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22:36)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신속하게 반응합니다.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눅22:38)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대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던 사실을 떠올리며 칼 두 자루로 오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부질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무관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하고 오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며, 칼 두 자루를 내미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끊어내듯 말씀하십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눅22:38) “족하다” 하십니다. 칼 두 자루면 충분하다 하십니다. 칼 두 자루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지도 않으시고, 군대를 사열하며 칼을 나눠주지도 않으시고, 그저 “족하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 하심은 제자들을 게릴라로 준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 하심은 왕과 총독과 황제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 하심은 오천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 하심은 로마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눅22:37)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반역자가 되어 로마법정으로 하여금 십자가형을 언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로마법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법정은 신성모독을 이유로 예수님을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을 때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칼 두 자루’는 반로마 항쟁의 지도자라는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
‘칼 두 자루’ 때문에 로마 법정은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법정에 체포당하기 위해 칼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 군인들에게 죽임당하기 위해 칼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법정은 십자가형을 집행할 수 없었거든요(요18:31). 십자가형이 내려지려면 반로마 항쟁을 지도하는 로마의 반역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는데, 칼 두 자루는 혐의를 조작할 훌륭한 증거물이 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은 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쇠가 칼이 되려면 자기 몸을 깎고 깎아야 합니다. 쇠가 칼이 되려면 자기 몸을 버리고 버려야 합니다. 쇠가 칼이 되려면 망치로 맞고 맞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쇠가 칼이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 하심은 칼을 품은 자객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함으로 진정 칼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소유하시지 않고 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칼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소유하시지 않고 칼이 되셔서 환난 위에 환난을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십자가 환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라,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여달라 기도하셨고,(마26:39)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십자가 환난은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 원망도 하셨습니다.(마27:46)
십자가 위에서 쏟았던 원망, 즉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6~18) 하신 원망이 시22편을 읊으신 것이라면,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악한 무리에게 찔려 뼈가 드러나는 고통을 지나, 칼이 되신 예수님의 노래가 바로 유명한 시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마침내 칼이 되셨습니다. 깎이고 깎여, 없어지도록 깎여 예수님은 칼이 되셨습니다. 칼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셨을 ‘칼의 노래’가 시23편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4~6)
예수님에게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생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십자가 위였습니다.(요19:30)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노래는 어디에서 부르는 것입니까.
나를 부인하고 부인하며, 그렇게 아프게 담금질되어 불러야 할 ‘칼의 노래’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140413_민들레주보.pdf
첫댓글 "칼의 노래"는 김훈의 표현을 빌린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 당하심을 생각하며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는 것이 지금은 아프고 슬퍼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이 심히 좋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결국은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내가 가져야할 믿음이라 여겨집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계심으로 안연한 사람이어야 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위에 내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박히심에 내가 함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김목사님의 기상이 왜적앞에 굳건하게 서신 이순신 장군을 뵙는 것 같습니다. 은혜로운 말씀, 삶을 파헤치는 말씀보고 듣게 하심에 감사드리고 말씀 주신대로 나를 담금질 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승리하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