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가졌구나,생각할 때는 그냥 막연했어요.모든 게 그저 그렇겠거니 생각되었을 뿐 그렇게 대단히 특별한 감동 같은 거 없었지,싶어요.그런데 …그랬었는데요. 요즘은 그래요. 엄마가 되는구나,생각하면 저절로 뭉클해져요.엄마라는 말이 …그렇게 귀한 건 줄 몰랐어요. 나 여기 있다고,잘 자라고 있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발길질해 주면 그게 고마워서 순간 순간 가슴이 막 차오르는 거죠. 그렇구나,내가 엄마가 되는 거구나 …혼잣말하고 그래요.” 배부른 그녀가 말했다.가늘한 그녀가 그리도 묵직한 배를 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 어쩌자고 그녀의 배 위에는 축구공 하나 덜컥 얹혀 있는 참이었다.더도 덜도 아니고 꼭 그만한 배를 가진 그녀와 하루를 보냈다. 한 번 앉으면 일어서기 어렵고,일단 일어선 뒤에는 다시 앉기 어렵다는 그녀의 모습이 …자세 한 번 바꿀 때마다 쑥스럽고 어색해서 슬그머니 웃어 주는 그 얼굴이 방실방실했다.
“처음엔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밥 냄새 맡는 게 무서워서 도망 다녔어요.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웬만한 음식은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거든요.4 5개월 때쯤?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면서는 그렇게 밤 생각이 나던 걸요.밤 있잖아요.찐밤,군밤 그런 거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밤만 먹은 적도 있어요.밤 먹다 목이 메어 물 마시고 …그런 제 모습을 남편은 정말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어요.뭘 그렇게 먹는 모습 같은 거,별로 익숙치 않아서 그랬을 거예요.” 고구마,밤,그런 거 먹으면 딸이라는데 ….게다가 밥보다 과일을 더 많이 먹었다는 말까지 들으면서는 은근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서 슬그머니 물었었다.고기는 안 먹고 싶었어요? 돼지 갈비 그런 거.아니면 순대국 같은 푹 퍼진 음식 같은 거.아,참!또 있다.떡은? 떡은 안 먹고 싶었어요?…그런 거 먹고 싶어야 아들이라던데 ….아들 낳아야 하는 거 아닌가? 속으로 은근히 궁금해져서 자꾸 유도 심문하는 기자의 마음을 어느새 그녀도 알아차린 듯했다.
“씩씩한 아들도 좋고,예쁜 딸도 좋아요.전 다 괜찮아요.그저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주면 그럼 된 거죠. 딸 낳으면 둘이서 매일 짝궁처럼 다닐 거고,아들 낳으면 …음 …그러면 남편이 좋겠네요. 아들 손 잡고 목욕탕 가는 거,남자들이 젤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서요. 남편도 아들이었으면,딸이었으면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하여튼 빨리 나오기만 했으면,하나 봐요.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기대하시려나?….남들이 배가 너무 크다고, 쌍둥이 아니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면 전 또 그냥 그렇게 대답해요. 쌍둥이면 좋지,뭐. 한 번에 둘이나 낳는 축복이 또 어디 있으려구 …그래요.” 축복이라 …아이 낳아 훌쩍 키운 경험 있는 기자로서는 그녀의 그 꿈결 같기만 한 기대가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몰라 그렇지.아이 하나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몰라 그렇지. 잠 못 자는 피곤함에다 우는 아이 달래는 요령 익히기며 수시로 닥쳐 오는 진땀나는 시간의 서글픔 같은 거,엄마 되기의 그런그런 훈련들을 잘 몰라서 그리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거지 ….눈물이 흘러넘쳐 강물처럼 흘러야 아이 하나를 다 키우는 거라던 어른들의 협박(?)같은 거,아직은 하나도 실감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한동안은 좀 우울하기도 했어요.그냥 괜히 그래졌어요.왜 그러나,마음이 왜 자꾸 가라앉나,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해지나 …혼자서 걱정했는데.선배 언니들이 그러대요. 임신 우울증이라구요.그래서였나?사소한 짜증 같은 걸 부렸던 것도 같아요.아,맞다! 임신 5개월 때였나? 그런 절 보면서 남편이 그러데요.그러면 안 되지.이젠 아기도 커 가는 데 남편한테 짜증내고 그러면 안 되지 ….그 말 하는 얼굴이 하도 우스워서 푸하하 웃었어요. 요즘은 편안해요. 배가 커져 불편한 것말고는 다 좋아요.그냥 빨리 나오기만 해라,기다리고 있어요.” 아이를 가지면서,하필이면 꼭 그 시기에 밤잠도 못 잘 만큼 바빠진 남편.그래서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 다른 여자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뭘 먹고 싶다,뭘 해 달라 하는 투정 같은 거 부려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를 위해 되도록 활동을 줄이고,온전히 건강을 챙기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으니 이만한 휴식도 없지,생각한다고. 매일매일 혼자 집에 있는 거 심심하지 않았어요?물을 때 그녀가 그랬다.있잖아요.그거 아시죠?남편이 바쁜게 훨씬 낫다니까요. 한가해서 함께 놀아 주면 투정은 좀 부릴 수 있지만 대신 챙겨 줘야 하잖아요.몸 무거울 때 챙겨 주는 일이 어디 쉽겠어요?….
“전 그래요.그냥 딱 부러지는 성격이에요.그러면 그런 거고,아닌 건 절대 아니고 그래요. 좋고 싫은 게 분명해서 오해도 받고 그러는데 …아이 가지면서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그냥 좀 유해졌어요.내 자신이 그걸 느끼니까 주변 사람들은 더 그렇겠구나,생각하죠. 그냥 참아지네요.엄마란 그런 건가.화나는 일 있어도 참고 눌러요.한 번 더 생각하고 나서 말하고,어려운 일 있어도 덤덤히 웃어 넘기려고 하게 돼요.정말 그런가요? 엄마란 거,엄마 되는 거,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겠죠?” 그녀를 볼 때마다 참 고운 여자구나,혼자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그렇게 바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 챙기는 거 잊지 않고,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법도 없고,어려운 일이며 힘든 사람 앞에서 함께 마음 아파 해줄 줄 아는, 저 여자는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가끔 그런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아이 가진 후 그 정다움이 더 깊어진 듯해서 바라보는 눈이 덩달아 행복했다.어떤 엄마가 될까,하는 궁금증 같은 거 없어도 좋았다.그녀는 분명 속 깊고 정 많은 엄마로 보란 듯이 당당하게,반듯한 아이를 키워 낼 테니.
“어떤 엄마가 될까,가끔 혼자 그려 보기도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저는 매일 아이 야단치고, 남편은 뒤에서 살살 달래 주고 그러지 않을까,생각도 하게 되고 ….특별한 욕심 없어요. 이 사람과 딱 지금 만큼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부부로,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 모습 보이면서 살자 …생각해요.그런데요.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우리 아기가 너무 못 생긴 거예요.잠 깨서도 한참 고민했어요.큰일 났다,못생겼으면 어쩌나 ….” 머지않았다,싶은생각. 엄마 마음을 아는지 아기는 벌써 나올 태세를 끝낸듯 그 큰배가 쭉쭉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란다. 그렇게 무거운 배를 안고 요 사이 얼마 동안은 내내 인부처럼 일을 했다는 그녀.아기방을 꾸미기 위해 가구를 맞추고,벽지를 찾으러 다니고,아이 용품들 보러 다니고 ….그 부지런한 정성이 가득 녹아든,그녀의 아기방 문을 열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꾸미면서 애쓰는 중인 걸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몇 번을 더 바꿀지 모르죠. 사실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들 색깔로 꾸며야 하나,딸 색깔을 골라야 하나 오래 망설였죠. 그러다 그냥 애매모호한 빛깔을 골랐어요. 엄마인 제가 좋아하는 색깔을 쓰기로 한 거죠. 코디네이터랑 둘이서 틈만 나면 물건 사러 다니고, 원단 고르러 가고,가구 디자인 뽑아서 맞추고 ….다리가 퉁퉁 부어 지치는데도 힘든 줄 모르겠네요. 너무 재미있어요.” 애써 꾸며 놓은 아기방을 촬영하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 이재룡 씨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저런! 아무래도 예술가가 나 오겠죠? 아이가 눈이 부시겠구만 ….그 눈부신 작은 방 안에 속속들이 녹아 든 엄마의 사랑이 만져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육아 일기 쓰는데 … 쓸말이 별로 없다며 웃는 예쁜 엄마 “아기를 가지면 굉장히 별나게 태교할 줄 알았어요. 뱃속 아기와 틈만 나면 대화를 나누고, 대단히 좋은 음악만 골라 듣고,예쁜 것만 골라 보고,좋은 말만 하고 …. 꼭 그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안 그래져요.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쓰는 정도예요. 고백하자면 저요. 너무너무 예쁜 육아 일기장도 준비해 놨거든요. 그런데 몇 장 못 썼어요.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뭐라고 쓸 말이 없는 거예요. 아가야, 엄마는 네 얼굴이 너무 궁금하단다 …그냥 그런 말들을 적고 나면 뭐 딱히 뭐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유치해서 이 다음에 우리 아이한테 못보여 줄 것 같고. 그래서 조금밖에 못 썼어요. 대신 맛있는 것 많이 골라 먹고,좋은 생각만 하려고 하고, 따뜻한 음악을 듣고,책을 읽고 그래요. 참! 저 뜨개질 열심히 하는 거,꼭 써 주세요.” 대단한 태교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기자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참이었다. 아기를 위해 그녀가 쏟아 붓는 남다른 정성같은 거. 전자파는 금물이라며 컴퓨터를 멀리 하더니, 급기야는 침실 한켠에 있던 컴퓨터 책상을 베란다 한구석으로 몰아내는 열의까지 보였다는 그녀. 욕실이며 거실이며 손닿는 곳 어디에나 태교 관련 서적들을 뿌려 놓고는 수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아닌 척하지만 음악이란 좋은 음악은 모두 골라 갖춰 두었다는 걸, 십자수 놓으며 뜨개질하며 아이랑 단 둘이 연기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는 걸, 그저 조금 썼을 뿐이라지만 그녀의 육아 일기장이 가득 채워지고 있다는걸 …. 그 모든 걸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