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부는 트리즈(TRIZ) 열풍
[한경비즈니스 2007-01-23]
지난 1월 9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생일 축하 만찬이 열린 신라호텔. 이 회장에게 몰려든 기자들은 ‘창조경영’에 대한 쌓인 궁금증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예년처럼 (경영을)한다면 어렵다”는 알쏭달쏭한 선문답만 남기고 돌아섰다. 지난해 9월 전자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이 회장이 처음 화두를 던진 이후 창조경영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그룹은 이미 창조경영을 올해 경영 방침으로 정해 놓았다.
‘이 회장이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 개념 형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3년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 이후 강소국, 천재론, 디자인 경영 등을 화두로 던져왔다. 하지만 창조경영론이 갖는 무게는 이전과 차이가 있다. 재계에서는 창조경영이 삼성에 1993년 신경영에 버금가는 큰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남의 것 베껴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남의 것을 베껴서는 통하지 않으며, 창조성과 혁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 회장의 이야기들은 삼성그룹 총수라는 그가 지닌 무게감을 빼놓고 본다면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지극히 원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관심은 어떻게 이처럼 중요한 창조성을 키우고, 창조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느냐는 실천론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1993년 신경영 때는 이 회장이 직접 계열사 임원들을 대동하고 세계를 누비며 수개월 동안 ‘특강’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추상적인 화두뿐이다. 창조경영의 실천 전략을 내놓아야 하는 계열사 임원진의 고민이 이래저래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는 것이 바로 ‘트리즈(TRIZ)’다. 삼성 측에서도 ‘창조경영=트리즈’라는 데는 조심스러운 반응이지만 트리즈가 창조경영을 실천하는 유력한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있다. ‘트리즈’는 ‘창조적 사고의 방법론’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1956년 소련 해군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겐리히 알츠슐러가 전 세계 특허 20만 건을 분석해 완성해낸 발명의 방법론이다.
트리즈 전문가들이 트리즈를 소개할 때 자주 인용하는 사례가 있다. 달 착륙을 준비하던 미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들이 난관에 봉착했다. 안전한 달 착륙을 위해서는 표면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우주탐사선 하부에 무수히 많은 백열전구를 달아야 했다. 하지만 달 착륙 시 발생하는 충격을 견딜만한 강한 유리와 전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구소련 과학자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이를 말끔하게 해결해 냈다. 우주는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전구에 굳이 유리를 씌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발견해낸 것이다. 왜 미국의 수많은 일류 과학자들은 이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차이는 바로 트리즈에 있다는 것이다. 소련 과학자는 트리즈 기법을 이용해 문제를 풀었지만 미국 과학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 기업들이 가장 먼저 스카우트해 간 인력은 소련의 트리즈 전문가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련의 신비스러운 비법으로만 알려져 있던 트리즈가 기업 경영에 접목되기 시작했다. 트리즈는 ‘모순 개념’, ‘40가지 발명원리’, ‘76가지 표준해’, ‘창의적 문제해결 알고리즘(ARIZ)’ 등 방대한 이론체계로 구성돼 있다. 또한 6시그마처럼 몇 시간 배운다고 곧바로 따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 트리즈 협회를 중심으로 엄격한 전문가 인증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국내에 트리즈를 처음 소개한 곳은 LG였다. 1995년 제휴 관계에 있던 필립스 소개로 LG생산기술원이 트리즈를 도입했지만 경영진의 지원 부족으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뒤늦게 도입한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트리즈를 전략적으로 추진해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96년 트리즈를 처음 접한 삼성종합기술원 김익철(현 한국트리즈협회장) 연구원은 이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창의성이 가르친다고 키워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997년 LG전자가 트리즈를 활용해 에어컨 소음을 줄이는데 성공한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김 연구원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e메일을 보내는 모험을 했다. 놀랍게도 e메일을 본 윤 부회장은 임원진에 직접 검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도 트리즈 활성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9년 손욱 삼성SDI 사장(현 삼성SDI 자문역)이 삼성종합기술원장을 맡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손 원장은 트리즈를 전면 도입해, 연구원의 모든 프로젝트에 시작 전 트리즈 전문가의 검토를 의무화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1년 DVD 픽업 개선 사례였다. 픽업은 비디오 헤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로 DVD 플레이어에서 DVD와 CD를 재생하는데 필요한 핵심 부품이다.
문제는 DVD와 CD가 서로 다른 파장의 레이저를 사용해 이 둘을 단일 장치로 합치려면 고가의 부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트리즈 연구팀은 두 개의 레이저 장치를 합치는 대신 거꾸로 레이저 감지 장치인 포토 디렉터 수를 2개로 늘리는 혁신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얻은 원가 절감 효과만 해도 한 해 1000억 원에 달했다.
DVD 픽업 사례 이후 삼성전자가 트리즈 도입에 발 벗고 나섰다. 트리즈 활성화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것은 윤종용 부회장이다. 수원 사업장의 VIP(Value Innovation Program) 센터가 트리즈 확산의 진원지가 됐다. 원래 VIP 센터는 가치혁신 전략을 실천하는 가치공학(VE: Value Engineering)이 주류였다. 그러나 트리즈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중심축이 바뀌었다. 지난해 VIP 센터 성과 발표회에서 제출된 사례 중 절반을 트리즈가 차지했다.
크레듀, ‘창조경영과 트리즈’ 강좌 개설
삼성전자의 트리즈 적용 사례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외 국제회의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 몇몇 사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국제적으로도 트리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트리즈 관련 국제 논문들은 히타치, 지멘스, 3M과 함께 트리즈로 큰 성공을 거둔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꼽곤 한다. 지난해에도 삼성전자는 트리즈 국제회의에서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트리즈 전문가는 2006년 논문에서 삼성에서 6시그마는 ‘통계적 사고’로 트리즈는 ‘창조적 사고’로 각각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종합기술원 삼성코닝 삼성코닝정밀유리 삼성SDS 등 삼성그룹 전자 관련 7개 계열사는 지난해 ‘삼성트리즈협회(STA)’를 출범시켰다. 삼성전자 이기원 부사장(CTO 전략실장)이 회장, 김세현 상무(CTO 개발혁신팀장)가 부회장을 각각 맡고 있으며 분기마다 계열사 담당 임원들이 모임을 갖고 ‘베스트 프랙티스’를 공유한다. 지난해 11월 삼성종합기술원에서 트리즈 컨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했다. 매달 발행하는 트리즈 웹진도 인기가 높다. 현재 삼성의 신입 연구개발 인력은 필수적으로 온라인 트리즈 과정을 듣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이 회장이 던진 창조경영 화두는 트리즈 확산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온라인 교육업체 크레듀는 오는 2월 1일 ‘창조경영과 창의적 문제해결 기법 트리즈’ 강좌를 개설한다. 국내 최고의 트리즈 전문가인 김익철 한국트리즈협회장과 이경원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가 연구 개발자뿐만 아니라 일반 사무직 직원들도 다양한 문제 해결에 트리즈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의한다. 크레듀는 창조경영과 함께 올해 그룹 내에서 트리즈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보고 발 빠르게 강좌를 준비했다. 크레듀 관계자는 “삼성그룹 임직원을 겨냥한 콘텐츠”라고 말했다.
물론 트리즈 전문가들도 이 회장이 트리즈를 염두에 두고 창조경영 화두를 꺼내들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회장은 더 큰 흐름에서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트리즈가 창조경영 실천 전략으로 쓰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론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