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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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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게시판 스크랩 개성, 선죽교, 아련한 핏자국
성곡동 안정숙 추천 0 조회 840 11.03.13 10:57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개성관광 다녀왔습니다.

부천에서 새벽 6시에 출발, 임진각에 시청버스를 남겨 두고 대화관광 버스로 옮겨탔지요. 아마 7시께 였을겁니다. 개성 가는 관문인 도라산 남쪽 CIQ에 7시께 도착하여 관광허가증을 받았습니다. 2층에 있더군요.

내려와 버스에 다시 오르니 북쪽의 허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8시40분까지 기다리라는군요. 버스에서 시간보내기가 무료하여 밖으로 나왔습니다. 건물 오른쪽에 개성가는 길이 있습니다. 직진하면 개성, 우회전하면 서울이라는 이정표가 선명합니다. 북측 비난하는 비라살포 등을 계속하면 개성관광은 물론 개성산업단지의 문을 닫겠다는 북쪽의 의사표명이 있은 뒤라서, 우리 관광이 가능할 건가 궁금해하던 터. 2008년 10월 29일 아침이었습니다.

 

 

무언가 쓸쓸함이 가슴을 채우는 스산한 가을 아침. 

그 쓸쓸함 건너 개성은, 박연폭포는 묘한 공간이었습니다. 관광이라서 관광지만을 골라다녔습니다. 개성공단은 통과하며 이곳에 무슨무슨 업체가 있고, 부지는 몇평이고, 3차 사업은 중단되었고 등등의 이야기를 북측 안내원이 해주었습니다. 받아적지 못했으니 숫자들은 증발.

 

맨 먼저 박연폭포로 갑니다. 폭포 가는 길에 안내원(이름은 김일철)이 설명을 합니다. 저기 저 산 기슭에는 왕건의 릉이 있고, 저쪽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릉이 있다, 저기가 송악산이다. 저 산, 임신한 여인네가 누워 있는 형상이지 않느냐, 그리고 저 산은 만수산이다, 이방원이 고려를 뒤엎을 역성혁명을 <하여가>를 읊으며 정몽주에게 제안하던 그 산 말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하던.  저 바위산이 천마산이다. 저 산을 돌아가면 박연폭포가 있다, 천마산 저 편 기슭에 폭포가 있다. 그러다가 노래 한곡을 선사하겠답니다. <안해의 노래>랍니다. 남쪽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비슷한 정서. 복쪽 아내의 손도 젖은 손이 애처로운 남쪽 아내의 손마냥 마를 날이 없고, 북쪽 아내도 어려운 일 당하면 먼저 웃으며 위로를 해준답디다. 그런 아내는 평생의 길동무라나요. 앵콜, 아니 한곡 더를 신청하니 <심장에 남는 사람들(?)>이란 노래를 더 부릅니다. 잠깐을 만나도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다는 그런 가사. 아주 서정적인 가사입니다만, 나중에 곡의 내력을 물으니 항일투쟁 중의 사람들을 기리는 영화의 주제가랍니다.

 

 

 박연폭포(위) 앞에서 차와 단 과자를 파는 아가씨들.

 

 황진이가 머릿단으로 휘갈겨 썼다는 글씨가 호방하고도 우아하다.

 

 

 폭포에서 박연으로 오르는 길의 북문. 동 서 남 북 4대문 가운데 이 산성에 남아있는 마지막 문.

 

박연폭포는 주차장에서 몇 십분 걸어가면 도달합니다.

물이 말라서 폭포의 물줄기는 가늘고, 폭포가 만들어 놓은 소도 옹색합니다. 바위만이 훤칠합니다. 폭포 앞 너럭 바위엔 황진이가 머리칼을 붓 삼아 썼다는, 분방하고 대담한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황진이와 서화담의 이야기는 황진이의 이야기 중에서도 묘한 긴장을 자아내는 부분입니다. 화담이 이곳 박연 폭포 가에 기거를 했다지요. 그 화담을 유혹하기 위해 황진이는 찾아왔더라구요. 송혜교가 주연한 황진이 제작팀이 개성에서, 박연에서의 촬영을 실현하기 위해 북측과 협의하다가 좌절, 금강산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박연폭포에서 촬영을 했더라면 꽤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살아나더군요. 폭포 앞에서. 10여분 위쪽으로 계단 타고 올라가니 폭포수의 공급처인 작은 연못 박연이 나타납니다. 가는 길 꼭대기 북문을 거쳤습니다.

 

서양사람들도 관광객 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친다는 이도, 오바마를 지지한다는 베트남 참전군인도 있었구요. 프랑스말을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점심은 개성의 민속촌, 시간을 이기고 남아 있는 옛집 마을에서 먹었습니다. 그 유명한 개성음식을 맛보리라 기대하였으나 이건 북쪽 식량사정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사치란 걸 음식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놋그릇에 담긴 몇첩 반상인가는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2달러 주면 내오는 냉면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저 유명한 개성 보쌈김치는 물론 맛볼 수 없었습니다.

 

헌데, 얼마전 이 마을의 한 집에 사시다 피난을 떠났던 할머니 한 분이 이곳을 방문하셨답니다. 저 집이 우리 살던 집이라던 그 할머니는 여든일곱인가 되셨더라구요. 집의 형태가 거의 변치 않았다고 하시더라는 것이 우리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씀.

 

 민속거리를 걷다. 개울에 물은 적어도, 그 물이 유리알처럼 맑다.

 

개성에서 남북의 역사공유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지는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깊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지요. 이 관광프로그램은 박연폭포 다음으로 선죽교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아주 작은 돌다리입니다.  정몽주는 이방원의 집을 방문,-목적은 병문안입니다. 방원인가 이성계인가가 칭병을 하고 누워 있었다던가요- 뜻밖의 역성혁명 제안을 <단심가>로 거절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그는 길, 선지교에서 방원 일파의 절퇴에 맞아 죽습니다. 그의 집은 선지교에서 한 고개 넘으면 있습니다. 관광코스에는 그 집터에 후세 조선조 유림들이 지은 숭양서원도 들어 있습니다.

 

 숭양서원을 올려다 보다(위). 서원 위 사당에서 내려다 본 숭양서원(아래).

 

자, 그가 흘린 피자국에서 올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솟았더라지요. 그래서 선지교 이름이 대나무 죽가 들어간 선죽교로 바뀌었구요. 그리고 그가 흘린 피는 돌다리에 붉게 남았구요. 이것이 우리들이 듣고 들어온 정몽주와 선죽교 이야기입니다. 고려의 옛 수도 개성에는 그 이야기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겁니다. 남쪽에서 간 사람들은 오랜동안 즐겨 듣던 황진이와 정몽주의 이야기를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거구요. 선죽교 돌다리엔 아련하게 붉은 자죽에 남아 있습니다. 돌의 성분이 그곳만 달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그 희미한 자국을 전설의 흔적으로 간직해온 겁니다.

(훗날, 그러니까 1780년 정조 4년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조선조의 개성유수로 이곳에 부임해 옵니다. 헌데 사람들과 우수마발이 조상의 핏자국을 밟고 지나는 걸 보고, 다리에 난간을 둘러 통행을 막습니다. 그 옆에 돌다리를 새로 놓아 사람들이 건너게 했구요.)

 

 돌다리에서 전설 속 정몽주의 핏자국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남쪽 손님들.

 

 아련하고도 아련한 붉은 자국은 정말 정몽주의 혈흔이었을까, 변성된 돌의 조화였을까.

 

분단의 길이가 참으로 짧지 않건만, 우리가 공유해온 역사는 그보다 더 길다는 게 우연히 돌아보니 다시 확인되는 개성 길. 그러나 분단을 다시 이으려면 무지무지 어려운 고비를 지나야 하겠지요.

 

선죽교 맞은 편에는 정몽주의 절개를 기리는 표충비가 있습니다. 1740년, 영조 16년에 왕이 쓴 포충비와 1872년 고종이 쓴 글싸로 된 표충비가 함께 있습니다. 조선조의 개국에 반대하던 고려의 사람을 건국 초기 집권층은 철저하게 부정하지요. 하지만 조선도 역사가 길어지니 권력자들은 고려라는 정몽주의 국적은 지우고, 그의 충절만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충성하는 것은 미덕이다, 그러니 지금의 왕에게 충성하라, 이것이 표충비의 정신입니다. 하 하.

 

 선죽교 건너편의 표충비가 서있는 사당이 있다. 비문을 이고 선 거북의 콧등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 이루어진다나.  

 

 

국자감으로 시작된 고려조의 대학, 성균관은 고려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마당의 은행나무가 장관입니다.

소중한 유물들이 항온항습 장치도 없이, 뭐 북에서야 걱정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보안경보장치도 없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남쪽에서 간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아침 온 길은 되짚어 옵니다. 옛 이야기에서 깨어나, 현실의 경계선을 넘어 다시 일상에 안착합니다. 하루 길입니다. 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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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3.13 10:57

    첫댓글 벌써 옛일이 되었네요.

  • 11.03.13 12:00

    사진을보니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네요.
    저도 3~4년 전에 다녀 왔어요.
    카메라의 검열이심해 지루했던 기억도 나네요.

    사모님!~ 팔은 다 나으셨는지요.
    설명까지 꼼꼼히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건강하세요.

  • 작성자 11.03.14 16:34

    네. 운동해서 천천히 회복시킬 일만 남았어요. 개성 다녀오셨군요. 송영자 회장님 쫓아 갔는데, 그 뒤로 개성길이 막히더군요. 회장님들 예쁜 사진도 있었는데 파일들이 날아가 버렸어요. 아쉽고 아쉬워라.

  • 11.03.15 06:29

    좋은 기행문 ~~~추억에 젓어 있어게네요.

  • 11.03.17 21:41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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