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뒤쪽에 있는수송공원이다.
옛날 이곳 이름은 박동이다. 용흥궁 등 궁집이 있었던 곳이다.
충정공 민영환의 생가도 이곳에 있었다.천도교 출판사 보성사가 있었던 곳도 바로 수송공원 자리다.
보성사는 1919년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유명한 출판사다. 그 옆에는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사당도 있다.
이 수송공원 자리에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사옥이 있었다. 그 신문의 창간 사옥 터임을 밝혀주는 표석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언론유사(言論遺事)에서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사옥 터는 수송동이라고 찾아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는 정진석교수의 <언론유사>에서 간추려 옮긴다.
'대한 박동 매일신보사 법어학교 앞에 전 영국인 셜필림 집 자리'
대한매일신보는 창간되던 당시부터 판권에 그 사의 위치를 박동으로 밝히고 있다.
이때 한글판과 영문판이 한 지면에 붙어있을 때였다.1905년 8월 11일 국한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개의 독립된 신문을 발행한 사옥도 같은 장소였다.
국한문 판권에는 "경성 북서(北署) 수진방(壽進坊) 박동(磚洞) 호외지(號外地) 법어학교(法語學校) 전(前)"으로 명시되었다.
그러면 박동에 있던 법어학교 즉 프랑스어학교가 있던 장소는 어디였을까?
박동은 현재 수송동과 견지동 근처였다.법어학교가 있었던 곳은 중동중고등학교 부근이었다.
중동학교는 1984년에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전했지만 원래 학교가 있었던 곳은 종로구 수송동 85번지였다.
원래의 학교 부지에는 한국일보사의 주차장과 연합통신의 건물이 들어섰으며 골목길 건너에는 일본대사관이 있다.
그러므로 대한매일신보 초기의 사옥는 당시는 박동이었다.현재는 수송동으로 되어 있는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사옥으로 사용했던 건물의 원 소유주는 영국인 셜필림이었다.
셜필림은 한자로 薛必林 또는 薛弼林으로 표기했던 스티리플링(A.B.Stripling)이었다.
그는 1883년부터 총세무사 뮐렌도르트의 보좌관으로 인천에서 세무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885년 9월 뮐렌도르프가 해임되자 총세무사 대리가 되었다.1897년 2월에는 경무청 고문에 임명된 사람이다.
대힌매일신보는 그가 소유했던 수송동(박동)의 현 연합통신 부근에서 발행되었던 것이다.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자 들이닥친 열강들.
그들의 각축으로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에 대한매일신보는 태어났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한국이름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이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헤이그 밀사사건,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대한매일신보으 논설은창간호 사설에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요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일본의 부당한 침략정책과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낱낱이 들추어 보도하였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에 와 있는 일본 관리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다.신문 편집뱡향은 '정의 편에 서서 불의와 싸워 전파함으로써 세계의 여론에 호소'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1995년12월 9일자 5면 <이규태코너>의 '배설의 손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베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서울신문의 전신이 대한매일신보다. 서울신문은 2003년 12월 29일자 10면 '대한매일 첫 사옥 위치 찾았다'라는 제목으로
대한매일신보 사옥 위치를 정리한다.그 기사를 아래에 옮긴다,
구한말 일제침략에 항거하며 우리 민족의 ‘대변지’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서울신문사 전신)의
첫 사옥 위치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28일 오인환(吳仁煥·사진) 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연구논문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사가 있었던 위치와 사옥의 사진을 찾아서’에 따르면,대한매일신보사 최초의 사옥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 85 연합뉴스 사옥과 제일모직 사옥에 걸친 300여평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오 교수는 “대한매일신보는 수송동의 현 연합통신 부근에서 발행됐다.”는 정진석 교수의 ‘언론유사’ 등을 참고로
정확한 위치를 추적,중동고의 ‘중동 80년사’에서 “1914년 옮긴 중동의 교지는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경영하던 사지(社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18일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 특파원 베델과 양기탁이 손잡고 창간한 신문이다. 일본의 야욕과 한국내 사정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다.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하는 등 대한매일신보는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첫 사옥은 현 연합뉴스와 제일모직 사이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사고(社告)에서 발행소의 위치를 “박동 법어(프랑스어)학교 앞 전 영국인 셜필립 집 자리”라고 밝히고 있다.
박동은 현재 종로구 수송동의 일부지역이다.
정진석 교수는 ‘언론유사’에서 “법어학교가 있던 곳은 수송동 85 중동고 부근이었고 대한매일신보는 수송동의 현 연합통신 부근에서 발행됐다.”고 밝혔었다.
오 교수는 이를 좀더 정확히 알고 싶어 영국인 셜필립의 집터와 법어학교터를 찾아봤지만 이렇다할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가 박동을 떠난 1907년을 전후해 주변에 있었던 중동,보성,숙명,한성사범 등 학교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로 했다.
다행히 ‘중동 80년사’에서 “중동이 1914년 옮겨간 당시 부지는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경영하던 사지(社址)였다.”는 단서를 확보했다.
이를 지도상에서 확인하기 위해 ‘경성관내도’(1918년) 상의 수송동 85 위에 거리와 방향을 같게 조정한 오늘날 지적도를 ‘포토숍’으로 포개얹은 결과,대한매일신보의 첫 사옥은 수송공원 북쪽 모퉁이 일부와 그에 접한 연합뉴스 부지 100평,제일모직 부지 200평에 걸친 형태로 나타났다.
첫 사옥의 사진 역시 중동 80년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80년사에는 수송동 교사 앞에서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중동이 당시 이 교사를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을 개축하지 않았을 것이고,따라서 사진 속 교사가 바로 대한매일신보의 첫 사옥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서 찾아낸 두번째 사옥 사진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월5일자 사고에서 새 사옥의 위치가 ‘남서 황단(皇壇·원구단) 신작로 초입 석정동 북변 3층 양옥’으로 밝혔다.두번째 사옥 역시 정진석 교수 등이 “대한매일신보의 두번째 사옥은 지금의 프레지던트호텔과 웨스틴조선호텔 입구 근처였다.”고 밝힌 바 있어 위치 추정이 가능했다.옛 지도(1911년,1918년 제작)에서 두번째 사옥 주변을 비교한 결과 지형이 7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시 ‘황단신작로 초입 북변’을 오늘날 지도에 포갠 결과 두번째 사옥은 현재 프레지던트호텔과 프라자호텔 사이,즉 시청 앞 광장 중앙부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번째 사옥의 사진은 참으로 운좋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일제는 1910년 8월29일 조선을 강제합병하면서 총독부 기관지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발행했는데,매일신보 1914년 10월25일자 1면에 실린 사진에서 두번째 사옥의 모습을 찾아냈다.
●최후의 대한매일신보는 종로2가에서 발행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인 사원이었던 이장훈이 1910년 6월 당시의 사주였던 영국인 만함에게서 시설과 판권을 사들인 뒤
사옥을 ‘경성 중부 포전병문(布廛屛門·베전 골목 입구) 이궁가(二宮街) 2층 양옥’으로 옮겼다.
정진석 교수의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에 따르면 표면상으로는 이장훈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통감부가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장훈 명의로 발행된 1910년 6월14일부터 대한매일신보로 발행된 마지막 호인 1910년 8월28일까지 있었던 위치를 세번째 사
옥으로 볼수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그해 10월19일 경성 서부 정동 대한문 앞으로 사옥을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서
계속 신문을 발행했다.옛 지도(1903년과 1907년 제작)에 이궁내(二宮內)로 표기된 부분이 탑골공원 맞은편에 있는데,따라서 세번째 사옥은 오늘날 YBM시사영어사 빌딩앞 보도와 차도 일부이거나,수표다릿길 건너편 동대문쪽 모퉁이 상가건물들 앞의 보도와 차도 일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세번째 사옥의 사진은 찾지 못했다.
●“신문터는 신문의 이름만큼 중요”
2001년 2월 정년퇴임 뒤부터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 구한말 신문터 찾기에 나선 오 교수는
40여년 전 ‘신문평론’(1965년 6월호)에 실렸던 언론계 원로들의 좌담을 인용,이번 연구의 의미를 대신했다.
“우리 신문사(史)가 100년이 넘는데도 명멸했던 신문이 간행되었던 곳이 어딘지에 대해서는 따로 깊이 알아보려하지 않았다.
어떤 신문이 자리잡아 인쇄해서 발행하던 곳이 가지는 의미는 신문의 이름과 내용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 류길상기자 uke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