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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15년 3월 19(목)~21(토)까지 2박 3일
2. 장소: 일본 오이타현 유후인 야마야다온천과 히타시 아마가세온천 일원
3. 인원: 가족 5명(4살 어린이 포함)
4. 항공편: 2015. 3, 19(목)일 후쿠오카 국제공항행 아시아나 항공 132기 출발 09:10분( 1시간 소요)
2015. 3. 21(토)일 인천 국제공항행 아시아나항공 133기 출발 19:10분(1시간간 소요)
5. 일본 여행일정
6. 1992년 영등포고등학교 교사 재직시 조선일보사가 교사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선생님을 해외로 -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주관하였다.
전국 시도 교육청이 선발한 초∙중 ∙고 교사 400여명과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인이 참가한 이 행사는 6박 7일간 일본 현지를 답사, 곳곳에서 한민족 관련 유적과 유물을 확인하여 왜곡된 한∙일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고 동시에 한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조선일보사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탐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일본까지의 이동수단은 8천톤급 페리 선샤인 후지호였다.
페리 선샤인 후지호의 일본으로 출발 시간은 초저녁 09:00시 무렵이어서 출항 시간 대에 맞추기 위하여 서울 용산역에서 부산역까지 기차를 이용하여야 하였다.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오후 2시 무렵이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로 이동하여야 하였는데 많은 교사들이 이미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출국 수속을 마친 나는 페리 션사인 후지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밤새 일본 하카다항으로 이동하였다.
우리 일행을 실은 전용 페리 8천톤급 선샤인 후지호는 밤하늘의 별을 친구삼아 외로운 바다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출국하기 전 인천공항에서
페리 션사인 후지호의 갑판 선미에서 밤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밤의 고요함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방은 적막하고 하늘의 별들만이 촘촘한 가운데 페리 션사인 후지호는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일본 후쿠오카현 하카다항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페리 션사인 후지호 갑판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사방은 칠흑같았다.
파도소리만 철썩철썩 들렸을 뿐 사방은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었으며 외로운 달과 별들만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저별은 나의 별 저기 보이는 별은 너의 별하며 헤아렸던 어린 시절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여 가족이 그리워지기도 하였다.
태어난 이래 가족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은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탐방하기 위하여 션사인 후지호에 몸을 실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션사인 후지호가 힘차게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어디가 한국 쪽이고 어디가 일본 쪽인지 방향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나무잎이 바다위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듯 바다위에서 흔들리는 페리 션사인 후지호 갑판에 서있는 나도 방향감각을 이미 잃어버린 채 하늘의 별만 헤아리고 있었다.
추측컨데 션사인 후지호는 대마도를 지나 현해탄으로 접어든 것도 같았으나 사방이 어두워서 지척을 구분하기기 어려웠다.
사방이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선샤인 후지호의 기관실에서 들리는 엔진 소리만이 자신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나 하는 듯 대자연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면 서호정 상대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던 왕인박사도 이러한 바다의 적막함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달래곤 하였을 것이다.
최신 시설이 갖춰진 션사인 후지호를 타고 오늘 밤만 외로움을 극복하고 이동하다면 쉽게 일본 하카다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나 풍선을 이용하여야 하였던 당시 백제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는 항해를 해야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여러날을 생활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그 고통이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 벳부 가마도지옥 온천에서 잠깐 발을 온천수에 담가보기도 하고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사만 연발한다.
또한 날씨와 조류 등 여러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고 풍선이 바람을 타고 빠르게 이동할 일 수 있어야 하였다.
일찌부터 바다로 진출하여 스스로 항해술을 체득하였던 백제 사람들은 바다의 해류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적당한 계절과 날짜를 잘 선택하였을 것이나 풍선이 이동하는 도중 바다에서의 날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과 싸워가며 여러 날을 허송하면서 이동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승선하였던 선박은 8천톤이나 되는 거대한 페리 여객선이었으나 넘실거리는 바다의 파도가 선수에 부딪힐 때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메스껍기도 하였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칠흑같은 바다를 풍선으로 일본까지 이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내가 지금 이동하는 이 항로를 이용하여 왕인박사나 노리사치계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백제 사람들의 도전정신과 용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솥지옥 가마도지고쿠
싈새없이 솟구치는 온천수는 90도가 넘고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으나 일본을 개화시키고 불국토로 변화시켜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노리사치계가 이 항로를 이용하였을 것이고 아직기와 왕인박사 또한 일본에 유학을 전파하여 문명화시켜보겠다는목적으로 이 항로를 이용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을 터인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세계 시민주의 사상가이자 인류 평화를 위한 계몽주의자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었다.
천진난만한 지우는 좋아 어찌할 바 모른다.
현해탄이란 일제 식민지 치하 때 조선을 왕래하였던 당시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말로 탄은 얕은 바다를 의미한다.
현해란 검은 바다라는 뜻인데 현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대마도와 일본 근해 사이에 검은 쿠로시오 해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로시오를 일본에서는 '黑潮'라고 쓰는데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검은 조류라고 하였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이 건넜던 곳이 바로 이 현해탄이었고 내가 션사인 후지호를 타고 일본으로 이동하고 있는 이 해로도 현해탄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담배연기를 불어대면 수증기가 많아지니 필시 지옥 염라대왕이
조화를 부리는 것 같다.
현해탄은 대한 해협 남쪽부터 일본 후쿠오카 현 서북쪽에 있는 바다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규슈(九州)를 잇는 해로로 수심이 얕고 대체로 풍파가 심한 곳이었다.
대마도 해류가 북동쪽으로 흐르고 동해 해류가 남쪽으로 흘러서 백제사람들이 일본을 건너갈 때 이 해류를 많이 이용하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포구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대마도 해류를 탔다면 약간의 풍파를 만난다 하더라도 순풍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후쿠오카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페리 션사인 후지호가 밤새 동쪽으로 이동하더니 마침내 내리쬐기 시작한 태양의 햇살 때문인지 드리웠던 새벽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하카다항의 윤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천지를 찾아 현해탄을 건넜을 때도 오늘 밤과 별 차이가 없으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마치 백제사람이나 된 듯 기분이 우쯜해지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의 선진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오히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조선의 인명 손실과 국가재정의 악화를 초래하는 등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민족을 말살하려하였으며 징용과 징병, 위안부 문제로 양국 관계는 아직까지도 선린관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우호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일본 속의 한민족의 애환을 알아보고 일본을 극기하기 위한 꿈을 간직한 채 새벽 공기를 마시며 난생 처음으로 일본 하카다항의 혼잡한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의 평화와 꿈, 그리고 이상을 짓밟고 일어선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그들의 풍물이나 현실이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다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션사인 후지호에서 바라보였던 하카다항은 우리나라 어느 항구하고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 어느 항구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바다 특유의 냄새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닷가의 생동감을 이곳 일본 하카당항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유후인 거리에서 잡동사니에 현혹되고
하카다항에 이미 몇 시간 전에 도착하였으나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일본 입국 심사 때문에 아침 식사를 션사인 후지호 선실에서 해결하여야 하였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하카다 국제 여객선 터미널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해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카다항에서 느끼는 감정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자연환경이 다르리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흙 한즘과 대나무와 소나무 등도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다르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본 하카다 국제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주변의 풍경과 풍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시내는 사람들로 혼잡하였으나 교통질서가 조기 정착되어서 인지 우리나라에서 보아왔던 교통 혼잡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시내를 빠져나와 시골 농촌같은 한가한 곳을 달리고 있었다.
농촌의 풍경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였으나 소득수준이 우리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은 것 같았다.
1992년 일본을 탐방하였을 때 일본의 농민들은 이미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는 농로에 뚜껑이 없는 픽업트럭이나 오토바이를 주차해놓고 농경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일상생활의 시스템이 분명 우리나라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저녁식사전 야마다야 료칸에서 넋나간 듯
음식만 바라보고
또한 국민들의 정치적 안목이나 경제적 생활수준이 높아서인지 그들의 문화적 정서도 우리네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시내 번화한 도로가임에도 에도시대의 허름한 고가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고대문화 유산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그들의 사고가 우리네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은 만큼 기본적인 생활태도도 우리네들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리 일행을 실은 차량이 이동하고 있는 도중에 보행자 신호가 떨어졌다.
횡단보도를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는데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뛰거나 서두루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보행자 중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마지막으로 건널 때까지 누구도 이를 불평하거나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량은 없었다.
일본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분명 우리나라 국민들보다 높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기전에 기본적인 선진 사고나 생활태도만큼은 우리가 배워야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연히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일본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나 당시까지만 하여도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만 알았을 뿐 일본 속의 백제 유적지를 탐방하여 일본을 재발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일본 큐슈 최남단 미야자키현 난고촌으로 이동하였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호흡이 멈출 것만 같았다.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고스란히 일본 난고촌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난고촌은 백제인들이 세운 마을이었다.
난고촌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백제관이었다.
백제관 내부는 백제 문화를 소개하는 자료들로 가득차 있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 국립박물관의 사랑방을 모델로 하여 한국 기술자들이 직접 실물 크기로 제작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시식이 시작된다.
백제 마을인 난고촌은 휴가시[日向市]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 왕족의 전설이 담겨져있는 곳이었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온 백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난고촌이라고 하였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왕족 정가왕(禎嘉王)이 망명하여 정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백제의 왕족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에게 백제 불교 문화와 건축술의 진수를 전파하는 등 백제 선진 문화 전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정가왕 일가는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이곳 난고촌에는 대한민국 국립부여박물관 객사를 본떠 지은 백제관이 있었으며 백제의 유물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었던 정창원도 있었다.
특히 정창원은 고문서를 조존하고 있었던 창고로 통일 신라시대 민정문서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여 주의 깊게 관찰해 보기도 하였다.
난고촌 언덕에는 부여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百花亭)을 본떠 지은 육각형의 정자가 있었고 이곳 정자에는 '연인의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우리나라 부여군에서 직접 기증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과연 일본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잠시 정신이 혼란스럽기도 하였으나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이 마한의 전지역을 점령하고, 중국 요서지방과 산동반도 및 일본에까지도 진출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 이곳 일본 큐슈 남부는 백제 고유의 영토였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때문에 백제가 이곳 큐슈 남부를 통치하기 위하여 왕족인 정가왕을 담로를 파견하였는데 정가왕은 백제 22담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제의 일부였던 난고촌을 뒤로하고 다시 아스카로 이동하였다.
아스카 마을은 나라 분지의 남단에 있었다.
일본 고대문화 발상지이기도 하고 아스카지방의 중심지이자 관광촌이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 문화가 집중적으로 전파되었던 아스카 마을은 일본의 다이카개신 시대 역사적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고 아스카 문화시대 도읍지 이기도 하였다.
이곳을 방문하는 동안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던 것은 다카마쓰고분 벽화였다.
일본 다카마쓰고분 벽화가 고구려의 강서 수산리 고분과 너무나도 흡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 유입의 흔적을 지우려하고 있었으나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유입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중 우리나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었던 인물이 고구려의 담징이었다.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화가로서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을 때 도일하였다.
왜구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요청에 따라 5만명을 신라에 지원하였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신라는 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과의 관계가 어수선하던 시기에 담징은 일본에 건너갔다.
고구려 출신이었던 담징은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를 알고 마음이 안정될 리 없었다.
이미 몸은 속계를 떠나 불계에 담고있었으나 마음은 항상 고국 고구려에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담징은 주지의 명에 따라 화선지 앞에 붓을 들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나 붓이 선뜻 화선지에 옮겨지지 않았다.
마음의 갈등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는 마음을 평정하고 방랑자이자 이방인으로서의 내면의 갈등을 화폭에 담기 시작하였다.
그의 혼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필생의 역작인 호류사금당벽화가 완성되었다.
호류사금당벽화가 보관되어있는 아스카의 호류사와 동대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사찰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기대하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담징의 역작 호류사의 금당벽화가 호류사 금당벽에서 제거되어 치워지고 없었다.
의아해하여 두리번거리며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어 다른 곳에다 보관해두고 있다고 하였다.
얼마나 관리를 소홀히 하였기에 벽화가 불에 타고 말았을까?
이역만리 고국을 떠나 일본에까지 와서 불교발전에 공헌하였으나 자신의 벽화가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참담하고 비참한 마음 가누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창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벽화를 발견하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창고 구석에 구겨져 방치되어 있는 벽화의 모양이 영락없이 담징이 구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단지 국적이 다른 고구려 사람이이 그렸다는 이유로 일본은 호류사금당벽화를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었다.
관리의 부실로 일부가 소실된 채 볼품사납게 홀대를 받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여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곧바로 아스카에서 사가현 아리타 도자기 마을로 이동하였다.
아리타 도자기 마을은 조선시대 도자기 기술자 이삼평의 혼이 담겨져 있는 곳이었다.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사가현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598년(선조 31)년 ‘일본의 보물’로 삼고자 끌고 간 도공의 한 사람으로, 사가현 아리타마을에 살면서 1616년 뎅구다니에서 가마를 설치하고 도자기를 구웠다.
그가 창시한 가마의 도자기는 아리타도기라 이름지어져, 아리타에서 12 km 정도 떨어진 이마리 항구를 통하여 일본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의 도자기는 이마리 도기라는 별칭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그에 의한 아리타도기의 창시는 일본 도자기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도 아리타시에는 150개의 도요와 250개의 도자기 상회가 있으며, 아리타 시민들은 그가 가마를 연 300주년인 1916년에 비를 세우고, 1917년부터 거시적인 도조제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고향인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으로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션사인 후지호는 다시 세토나이카이 내해로 이동하여 정박하고 우리 일행은 오사카시로 이동하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오사카시 호텔에서 숙박하고 있을 때 한인학교 교사로 파견되었던 오병렬선생이 호텔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오병렬선생은 대학 동기로서 평소에 가까이 지내고 있었던 터였으나 전혀 기별도 없이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갑자기 호텔로 찾아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물론 오병렬선생이 재직하고 있었던 학교가 오사카 한인학교여서 한인학교의 현황과 오사카 시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이후 10여 성상이 지났다.
일본을 탐방하였던 기억이 거의 잊혀 가물가물하여지고 있었는데 사위가 2박 3일 간 일본 오이타현 유후인시 야마다야 온천과 히타시 아마가세 텐스이 온천을 다녀오자고 제안하여 다시 일본을 돌아다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고 1992년도 일본을 방문하였던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 한층 흥분이 고조되었다.
우리 가족이 일본을 방문하는 19일에 대한민국이나 일본 후쿠오카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일본을 두번째 탐방하는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여간 마음이 착잡하지 않았다.
당일 아침 4시에 기상하여 스마트폰에 표기된 날씨를 살펴보니 비가 내리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러나 순간 화면이 바뀌면서 구름이 그려진 화면이 다시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날씨가 점점 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충 준비해 두었던 옷을 입고 집사람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성남시 분당구 판교의 딸집으로 이동하였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상황을 물어보니 10분 후에 주차장으로 내려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여 오전 06:00에 딸과 사위, 지우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다시 인천 국제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07:00시 무렵이었다.
비행기 이륙시간이 09:10분이어서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았으나 여행가방을 화물로 탁송하고 출국심사를 마치니 08:1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먹는둥마는둥 하였기 때문에 간단한 간식이라도 먹어볼까하여 2층의 식당가를 찾았으나 결국 햄버거 하나씩으로 허기를 달래야하였다.
시계를 바라보니 08:40분이어서 허겁지겁 개찰구로 이동하였다.
통계학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 비행기라고들 말하고 있으나 그때마마다 가슴을 긴장시키는 것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비행기에 대한 안전 때문일 것이다.
인천 국제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항공 132기는 10:40분이 되자 일본 후쿠오카 국제공항으로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후쿠오카 국제공항 상공이 먹구름으로 뒤덮인 채 근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분위기여서 가슴을 조이고 긴장시키게 하였으나 점점 하강하여 비행장으로 접근해들어가니 활짝 갠 후쿠오카 시야가 긴장시켰던 가슴을 시원스럽게 하였다.
후쿠오카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는 정확하였다.
비는 간간히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개기 시작하였다.
날씨 때문에 잔뜩 긴장하기도 하였으나 다행이도 우리를 환영이나 한 듯 후쿠오카 국제공항은 맑아지고 있었다.
일본 입국심사를 마치고 후쿠오카 국제공항밖으로 나오니 가이드가 A4 용지에 "홍지우씨 가족 환영"이라는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가이드는 30대 후반 여행박사 여행사 소속 한국인이었다.
일본에 정착한지 10여년이 지난 중견 가이드였다.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외국으로 이민가려는 이들이 점증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가이드는 일찍부터 일본어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일본에서 중견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언행이 가볍지 않고 중후한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책임감이 투철한 호남아였다.
이러한 가이드라면 우리 가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놓이기도 하였다.
가이드가 기지고 나온 도요타 알파드 밴에 환승한 후 후쿠오카에서 벳부로 이동하였다.
일본의 큐슈는 남한의 절반 정도의 넓이인데도 한국의 도급인 현이 7개나 되었다.
섬이라고 해서 제주도 만큼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의 국가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후쿠오카 시를 빠져나온 도요타 알파드 밴은 3번 국도로 진입하더니 다시 후쿠와카와 뱃부간 고속도로로 이동해 갔다.
고속도로는 평일이라서 인지 한산하다시피 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교통체계가 전혀 달랐다.
운전하는 기사가 오른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추월하는 차선도 맨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특히 코너에서 급히 운행해오는 차량을 발견하였을 때는 겁이 덜컥나기도 하였다.
우리가 운행해가야 할 차선으로 운행해오는 것처럼 착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다른 교통 시스템이어서 불안하기도 하였으나 정착이 되어서인지 고속도로는 시원스럽게 소통되고 있었다.
일본은 선행 차량이 자주 차선을 변경하지 않아서 후미 차량이 선행 차량이 언제 차선을 변경 할 지 예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사의 말을 듣고 일본이야말로 교통 선진국이라 생각이 들었다.
2시간 동안의 질주 끝에 벳부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벳부는 세계적인 온천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시가지는 부채꼴 모양의 퇴적지인 화산성 선상지와 그 기슭에 이어지는 충적지에 펼쳐지고 있었으며 주변은 쓰루미산과 다카사키산 등과 같은 화산지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의 남쪽에 벳푸 등 4개, 북쪽에 가메카와 등 4개의 온천이 있어, 이른바 벳푸팔탕이라는 온천고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중 벳푸온천이 용출 수량이나 교통, 지형 등 조건이 가장 좋아 번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천고을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온천은 간카이지온천으로, 이곳의 온천수는 수로를 통해 근처의 리조트에 공급되고 있다고하니 얼마나 방대한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온천고을 전체의 1일 용출수량은 3.9만㎘로 일본에서 가장 많고, 세계에서도 미국의 옐로스톤 다음으로 많다고 하였다.
수질은 각 온천마다 달라서 목욕하여 치료하는 방법도 각각 달랐다.
온천고을에 모여드는 욕객의 수로도 일본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의 산업도 숙박업 등 욕객, 관광객 상대의 서비스업이 압도적이다.
땅만 파도 석유가 아니라 온천수가 쏟아지는 곳이 곧 벳부였다.
그러나 우리가족은 벳부 가마도온천을 순례하는 것으로 지옥온천 순례를 대신하였다.
가마도지고쿠(부뚜막 지옥)는 지옥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로 밥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여섯 개의 연못 색깔이 온도가 오르내림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였을 뿐 아니라 담배불 연기에 따라서도 수증기의 양이 변하고 있었다.
가마도 지옥온천을 둘러보고 곧바로 유후인으로 이동하였다.
벳부에서 유후인으로 가는 도로는 옛날 미시령을 올라가는 것 만큼이나 구절양장을 연상하게 하였다.
유후인 마을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워 마음이 안정되었으며 그 중의 금린호는 캐나다 천섬의 수려하고 빼어난 산수를 연상하게 하였다.
금린호와 아기자기한 유후인 시가지를 뒤로하고 위리가족이 1박하기로 한 야마다야 료칸으로 이동하였다.
야마다야 료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전통 일본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골이었다.
야마다야 료칸은 유후인에서 10분 거리인 시골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야마다야 료칸에 들어섰을 때는 실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시골의 어느 허름한 집이나 다름 없었가 때문이었다.
료칸으로 접근하니 입구는 철창으로 잠겨져 있었고 안내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어 감옥을 연상하게 하였다.
외부의 다른 어떤 사람도 료칸 내부로 들어서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실제 오후 08:00이후부터는 료칸 밖에서 사람 그림자도 찿아볼 수 없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시골이었다.
그러나 다른 특징이 있었다.
오로지 이곳은 온천욕을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사람들만이 찾는 휴양지였다.
료칸 내부로 들어서서야 나의 생각이 점점 바뀌게 되었는데 시설은 여관급이었으나 접대는 호텔급 이상이었다.
이부자리는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이 풀을 칠하고 손수 다리미로 다렸던 것을 연상하게 하였고 온천욕은 각 실에 딸려있는 가족탕과 노천탕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침실 바닥은 침대도 없는 두툼한 다타미여서 낯설게 느껴졌으나 그네들의 전통방식이어서 체험해보는 것도 그리 싫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만큼은 왕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 한분이 시종 무릎을 꿇고 민망할 정도로 우리가족을 위하여 세심한 서비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서비스분야에 있어서는 세계를 압도할 것 같았다.
물론 식사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코스 요리와 비슷하였는데 써비스 면에 있어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추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음식의 가지수만 하여도 셀 수 없었으며 독특한 음식의 맛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오니 어느새 이부자리기가 방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옛 모습의 전통 가옥에다 현대식 와이파이까지도 설치되어있었으며 적막한 시골 전통 여관인데도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남을 배려하고 친절함에 있어서는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없으리라 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실제 그들의 일상을 체험하여보니 명불허전이었다
그들의 료칸 운영 방식은 현대식 건물의 편리함이 주는 위압감과 불안을 피하고 정서적 안정을 위한 휴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정석적 안정과 휴식은 전통 여관 방식이 적격일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그들의 운영방식에 찬사를 보냈다.
온천관광과 더블어 식사대접을 융숭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훌륭한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실제 대접을 받고보니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나는 서울에서 대중 목욕탕을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저마다 아들과 동반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소외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항상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외로울 때가 사실 만았다.
그런것 때문에 일본으로 비싼 온천여행을 가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였다.
애초에 사위와 딸이 여기 일본 유후인 야마다야 료칸을 예약하여 일본 여행을 추진할 때부터 나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딸부부에게 짊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부부와 1박을 하고보니 사위의 행동이 너무 대견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말수가 적었던 큰 사위에게 사실 접근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사위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없었던 나에게 아들 역할을 해보기로 작심을 한 것 같았다.
노천탕에 같이 들어가 등을 밀어주고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고마움에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조심스러워 행동이 부자연스러웠으나 차츰 익숙하여 허물이 없어졌다.
그동안 외로웠던 생활이 스스럼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비록 아들이 없어서 딸만 둘을 기르고 있었으나 교육을 잘 시킨다면 아들 여럿이 부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데 그러한 나의 생각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둘째 딸을 하늘로 보낸 뒤 더욱 나약해져가는 나 자신을 극복할수 없었는데 큰 사위가 마음을 열고 나에게 더욱 밀착되어오는 것을 보고 이제는 나의 가슴에서 둘째딸을 하늘로 보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저 별중의 어느 곳에 둘째 딸이 있을까 생각하며 노천탕 안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별들이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