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화 상품은 그 상품이 속한 장르의 부산물이다. 어떤 문화 상품이건 장르의 규범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걸출한 하나의 작품으로 인해 장르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핵폭탄 같은 선구자들이 있다.
쉬운 예는 영화계에서 찾아볼수 있다. 워낙 뛰어난 작품이라 후대에 만들어지는 영화들에까지 힘을 미치는 영화. 장르 자체의 공식을 새로 쓰는 영화. 공포 영화에선 '식스 센스'. 그 엄청난 반전의 힘과 그 이후 공포 영화들을 옭아매는 반전 강박증을 보라. SF 영화에선 '매트릭스'. 네오와 스미스의 대결이 보여준 가공할 비주얼. 매트릭스 이후 헐리웃 액션의 강도는 와이어액션과 더불어 한단계 진화했다. 마찬가지로 일본 영화 '링' 이후, 모든 귀신들의 공통점. 하나같이 머리늘어뜨리고 눈뒤집고 기어서 등장한다.
시트콤의 세계에도 그렇게 장르의 공식까지 바꿔버린 걸작이 있을까? 시트콤계의 '트렌드 쉬프트'-사조의 변화-를 가져온 작품을 들라하면 난 서슴없이 '싸인펠드'를 꼽는다.
시트콤 성공법칙 3. 고정 관념을 깨라.
'싸인펠드' 이전에 성공한 미국 시트콤의 경향은 단순했다. 따뜻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홈 시트콤. 흑인 가정도 이렇게 알콩달콩 잘산다는걸 보여준 '코스비네 가족-The Cosby show-' (실제 미국 흑인 가정의 평균 생활수준을 생각해보면 거의 환타지다), 취어스라는 술집을 경영하는 주인과 웨이트레스, 손님들의 이야기 '취어스-Cheers'(가족보다 더 가족적인 술집 단골들, 이곳도 술꾼들의 환타지), 평범한 한 소년의 따뜻한 성장기 '케빈은 열두살 -Wonder Years-'(1970년대 미국의 성장 신화를 가족의 시선에서 복고하는 드라마) 등등. 이들 시트콤의 공식은 단순하다. 어떤 코믹한 한 사건이 생긴다. 그 사건으로 가족의 구성원들이 하나 둘 휘말려 엉뚱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그러다 마지막에는 모든 문제가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해결된다. 앞에서는 코미디로 웃겨주고, 뒤에는 가족애의 감동까지... 오홀. 완벽한 시트콤 공식이다. (우리도 이런 비슷한 홈시트콤 참 많았다.)
이렇게 착한 시트콤이 주류를 이루던 미국에 핵폭탄같은 애가 하나 등장한다. 이름하여 '싸인펠드'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제리 싸인펠드. 코미디 작가를 꿈꾸는 짝패 죠지, 하는 일없이 빈둥대는 백수 크레이머, 멀리서 보면 공주인데 자세히 보면 무수리인 일레인.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네명의 뉴요커가 주인공이다.
싸인펠드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자신 밖에 모르는 이들이 벌이는 소동. 장애인 휠체어 통로에 불법 주차하는 주인공. 그 바람에 한 장애인 여자가 다치자 병문안 가서는 망가진 휠체어 대신 낡은 중고 휠체어를 사다준다. 퇴원하는날 다시 휠체어 고장으로 입원하는 여자... 콜라 공병 값이 10원 오르자 그걸 모으겠다고 노숙자들의 생활 터전인 쓰레기통을 싹쓸이하고 심지어 거지가 모아놓은 병들까지 모른 척 주워오는 이야기. 거의 '악행의 자서전'같은 이야기들이 벌어지는데. 더 웃기는 것은 이 인간들, 반성할 줄 모른다는거다. 그런 민망한 코미디를 했으면 종반에는 반성하고 아름답게 화해할 법도 한데... 이 나쁜 인간들은 그런 것도 없다. 억지 감동을 위해 막판에 민망한 드라마가는 법 없이 그냥 내내 코미디만 치고, 웃다 지치면 거기서 끝낸다. 참 쿨한 코미디다.
싸인펠드 이후, 미국 시트콤은 이전의 감동 강박증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웃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순풍 산부인과'를 보라. 너무나 이기적이고 엽기적인 캐릭터들이지만 얼마나 웃기는가. '세 친구'를 보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여기엔 그런거 없다. 매일같이 걸들에게 작업거는 선수들 셋이 있을 뿐이다.
감동적인 결말이 있어야 3류 코미디에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라. 코미디에는 항상 마지막에 교훈적인 드라마가 있어야한다는 고정관념만 없어도, 훨씬 더 재밌었을 한국 영화 참 많다.
이 위대한 시트콤 '싸인펠드'는 어떻게 종영했을까? 마지막 회에서 이들은 늘 그렇듯이 이기적인 욕심에 사소한 경범죄 하나를 저지른다.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재판정에 나서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반대 심문의 증인들... 바로 싸인펠드 방송 9년간 등장했던 게스트들이다. 이들이 나와서 각자가 어떻게 네 명에게 당했는지를 낱낱이 증언한다. 그 증언 과정은 싸인펠드 전회에 걸친 하이라이트이고. 증언을 다 들은 배심원, 당신같은 인간들은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해야한다며 징역을 선고한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감방에서도 정신못차리고 법집행의 불합리성에 대해 투덜대는 네 명의 모습에서...
얼마나 쿨한 결말인가. 모두가 따뜻한 가족애를 다룬 홈시트콤을 할 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꿰뚫는 시니컬한 코미디를 다룬다는 것.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은 이전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의 눈을 확 사로잡는 다는 것이다. 장르의 규범에 얽매이면서 그 장르의 틀을 깬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트콤 연출일기, 다음번에는 새로운 시트콤을 기획하며 겪는 고민의 시간, 시트콤 기획일지를 준비해보겠습니다.
첫댓글 캬~ 아바타 꾸미셨네요 멋진데요 ㅋㅋ 피디님 말씀 들어보니깐 참 공감이 가네요 특히 고정관념이 없었더라면 더 잼있는 코미디 영화가 많았을거라는 부분이요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억지스럽게 감동으로 끝난 영화나 뭔가 끝이 이게 아닌것 같은 영화도 많았던것 같아요
역시 여기서도 피디님의 지론이 나오네요 시트콤은 그래도 시츄에이션 코미디이다......... 나머지는 시트콤을 좀더 맛있게 요리하기위한 양념일뿐....... 그런데 저는 논스톱에서의 피디님의 코미디도 재미있었고 사랑이야기들도 흠뻑 취해있었는데.... 난 둘다 좋았는데.....
그래서 사인펠드를 보고 씁쓸했나바요. 케이블에서 하는 몇 편을 보고 나서 가족들이 모두 '재미없다'한 이유가 전 그냥 문화차이려니 했는데... 시트콤의 근성인양 웃음과 감동을 당연히 안겨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걸 부인할 순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