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사람들은 군대 이야기와 특히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를 하면 왜 다들 싫어할까?
당사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왔다 갔다 심각했는데...)
1977년 9월 어느 일요일 오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제101 야전병원 수술실. 병원 특유의 사늘한 크레졸 소독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숨마저 컥컥 막힐 지경이었다. 수술실이래야 함바식당처럼 된 둥근 모형의 간이건물에 철제침대 하나가 칸막이 속에 숨어 있고, 천장엔 밝은 조명도 없는 붉은 백열등이 군데군데 매달려 있을 뿐. 사지를 철제침대 모서리에 꽁꽁 묶긴 채 처절한 고함과 함께 발버둥을 쳤다. 그래도 침대가 삐거덕거리며 움직이자 건장한 체구의 위생병 네 명이 달라붙어 팔다리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야, 이놈의 새끼들아! 내 *창대기 그만 좀 땡겨라, 땡겨! 차라리 빨리 죽여라, 죽여〜〜”
내가 듣고 배운 욕이라는 욕은 다 뱉어냈다. 아무리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누가 하나 대답이 없다. 죽음보다 더한 아픔과 고통이 이런 것일까. 제풀에 기진맥진하여 실신했다.
전날인 토요일 오후이었다.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진부령의 연병장엔 축구 경기가 있었다. 곧 있을 12사단장 배 축구 시합에 나갈 선수 차출 겸 술내기 게임이었다. 힘이 남아돌아 팔팔 날 것 같던 상병 시절이라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나도 중대 대표 선수로 자원했다. 출전해서 잘만하면 일주일 포상 휴가는 당연지사라 사방팔방 열심히 쫓아다녔지. 후반 전 중간쯤에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방 선수와 부딪쳐 넘어졌는데 우측 옆구리가 불에 덴 듯 쿡! 쑤셔왔다. 아차, 싶었지만 임전무퇴로 무장한 화랑의 후예답게 젊은 패기로 버티며 시합을 마쳤다.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체한 것 같다며 선임이 양 엄지손톱 위에 바늘로 따 주었다. 시커먼 피가 솟아나서 좀 시원하고 덜 아픈 것아 이상이 없는 줄 알았다. 잠을 자는데 아랫배가 끊어지듯 더 아팠다. 밤새 끙끙 앓다가 새벽녘에는 중대 취사실 부뚜막에 배를 지져봤지만 여전했다. 아침도 못 먹고 누워 있는데 중대 인사계(상사)가 보더니만 안 되겠다 싶다며 운전병에게 빨리 1호 차(중대장 전용 지프)를 준비시키라고 했다. 용대리 연대 의무대로 갔다. 연대 의무병은 귀찮은 듯 쳐다보지도 않고 전화를 돌려 상부에 보고하는 것 같았다. 배가 아파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인데 동작이 느릿느릿 급한 게 없다. 아픈 놈만 서러웠다. 의무대에 오기만 하면 진통제 주사라도 한 대 줄줄 기대했는데, 아무런 처치도 없이 전화통만 붙들고 있으니 화가 나서 복장이 터져 죽을 판이었다. 한 시간가량 지난 후 드디어 101 야전병원으로 후송 조치 명령이 났다고 했다. 이제는 적십자 마크가 선명한 군 엠블런스 차를 타고 원통리로 갔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령계급의 군의관 아저씨, 아니 101야전 병원장은 배를 만져보고 눈도 까집어 보고서는 충수염(맹장염을 충수염이라 부르는 것을 처음 알았다)인데 위급상황이니 빨리 수술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생전 처음으로 척추 주사를 맞았다. 2~3분뒤에 발가락 끝을 찔러보면서 아프면 아프다고 말라고 했다. 여기저기 송곳으로 찔러댔다.
“여기?”
『아, 아파요』
“그럼 이쪽엔? ”
『거기도 쪼매 아프네요〜』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몇 분쯤 지났을까? 사각사각 가위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곧바로 내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빨려 올라가는 듯했다. 표현 못 할 아픔이 뒤따랐다. 생 창자를 핀셋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발악에 가까운 고함, 온갖 욕설과 함께 몸을 들썩거렸다. 힘센 위생병들의 저지에 제풀에 지쳐 혼절했다.
후일담이다. 마취가 안 되는 독종의 사나이라고 별명이 붙었다. 같은 병원의 맹장염 수술 환자들은 자고 나니 수술이 끝나 있었고 수술 중에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왜 나만 그리 통증이 심하고 아팠을까. 마침 야전병원 내 마취액 재고가 떨어져 군단에서 급송으로 오는 중에 내가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목숨까지 위험해서 마취가 덜 되었는데도 수술을 밀어붙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마취액을 정량보다 적게 투여했다는 소리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일주일만의 깁스를 풀고 쌩쌩 잘도 돌아다녔다. 환자들과 기간병(위생병) 간의 축구 시합도 하면서 잘 보내고 있는데 10여 일쯤 지나자 지옥 사자 같은 인사계가 잡으러 왔다.
“야, 이 상병! 이젠 다 나았제〜 부대로 가자! 중대원 전부 유격훈련 들어가서 상황실 근무할 인원이 없다 빨리 따블빽 싸라!”
죽음(?)보다 더 아픈 상황을 겪어봤다. 그 덕택에 와신상담까지는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웬만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때 일을 상기하면 다 참고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내 우측 아랫배는 4㎝ 정도의 희미한 자국이 남아있다. 군대 생활 35개월 근무의 흔적이자 훈장인 셈이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사나이라면 당연히 거쳐 가야 했던 논산훈련소 군번 12667057이 죽어도 잊지 못할 나의 부적이다.
(2022.09)
*창대기: ’창자‘의 경상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