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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이기호 · 정이현 · 박민규 · 김애란,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 『문학동네』, 2007 여름호.
신형철 귀한 시간 내주신 네 분께 감사드립니다. 2000년대 문학의 주역들로 평가받는 네 분을 모시고 한국소설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몇 가지 테마를 준비해오기는 했습니다만 자유롭게 진행하겠습니다. 딱딱한 좌담이 아니라 부드러운 방담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세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방담이 한국소설의 애독자들을 위한 흥미로운 서비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둘째로, 작가론의 좌표가 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평단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작가들의 육성 응답을 듣는 자리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겠습니다.
1. 한국소설, 정말 위기인가?
신형철 지루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한국소설이 위기라고들 합니다. 최근 위기를 말하는 분들은 사실상 '시장에서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팔리지를 않는다. 일본소설에 밀리고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소설이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런 지적은 더러 악순환 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대개는 최근 한국소설을 읽지 않고 말합니다. 왜 읽지 않느냐고 물으면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에 읽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순환논법입니다. 한국소설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기보다는 한국소설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 팔리면 그만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무책임한 주례사 비평 때문에 독자들이 환멸을 느낀 결과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비평의 영향으로 책을 선택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거니와, '주례사'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위험성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주례사가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이 말은 어떤 경우 문학적인 판단을 정치적인 판단으로 환원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비평가각 특정 작품을 자신의 문학적 기준에 의거하여 옹호하면, 또다른 문학적 기준을 근거로 그 주장에 반박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 문학적 판단 배후에 모종의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고 단정합니다. 나의 판단은 공평무사하지만 당신의 판단은 삿된 것이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이상한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회피가 되고, 응하면 그 순간 자동적으로 악역을 맡게 됩니다.
아무튼 저는 '판매량'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위기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정립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판매량이 중요하다고 쳐도,, 네 분은 이런 측면에서도 행복한 예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론가들에게서도 상찬을 받앗고 독자들의 사랑도 받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니, 도대체 위기라는 것을 실감하고 계시기는 합니까? 가장 최근에 신간을 낸 분이 이기호씨니까 먼저 여쭙겠습니다. 시장에서의 반응은 어떠세요?
이기호 시장의 반응은 없죠. 반응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신형철 동료 작가분들과 '한국소설의 위기'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기도 하십니까?
이기호 별로 안 하죠. 원래 위기인줄 알고 있고 내가 내 스스로 위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그런게 참 웃긴 것 같어. 우리들은 늘 위기를 먹고 사는 것 같고…… 예전에도 계속 위기 아니었나? 1890년대, 이럴 때도 도스토옙스키니 이런 사람들도 문학이 위기다 하고 살았다는데……
신형철 흔히 하는 얘기로, 상업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90년대 중반이 한국소설의 '가까운' 전성기였다고, 그때 독자의 반응이 뜨거웠다고들 하더군요. 지금은 당시 판매량의 절반도 안 된다고.
이기호 근데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들의 엄살인 것 같아요. 뻔히 알고 들어왔고, 누가 작가가 돼서 우리 생계를 책임져라 하면서 등 떠미는 사람도 없었고. 다들 뻔히 알고 들어온 건데 우리가 뭐…… 다들 살 만하던데……(일동 웃음)
박민규 제 느낌만 얘기 하겠습니다. 우선 묻겠는데 '한국문학'이 뭐죠? 한국인이 한글로 썼으니까 한국문학인가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문학'이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왜 한국문학이에요? 유럽에서, 또 미국에서 , 그리고 일본을 거쳐 들어온 문학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문학'이란 환상을 가지게 된 건 해방 후 80,90년대까지 이곳의 문학이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출은 말할 것도 없고 정확한 경로의 수입도 없었죠. 백년 전에 쓰인 고전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오로지 내수와 밀수만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쓴 글 우리가 읽고, 와 좋다 우리가 평가하고…… 극소수가 밀수를 통해 영향을 받고…… 다시 내수로 돌리고…… 말하자면 이곳은 우물이었습니다. '한국소설의 위기' 하니까 마치 '로마제국의 위기' 같은 느낌인데요, 개폼 잡지 마세요. 실은, 한국문학은 단 한 번도 번성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시작이에요. 이제 겨우 습작기에 들어간 겁니다. 반만 년 역사 반만 년 역사 하면서 마치 반만 년 동안 소설을 써온 것처럼 위기 위기 하는데…… 잘 아시듯 그건 이미 단절되었습니다. 실은, 이제 우리 고작 육십 년 쓴 거예요. 우리 백 년은 더 써야 합니다. 판매를 말씀하시는데 80,90년대 우리 소설 많이 팔렸죠. 한국 안에서, 한국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수입이 없었습니다. 과거 우리 쌀 우리 농산물 우리가 다 사먹었듯 말이죠. 지금과 같은 수입이 있었다면 장담컨대 그때도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문학의 진도가 실은, 아직 여기까지인 것입니다. 현실에 왜 자꾸 턱없는 환상을 갖다씌우는지 모르겠습니다. 개뿔 자존심이 있어선가요? 그건 콤플렉스죠. 저는 이런 현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왜? 지난 수십 년간 우리 문학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렇게 발전하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언젠가 정말 '한국문학'이 단어 자체로 성립되는 날이 오겠죠. 명사 하나 완성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벨상 탄다고 해서 '한국문학' 성립되는 거 아닙니다. 장한나가 최고 권위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탔다고 클래식이 한국음악이 되나요? 그건 위상의 문제일 뿐이죠. 정말로 '한국문학'이 성립되려면 이곳에서 새로운 장르가 나와야 합니다. 음악으로 치면 레게라든지, 재즈라든지…… 그런 이곳 태생의 장르 말입니다. 즉 위기란 얘기는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일본소설 얘길 하셨는데, 지금 일본소설이 그만큼 많이 팔리는 이유는 일본문학이 그만큼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우수성 그딴 걸 논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 우리보다 훨씬 오랫동안 썼습니다. 훨씬 더 오래, 더 많이, 쌓고 쌓은 것입니다. 그걸 왜 인정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절대 기현상이 아니에요. 역사와 진도의 자연스런 결과죠. 그리고 우리도 쌓아가고 있습니다. 수입, 내수의 대립구도로 자꾸만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그건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죠. 누구나 아는,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해외경쟁력이 없다면 망하는 거고…… 경제란 잔혹한 것이니까요. 세계화에 이 정도 출혈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면 차라리 돌고래에게 문단을 맡기세요. 거 참 안일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신형철 그런데 소설 일반 혹은 문학 일반이 아니라 '한국소설'과 '한국문학'을 말하는 이들의 심리에는 소설이란 모르지기 지금-여기의 현실과 밀착해야 한다는 신념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요. 한국소설은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소설 일반 혹은 문학 일반이 되어버리면 그때 소설과 현실의 관계가 끊어져도 좋다는 식이 되어버리니까 그건 문제다, 라는 판단이 거기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박민규 그런 문제가 제기됐었나요? 제 느낌엔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아마도 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은 분들이고, 지금…… 외로울 것입니다. 왜? 순수와 참여의 논쟁만 존재했던 시기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성질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갭에서 오는 외로움…… 저 역시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화살을 쏜 것일까요? 화살을 왜, 쏴야만 했을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촌스럽고 미성숙한 풍토에 있습니다. 기존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싶으면 거기다 무작정 '새로움'이란 단어를 부과합니다. 아, 물론 책을 팔아야겠죠. 좋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이후의 풍토입니다. 리얼리즘이 어느새 올드한 것으로 전락해버린 이곳의 풍경이란 거죠. 기존의 한국소설, 한국문학을 젊은 세대들이 올드하게 느낀다 하는데…… 올드해서가 아닙니다. 실은 어려서 그런 거예요. 왜? 우리의 진도가 여기까지인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어요. 모더니즘에서 몇몇 개인의 성취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이제 리얼리즘 하나 가진 거죠. 음악으로 치면 클래식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SF가 있나요, 추리소설이 있나요, 공포소설이 있나요, 판타지가 있나요. 즉 록도 블루스도 재즈도 힙합도 없는 거예요. 재즈가 있다고 해서 클래식이 진부해지나요? 사실과 환상은 문학이 가진 두 개의 유전자 줄기입니다. 어떤 게 새롭고 어떤 게 진부한 게 아니란 거죠. 이제 없었던 줄기가 돋아나고 더욱 풍성해져야죠. 그런 나무가 되어야죠. 정말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선 그런 풍토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싹이 돋아나면 그것을 키우면서도 기존의 줄기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 싹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마찬가지 줄기의 성숙과 노화를 음미하는 것. 그게 안 되니까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진도가 더 나가야죠. 그래서 클래식도 있고 메탈도 있고…… 클래식 평론가가 클래식을 평론하고, 헤비메탈 평론가가 헤비메탈을 평론하고…… 그래야겠죠. 클래식 평론가로부터 평론을 당한 힙합 싱어의 심정은 어떤걸까YO? 말하자면 서로가 참 머쓱한 풍경이란 얘기죠. 한국소설이 한국의 현실을 떠난다?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클래식을 하건 힙합을 하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요. 그리고 중요한 건 떠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떠나봐야 또다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죠. 원, 별 걱정을 다 한다는 생각이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요, 이 외로움의 문제는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인지 어떤지…… 그래도 외로우시면 이제 힘든 일은 돌고래들에게 맡기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기호 이 좌담이라든지 페이지 분량으로 봤을 때 박민규 형이 잘 해주고 있어.(웃음)
신형철 근데 어쩐지 제가 꾸중을 듣고 있는 기분입니다.(웃음) 아무튼 재밌는 말씀입니다. 전성기가 지나 퇴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성숙의 상태다.
박민규 어린 거죠.
신형철 예. 그리고 책이 팔리는가 안 팔리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의 구조적인 기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소설의 성숙 여부와는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네요.
박민규 그런데 저는 책이 굉장히 많이 팔린다고 생각하거든요.
신형철 땅덩어리에 비해서?
박민규 그럼요. 저는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문학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이기호 그런데 박민규 형 말을 들으니까 의문이 들었던 게 70년대, 80년대는 사람들이 사는 게 강퍅했잖아. 근데 오히려 그때 당시에 문학적 수요가 많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박민규 그렇죠.
이기호 그럼 그때 당시에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문학이 책,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문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FTA가 된 거라니까.(일동 웃음)
박민규 잘 된 거예요.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70년대, 80년대는…… 전 70년대가 정말 황금기였다고 생각해요. 왜? 순수와 정신을 믿었거든요. 이데올로기가 있던 시대였잖아요. 지금은 이데아 자체를 믿지 않아요. 이데올로기 자체를 아무도…… 왜? 다들 먹고사는 문제였구나 하는 인식을 전체적으로 하게 된 거죠. 정치건 예술이건 뭐건 간에…… 그리고 바로 세계화가 닥쳤습니다. 교묘한 문제죠. 앞으로의 문제는 한국문학의 위기, 이딴 개똥같은 걸 고민할 게 아니고 그런 걸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적인, 정신적인 명제를 다시 찾아 그걸 문학으로 던져주는 것, 그런 새로운 명제가 나온다면 한국문학은 또다른 각도에서 정말이지 성립되는 거죠. 왜? 수백년 동안 해온 유럽도, 저렇게 부유한 미국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이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 했거든요. 그 명제를 찾는다면…… 사람들은 그걸 갈구할 수밖에 없죠. 실은 그 명제를 찾는 일이 중요한 거죠.
정이현 문학의 위기를 진단할 때 다양성의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문학이 다양하지 않거나 작가들이 다들 똑같은 얘기만 쓰고 있다면, 분명 위기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문단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 작가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모색들을 하고 있어요.
일본소설에 대처하는 한국 작가의 자세에 대하여 요즘 부쩍 여러 군데에서 질문을 하십니다. 일본 작가들에게는 아무도 한국소설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웃음) 글쎄요. 사실 요즘 한국의 도서시장에서 일본소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 중에는,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일본소설을 출간하는 풍토 탓도 있는 것 같아요. 국내에 조금 알려진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 대해 경쟁적으로 판권 확보에 나서는 경우가 없지 않고요.그만큼 많이 나오니까 우리 독자들은 또 그만큼 선택을 하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소설 붐은 일정 부분 거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다양한 좋은 소설들이 호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스타 작가들이 시장을 이끌고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에쿠니 가오리 등의 경우, 그녀가 일본 작가이기 때문에 우리 젊은 독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국적에 관계없이 그 작가가 표현하는 어떤 감수성에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이 매료되는 거죠.
독자 입장에서 말한다면 저는 실시간으로 번역되는 일본소설뿐 아니라 제 3세계의 소설들이 국내에 좀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트남이나 우크라이나 문학은 어떨지 궁금하고, 터키에는 오르한 파묵 말고 어떤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거든요. 작가로서, 현재 세계 각국에서 소설을 생산해내고 있는 분들에게 다 동료의식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여기 한국에서, 다른 곳에 있는 당대의 작가들과 함께 세계문학사를 쌓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우리 소설들도 어서 더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되어 그곳의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고요. 여러모로 문학에서 국경에 대한 인식이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신형철 박민규, 정이현 두 분 말씀에 공통점이 있네요. 문학의 국적이랄까, '한국문학'이라는 범주 같은 것들은 무의미하다?
정이현 무의미하다기보다는 범주의 폭이 넓어져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기호 위기라는 말을 하는 건 작가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평론가가 이기호 소설의 위기다 하면 이기호 소설의 위기가 아니고 카테고리 하나로 몰아. 반민규 소설의 위기다 하면 박민규 소설의 위기가 아니고 한국문학의 위기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하나의 작은 것들을 크게 만드는 것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아요.
결국 나도 같은 입장이에요. 이번 소설 같은 것들도…… 작가에겐 여권은 있지만 세계관의 국경은 없지. 없는 게 당연하고. 거품이지 뭐.
김애란 저는 지금 선배님들이 얘기하는 걸 '듣고'있기도 하지만, '보고'도 있잖아요. 주위가 다 통유리고. 그런데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바람이 막 불고, 저기 나무가 흔들리고, 파주의 4월은 왜 이렇게 을씨년스러운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게도 그런 말들은 하나의 소문처럼 느껴지는데요. 대부분의 소문은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그 두려움을 매우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고요. 내가 뭐가 되고 싶으면 우선 그걸 말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정리한 뒤 얻으려고 하는 것, 안도하고 싶어하는 게 뭘까 눈을 가늘게 뜨게 돼요.
일본문학에 대해 가끔 그림자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보통 그림자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사물의 뒤에 생기는데, 일본문학은 이상하게 한국이라는 대상의 앞면에 생기는 그림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실루엣이 묘하게 남한 땅과 닮아 있는. 그걸 비추는 태양이 근대든 아니든. 어쨌든 우리가 밟고 있는 역사적인 과정을 반 박자, 한 박자 먼저 겪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떤 감수성을 요구할 때, 그걸을 먼저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요. 단순한 한일의 구분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고,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위기라는 말에 상품성도 큰 기준이 되는 것 같은데, 다른 태도까지 혐의를 둔다면, 적어도 진정성에 대해서는 동료, 선배 작가들이 떳떳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형철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평론가들이 위기라고 할 때 그건 한국 독자들이 한국소설을 안 읽는 것이 위기라는 뜻인데, 그것이 왜 위기냐하면, 어느 나라 소설을 읽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한국 독자는 한국소설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현실은 한국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문학이 현실과 유리되지 않으면서 과거에 문학이 했던 역할들, 선도적인 기능들, 계몽적인 기능들, 이런 것들을 계속 살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들이 한국소설을 안 읽으면 문학의 역할이 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을 깔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네 분께서는, 물론 그런 점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한국소설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이를테면 '성장'을 하는 과정이다, 라는 측면에 더 주목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남습니다. 한국소설은 그냥 훌륭한 소설이면 되는 건가, 아니면 훌륭한 한국소설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 말이지요. '한국소설'이라는 자의식을 놓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반문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정이현 모국어에 대한 자의식, 물론 있지요. 그러나 한국소설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다니는 한국적 현실이라는 말이 명확히 어떤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한국적 현실이란 것이 하나이거나 단층적인 건 아닐 텐데요. 어떤 시각에서 보는지, 명명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에 따라 그 현실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이 가변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현실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한국적 현실이란 실체가 여기 이렇게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하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이기호 그건 있는 것 같아요. 분명히 일본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문화적으로 지체가 없는 거죠. 아까 애란씨가 얘기한 것처럼 사실 제가 우리나라 작가들에 대해서 답답하게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문화라는 게 사회적 현상보다 반 발짝 정도 앞서 나가서 먼저 보는 견자적인 시선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아니면 당대성과 싸워야 하는 문제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자꾸…… 예전 작가들일 수도 있고 저일 경우도 있는데, 그걸 자꾸 뒤돌아보다는 거죠. 예전 얘기들을 하고. 그게 편하고 쉽게 먹히니까. 근데 일본소설에서는 분명히 그건 없는 것 같아요. 아주 현장감이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문학적 자상일 수도 있고 문학적 왜소화의 문제도 있는데, 작가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들은 사실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당대와 발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뭔가 뒤처져 있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어요. 그리고 그 뒤처져 있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히고 있다는 것.(웃음) 뭔가 한 발짝 앞서 나가면 '저 새끼 뭘까?'
박민규 일본소설을 지금 한국에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왜?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방된 후 지금까지 지구의 어떤 나라가 아닌, 일본을 샘플로 발전하고 쫓아온 나라예요. 현재 지구 위 160여 개국 가운데 이런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나라는 내가 알기론 일본과 한국밖에 없어요. 국민 대다수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이렇게 미친듯이 일하고, 이렇게 서로 경쟁하면서…… 그러니까 일본사회는 한국사회와 가장 닮아 있는 사회죠. 그러면서 진도가 우리보다 앞서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아까 김애란씨가 말했듯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기간의 어느 정도를 이미 살고 나온 소설이죠. 게다가 글을 쓴 역사가, 또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풍부해요.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누차 말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진도가 아직 못 미친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커다란 착각이 있어요. 진도가 늦은 이 콤플렉스를…… 콤플렉스도 실은 대단한 에너지고 자산이거든요. 그런데 이걸 자꾸 다른 걸로 덮으려는 게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뭘 전수해주고…… 마치 우리가 문명의 종주국인 양…… 아아, 물론 잦은 자위 끝에 섹스도 있는 거 겠지만…… 아무튼 자위…… 너무 오래 했잖아요. 너무 오래 하면…… 안 좋아요. 자꾸 만지면서 흥 쟤들은 가볍잖아? 하지만 우리에겐 묵직한 현실이 있어…… 그리고 크리넥스를 뽑는 일 이제 추해요, 그만 해요. 예, 일본문학은 확실히 앞서 있어요. 그러면 일본이 그 정도면 유럽은 어떻겠냐고요? 또 미국은…… 그 콤플렉스가…… 하지만 저는 그래서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게. 왜? 여기는 언더그라운드잖아요. 그렇게들 떠드는 '한국문학' 자체가 이 지구의 변방의 변방, 언더그라운드라는 거죠. 그리고 시작부터가 수입이었고 짬뽕이었어요. 멜팅 팟이죠. 수입은 계속되고 앞으로도 우린 이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실은, 그래서 정말 새로운 게 나올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없고 뭐든 할 수 있다…… 작가로서 이렇게 가슴 뛰는 나라가 어딨겠어요?
신형철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 정이현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적 현실이라는 것이 마치 자명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한 다음 작가들에게 그것을 그려야 한다고 주문하는 식의 논법은 확실히 수상쩍은 데가 있습니다. 한국적 현실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유를 작가에게 떠넘기는 듯 보일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소설의 위기의 이면은 비평의 위기라고도 합니다만,적어도 이런 측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호 일리가 많은 것 같아……(일동 웃음)
2. 근대문학의 종언?
신형철 무슨 결론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다음 주제로 넘어가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적 현실의 반영을 강조하는 분들은 소위 '근대문학'이 담당했던 역할을 문학 일반의 본질적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곧 문학 자체의 종언이 되겠지요. 그 이후의 문학은 그저 무수한 '오락거리'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렇지만 이를테면 김애란씨 같은 경우는 등장하자마자 문학이 끝나버린 셈인데,(웃음) 이런 논의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나요?
김애란 지각이 없는 작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는가를 떠올려보면, '자, '문학'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출발하지도 않고요, '어디 '근대문학' 한번 써볼까?'라고 팔 걷지도 않고, 이게 어떤 문학이다 생각하며 쓰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이 이야기가 나한테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쓰고요. 그런 것들이 나중에 이름 붙여지겠지만, 지금 이 이야기가 하고 싶고, 또 필요하고, 그 필요가 다른 누군가와 만났을 때 그렇게 만나는 느낌이 좋고, 이 정도까지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신형철 문학의 역할을 너무 소박하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작가로서 너무 야심이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누가 반문하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김애란 예. 저는 제가 하는 작품들이 다 소박하다고 생각하고요. 소박하다 못해 보잘것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보잘것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
정이현 멋있다!
김애란 괜찮나요?(웃음)
정이현 문학이라는 것, 특히 소설이라는 건 사실 너무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요?
이기호 우리 어머니 말씀은 '저 더러운 놈의 직업……'
정이현 소설이란 참 자질구레한 작업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했던 일들이 모여서 하나의 꼴을 갖추어가는 과정이 늘 경이로워요…… 가라타니 고전의 이야기야 알고 있지만,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진의 말대로, 만약 근대문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문학은 끝났을지도 모르곘어요. 그러나 어쨌든 그 이후에 근대문학적인 문학이 아닌, 새로운 목소리를 가진 소설들이 현장에서는 계속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근대적인 게 과연 무얼까 궁금해집니다. 가끔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시간 속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곤 하는데요. 근대와 전근대와 탈근대, 과거 현재 미래가 저라는 사람의 내면에 마구 뒤섞여 혼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 서울을 살고 있는 저의 일상들 역시 그 여러 시간대가 뒤섞여 있고요.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저의 관심사는 그 뒤섞임에 관한 것입니다. 뒤섞여진 무늬들은 어떤 모양이고 어떤 색깔인가,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얼굴과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친구들, 그리고 내 독자들은 이곳에서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언제나 저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짬뽕 같은 현실을, 다른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제 눈으로 보고 제 방식으로 읽어내는 작업, 문학적으로 치환하는 작업. 그게 제가 앞으로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입니다. 남들이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하든 끝나지 않았다고 하든, 제 실제 작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저는 어쨌든 제가 하던 일을 계속 할 사람이니까요. 다만 제 작업들을 새롭게 갱신해나가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민규 저는 가라탄인가……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그냥 사견을 말씀드리죠. 인류의 역사를 길게 본다면 결국 문학은 언젠가 사라질 거예요. 인간은 분명 어떤 필요에 의해 글자를 만들고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그 존재이유…… 저는 문학이 인간에게 있어 진화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 아마도 숫자였겠죠. 가장 먼저 필요했던 건 역시나 디지털이었습니다. 또 그림을 그리고…… 맨 마지막에 문자를 만들었어요. 숫자와 그림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그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그러니까 제일 늦게 나온 거죠. 제일 늦게 나온 거기 때문에 제일 먼저 사라질 거예요.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건 숫자, 특히나 0과 1의 이진법이겠죠. 문학이 사라진다는 건…… 그건 어마어마하게 황홀한 일이죠. 왜? 그건 문학이 필요 없어진 거니까…… 그런 시기가 온다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진화해 있을까요? 추측건대 텔레파시가 가능해졌다는 거죠. 텔레파시. 결국 그걸 못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는 거니까…… 마음을 이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마음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할 만큼 인간이 진화한다면 예술 같은 건 하지 않죠. 문학은 차차 풍성해지고 그럼으로서 차차 간편해지고…… 흡수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말이죠.
정이현 읽기는 했는데 그러나……
이기호 그거 아니겠어요? 이거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얘기가 나와서 우리 사회에 삼사 년 동안 계속 쇼크를 계속 주고 있는 이유는 한국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일본 작가가 얘기한 것 때문인데, 그런데 나는 그것 또한 비평의 위대함이라고 봐요. 왜 그렇게밖에 안 읽히냐면 문학에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사실은 오락적인 기능도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지. 유희기능. 그건 비평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비평도 재미있을 때가 있거든. 문체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유희적인데, 문학이 오락적인 길로 간다면 제일 먼저 위기를 겪는 사람들은 비평가들이죠. 어떤 문학이 사회적인 대전제의 문제들에 언급하고 이야기해줘야지 평론가들이 그것에 대해서 해석해줄 부분들이 있는데 이젠 오락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거든. 그러니까 비평가들은 문학이 오락으로 가지 않도록 열심히 붙잡아줘야 하는데, 작가들은 자꾸만 오락으로 가려고 하거든.(웃음) 나는 우리나라 문학이 사실은 그 동안…… 이건 진지성도 아냐. 말도 안 되는 엄숙주의에 빠져 있어서…… 난 내 소설이 굉장히 진지하게 나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 경박하다'고 하는 거야.(웃음) 난 사실은 그게 웃겨. 그런 것들에 대해서 무슨 호들갑 같은……
신형철 문학이 오락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평가인 건 맞습니다. 자기가 인생을 걸고 하는 일이 문학작품을 읽는 일인데, 작가들이 '에이 이건 그냥 오락이에요'하면 허망해질 수밖에요. 월터 카우프만이라는 철학교수가 하는 말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독파한 사람은 결국 헤겔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읽은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소시라고 믿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만 사유한다는 겁니다. 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어떤 비평가들은 그렇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정이현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근대적 현실에 착복하는 문학을 뜻한다기보다는, 문학이 역사 혹은 정치와 결합해서 진보의 동력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는 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문학의 '근대적' 위상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종언'이라는 말도 박민규씨가 말씀하신 맥락, 그러니까 문자매체의 생명력이 소멸한다는 그런 취지라기보다는 아까 말씀드린 그런 역사적 · 정치적 기능의 '종언'을 뜻한다는 점을 부기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혹자는 문학이 근대에 수행했던 기능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오락이면 어떠냐고 하는 분들은(물론 오락적이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실 테고) 문학에는 다른 여러 가지 기능들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기능들의 경중을 논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말 나온 김에 여쭤보겠습니다. 도대체 지금 소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기능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문학, 어디로 갈 것인가' 정도의 질문입니다.
박민규 한국문학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어요.
신형철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로 바꿔 여쭙겟습니다.
박민규 더더욱 관심이 없는데요.
정이현 음, 좋은 오락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오락에 몰두하는 순간에 잠깐 현실을 잊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오락 안에서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오락 안에서도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잖아요. 저는 한국사회가 정치적 역사적 현실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물론 전 시대의 대전제는 희미해지거나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정치라는 말, 역사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하고 있진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의 일상 속에 잠복되어 있는 정치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족 같은 개인적 공간이나 평범한 일상 속에 배어 있는 권력관계와 위계질서들…… 지금 이 대담에서도 김애란씨가 제일 후배라서 제일 나중에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웃음)
김애란 늦게 말하는 게 유리해서 그런 거지요.
이기호 학생들에게 소설을 읽혀보면 참 독특한 게 있어요. 80년대 소설이나 70년대 소설을 읽혀보면 아이들의 독법이나 해석의 방향이 아주 일정해요. 그렇게 단일한 코드로 나오는데, 지금 박민규 형이나 애란씨나 이현씨 걸 읽혀보면 어떤 친구들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또 어떤 친구들은 그 안에서 너무너무 커다란 정치성을 읽어내고…… 독법 자체들이 굉장히 다양해졌어요. 뭐랄까, 이건 독자들의 의식이 많이 자라났다는 얘기가 도리 수도 있고 또 그만큼 작가들의 코드 자체가 단일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매우 복잡다단해지고 넓어졌다는 얘기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게 굉장히 좋게 읽혔어요.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오락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커다란 정치구호가 되고. 아주 좋게 읽어서 이대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아까 민규 형이 얘기했듯이 우리나라 아이들은 집과 학교를 쳇바퀴 돌고 있잖아요? 그래도 희망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래도 얘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더라고. 인터넷으로든 밖으로든…… 우리 때 누가 터키를 갔다 왔나? 터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 근데 지금 애들은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보다는 감각 자체가 우리와는 굉장히 판이한 감각, 감수성들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세계사적이고 어떻게 보면 넓은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봐요. 좀더 다양해진다는 것, 지금 우리 또래의 작가들만 해도 90년대 소설, 혹은 80년대 소설의 카테고리로 묶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분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좀더 분화됐으면 좋겠어요.
정이현 애란씨가 80년생이죠? 요즈음 소설 담론에서 김애란씨가 '80년대생적 감수성'의 어떤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애란 그렇게 불편한 건 아니고요. 스스로 그런 말에 대해 감탄해서도 또 반대로 불평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냥 담담하게 '몇년대생'작가가 아니라 '작가'라는 단어에 더 방점을 두려고 해요.
신형철 네 분의 말씀이 서로 만나는 대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언은 곧 진화의 시작이다, 정도로 요약해도 좋겠습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문학의 미래에 '낙관적'이라는 말이 문학의 현재에 '긍정적'이라는 말과 같은 말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정이현씨께서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2000년대 문학은 정치를 잊은 적이 없다는 것, 다만 일상의 영역에서 정치를 탐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저 역시 그 점은 폄하해서는 안 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작가들이 그에 대해 자의식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하곤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작가들의 '의식적' 노력 여부와는 무관하게, 좋은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어떤 미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낙관적이라는 것이죠.
3. 2000년대 문학은 존재하는가?
신형철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서 주로 법정에 끌려나오는 것은 소위 '2000년대 문학'입니다. 여기 나와 계신 네 분이 아마도 그 직접적인 대상이 되겠지요. '한국문학의 보람'이라는 얘기도 들으시고 '뒤로 가는 소설들'이라는 얘기도 들으시니 좀 얼떨떨하시겠습니다만.(웃음) 당사자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2000년대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2000년대 문학이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과 '2000년대적인 것'이 구별된다는 게 전제돼야 할 텐데, 구별이 된다고 보시는지, 된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평론가들은 흔히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컨대 2000년대 6월 15일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잖아요? 그 사건이 2000년대 문학의 어떤 무의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분들은 6·15시대라는 말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이기호 한기욱 선생님인가?
신형철 네. 남북정상이 38선을 넘어 만난 것은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었죠.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나는 소위 '경계 넘기'의 상상력을 그 사건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독법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경계'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확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그리고 또 한 가지 시각은 2000년대 문학의 스타트라인이 1997년의 환란 부근에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6·15시대의 문학' 운운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포스트 IMF 시대의 문학'이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지요. 왜소하고 무력한 인물들, 상상이나 공상으로 현실을 처리 혹은 극복하려는 태도, 망상의 내러티브(편집증적 상상력이라고도 부릅니다만) 등을 IMF 이후 한국사회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지요.
세번째로는 2000년대 문학의 공간이 일종의 '무중력 공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논란을 낳은 시각이었지요. 저는 이 말을 2000년대 문학이 채택하고 있는 어떤 '기법'에 대한 명명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작품 속의 현실을 무중력 공간으로 '설정'하는 그 기법의 의미를 묻는 명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현실의 인력을 받지 않는 문학이 어디 있느냐는 당위론을 내밀거나, 작품에 재현된 현실의 조각들을 수습해서 '여기에도 현실이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은 너무 소박합니다. 현실에 무관심한 작가가 어디 잇을 것이며 현실의 편린이 박혀 있지 않은 작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핵심은 마치 무중력 공간에서 유영하는 듯 '쓰는' 작가들의 미학적 자의식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겠지요.
대체로 이런 관점들하에서 2000년대 문학들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동일한 이유를 놓고 한쪽에서는 그래서 새롭고 좋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들을 하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6·15나 IMF 같은 것들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정이현 6·15랑 IMF는 다르지 않나요.
신형철 네, 그렇죠. 이런 논의들에 대해 박민규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민규 저는 문예지를 안 읽어요. 그러니까…… 그런 논쟁이 있었군요. 그 속에 제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문제는 평론의 문제겠죠. 아주 가깝다고들 생각하는데 저는 평론이 창작과는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얘길 해도 좋아요. 나도 꼴리는 대로 쓰는 거니까. 한 가지 궁금한 건 2000년대 문학이란 게 뭐죠? 2000년 1월 1일부터 씌어진 문학인가?(일동 웃음) 그렇다면 1999년 12월 31일에 발표한 문학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앞서 '한국문학'이란 허상에 대해 얘기한 것처럼 '2000년대 문학' 역시 하나의 허상일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거 만들면 재밌는지 어떤지…… 아무튼 전 그거와는 좀 다른 얘길 하고 싶어요. 논쟁은 좋은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고, 또 그런 역할을 하는 분들이 평론가들이고, 아주 중요한 거라 생각하는데…… 제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어떤 논란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해요. 생활하는 주변에서 그 누구도 그런 논쟁을 아는 이가 없고…… 그게 정말 중요한 논쟁이라면 뉴스에 나겠죠. 그것 참…… 문예지를 안 보면 알 수 없는 논쟁이라…… 그래서 수고가 많다는 느낌은 드는데 현실감은 없어요.
글쓰기에 관해서 제가 영향을 받는 케이스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저보다 글을 잘 쓰는 인간, 또 한 가지는 저보다 삶을 잘 사는 인간이에요. 그 두 가지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저보다 글을 잘 쓰는 인간, 그건 재능의 문제고…… 그 속에 평론가도 있습니다. 역시 재능의 문제죠. 그게 아니면 삶의 문젠데…… 까놓고 말해 지금 한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해서 먹고사는 인간으로부터 삶이니 문학관이니 세계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소릴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얘길 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실까요? 논의과정을 몰라 죄송합니다만…… 잔인한 현실이 좋아지길 기다리겠습니다. 결국엔 한국 인문학의 문제겠죠. 평론으로 먹고사는 평론가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평론도 발전하고 문학도 발전하겠죠. 다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분들이에요. 하루빨리 저 역시 진심으로 영향을 받고 싶습니다.
신형철 정리하면, 2000년대 문학 논쟁은 군대에서 하는 축구 같은 거로군요.(일동 웃음) 아까 정이현씨가 6·15와 IMF는 다르다고 하셨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정이현 저의 경우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IMF는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IMF 이전과 이후의 한국인들의 변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90년대 초반 이른바 거품시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갑자기 20대 중후반이 되면서 구제금융사태가 닥쳤지요. 갑자기 취직도 안 되고 유학 준비하던 친구는 꿈을 포기하고, 모든게 많이 변했어요. 눈앞에서 풍선껌이 뻥 터져버리는 장면을 보았다고 할까요. IMF의 경험 이후에 제 안에 설명 못 할 어떤 공포감이 생겼습니다. 저와 함께 이곳을 살아가는 저의 인물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담론들도 좋지만, 9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던 작가들이 2000년대에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생산하고 계시거든요. 그 개별 작가들, 개별 작품들에 대하여 세심하게 결을 따라 읽어주고. 작가와 작품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도 함께 읽어주는 평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지금이 2007년이니 2010년까지 삼 년 남은 셈이네요.(웃음)
이기호 그렇지. 우리는 살 만큼 살았는데, 김애란은 서른인데 그때 되면……(웃음)
정이현 그렇지만, 이런 논쟁은 한국문학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작가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주목할 만한 작품을 열심히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논쟁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작가 입장에서는, 평론이 지도하려 하기보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조금만 더 선입견 없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젊은 작가들이란 고작 책 두어 권 냈을 뿐, 아직도 계속 변화하고 있고 자기 세계를 찾아가는 길 위에 있는 이들이잖아요.
이기호 그게 평론가들의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게, 근대문학의 두 가지 요건, 제도와 시장이 있잖아요. 말하자면 대학과 출판사의 논린데, 사실 그거에 휘말리는 것 같아요. 어떤 흐름의 문제가 아니고 출판사의 시장의 논리, 혹은 출판사의 마케팅적 논리하에 자꾸만 세대론적 단절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 얼마 전에도 이제 스무 살 된 애들한테 김승옥 선생 걸 읽혔는데 열광하는 거야. 그것은 과연 60년대 문학인가? 그렇지는 않잖아……
김애란 그런 말들이 작가에게 특징을 부여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정짓게 만드는 것도 같아요. 다만 저는 고대 사람들이든 중세 사람들이든 내 앞세대 사람들이든 제 문학적, 철학적 선배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어요. 옛날 사람들이 하늘을 봤다면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건 천장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개인적인 자질보다 환경 자체가 난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고. 사실 2000년대에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곤궁한 일이에요? 늘 제 주머니가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옛날에는 저기 가 있었는데,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라고 계속 아쉬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고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가졌지? 난 왜 이것밖에 얘기할 수 없지?'가 아니라, 그게 비록 천장의 높이라 하더라도 '어디 그 높이에 한번 집중해보자'는 생각을 해요.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요.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기호 비슷한 시기에 어느 문예지에서 한국소설의 장편이 어떻게 돼야 하는가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는데요, 고민하다가 생각한 게 뭐냐면, 한국문학에 단편이 승하고 장편이 뒤지는 이유는 역시 대학 교육 때문이다, 조교의 힘이다. 사실은 딴 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사를 빨리 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야.(일동 웃음) 그건 명백한 일인데 만약 거기에서 복사를 안하고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면 장편이 금방 승할 수 있어. 조교들이 복사하기가 힘들지. 이거 나가면 어떡하지?
신형철 나가야죠. 한국소설이 단편 위주인 것은 조교들 때문이다.(웃음)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논쟁을 여기서 좀 진전시켜볼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군요.(일동 웃음)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공감합니다. 십 년 단위로 시기를 나누는 관행에 대해서 우려는 표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게 좀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까 박민규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작가의 일이 있고 비평가의 일이 있는 건데, 비평가들은 동일하게 꾸준히 지속되는 어떤 것보다는 작지만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을 주목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야 새로운 담론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의제가 생산되니까요.
그리고 아까 '지도'를 말씀하셨습니다만, 두 개의 지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도(指導)와 지도(地圖)가 있어요. 6·15시대를 말씀하시는 분들에게는 확실히 지도(指導)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통일시대를 위한 문학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갖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IMF를 얘기하고 무중력 공간을 얘기하는 분들은 맵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정이현 지도에 있는 길만 길이고 지도에 명명되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넓고 눈에 확 띄는 길은 당연히 지도에 그려넣지만, 숲 속의 오솔길 같은 것들, 소수만 아는 작지만 너무 아름다운 길은 지도에 그리지 않잖아요. 나중에 그 오솔길은 지도에 없으므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길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학의 본령은 어쩌면 오솔길을 발견하고 산책하는 일에 가깝지 않은가요?
신형철 근데 그게 어떤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도를 그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지도가 너무 크면 세부의 지형을 놓치게 되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런데 자꾸 지도를 그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판을 전체적으로 봐야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전체를 보는 눈과 개별 작가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눈을 함께 떠야 하는 건데, 후자는 생략하고 전자에만 몰두하니 더러 작가들의 비판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거 그러고 보니 다시 비평의 위기네요.(웃음)
4. 소설은 작업이다
신형철 네 분을 어렵게 한 자리에 모셨으니 이런 얘기 꼭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정이현은 김애란의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가, 뭐 이런 얘기 말입니다. 비평가들이 하는 얘기랑은 또 다르게 재밌는 감상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독자들은 이런 얘기를 좋아합니다.
정이현 작가들끼리는 서로 작품 얘기 잘 안 하지 않나요? 김애란 최고다! 이러면 부끄럽지 않을까요?(웃음)
김애란 그런 말 좋아하는데……(일동 웃음) 농담이에요.
신형철 이를테면 내가 볼 때는 저 작가의 이런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데 왜 비평가들이나 독자들은 거기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가 하는 것들 없으셨나요?
정이현 모르겠어요. 저는 제 것도 잘 따라 읽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정말 몰라서……(웃음)
신형철 당황스럽습니다.(웃음) 아까 박민규씨가 문예지를 잘 안 읽는다고 하셨는데 다른 작가의 작품도 잘 안 보시나요?
박민규 제가 문예지를 안 읽는 이유가…… 일단 아는 용어가 거의 없어요. 여기선 다들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같은데…… 뭐, 모르니까…… 하지만 희한한 게 이게 어떤 얘기를 하는 거구나는 알겠어요. 알긴 알겠는데 읽기는 싫어지죠. 그리고 몇 편 읽어보니까 이게 내가 가는 길과는 상관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단어 가지고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이기호 문예지가 오면 안 보세요?
박민규 안 봐요.
이기호 대단하다. 그럼 눈이 안 갈까요? 나는 소심해서……
김애란 나는 세 번도 읽는데……
박민규 아파트단지에 조그만 휴게실과 도서관이 있는데 거기 갖다줘요.
이기호 읽고 나서 갖다주는 건 모르겠는데 거기에 자기 이름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심정적으로도……
박민규 시는 읽어요…… 소설도 가끔은…… 그런데 그런 게 분명 있어요. 우선 칭찬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누가 나에 대해 뭐라 하고……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요. 늘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의 생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 그래요. 행여 누가 칭찬을 하면 '나한테 뭐 이용할 게 있나?'(일동 웃음) 그런 생각이 들고…… 또 일단은 제 주변의 친구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문학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웃음) 아직도 내가 작가란 거 모르는 주변인들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제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슨 거창한 게 아니에요. 우선은 내 와이프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어 열심히 써요. 불가사의한 남자로 보이고 싶어…… 그런 것 있잖아요. 결혼한 지 십 년 됐거든요.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데 남자라는 환상을 유지시키기도 쉬운 일이 아니고…… 어쨌거나 불가사의한 남자로 보이고 싶어…… 멋지게 보이려고…… 쓴 다음에 딱 보여주면서…… 그 에너지가 제일 커요.
신형철 주로 집에서 쓰세요?
박민규 집에서 쓰죠.
이기호 나는 내 아내가 내 소설을 너무 싫어해.
정이현 왜?
이기호 재미없대……
신형철 눈이 너무 높이시다.
이기호 아냐. 나는 그 친구만 통과하면 발표해도 되겠구나 그런 거야. 그 친구가 내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고 윤성희, 편혜영 이런 작가들만 좋아하니까. 질투나고 짜증이 나서…… 근데 나는 사람이 소심해서 그런지 조금만 뭐라 해도 욱하고……
신형철 쓴소리도 하고 그러시나 봐요?
이기호 그런 거 많아요. 그런 걸 많이 들어서 이제는 좀 면역이 된 것 같아. 그래서 그렇게 읽을 수도 있지 하는 게 된 것 같은데, 불과 이 년 전만 하더라도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이 사람이 왜 나를 미워하지?' 그거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렇게 되던데……
신형철 이기호 소설에 대한 방담부터 하죠. 서로들 말씀을 안 하시니까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정이현 이게 좋구먼.
신형철 장편 연재를 시작하셨죠? 『문예중앙』봄호에 1회가 나갔습니다. 제목이 '울보리 선생 말년 수난기'예요.
이기호 연재 좀 따라 읽지 말아요. 연재 따라 읽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신형철 춘원 이광수의 공식적인 사망연대와 비공식적인 사망연대에 차이가 있는데, 그 빈 공간에 주목해서 춘원의 말년을 재구성하는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근데 왜 하필 이광수인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의 표현대로 이광수는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같은 존재 아닙니까. 왜 하필 이 민감한 인물을?
이기호 다른 건 없고요. 우연히 헌책방에서 1962년에 나온 이광수 전집이 있어서 샀어요. 한 권도 안 빠지고 새 건데, 다른 데 비해서 되게 비싸게 샀더만. 그래서 그걸 읽었어요. 난 『무정』만 읽었는데, 다 읽었더니 이 양반이 웃기는 양반이더만. 그리고 인물 자체가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아.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고. 너무 정치적으로 보거나 역사적으로 보면 골 아픈데, 그 외적인 면들이 많은 인물인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쓴 거예요. 다른 건 없어요. 늘 우연히 다가오는 거죠. 그런 거죠 뭐. 스타트가 이러니 어떡해?(웃음)
신형철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문제적인 평론이 한 편 발표됐습니다. 심진경씨의 「뒤로 가는 소설들」말입니다. 뒤로 간다는 말이 좀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합니다만, 그 글의 요지는 다른 것이 아니고, 최근 소설들의 형식이 자유로워졌다는 것, 그래서 근대적 소설 장르 이전의 형태들로 돌아가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오랜 세월 동안 구축되어 완성된 근대소설의 문법들에 대해 충분히 숙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 글로 읽혔습니다. 이기호씨도 그 글에서 언급된 작가들 중 하나였죠. 비평가의 이런 평가가 작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칫 보수적인 비평 태도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제기가 나온 것은 이기호 소설에서 형식이 그만큼 도드라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부정적으로 말하면, 내용의 깊이가 형식의 화려함을 충분히 보상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이 거기에 깔려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좀 부담스러운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궁금한 걸 어쩝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기호 사실 몰랐는데 남들이 와서 "그랬대요" 하면서 얘기해주고……(웃음) 사실 크게 마음 쓰지 않아요. 형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내용이라는 것도 그렇고, 특별히 생각하지는 않아요. 일단은 내가 쓰면서 즐거워야 하니까요. 몸이 너무너무 힘든데 마음이라도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자꾸 형식적인 부분들이 건드려지는 면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형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난 소설 전체가 퇴고하면서 바뀌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을 갖고 뭐라고 하신다면 난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어요.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되나. 뭔 소시를 해야 되나…… 난 기본적으로 단편 소설이라는 게 좀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이미 목적은 주어졌고, 그 태도를 보는 거. 그게 전부라고 말이죠. 내용은 뭐 다 거기서 거기란 생각이 너무 깊게 박혀 있어서…… 무슨 말을 해야 돼?
신형철 정이현씨는 이기호 소설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정이현 이기호씨 소설은 일단 재미있지요. 2002년도였던가, 문예지에 제 소설과 앞뒤로 실렸던 「백미러 사나이」를 처음 읽었습니다.
이기호 아, 모던 걸 쓸 때?
정이현 그때만 해도 이기호라는 이름이 생소했어요. 그런데 소설이 무척 새로웠어요. 「백미러 사나이」의 문제의식처럼 저도 그 무렵 '뒤'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거든요. 아, 이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기호 정말 사람 앞에서 하니까…… 와~
김애란 민망해요.
신형철 다시 말하지만, 독자들은 이런 내용을 재밌어합니다.
이기호 평론가나 누군가가 나의 소설을 읽고 칭찬을 해줘도 할 말이 없어. 그리고 면도칼 같은 비판을 해주셔도 사실 할 말이 없어요.
정이현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이들은 이렇게 실험을 하고 있구나, 알게 되죠. 전범이라는 게 항상 멀리 있지 않고 당대에 늘…… 이기호씨 갑자기 당황하시면서 눈길을 피하시는데……(웃음) 평소 이 정도면 소설이 되겠다 혹은 안 되겠다는 기준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기호씨 소설은 그 기준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 경계를 무너뜨려가는 작업을 같은 시대 작가로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김애란 저는 이기호 선배님 소설을 읽으면 롤리팝(lollipop)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거든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하나는 막대사탕이고 두번째는 밀고자라는 뜻이래요. 그리고 축구 기술 중에 '헛다리짚기'라는 것도 롤리팝이라고 한대요. 상대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렇게 왔다갔다하는 다리의 움직임이요. 사실 축구가 지금처럼 자본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기 전에 축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롤리팝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 월드컵은 경제적, 정치적 목적이 있잖아요. 그런데 순수하게 축구를 즐겼던 시대의 아름다움은 롤리팝에 있었다는 생각이에요. 우리가 축구장에 가는 이유는, 골을 위해서가 아니라 롤리팝을 보기 위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요. 그런데 밀고자도 좋지 않나요?
선배님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얘기'를 많이 하셨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시는구나. 그리고 어떤 작품이든 그런 고민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게 헛다리짚기 하시지만 결국은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말씀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죄송해요, 선배님.
신형철 좋군요. 이런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기호 당사자는 밖에 나가 있어야 돼. 그래야 많은 얘기가 더 나와.
신형철 상투적인 질문 하나 나갑니다. 선배 작가들 중에서 모델로 삼고 있는 작가가 있으신지요?
이기호 없어요. 나는 요즘 장편 연재 시작하면서 소설도 안 읽어요. 난 귀가 얇고 마음도 엷고 그래서 뭔가 하나 읽고 경도될까봐 겁나 죽겠어요. 그래서 사실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어제도 이 좌담 준비한다고 박민규의 『핑퐁』을 들었는데 경도될까봐 못 읽겠더라구.
정이현 결국은 안 읽으셨다는……(웃음)
이기호 안 읽었어. 와이프는 다 읽고 나는 계속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어떻게 할 수가 없드만. 미안해.
신형철 정이현씨의 경우는 첫번째 작품집 이후에 발표된 단편이 거의 열한 편쯤 되죠?
정이현 이번에 작품집 묶으려고 헤아려보니 열다섯 편 가까이 되던데요.
신형철 『달콤한 나의 도시』를 연재하면서도 꾸준히 단편을 쓰신 거죠?
정이현 아니요. 장편 연재하는 동안에는 어려웠어요. 현실적으로 같이 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일일연재여서 다른 작업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형철 그러고 보니 일간지에 연재를 한 분은 여기서 정이현씨밖에 없네요. 그 연재라는 것이 매일 일정 분량을 쓰는 건가요?
정이현 매일 열 장씩 썼습니다. 일주일에 다섯 번 나가니까 오십 장인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저걸 어떻게 했는지 실감이 안 나지요. 일일연재를 몇 년씩 하는 분들은 어떻게 하실까? 저 같은 사람이 모르는 어떤 비법 같은 게 있으신가봐요.
신형철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등단 작품인데, 아시다시피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은희경의 초기 단편을 잇는 듯하면서도 더 세게 치고 나가는 부분이 있었지요. 은희경의 소설도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가차없이 해부했습니다만, 그건 일종의 배수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론적 해부 같은 거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더 과감했습니다. 결혼을 경제적 교환 논리로 철저하게 번역한 소설이었지요. 결혼시장소설 혹은 결혼전쟁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그 작품을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읽히면 남학생들은 더러 불쾌해합니다.
정이현 남학생 여학생 사이에 간혹 싸움이 나기도 한다지요.
신형철 여주인공이 얄밉다는 것이죠. 이기호씨는 어떻게 보셨어요?
이기호 나는 모든 소설을 작업의 차원으로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현씨 소설은 이상하게…… 원래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작업 거는 소설을 쓰는데 이현씨 소설은 여자들에게 작업 거는 소설이다. 약간 동성애적 느낌이 있는 거지.
정이현 재밌다. 새로운 발상이다.
이기호 아냐, 진짜로 그렇게 느꼈어요. 내가 애란씨 소설을 읽으면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이 양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작업을 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민규 형 소설을 읽을 때는 우주적 작업이구나……(일동 웃음) 나는 주로 작업을 당하려고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래서 애란씨 소설을 읽으면 그런 느낌이야. 정말 나를 소외시키는구나. 나는 화자가 중요하게 보이거든요. 화자의 성도 중요하게 봐요. 애란씨의 성 같은 경우는 사실은 매우 중성적이잖아.(웃음) 그래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내가 느끼기에는 결코 경쾌하거나 발랄하지도 않고 오히려…… 뭐랄까 그때 당시에 나도 아주 새롭게 읽었고 재밌게 읽혔어요. 내가 무지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도 없지 않아 있고. 감각의 새로움이지.
신형철 정이현 소설에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세태의 디테일이 있고, 생경하지 않은 방식으로 슬쩍 끼어드는 반성적 시각도 있습니다. 이 둘을 적절한 비율로 결합하는 명석한 자의식이 정이현 소설의 강점 같습니다. 제가 어딘가에서 은희경의 세례를 받은 세대의 박완서 같다는 건방진 소릴 한 적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자, 이제 제가 잠시 악역을 맡겠습니다. 어떤가 하면, 『달콤한 나의 도시』는 등단작의 도발성을 높이 평가했던 사람들에게 좀 착한 소설로 보이기도 합니다.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소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불편할 것.주제든 기법이든 말이지요. 둘째, 모호할 것. 그래야 해석의 여지가 많지요. 셋째, 비극적일 것. 희극적인 것은 당대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지만 비극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더 큰 보편성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달콤한 나의 도시』는 불편하지 않았고 명쾌했으며 분위기도 비교적 밝았습니다.
정이현 예, 『달콤한 나의 도시』는 첫 장편이니다. 어떤 작가든 첫 장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을 거예요. 저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요. 그럴 때 신문 일일 연재소설을 쓰게 되었고, 독자들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문 연재소설의 피할 수 없는 형식적인 조건이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건네야 될지 시작 전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은수라는 보편성을 가진 인물을 선택하고, 그녀의 이야기로 말을 건넸던 게 그 당시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앞으로 제가 소설가로서 넘어가야 할 필연적인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동안 첫 장편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제법 거창한 여러 기획들이 많았거든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것들이 기획의 차원에서 소설의 차원으로 넘어오기 어려웠던 이유는, 저한테 정말로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은수란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제 개인적인 문제의식들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지금 이 산을 넘지 않으면 다음 소설을 쓸 때 한 시대에 대해 완전히 정리를 하지 못하고 온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지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보편적이기보다는 좀 과장된 인물, 위악적 인물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보다 평균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그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보고 싶었습니다. 김영수라는 인물이 대표적이지요.
이 소설을 읽은 분들로부터 다양한 반응들을 전해듣습니다. 저는 소설이 내 손을 떠나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그 소설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 스무 살에 읽느냐 십 년 뒤에 다시 읽느냐에 따라 그 감상이 다 다르잖아요. 그 다채로운 반응들이 작가에게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신형철 다양한 반응을 하나 정도 더 들으면 좋겠는데……
김애란 그냥 일반적인 얘기인데요, 보통 작가들이 책을 낼 때마다 새로움에 대한 요구나 질문을 받잖아요. 작가도 자기 세계의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또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갸웃거릴 때도 있어요. 다양성이 미덕처럼 얘기되지만 사실 작가가 온전한 자기 목소리 하나 갖는 것도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해요.
이기호 정이현씨의 『달콤한 나의 도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미덕은 우리가 당대를 다룬다는 것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쉽게 말하면 세태인데, 사실 작가에게는 세태란 것이 거부감이 없잖아 있을 수 없는데 당대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미덕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했어요. 다른 건 평론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저는 당대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존재의미를 갖는다고 봐요.
신형철 네. 김애란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보지요. 첫번째 작품집 이후에 발표한 단편인 일곱 편입니다. 다음 책은 언제쯤 나옵니까?
김애란 여름에 나올 것 같아요.
신형철 첫 작품집을 내고 나서 부담을 많이 느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래서 외려 이제는 좀 변화를 꾀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지는 않던가요?
김애란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대신에 질문을 많이 받으니까요. 부담이 안 되느냐,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능청도 떨고 미끄러져가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제가 '나 괜찮아요'라고 말하려 애썼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바깥에다 대고 끊임없이 해명을 구하는 것보다 내가 나한테 조용한 신뢰를 보내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이기호 아, 누가 김애란을 미워할 수 있는 거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진짜…… 신형철의 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신형철 자, 넘어갑시다.
이기호 그리고 애란씨가 문학특강 같은 데 가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뭐더라?
김애란 아버지가 안 계세요?
정이현 나는 오죽하겠어.
신형철 정이현씨와 김애란씨가 팔 년 차이입니다. 정이현씨는 혹시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는 세대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 있으세요?
정이현 애란씨 소설을 읽으면 이십대 초중반, 잊고 살고 있던 감수성이 떠올라요.
이기호 그래요? 나는 솔직히 친구 같어. 애란씨가 애늙은이 같기도 하고……
정이현 누구나 그 시절을 겪잖아요. 그게 꼭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고 감수성의 문제인 것 같은데요. 김애란씨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내가 지나온 어떤 아련한 시절의 감각들이 깨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김애란 사랑스러워서 죄송합니다.(일동 웃음)
신형철 박민규씨에게 몇 가지 여쭤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제 박민규씨의 단편들을 다시 쭉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변칙적인 소설이라느니 형식이 자유롭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이렇게 공학적으로 계산된 소설도 흔치 않습니다. 특히 박민규 특유의 문장은 문법적으로 거의 완벽한 문장입니다. 흔히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가, 나라면 이 문장은 이렇게 고치겠다, 뭐 이런 생각들을 더러 하지 않습니까. 박민규의 소설은 그런 생각을 거의 못 하면서 읽게 됩니다. 장식을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뭔가 플러스가 생겨나는 문장입니다. 어떤 불확실한 감정을 명료하게 번안하는 문장이랄까요. 김영하씨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박민규에게서 하나를 훔치라면 문장을 훔치겠다고 말입니다. 그 문장의 기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박민규 제 자신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시를 좋아하지…… 실은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쓰게 됐는지…… 아무튼 갑자기 쓰고 싶었고…… 배운 적도 없는데 그냥 쓰는 겁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써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얘기가 많아요. 마구 쓰고 싶고…… 계속 달리는 그 기분이 좋아요. 문장의 기원 같은 거…… 알게 뭐예요. 아무튼 계속 만들어나가고…… 저는 이거 정신적인 거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물질이더라고요. 물질……이니까……
정이현 이건 딴 얘기인데요. 그 사람 문장을 보면, 다른 게 아니라 문장이 그 사람을 닮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분들을 보면 문장 생각이 나요. 문장을 잘 쓰고 못 쓰고 그런 것을 떠나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쓰는 분을 보면 그런 게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선입견인가?
신형철 박민규씨 소설을 다들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분열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은 박민규 소설에서 한국사회 현실의 색다른 재현을 읽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읽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로 그런 한국소설 풍의 정서가 덜하다는 점, 그러니까 세계와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자유로움과 기발함을 좋아하고요. 『핑퐁』같은 경우는 이와 관련해서 특히 문제적인 작품 같습니다. 이를테면 결말 말입니다. 저는 장편소설의 결말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위태로운 줄타기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능한 것'의 한계 안에서 '불가능한 것'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 말하자면 결말의 윤리라는 것이죠. 가능한 것 속으로 함몰되거나 불가능한 것 속으로 도약해버리는 것은 전복적인 효과를 낳지 못합니다. 『핑퐁』의 경우는 지구의 삭제를 감행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 안으로 도약해버린 결말이라고 할 수 없을까요? 그런 결말은 애초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나요?
박민규 아, 그 결말요? 『핑퐁』같은 경우는 원래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의 삼십 퍼센트 정도가 빠진 상태예요. 근데 빠진 상태로 책을 냈어요. 이유는 우선…… 그 삼십 퍼센트의 부분을 그 무렵의 저 자신이 소화를 할 수 없었어요. 생각은 있는데 그걸 물질로 만들 능력이 없었던 거죠. 더럽게 못 쓰니까…… 분명 제 성격의 문제도 잇어요. '내가 하는 게 그렇지 뭐' 그런 것 있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삼십 퍼센트 정도를 남겨둔 상태로 그냥 출간을 했습니다. 전 이런 제 성격이 정말 좋아요.(웃음) 틈틈이 그 나머지 삼십 퍼센트를 계속 쓰고 있어요. 글을 쓰면서 저도 조금씩 발전하니까…… 어느 정도는 이제 소화할 가능성도 보이고…… 즉 진행형인 거죠. 원래는 그것부터 썼어요. 존 메이슨의 가상소설…… 그 에피소드…… 우선 그걸 열세 편을 썼는데, 몇 편 안 실었죠. 결말은 애초 결정된 거였고…… 아무튼 저는 이런 식으로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카스테라』를 내고서…… 왜 주인공이 일인칭인 소설만 쓰냐고 해서…… 저도 처음 알았거든요. 전지적 작가시점도 있고 그런데……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씩 알게 되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읽었던 소설 중에 나로 시작 안 하고…… 그런 것들도 많았고…… 쓸 때는 몰랐어요. 즉 그런 식으로 하나씩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신형철 이번에 『문학동네』봄호에 발표된 「깊」은 삼인칭이더군요.
박민규 삼인칭?
신형철 네, 의식 못 하고 쓰셨나요?
박민규 전지적 작가인가, 그거라 생각하고 썼는데……(일동 웃음) 여담이지만 전 그런 걸 아는 게 소설을 쓰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믿습니다. 중요한 건 그런 걸 모르는데도 소설은 쓰고 싶은…… 쓰게끔 만드는 그런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에너지…… 뜨겁고 그런 거…… 막연히 그런 느낌으로 계속 썼어요. 예를 들면…… 그러니까 어느 날 문득…… 이곳이, 이 우주라는 게 카스테라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 「카스테라」를 쓰는 겁니다. 그런 식이죠.
신형철 박민규의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까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핑퐁』도 그렇지만, 최근작인 「누런 강 배 한 척」이나 「깊」은 꽤 어둡습니다. 예전 단편들에도 비애는 늘 깔려 있었지만 반어적인 유머를 잃지는 않았었잖아요. 이를테면 유쾌한 편집증자의 서사 같았다고 할까. 혹시 세계관이 더 비관적으로 바뀌셨습니까?
박민규 전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하는 사람입니다. 계속 인류는 좋아지고 있다고 보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문학은 인류의 진화를 위한 도구의 하나고…… 그건 인문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거고…… 결국 크게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개의 줄기가 되는 거죠. 유전자의 나선을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렇게 두 개의 고리가 나선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가고 있는 거죠. 이 두 가지가 계속 발전해나가다 결국 어느 시점에 함께 그 답을 구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가 어디서 온 건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가 밝혀지면 어디로 갈 건가의 해답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겠죠. 저는 그게 진화라고 봅니다. 그래서 언젠가 궁극적으론 문학이 필요 없는, 예술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거라는…… 멋진 일인데…… 그래서 늘 스스로의 능력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신형철 지금 SF소설을 쓰고 계신 이유도 그와 관련이 있나요?
박민규 네. 저는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리고 희극을 위해 비극을 쓸 때도 있고 비극을 위해 희극을 쓸 때도 있을 거란 예감입니다. 『핑퐁』같은 경우도 전 굉장히 희망적인 결말이라 생각하고 쓴 거거든요. 즉…… 그리고 다시 학교로 가는 거죠. 인류의 이교시란 생각을 했어요. 없어질 건 일시에 없어질 거고……
신형철 이쯤에서 상투적인 질문 하나 나갑니다. 아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읽은 소설은 다 일인칭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내가 읽은 소설'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지요. 주로 어떤 작품을 좋아하십니까?
박민규 특별히 좋아하거나 특별히 싫어하는 작품이 없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렸을 땐 그게 되게 분명한 사람이었거든요. 싫어하는 건 죽어도 못 봐요. 좋아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고 또 써나가면서…… 그냥 다 좋아진 겁니다. 그 이유가 소설이라는 이름이로, 시라는 이름으로…… 어떤 경우건 간에 인간이 예술을 통해 만들어낸 것들의 목표는 한 가지인 것 같아요. 잘 살고 싶어서, 그러니까…… 잘 살자는 얘기. 그래서 다 좋은 것 같습니다. 전부 잘 살자는 얘기니까.
신형철 김애란씨는 박민규 소설을 어떻게 읽으셨어요?
김애란 저는 선배님 소설을 보면 스카펑크라는 말이 떠올라요. 사실 전 음악적 지식이 바닥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얕은데요,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록 정신을 부르짖었던 시대가 있었고, 나중에 거기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사실 '저기 뭔가가 있다'고 믿었던 이들에 대해, '가봤더니 없더라, 남은 건 패션밖에 없더라' 라고 해서 만든 게 스카펑크라고 들었어요. 사회적 메시지가 굉장히 강했던 자리에 메시지 대신 즐거움을 넣고, 그걸 춤곡으로 만든 거라고요. 쿵짝짝- 세 박인가? 실제로 선배님 작품 읽으면 음악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아요. 같이 호흡한다는 느낌도요. '여기서는 나처럼 쉬었겠지? 분명 여기서는 나처럼 숨을 들이 쉬었을 거야' 하고 숨박자를 공유하게 되요. '가봤는데 없더라' 라고 말하며 춤을 추는. 그만큼 즐거워졌지만 또 그만큼 슬퍼졌는지도 모르곘다는 생각을 했고요.
이기호 형 소설은 아내의 눈치를 너무 보고 있어요. 내가 보는 입장은 그래요.
신형철 어떤 면에서?
이기호 작업이 아내에 대한 작업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진짜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아내에게 순종하면서 사실까?
정이현 지금도 떨면서 사신다고 하던데……
박민규 좋은 걸 어떡해요?
이기호 이건 나쁜 의미가 아닌데, 아내에게 작업 거는 소설이죠.
박민규 작가로서도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게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열정…… 멋지게 보이고픈…… 가장 강렬한 에너지라고 보는데…… 제 와이프가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하여간에…… 그래서 너무 좋고…… 잘 보이고 싶은 거죠. 그게 없다면 아마 글 많이 못 쓸 거예요.(일동 웃음)
이기호 한국문학에서 박민규 형수님의 역할을 되게……
신형철 그렇군요. 형수님께서 한국문학에 큰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5. 우리가 마무리할 때 늘 하는 이야기들
신형철 예. 이제 향후 계획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김애란씨 장편은 아직 시동이 안 걸렸나요?
김애란 장편은 단편집을 마무리한 뒤에 시작할 생각이구요. 요즘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하나는 어떤 배우의 인터뷰를 보면서 느낀 건데요. 제가 좋아하는 연극배우이자 탤런트예요. 그 역을 하면서 되게 힘들었다는 말을 했는데, 다른 연예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과 다르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힘들었다는 건 그가 자기 역에 진지했다는 거잖아요. 저 역시 쓰는 게 즐겁고, 또 즐겁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겁먹지도 말고, 쓸데없이 능청 떨지도 말고,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하나는 최근 <우리 학교>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거기서 한 여학생이 후반부에 담담하게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고 이런 게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하는데 이상하게 막 눈물이 났어요. 빈정거림도, 패배적인 말도 아니었고, 그애가 자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걸 얘기해서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은 쉬운 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그걸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하고 나면 너무 창피하고 수줍어서 혹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여서 못하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저 역시 '사랑은 중요해요'라고 말하려면 다리부터 꼬이고, 아무 말도 아닌데 용기가 필요하고 그래요. 그래서 요새는 쉬운 말 하면서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작품을 쓰고 싶고요.
신형철 정이현씨는?
정이현 당장의 계획은 7월경 새 작품집 출간이고요. 가을호부터 계간지 장편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신형철 『문학동네』에 연재하시죠?
정이현 네. 다시 장편 연재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설렙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요? 제 관심사가 서서히 변하는 걸 느낍니다. 지금까지는 이곳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에 관심의 촉수를 두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나온 게 작년 7월인데, 책 출간 뒤에 일종의 진공상태가 되어 여행도 많이 다니고 푹 쉬었습니다. 쉬면서 그 동안 참 숨 가삐 달려왔구나 싶었지요. 이제부터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은 여유를 가지려고 해요. 곧 시작할 다음 장편 연재도 가능하면 좀더 재미나고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껏은 남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NO라는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웃음) 앞으로는 좀 변하고 싶기도 합니다.
신형철 저도 좀 그렇습니다. 뼈저리게 공감합니다.
박민규 저는 지금 대중소설을 쓰고 있고요.
정이현 지난번에 애정소설도 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박민규 예, 일종의 연애소설…… 갑자기 대중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더군요. 그래서 현재 작업중입니다. 책이 언제 나올지는 뭐라 말씀 못 드리겠고. 그리고 그런 편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같은 걸 다시 써달라는…… 『카스테라』싫어요, 『핑퐁』싫어요…… 안드로메다로 가지 마세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비슷한 톤의 장편을 따로 한 편 구상하고 있습니다. 장편 쪽의 진행은 그렇구요…… 단편, 즉 소설집은 '더블'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짜리 재킷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망인데, 옛날 LP 시절 아시죠? 그때 그 더블 앨범, 그거에 대한 로망이에요. 그걸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 두 권 중 한 권은 기존 문예지에 게재된 이른바 순수소설이란 걸로…… 다른 한 권은 SF와 판타지를 주축으로 한 미발표 소설들로…… 그렇게 두 권을 '더블'이란 타이틀로 묶어내려는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기호 박형 얘기를 들으니까 나는 진짜 삶에 대한 전략도 없고 문학에 대한 계획이나 이런 게 전혀 없는 놈이구나 싶네. 나는 정말 되는대로 사는 것 같아. 근데 나는 지금 그런 건 있어요. 장편을 도망가지 않고 무사히…… 나 자꾸만 필리핀으로 도망가고 싶어. 하여튼 도망가지 않는 방향으로 갔으면 싶고. 애가 나오니까, 나는 진짜 내가 작가로서 가족에게 밥을 먹인다는 게 너무 너무 숭고해 보여요. 이것이 안 된다면 내가 어떻게 작가를 해야 되냐 하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나는 바라건데 내가 아르바이트를 안 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일동 웃음)
다른 건 없는 것 같고, 나는 정말 그런 게 좋아. 무계획적으로 있다가, 뭔가 우연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들, 대충 그 안에서 낑낑거리는 것들, 그게 좋아요. 그냥 전략 없이 사는 게 전략인 것 같아요.
신형철 은희경 선생님이 며칠 전에 이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박민규랑 이기호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요즘 소설가들은 너무 얌전하고 모범생인데, 그 사람들은 정말 예술가 같아서.
이기호 난 모범생이야.
신형철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웃음) 자,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창작공간 글이고 (club.cyworld.com/uo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