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을 모포처럼 둘러 쓴 길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다
눈길 위로 걸어간 발자국
먼저 간 발자국 위를 다시 걸어
뒤엉킨 길이 또 하나 걸어가고 있다
강둑에서 멈춘 발걸음들
문득 발자국의 임자가 궁금하다
강 건너에 도착한 풍경들
마주보고 서 있다가
발이 시릴 때쯤 안다
멀리 있는 하늘이 제일 먼저
이 길을 건넜으리라
그 아래 몰골 드러낸 산이 건넜을 테고
그 다음엔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이 길을 건넜을 것이다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서있는 나무들도
눈 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건너온 길을 바라보며
제 발자국 헤아리지 않으며
얼어있는 강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다
건너지 않고 서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풍경
강 건너 저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지우며 간다
/큰눈무늬 나방
신정민
날개가 아니라
눈으로 날아다녔다
날개를 차지해버린 눈은
날개와 늘 다투었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불빛 가까이 가려는 날개와
다가갈수록 눈부셔 감기는 눈
온전한 한 곳을 응시하기 위해
두 눈을 활짝 뜨는데
날개가 이내 몸을 접는다
초점이 흔들린다
아웅다웅 끝날 줄 모르는 싸움
나방의 귀가 가슴에 있는 건
둘의 잦은 다툼 때문이다
눈이 아니라
날개로 날고 싶은 나방
계단참에 떨어져있다
날개보다 먼저
눈이 떨어져있다
/앵두나무
신정민
꿈틀거리는 애벌레 속으로
앵두나무, 몸을 밀어 넣는다
밀어 넣을 때마다
애벌레 더욱 꿈틀거린다
붉은 열매 6월이 꿈틀꿈틀
끌려 들어간다 꾸역꾸역
허물 벗는 초여름 마저 기어들자
우화를 꿈꾸는 앵두나무
날개 달고 날개 달고
세상 훨훨 날아볼 양인데
애벌레 뭐가 부족한지
자꾸만 두리번거린다
무슨 나무인지 물어도 대답 못할 나무
애꿎은 바람까지 불러들이고
인적 없는 한 날 잡아
해탈하리라던 징그러운 약속
날개 죽지 가려워지길
기다리는 앵두나무
애벌레 몸 속에서 앵두 익어가는데
속사정 너머로 여름 한철 날아가는데
기별 없는 우화
애타는 앵두나무 한 그루
애벌레 몸 속에서 꿈틀,
또 꿈틀거린다
/순간. 1
신정민
개 한 마리 순간에 뛰어든다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도망치는 개의 순간에 내가 뛰어든다
시간의 몸뚱이를 단칼에 탁!
두 동강 난 단면
갈라선 순간이 서로 멀거니 바라본다
순간은 아주 먼데서 온다
목줄에 집을 매달고 달린 개는
기둥에 묶여 길들여질 무렵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들은 모두 순간에 도착한다
에덴에서의 추방, 그 때부터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먼데서 달리기 시작한 순간은
다른 누군가의 순간에 뛰어들곤 한다
베인 흔적에 새어나오는 쓰라림,
거친 숨소리를 꿀꺽 삼키는 동안
순간이 봉합되지 않은 채 달아난다
달아나는 뒷모습에 길이 따라간다
뒤돌아본다
저 길 끝 어딘가에 집이 매달려 있다
/눈물
신정민
무얼 내다 버리는 걸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우는 그녀
그녀의 눈물이 정차하는 역은 모두
기억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둥근 바퀴를 가진 그녀의 울음은
슬픔이라는 뜨거운 동력으로 달려
붉은 눈시울에 도착한다
볼 위에 흘러내리는 기적을 스윽,
그녀가 닦아낸다 훔쳐낸다
울컥울컥 도착한
그녀의 슬픔은 연착하지 않는다
/측량
신정민
한 사내가
측량기를 국도에 세워놓고
가을을 재고있다
한 쪽 눈을 질끈 감고
가을 속으로 뛰어든 텅 빈 밭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무엇이 가을의 영토에 뛰어들었는지
설계도에서 벗어났는지
들여다 보고 있다
길모퉁이 조심조심 돌아가는 하늘
지난 홍수에 떠내려간 다리
사내의 눈 속으로 달려오는
노인의 낡은 자전거 소리까지
모눈종이에 한 칸 한 칸 새겨넣는다
잘 보이지 않는 먼 곳
성에 안차는지 그 사내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는다
한 쪽 눈을 감아야 정확한 경우라니
뽈대 끝에 펄럭이는 붉은 삼각 깃발
은근슬쩍 벌판에 파고드는 바람
한 사내가 국도변에서
가을의 확장을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공원묘지
신정민
한 문장이 끝났다
마침표를 찍었다
또 다른 문장이 시작되었다
시작된 문장이 다시 끝났다
마침표를 찍었다
모든 문장이 마침표를 향하고 있다
죽음은 얼마나 많은 문장을 지녔는가
만연체의 삶 속에 끼어있는 무수한 마침표들
내가 마침표 앞에 쉼표로 서있다
가서 당도하면 모두 마침표가 될 부호들
여기저기 사람들이 따옴표로 서있다
땅 속에 반 쯤 묻힌 둥근,
말 줄임 혹은 말 없음의 기호들이
한데 모여있다
모든 문장이 여기 와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톤 트럭 한 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잘 발효된 침묵을 한 줌 얹자
설익은 말들이 숨을 죽이고 돌아눕는다
반죽 묻은 손으로 간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관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젖은 말들 불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완숙의 음절로 한껏 부풀어올라
두꺼워지는 어둠을 몇 걸음 뒤로 밀어낸다
종이봉지 안에서는
단골이라고 한 마디 더 얹어준 덤의 말
속에 든 말없음표까지 골고루 뜸이 들고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말을 받아든 나는
목에 걸린 고등어 가시 같은 누추한 설움에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무성한 차가운 말들이 파놓은
캄캄한 지하도 같은 숨은 함정들을 용서한다
오늘도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농아 부부
소리 없이 따뜻한 느낌표를 굽는다
/거제도 구조라 보건진료소
최정란
파랑주의보를 내린다
샛바람 바다는 머리맡에 면회사절
표시를 얹는다. 굽어보이는 언덕 위
하얀 가운을 입은 진료소가
녹슨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테가 굵은 안경을 낀 진료소,
근심 어린 눈길이 들고 나는 바다를 살핀다
갯냄새 풍기며, 수평선에 컴퍼스의 중심점을 찍고 사는
환자들이 쉴새없이 진료소를 찾아온다
부러진 돛대에 붕대를 감는다
골다공증이 깊어서 걸핏하면 뼈가 부러진다며
허리가 새우처럼 휘어진 해송이 허둥거린다
천식으로 기침하는 갯바위에는 햇살과 바닷바람을,
물비늘이 너울거리는 파도의 멀미에는
흔들리는 대로 떠다닐 부표 하나를 처방한다
바라보이는 섬과 섬 사이에 일회용반창고를
처방전에 그리움은 불치라고 써넣는다
처방할 수 있는 약이 시간뿐인 병이
얼마나 더 많은지 알 수 없는 나는
천천히 거닐면서 모래 속에서
난파한 태양의 흑점 조각을 찾거나
잊을만하면 드러나는 추억 같은 것을
건져 올린다. 떠도는 동안 떠나지 않던
만성질환인 어지럼증에 면역이 생길 때까지
수평선을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말려드는 파도의 압으로 심각한 병
거제도 구조라 보건진료소는
내 안의 파랑주의보를 다스리고 있다
/문희, 꿈을 사다
최정란
지하철에서 그가 봉투 한 묶음과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 한 장 꺼내 졸고 있는 내 손에 얹는다. 잠결에 나는 편지지에 꼭꼭 눌러 쓴 그의 편지를 읽는다.
신라 화랑인 그가 문희에게 보내는 밤 열 한 시의 편지다. 그의 부러진 팔과 다리가 빠져 나온다. 한 올 한 올 떨어져 나온 거친 세월이 순식간에 무릎 위에 수북히 쌓인다.
지갑에서 천 원 짜리 두 장이 그의 손으로 옮겨간다. 봉투를 한 묶음 더 내미는 동안에도 그의 넥타이는 녹이 슨다. 꿈결에 바늘을 꺼내들고 편지지 모서리에 저고리 고름을 꿰맨다.
그 사이에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갑옷의 파편들 예각으로 흩어져 있다. 몇 개의 가장 날카로운 빛의 조각을 주워 천 년 전에 그가 전해준 봉투에 조심조심 담는다.
말발굽소리가 잦아들며 지하철이 멈춘 다음 역 내려서는 내 발 아래 갈린 대리석 얼비치는 불빛, 비단치마 한 벌 만큼 환하다. 못 다 이룬 천마의 꿈으로
/달빛거미
최정란
거미가 달빛을 끌고 온다
방금 간 칼날처럼 예리한 달빛이다
달빛이 하얗게 지나가는 길목
나뭇잎들 가장자리가 베어나간다
조심조심 거미가 달빛을 엮는다
보일 듯 말 듯, 훅 불면 날아갈 듯 가볍게
살아 움직이는 것들 기꺼이 퍼덕이며 날아와
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번 걸리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금속성을 내며 팽팽하게 펴진 달빛
거미가 슬픔을 몇 개 위장으로 매단다
바람 앞에 거는 순간, 출렁
기다렸다는 듯 밤이 통째로 걸린다
천천히 조여드는 달빛, 움직일수록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거미가 반짝이는 달빛에 이빨을 박고
숨어 있는 캄캄한 은유의 수액을 빨아올린다
정교하고 처절한 어둠으로 출렁거리는
거미는 얼마나 위험한가
제 살을 크게 한 점 저며낸 열아흐레 달,
산허리를 딛는 걸음이 휘청거린다
/모과
최정란
꽃들 시든 작은 꽃밭 모퉁이
흙에 배를 반쯤 묻고
돌처럼 캄캄해진 모과 한 알 누워 있다
제 안에 쟁여둔 햇살을
향기로 바꾸는 조용한 노동으로 모과는
몸에 걸친 밝은 껍질이 헐거워졌을 것이다
소리없이 끌고 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운
향기는 느슨하게 풀어서
한 톨도 남김없이 방전시켰을 것이다
땅속으로 발을 뻗을 때
미리 와서 누워있던 땅이 눈부셔 잠 깰까봐
밝게 빛나던 제 몸 스위치를 껐을 것이다
머리통이 단단하게 여문 모과 씨앗들이
같이 덮은 이불을 잡아당기느라
발가락을 꼬무락거리는
소리가 마른 풀섶에 환하다
/봉숭아 꽃밭
최정란
꽃물 들이던 날은 뱀이 보였다
으깬 꽃을 손톱 위에 얹어놓고
이불 꿰매는 굵은 면실로 칭칭 손가락 동여매면
뱀이 내 꿈을 칭칭 감았다
첫눈 오는 날까지 꽃물 남아 있으면
첫사랑 이루어진다고 두근거리며 믿었던 탓일까
피처럼 스며든 붉은 봉숭아의 영혼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던 첫사랑이 지나가고
언제부터인가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칭칭
으깬 꽃잎을 감아도 뱀이 보이지 않는다
지우고 싶으면 언제든 지울 수 있는 그리움 아니라서
뽑아내기 전에는 지울 수 없는 독으로
누구의 마음에 그렇게 나 스며든 적 있을까
오랫동안 독을 만들지 않아서
독을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무늬만 독을 뿜는 은유의 뱀처럼
핏빛 머리를 바짝 쳐든 슬픈 손가락으로
저녁 해의 까칠한 발뒤꿈치를 만진다
손톱이 자라나고 뒤돌아보는 꽃물 들어 있던 자리
소녀들에게서 다시 소녀들이 태어나는
꿈의 꽃밭에서 나 뱀에게 시달리고 싶다
/나비
최정란
방금 우화한 나비, 날개가 젖어있다
눈 밝은 새들 배회하는 아찔한 시간
솜처럼 가라앉는 물먹은 몸으로
소멸의 공포 지우며 날개를 말린다
나머지 삶 전체의 무게와 맞먹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날아오르겠다는
생각까지 한 점 남김 없이 비운다
/모자
최정란
한 됫박의 소금과
메주를 품은
아랫배 불룩한 옹기 항아리
익기도 전에 부글부글
끓어 넘치지 말라고
숯과 고추 둥둥 띄운다
양지쪽 햇살을 조심하라고
굵은 소금 한 줌 더 친다
금 갈라 깨질라 물 샐라
근심스레 들여다보던 주름진
항아리 뚜껑을 덮는다
묵언정진의 동안거
얼음과 불을 지나야
제 구실 겨우 할, 초벌 구운
생각들, 귀까지 푹 덮힌다
싸락눈 내려앉은 측백의
머리 위 풀풀 날아오르던
번뇌를 가둔다
푸른 여백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