가 더 큰 현대적인 군이 더 작고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로 무장된 군을 물리치는)로 문제를 쉽게 처리하여 승리를 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는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방법(병력, 사단, 전차, 비행기 또는 평사포의 수)으로 군사력을 계산하면, 상대방과 거의 비슷했다. 독일 승리의 원동력은 그들 부대 규모나 또는 현대화되지 않은 부대를 운용하는 방법에 있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소련에 대한 독일의 대승리에 대해서도 똑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승리는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독일군에게는 서부 동맹군에 대한 6주간의 전역보다도 속도전이 훨씬 값진 승리이었다. 1940년의 경우 보다도 더 규모가 큰 부대를 물리쳤고, 또한 장애물을 더 많이 극복했으며, 영토를 더 많이 획득했다.

1941년의 부분적인 승리의 결과로 1914년의 상대방처럼 교착상태에 봉착했다. 기동전의 재능에 희망을 두었던 군은 재차 긴 일련의 야전축성에 고착되었다. 이 당시의 전선은 더 길어졌지만 가용한 부대는 상당히 감소되었다. 더구나 전쟁이 장기화되어, 특히 독일 보병의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점점 줄어드는 부대로 북극권으로부터 흑해까지 펼쳐진 전선을 방어하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3년 동안, 독일 육군은 피할 수 없는 동부전선 진지의 붕괴를 편법의 결합으로 간신히 모면하였다. 첫 번째 경우는 (전적으로 휘발유 차량을 사용하는 소수부대를 전선에서 차출하여 기동예비로 사용한) 사격여단(fire brigade)이었다. 히틀러가 첫 번째 편법을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해 예하 장군이 요구했던 융통성을 승인하기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독일은 동부진지의 방어를 점점 독일군 포병의 어깨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 곡사포의 집중된 화력에 의해 독일군 스스로 지상에 노출된 것을 발견만 했더라면, 소련군은 주방어선으로 간주되었던 독일군 기관총 초병과 대전차포의 얇은 껍질을 돌파할 때마다 성공했을 것이디.

독일의 집중화력 기법의 본질은 국경경비 사단의 포병인이 사용했던 표어인 “많은 포신, 적은 발수, 단일 점에 대한 기습(many tubes, few rounds, suddenly on a single point)”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표적으로서 단일 점의 사용으로 사격통제는 매우 간단하게 되었다. 집중은 암호와 지도참조로서 하달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사소한 부정확성(사격한 첫 발이 효과를 갖도록 수정하지 않은) 때문에, 모든 포탄이 같은 지점에 정확하게 탄착되는 것은 방해했다. 독일은 소량의 발수를 사격하여 탄약을 최소로 사용하면서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집중 낙하에 의한 기습으로 무방비의 적을 잡았는 것이었다.

3년동안 전선을 유지하는데 독일 포병이 수행했던 역할은 독일 포병 물자저장소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간주되었을 때가 더욱 두드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첫 수년동안 독일 육군의 신속한 팽창으로 각 보병사단에 105밀리 곡사포 3개 대대와 150밀리 곡사포 2개 대대를 제공하려던 최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1939년 9월 동원시에는 사단의 중연대 예하 제2대대는 사단으로부터 차출되어 포병 일반예비에 배속되었다. 프랑스 전역후 이 차량화 대대의 대부분은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창설중인 새로운 사단(보병, 기갑, 차량화) 예하의 연대로 집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소 덜 선호받던 보병사단은 중대대도 없이 일을 해야만 했을지라도, 독일은 105밀리 3개 대대와 150밀리 1개 대대로 구성된 1개연대를 거의 대부분 보병사단에 제공했다. 1940년 가을 105밀리 2개 대대만으로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전역을 치렸던 거의 모든 기갑사단에 중대대(150밀리 대대, 또는 100밀리 평사포 1개 포대와 150밀리 곡사포 2개포대의 혼성대대)가 제공되었다.

1943년 동부전선 독일 보병사단의 포병연대에 인가된 전투력은 각 포대 화포가 4문에서 3문으로 줄어들었다. 말할 나위도없이 인가된 화포 문수와 임무수행을 위해 제공된 문수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2년동안 독일 상비사단은 27문 이하로 감소되었다. 대조적으로 미국 사단은 36문에 비사단 부대로부터 같은 대포문수 지원받았다. 영국군 사단은 25-파운드 75문과 통상 사단에서 배속된 중간 규모의 연대로부터 평균적으로 16문의 중포를 보유했다.

신속한 팽창은 사격 대대의 부족만큼 피해를 주지 않았더라도, 각 보병사단에 포병 지휘관과 관측부대를 제공하는 계획에 또 다른 주요한 피해를 주었다. (관측부대는 진지 측지, 기상제원 제공, 포병용 지도 제작, 가장 중요한 음향과 섬광거리 측정을 측정할 수 있고, 일부는 직접 관측을 위한 계류기구를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처럼 포병 운용에 관련된 유일한 제대인 이와 같은 자산을 가진 사단은 대대에 추가하여 많은 배속부대를 지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상 각 군단에 포병지휘관과 관측대대를 제공하기가 충분했기 때문에, 독일은 군단포병 편성을 종종 임시적으로 구성해야 했다.

일시

사단

포병지휘관

관측대대

1939. 9

102

16

48

1940. 5

145

45

45

1941. 6

179

59

67

표 8-1 독일 포병지휘관과 관측부대 현황

그들은 사단 및 군단포병간의 프랑스식 분업을 위한 전통적인 포병편성(1914년의 “한 상점에서 여러 상품을 살 수 있는 쇼핑” 교리와 브루흐뮬러 시대보다도 더 복잡한 임무편성)에 내재된 융통성을 포기하게 하는 유혹을 독일 포병인에 대한 신뢰로 통상 저지했다. 포병지휘관과 관측부대를 군단사령부의 직할 포병군의 골격으로 형성하여 주로 대포병전 및 다른 일반지원 임무를 위해 사용하던 경우가 있을지라도, 포병지휘관의 “유동적인” 성격과 비사단 포병부대에 내재된 융통성을 현장에서 과업을 재단하려는 집단의 관습을 생성하기 위해 사용하려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포병부대와 본부를 혼합하여 대응시키려는 이러한 의지는 사단 포병연대까지 확산되었다. 만일 독일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수 많은 계획을 전쟁의 막바지에 노획했더라면, 독일 포병은 포병연대로부터 대대를 차출하여 다른 연대에 배속하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 나머지 연대본부는 다른 과업(비사단부대 또는  타연대에서 차출된 대대로 구성된 포병군을 지휘하는)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1940년 페르테(Ferté)의 마지노선 확보, 1941년 소련 전선 통과, 1942년 세바스토폴(Sevastopol) 포위, 또는 1944년 올샤(Orsha)의 주요 철도 환승역 방어와 같은) 주요 작전을 위한 독일 포병부대 수와 과업 편성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페르테에서 259문(210밀리 중곡사포 3개 대대, 100밀리 평사포 3개 대대와 150밀리 곡사포 6개 대대, 150밀리 평사포 1개 대대, 105밀리 곡사포 9개대대, 88밀리 대공포 1개포대)에 네델베르퍼(Nebelwelfer)(연막생성 로켓을 발사하는 다련장) 3개 포대를 추가하여 포병지휘관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를 구성했다. 이 모든 화력의 지원을 받는 기동부대는 강습 공병중대이었다. (추가로 보병연대의 근접엄호 화력지원(close-in fire support)이 이 공병에게 제공되었다.)

이와 같은 집중적인 포병집결은 다른 전선의 일부를 희생해야만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동부전선 대부분의 독일 사단은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예속된 곡사포 12문을 처리해야만 했다. 탄약과 곡사포 보급이 방어를 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해동안 탄약과 곡사포 보급이 부족하여 독일은 포병을 경제적으로 운용하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통적인 방법은 보병과 “수하” 포병을 보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2가지 이유로 비교적 쉬운 방법이었다. 첫 번째, 1943년 대부분 사단의 보병대대 수를 1/3정도로 감소되어 나타난 결과로 보병이 고통을 받게 된 심각한 손실로 소총수와 경기관총 사수보다도 박격포, 보병 평사포, 대전차포, 그리고 중기관총의 비율을 자동적으로 높게 했다. 두 번째, 독일이 전쟁에 도입하였던 81밀리 형과 소련으로부터 모방한 120밀리 박격포는 탄약 공급이 용이했고, 심지어 조작이 더욱 쉬웠다.

강습포병(assault artillery)을 만드는 것이 보병 전투력을 보강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포탑은 없으나, 그러나 비교적 장갑화와 무장이 잘 된 전차를 간단히 보병용 전차(공격하는 보병에게 화력을 직접지원하는 수단)로 개조했다. 양대전동안 말이 끄는 포병(horse artillery)의 현대적 산물인 돌격 평사포를 (후에 육군 사령관이 된 Erichvion Manstein에 의해) 주요 구성원들에게 판매했다는 사실 때문에,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의 세련되지 못한 디딤판이 있는 토치카(pillbox-on-tread)보다도 돌격 평사포가 더 기술적으로 운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특히 방어에서 이 기술은 주목을 받을 만 했다. 돌격포 부대를 지휘했던 포병인이 라우어슈텔룽(Lauerstellung)의 오래된 기법을 복원했다. 그들은 현저하거나 또는 심지어 차폐된 사격진지를 점령하기 보다는 노출된 측방이나 또는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이 충분히 전진할 때까지 두드러지지 않는 지점에 은폐하려고 했었다. 이 기법에 능통한 창도자는 (말이 끄는 포병에서 자신의 일을 배웠던 참모부 하사관인) 프리모직(Hugo Primozic) 상사이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보병 중화기나 돌격 평사포 어느 것도 다련장, 경 / 중 곡사포대의 집중화력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었다. 실제 독일 사단급 포병연대의 집중 화력에 대한 중요한 증거는 이것을 사용했거나 이것도 없이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주요한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다. 1943년 전반기동안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매우 다양한 화력방식으로 구성된 사단 형태를 전선에서 실험했다. 1942년 11월과 12월의 진지전에서 피해를 심하게 입었던 73보병사단 잔해로 만든 실험 사단은 78강습사단으로 알려져 있다.

강습사단의 기본적인 골격은 강습연대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78보병사단 예하 3개 연대의 자투리로 만든 강습연대는 보병부대는 아니었다. 매우 관대하게 중대 전차무기와 포병부대를 할당받은 완전히 새로운 부대형태이었다. 각 강습연대의 1대대가 강습대대이었다. 강습대대는 전통적인 보병이 하던 일을 하기 위해 (MG42 경기관총 18정과 81밀리 박격포 2문으로) 잘 장비된 4개의 강습중대로 구성되었다. 각 강습중대는 75밀리 대전차포 6문을 추가적으로 제공받았다. 이들은 벙커같은 표적을 공격하는 포병을 동반하는 대전차포와 직접사격의 형태로 지원을 했다.

2대대는 105밀리 곡사포 9문의 포병대대였다. 과거 78보병사단의 포병연대로부터 차출된 이 대대는 강습연대만을 직접지원하지 않았다. 육군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설계대로, 강습대대와 독립중대처럼 강습연대 편제의 일부가 되었다. 여전히 그 당시의 산악 및 경보병 대대로 연상케하는 중보병 중대의 형태로 더 많은 화력이 강습연대에 제공되었다. 이 중대에는 보병 평사포 4문(75밀리 2문과 150밀리 2문), 중간(81밀리) 박격포 6문, MG-42 중기관총 8정이 승인되었다.

많은 포병이 3개 강습연대에 분배되었을지라도, 강습사단은 비교적 큰 포병연대를 보유했다. 과거 78보병사단 포병연대본부로부터 지휘를 받았던 새로운 포병연대는 재래식 중곡사포(150밀리) 대대, 약 30문의 돌격 평사포를 가진 돌격 평사포 대대와 88밀리 평사포 2개 포대와 경대공화기(27~37밀리) 1개포대를 가진 방공대대로 구성되었다. 120밀리 박격포 36문의 중박격포 대대(각 12문 단위 박격포 3개 중대)는 사단에게 1개이상의 중화력을 제공하는 출처가 되었다.

78강습사단의 지휘부가 포병 집중화력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사단을 재편성한 후 처분하지 않으려는 것을 바로 실시된 도상연습에서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볼가(Volga) 100에 있는 도시나 르베(Rshew) 남동쪽 언덕의 모스크바 서쪽 수 마일 떨어져 있는 제한된 목표를 가진 2개 사단의 공격이 문제이었다. 모의공격의 목적은 지방 하천너머의 교두보를 제공하는 소련이 확보중인 독일 전선으로 진입하는 돌출부인 고지대의 일부와 중요한 북-남 철도에 포탄사격을 허용하는 관측소를 확보하는데 있었다.

도상연습에서 결정된 공격계획은 2개 사단에 의한 V형 전면 동시공격을 요구했다. 양개사단이 타사단 및 군단의 포병으로부터 차출된 포병대대로 증강될지라도, 주노력은 분명히 78강습사단에게 있었다. 가용한 14개 포병대대중 9개가 할당되었다. 또한 이 국지적인 주노력에는 포병의 최대 몫이 할당되었다. 78강습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할당된 9개 대대중 7개 대대(강습연대의 105밀리 곡사포대대, 사단의 150밀리 곡사포대대, 추가로 차출된 5개 대대)는 주노력을 형성하는 강습연대 후방에 두었다. 다른 2개 대대(다른 강습연대의 105밀리 곡사포대대)는 모체 강습연대를 직접지원하도록 했다.

공격을 위한 화력계획에서 독일 전선을 출발하는 강습부대 앞에는 어떠한 화력도 필요가 없었다. 주노력을 형성하는 강습부대장은 “기습은 성공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대신 강습 연대장으로부터 요청을 접수하면 즉각 사격을 지원할 수 있도록 사격임무를 많이 준비했다. 예를 들어 강습부대가 소련의 주저항선에 있는 진지를 돌파하기 직전, 짧고 치열하게  (모든 가용 포신으로) 공격준비사격을 했다.

포병과의 통신은 강습연대 예하의 강습대대를 연결하는 유선과 무선으로 연결했다. 그 후 대대는 편조포병 지휘체계(task-organized artillery command system)로 78강습사단을 지원하는 타포병대대와 연결을 했다. 이 체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는 78강습사단을 화력지원하는 9개 대대를 작전통제하는 단일 포병본부(78강습사단의 포병연대본부)가 있었다. 또한 강습연대에게 조언하고 화력을 계획하는 책임은 이 본부에 있었다.

심지어 도상연습에서 비추어진 인조조명에는 포병대대를 기동연대의 일부로 만드는데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야기시켰다. 첫째, 이로 인해 포대를 위치시키고 재보급 업무를 하는 강습연대장에게 진두에서 지휘하는 기본임무와 갈등을 야기하는 과업이 부여되었다. 둘째, 포병대대를 강습연대의 지휘하에 두므로서 매우 복잡하게 화력을 집중하였다. 말하자면, 협동을 효과적으로 하기위해서는 연대본부의 작전통제하에 포병대대를 후방에 위치해야 했다. 이와 같이 포병대대는 포병으로부터 많은 명령을 받지만, 행정적으로는 보병에게 소속되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해 겨울이 지나 78강습사단이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이런 문제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3월에 제출된 사후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진지에 대한 제한된 목표를 가진 실제 공격을 수행할 기회를 가졌던 사단장은 105밀리 곡사포 대대를 강습연대로부터 차출하여 포병연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돌격 평사포대대를 포병연대에서 차출하여 사단장에게 즉각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건의가 승인될 당시에 창설된 포병연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다른 독일 포병연대와 매우 비슷했다. 다른 포병연대처럼 78강습사단의 포병연대에는 본부, 1개 중(150밀리)대대, 3개의 경(150밀리)대대가 있었다. 78강습사단의 포병연대에는 포병대대의 간접화력을 보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명된 자신의 88밀리 평사포부대인 방공대대를 보유한 것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규모가 대대보다 더 큰 포병부대의 집중 화력지원을 받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려던 78강습사단의 시도에 대한 신선한 기억은 독일 육군의 차기사단 편성의 주요 실험인 18포병사단에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직접사격 무기가 엄청나게 많았던 78강습사단에 비해, 18포병사단은 집중된 간접화력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했던 대형으로 간주되었다. 이 18포병사단의 주요 전투부대로는 장갑화, 자주화, 완전 궤도화된 차대에 탑재된 곡사포를 가진 9개의 완전 차량화 포병대대가 있었다. 18포병사단을 위해 육군 최고사령부가 특히 중요한 상황에서 “노력 무기의 초점(focus of efforts weapon)"로서 군단 또는 유사한 집단을 강력하게 증강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최초 개념이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사단은 완전 차량화 되어야만 했다. (전차와 전투공병부대가 다른 대형으로 전환되었던 기갑사단에서 6개 포병부대를 추가하므로서 이것을 쉽게 달성되었다.) 단일 표적에 가용한 모든 포대의 화력을 신속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18포병사단에 실험 화력통제 포대(experimental fire control battery)가 제공되었다.

화력통제 포대는 프랑스 지휘본부의 과도하게 성장된 개정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8개 사격부대(단일 포대, 대대, 또는 다양한 규모의 분견대) 및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 관측자와 통신으로 연결된 화력통제 포대는 관측자의 전술적인 결심을 사격지시의 협조된 집합으로 전환하는 일을 해야 했다. 프랑스의 선례처럼, 화력통제 포대는 포대장이 수십 발의 포탄을 동시에 탄착하기 위해 다른 포대와 협력하려는 일을 매우 단순하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포대장으로부터 전술적인 결심자로서의 역할을 빼앗는 큰 위험이 있었다.

이 위험은 화력통제 포대가 독일의 전통적인 화력통제 절차를 대체했다는 사살보다는 보완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완화되었다. 18포병사단의 포대는 사단의 작전통제를 받는 포대와 마찬가지로 전장을 감시하는 눈을 가진 포대장을 전술적인 결심자로 만드는 절차와 포대 관측소 및 전반 관측자를 보유했다. 다른 관측자는 대체로 사단이 직접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포대, 대대, 연대 집중, 탄막(드물게) ; 또한 유동포에 의한 기록 및 요란사격) 임무를 하는 데 사용되엇다. 단지 재래식 방법이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때만 (특히, 수 많은 포대의 화력을 신속하게 집중할 필요가 있을 때), 화력통제 포대가 활동을 했다.

독일 화력통제 포대는 단순히 규모만 혁신된 것은 아니었다. 포대의 심장(또는 마음)은 일련의 전동타자기에 연결된 전자계산기이었다. 독일 사격부대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던” 전자계산기는 관측자의 사격요구를 3~5초만에 전동타자기에 의해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일련의 사격지시(방위각, 사거리, 탄두 / 신관, 발수 등)로 신속하게 변환했다.

화력통제 포대는 포대, 대대, 그리고 연대의 전방 관측자와 관측소를 이용하는 것에 추가하여, 지휘용 장갑차량에 탑승한 수 많은 특별 관측자와 접촉을 유지했다. (18포병사단의 돌격 평사포 중대의) 돌격포에 의해 엄호를 받았고, 장갑차량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작은 관측소를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휴대용 무전기를 제공받았던 관측자는 대체로 포대나 대대가 아닌 사단에 소속되었다. 포대의 전방 관측자로 중위와 하사관들이 근무한 반면, 그들은 경험이 많은 포대장 (및 어떤 경우에는 대대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정한 지점에 포병연대 또는 사단 포병 전체의 집중된 화력을 하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장갑화된 관측자(armored observer)는 1918년도 포병 연락장교의 후예이었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장갑화된 관측자는 특정 사격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용한 포병부대의 지원을 집결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장갑화된 관측자는 무선의 사용과 포대와 연결로 많은 잠재적인 사격포대와의 접촉이 허용받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포병 연락장교보다는 높은 단계를 보여 주었다. 장갑화된 관측자는 2, 3개 팀으로 장갑화된 관측자를 내보내는 훈련으로 또 다른 장점을 즐기었다. 이것은 (한 관측자가 위치를 변경하는 동안 다른 관측자는 감시 위치에 있는) 이동간에도 연속된 관측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2~3개의 다른 유리한 지점에서 전술적인 사태를 관측하도록 허용받았다.

18포병사단에는 대포병 업무를 위한 관측대대가 있었다. 포병 지휘관의 직할 관측대대와 마찬가지로 통상 군단에 배속된 이 관측대대에는 3개 과업이 부여되었다. 첫 번째 과업으로 첨음 관측소와 기구에 정보망을 설치해야 했다. 둘째 과업으로 화력통제 포대가 유용성을 갖도록 특히 중요한 전체 사단이 동일 격자에 있도록 측지를 완벽하게 수행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대포병 노력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즉, 사단은 부대를 대포병 업무를 위한 특정 대대 또는 연대로 구분하기보다는 관측대대에게 작전통제를 주었다.

18포병사단이 포병지휘관이나 관측대대에 접속되었던 대형으로 작전중인 상황에서는 이들 중 하나에게 대포병 노력의 책임이 부여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18포병사단은 화력으로 전투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일 지점에 신속하게 화력을 집중하도록 계획된 일을 않아도 되었다. 결과적으로 18포병사단은 비슷한 숫자의 사격포대를 지휘하는 포병지휘관보다 소련군 포대를 식별하고 전투하는 장비가 열악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보병과 협동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화력통제 포대와 장갑화 관측차량의 결합을 제공받았다.

독일 육군은 사단이 스스로 부여된 과업을 적합하게 준비하거나 또는 완전한 부대로 행동하기가 어려워서 18포병사단을 창설해야만 했었다. 1943년 11월 당시의 사단 편성은 소련의 주요 공세와 일치했다. 편성 또는 재훈련과정에서 다른 대형이 이미 많이 생겼던 것처럼, 절반정도의 훈련과 부족한 인원, 불완전하게 장비가 된 18포병사단으로 독일 배치의 간격을 보강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관측대대, 방공대대, 사격포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가용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에 근접전투부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승인된 전체 24개중) 8개 포대가 동부전선에 도착해야 할지라도, 9개 포대는 다른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거되었다. 소련 다중군 공세의 주노력 방향에 있으려는 소수의 서투른 보병을 지원사격하는 완전한 전투력을 가진 보병사단의 포병보다는 조금 많게 구성된 대형이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재난에서 독일 기갑부대의 시기적절한 개입에 의해 살아난 18포병사단은 2달 뒤 최초 개념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는 지경까지 겨우 복원되었다. 군단 예하로 보병사단 후방에 위치한 16~17개 포병대대(9개 대대는 편제이고 7~8개 대대는 보병사단에서 차출된)의 화력을 지휘(집중이 아닌)할 수 있었다. 이 기간동안 주요한 혁신으로 경 및 혼성 중대대가 재편성되었다. 3개 혼성 중대대는 3개 “순수” 대대(경곡사포 2개 대대와 100밀리 평사포 1개 대대로 장비된) 5개 대대는 4문단위 3개 포대와 6문단위 2개 포대로 대체되었다.

이 후자의 변경은 포수에 대한 “간접”(포대장 및 지원요원) 비율을 감소하여 대대 화력을 감소시키지 않고서 포병대대가 필요했던 인원의 1/3을 감축하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화력통제 포대가 18포병사단의 포대에 더 높은 비율로 직접 연결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포대규모가 컸기 때문에 수반되는 불리한 점(사격진지 선정의 어려움, 진지변환 추가 소요시간, 더 커진 표적제공, 대대가 책임질 수 있는 전선의 감소)은 보병 또는 기갑사단의 포병보다는 18포병사단의 경우 덜 심각했다. 결국 18포병사단의 포대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독립부대로서 활동하는 증원포병이었다.

18포병사단이 자신의 기법을 완성하기도 전에, 이와 같은 상황은 변했다. 1942년 또는 1943에 약 10km 전선의 한 지점에 15개 포병대대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독일 대형은 소련 주공과 상대를 했다. 그러나 1944년 소련의 돌파규모는 각 주공이 전선의 20km 지점까지 증가되었다. 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은 훨씬 많은 대포가 필요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대포가 전 전선의 모든 곳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대포의 화력을 집중해야하는 목적을 가진 비현실적인 조직이 제공되었다. 1944년 2월초, 18포병사단은 전선이 너무 확장되어 더 이상 사단 집중이 불가능하여 전선을 따라 연대를 펼치도록 강요받았다.

1944년 봄의 “카울드론(cauldron)"전투에서 고생을 많이 했던 18포병사단은 그해 7월에 해체되었다. 구성부분은 유동적인 본부의 지휘하에 집결될 일정하지 않는 숫자를 가진 군 포병여단과 포병군단의 표준구조인 집중된 포병화력을 가진 차기 독일 실험요소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여단은 4개 대대, 군단은 6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다양한 무기로 장비되었고, 외국산의 대공포와 대포를 많이 포함했다. 유동적인 본부는 군단작전을 하는 기존 포병지휘관, 군 업무를 위한 차상급 포병지휘관, 집단군의 임시 포병편성을 지휘하는 포병장군으로 구성되었다.

포신 포병(tube Artillery)으로 장비된 부대는 연막투발기(smoke projector)로 장비된 조직에 의해 이들 집단에 합류되었다. 이것은 본래 연막차장(smoke screen)을 설치하기 위해 설계되었던 다양한 크기의 로켓발사기이었지만, 1944년경 고폭탄을 투발하는 우수한 수단으로 판명되었다. 연막투발기는 포신 포병보다는 부정확했지만, 단기간내 많은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 때문에 단일 지점에 많은 화력을 집중할 때에는 훨씬 큰 포신 포병부대에 대한 타당성있는 대체물로서 연막투발기를 장비했다. 예를 들어 1944년의 연막투발기 여단은 각각 6~8개의 발사포신을 가진 124문의 발사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18포병사단에는 108문의 포병만 승인되었다.

3년간 소련과 전투한 독일 육군은 1944년과 1945년에 소련의 서부 영어권 동맹국인 프랑스와 벨기에게 포병 집중화력(massed artillery fire) 기법을 실시하길 갈망했다.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되던 1944년 12월, 발지(Bulge) 전투로 알려진 아르덴네스(Ardennes)를 통과하는 공격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독일군은 이 공격을 위해 1,001문의 경대포(75밀리 평사포, 88밀리 대공포, 105밀리 곡사포), 639문의 중대포(100밀리이상 평사포, 120밀리이상 곡사포), 957문의 연막투발기를 ?어 모으려고 했다.

1944년 12월 아르덴네스와 다른 곳에 있던 미군 포병의 위대한 힘은 포병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만큼 포신에 두지 않았다. 병기창에 있는 미국 무기는 독일 무기와 매우 비슷했다. 독일처럼 105밀리 곡사포가 미국의 기본형 경대포였다. 또한 미국의 중사단 대포는 독일의 150밀리 대포와 거의 비슷한 155밀리 곡사포였다. 100밀리 장거리 평사포와 필적할 수 있는 무기는 부족했을지라도, 미국은 독일 150밀리 평사포와 경쟁하는 155밀리 평사포와 독일 210밀리 곡사포에 대응하는 8인치 곡사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 표면상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포병에 대한 미국의 포병 접근은 독일과 달랐다. 이렇게 한 이유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판쵸 빌라 추격에 필요했던 것보다는 적게 가지고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미군은 1917년과 1918년에 프랑스 산파의 도움을 받아 20세기로 인도되었다. 미국 실험부대를 창설하는 군사임무가 부여된 프랑스 교관이 미국학교에서 가르쳤다. 프랑스 교범을 요약으로 번역하여 참고자료가 아닌 교리로 발행되었다. 미국부대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프랑스 편성에 배속되었다.

전반적으로 미국 실험부대에서 포병에 대한 내용은 특히 사실이었다. 토착적인 전통을 프랑스로부터 도입한 것과 혼합하려는 보병및 기병과는 달리, 미국 포병은 전문지식 축적이 가장 불안전했던 시점에 상대방인 프랑스의 지도하에 있었다. 프랑스 자료와 모든 포수들이 채택한 프랑스 포병 선제(predominance of artillery)교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매력을 거의 독점적으로 미국 포병부대가 제공받았다는 사실과 결합된 공급과 소요의 일치는 단지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모방정도로 결말이 났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프랑스는 미국 포병에게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후 미 육군의 이상적인 포병 대포 “종류”를 결정하기 위한 연구위원회의 보고내용을 추종하는 병기군단이 75밀리와 105밀리 곡사포를 열심히 개발했을 지라도, 미국 사단포병은 그 당시 프랑스 보병사단의 포병과 매우 유사했다. 상대방인 프랑스처럼 양대전동안 미국 보병사단은 2개 연대, 즉 75밀리 평사포 3개 대대와 155밀리 곡사포 2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양 경우의 대포는 프랑스가 설계한 무기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155밀리 곡사포와 155밀리 G.P.F. 평사포로 구성된 중포병도 역시 프랑스가 원조이었다.

프랑스가 이것을 도입하자, 지휘본부는 미국에 적용할 방법을 알게 되었다. 1935년을 시작으로 오클로호마(Oklahoma)의 실(Sill)요새에 위치한 미 육군포병학교의 장교들은 대대 사격지휘소(fire direction center)라고 명명된 것과 함께 일을 했다. 1941년 10월경, 방법과 시간을 많이 절약하는 아날로그 계산기(슬라이드 척과 원형 표적판)는 미 포병의 업무를 수행하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동시에 사격지휘소가 3~4개 포대를 위해 하던 일을 실 요새의 개혁자들은 3, 4 또는 5개 대대를 위한 일을 했다.

이 기법은 완전한 반면, 프랑스의 실패로 인해 프랑스 교관에게 대한 미국 포수의 믿음은 시험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20년동안 미 육군에게 충격을 준 독일 숭배자에 대한 퇴조의 물결에 뒤따르는 독일이 프랑스에게 패배하자 선례자의 무기나 기법을 가지고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던 미 포병인의 의지는 파괴되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전야, 미육군 포병장교사이에 퍼져있는 의문에 대한 반응으로 이상적인 보병사단의 포병편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미국이 새로 설계한 105밀리 곡사포 3개 대대와 155밀리 곡사포 2개 대대로 편성하는 것이 자주 건의된 반면, 사단 대포로는 105밀리 곡사포 사용과 75밀리 평사포, 75밀리 꾸러미(pack) 곡사포, 105밀리 곡사포, 그리고 155밀리 곡사포의 혼합 운용이 제안되었다.

도달한 최종 결론(1942년초 사단포병과 1943년 중간의 군단포병)은 그 당시의 독일 편성과 매우 유사했다. 보병사단 포병은 12문단위 4개 대대 즉, 105밀리 곡사포 3개대대와 155밀리 1개대대로 구성되었다. 군단포병은 유동적인 군(연대급)과 여단본부 예하에 독립대대를 집결하여 구성했다. 실제, 외적인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동안 미국과 독일 포병의 주요한 차이는 노새가 운반하는 소수의 꾸러미 곡사포 포대를 절약하기 위해서 모든 미국 포병은 차량으로 견인하거나 또는 자주화된 사실에 있다.

상대방인 독일처럼, 미국 포병장병도 1개 표적에 대해 대대 또는 다수 대대의 화력을 집중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 많은 무전기와 연결된 사격통제기법과 장비가 실 요새에서 많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풍부한 탄약보급으로 화력집중이 가능하게 되었다. 미국이 선호하는 이 기본적인 기법에 대한 수정은 다양한 포대가 사격한 포탄을 동시에 탄착하여 일격에 비탈거리게 하는 “동시탄착사격(time on target)" 임무이었다. 다른 신관보다 더욱 신뢰성이 높은 공중파열을 허용하는 접근신관(variable time fuse)을 1944년 도입하여 개활지에 노출된 독일부대를 더욱 위험하게 되었다. 미국 포병 전문가들이 미국이 독일을 따라 잡는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유일한 분야는 많은 사단의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경직된 미국 지휘정렬(command arrangment)의 성격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이 사단포병을 타 포병본부(포병사단본부, 포병지휘관, 독립연대본부, 관측대대, 또는 18포병사단)의 직접적인 작전통제하에 두는 것을 철저하게 선호한 반면, 미국은 사단장의 독단을 침해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처럼 브루흐뮬러 시대이후에도 독일 포병 시행의 중심인 단일 지휘를 방해했던 사단과 군단포병간에는 벽이 여전히 있었다.

동부전선의 전쟁 마지막 해, 단일 지휘를 실시하려는 독일 능력에 대한 최대의 적은 전차부대의 종심돌격으로 독일 방어외곽에 있던 틈을 확장하려는 증강된 소련의 능력이었다. 이와 같은 사례가 1940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후, 이 돌격은 포병부대에게 사격임무보다는 대전차 지역방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포병집중 행동을 계속하는데 필수적인 연결(유선, 탄약 재보급, 연락)을 혼란시켰고, 독일 포대와 대대가 완전한 부대로 철수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1944년과 1945년의 아르덴네스 전투에서 독일이 돌파를 성공하므로서 독일 포병의 집중능력에 혼란이 발생했다. 모든 것을 충분하게 운반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여 단지 극소수 대포만이 작전에 투입되어, 독일 포병은 성공한 전차를 계속하여 후속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일단 기상이 개이기만 하면, 지상공격용 육군항공의 도움을 받은 미국 지상부대는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양 상황의 풍자로는 전쟁초 독일이 물리쳤던 육군이 똑 같은 위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던 것이다. 평사포와 곡사포의 사거리내에 있는 적에게 충분히 퍼붇는 능력이 있는 포병과 광대한 화력의 양을 제공받은 독일은 동시에 이들을 이동할 수 없었고 다른 기동에 극단적으로 취약했다. 1940년에는 일부 부대의 희생이나 1급 사격부대 어느 것도 위험이나 호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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